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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통킹만 사건과 미국
지구 상 손꼽는 해변은 인도양에 세이셸 (Seychelles) 을 필두로 말디브( Maldives) 타히티의 보라보라 하와이 라니카이를 꼽는다지만 미국 웹 사이트 Investopedia는 다낭, 나짱, 달랏을 미국인이 은퇴한 후 지내기 가장 좋은 곳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다. 다낭은 월남전 당시 미 공군기지로 현재 인구 100만의 현대적 도시로 성장 했는데 생활비는 불과 월 천 2백 불로 한강을 중심으로 멋진 골프장과 해변을 갖고 있으니 그럴듯하고 나트랑은 6킬로에 이르는 황홀한 해변을 끼고 관광단지가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으며 앞 바다는 큰 섬 세 개가 병풍 역할을 해 바다가 잔잔하고 월 생활비가 3백불 수준으로 저렴하고 신선한 해산물이 많다는 점이 꼽는 이유였다. 달랏은 식사한 끼 1불, 마사지도 고작 5불로 해변과 산간을 오가는 노년의 즐거움을 들었다.
나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더 생활비가 오르지 말고 더 모여들지 않는다면 나도 충분히 고려해볼만한 곳이다. 이른 아침 나트랑의 해변을 쳐다보자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끝이 안 보이는 너른 바닷가에 잔잔한 파도 이를 지켜주는 파수꾼인 앞바다에 작은 섬들, 외계인이 찾아온다 해도 먼저 들를 곳이 아니겠는가 싶다. 이런 천혜 휴양지를 누가 못 알아볼까. 그 바람에 전쟁 통에 그 유려한 생김으로 큰 화를 입지 않았을까 싶다. 프랑스인들이 애초 왜 다낭을 들렀을까. 분명 이곳은 진주가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다낭과 나트랑은 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 터가 좋은 그 팔자로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가 무릎을 꿇은 그다음날인 1954년 5월 8일.스위스 제네바 국제회의장. 프랑스는 약한 베트남에게 얻어 터졌으므로 베트남을 점령할 자격이 박탈된다는 그런 당연한 평화 합의 서명에 임해야 했다. 대부분 나라들은 베트남 독립에 동의했다. 그런데 2차대전 이후 자유진영의 새로운 다크호스로 급부상한 미국이 반대를 했다. 이에는 짐작가는 바가 있다. 한국전쟁 이는 공산주의와 자유수호로 극명하게 갈린 전쟁이 아닌가. 당시 그 유명한 에치슨 라인이라는 게 존재했었다. 즉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1950년 1월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스탈린과 모택동 두 돼지의 야심을 저지하기 위해 설정한 미국의 동북아시아 방위선을 말한다.
그러기에 태평양호수(Pacific Lake)를 만들어 제해권을 확보하기위해서는 베트남이 공산화가 되면 절대로 안됐다. 그런데 참 아어리니한 게 미국이다. 프랑스와 월맹군 싸움에서 생각지도 않은 월맹군 전력, 그냥 그 전처럼 원주민이 소총정도로 무장한 줄 알았는데 정규군급 무장과 전술로 개전 수 시 간만에 프랑스군 진지 하나를 초토화 시켜버리자, 프랑스군은 당황하여 전투기를 출동시켰는데 정글속에서 뿜어대는 월맹군 대공포에 작살이 난 게 아닌가. 어디서 그런 강력한....이는 어디선가 군사적 지원을 받은게 분명한 것이었다. 나중에 기밀해제되면서 미국의 CIA가 1946년까지는 월맹을 지원했다는게 밝혀졌다.
아무튼 미국의 지역방위선은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라인 즉 '애치슨 라인'으로 한다는 거였는데 여기엔 한국하고 대만, 인도차이나반도는 미국의 방위선상에 있지 않았었다. 그런데 바로 5개월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딘 애치슨은 엄청난 비난을 받는다. 아마 베트남이 공산화 안됐더라면 필리핀의 수빅 미군기지는 없었을거고 미군의 동북아시아 물류허브를 베트남이 가져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 아시아 판도는 많이 달랐을거라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역사에 만약은 없는거지만 그때 당시에 베트남전쟁이 없었다면 어쩌면 대한민국이 베트남, 라오스처럼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1946년까지만 해도 베트콩을 도왔던 미국은 급선회하여 직접 개입하기 좀 뭐하니까 예전에 연고가 있던 프랑스를 불러서 전쟁비용의 90%와 무기, 탄약을 줘가면서 싸우라고 독려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프랑스가 바보짓을 하는 바람에 보급이 바닥나서 항복을 하니 미국으로선 엄청 열 받을 만한 일이었다. 이의 단초는 어디까지나 미국에 있다. 미국이 베트콩의 성분을 잘못 파악해 이 사단이 난 게 아닌가. 사실 1946년 까지는 미국이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팽창에 반대하는 입장이라 지원해 준 건데 호치민이 알고 보니 공산주의자였던 것, 미국으로선 참으로 뼈아픈 과거지사다.
그 당시 미국은 매카시즘에 사로잡혀서 살짝 정상이 아닌 상태였다. 공산주의의 "공"자만 나와도 분노하던 미국 국민들. 위스콘신주의 공화당 상원의원이던 존.R.매카시는 "미국내 공산주의자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내가 그 명단을 갖고 있다." 이런 말을 유포해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근데 당시에 메카시한테 "야 너 그말 책임질수 있느냐? 팩트 확실해 ?"하고 몰아 부쳤는데 매카시는 "증거는 있는데 일반에 공개하면 사회적 파장이 있으니까 비공개로 입증하겠다" 라고 해서 엄청난 비난을 받는다.
결국 매카시가 몸담던 공화당에서조차 매카시를 비난하는 결의를 내고 그로 정치생명이 끝나지만, 2003년 기밀 해제되면서 매카시 주장이 사실이었다는 게 드러난다. 이 무렵 미국이 엄청난 혼란도 겪고 억울한 사람도 많이 나왔지만 아무튼 이때를 기화로 내부 청소를 깨끗하게 단행하고 앞으로 나아갈 정책기조가 만들어지는 효과를 가져 오게도 된다. 당시에는 미국엔 심각할 정도로 공산주의자들이 들끓었고 심지어 초대 FBI 국장 에드가 후버도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 정도였다. "공산주의는 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질병이다"
당시 미국은 여기저기서 빨간 선동하는 길거리 선동꾼들도 실제로 많았고 Communist Party USA라는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실제 빨갱이 정당이 활개치던 시기이디도 했다. 그러던 차 민심을 접수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1947년 소비에트 연방하고 완전히 선을 긋는 발언을 하게 된다. "공산주의자와 타협하지 않는다" 이것이 유명한 트루먼 독트린이다.이후, 이는 미국 외교정책의 근간과 방향타가 되는 정책이 되었고 수십년간 지구를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누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 길목에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도 끼게 된 것이고 말이다. 그런 냉전 덕분에 두 진영이 경쟁하면서 군사/과학기술이 발전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긍정적인 면도 있기는 있었다.
미국이 입장이 어쩌든 링 위에 올라간 건 프랑스였고 게임에서 진 프랑스는 어깨가 축 처진 채 1954년 7월 20일 제네바에서 호치민과의 협상에서 "2년뒤인 1956년 6월까지 남 북 총선거해서 단일 베트남 정부 수립하고 우리는 그거를 보고 철수할께"하는 합의같지 않은 합의를 하게 되는데, 한마디로 멍청한 짓이었다. 하기야 하루라도 빨리 손을 떼고 싶은 심정인데 뭔들 못하랴. 미국은 이제 프랑스가 싸놓은 똥을 치워야 할 상황이 됐다. 그때까지는 프랑스 vs 베트남의 전쟁은 제국주의 vs 민족주의 양상이었는데, 2년 뒤 베트남 총선거가 열린다면 결과가 어땠을까? 당연히 호치민의 압승으로 끝나는거였고 이건 볼 것도 없이 베트남은 당연히 공산화가 되는거고 그렇다면 도미노 효과로 인해 동남아시아에서 공산화의 팽창은 불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아직 덜 빨간 남베트남에 친미 반공정부를 수립해서 적화를 막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앞서 설명한 우리가 잘 아는 응오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 황제. 예전에 망했어야 하지만 프랑스가 식민통치를 위해 얼굴마담으로 세워둔 인물. 베트남인들에게 식민지배라면 이가 갈리는데 식민시대 로봇황제로 새정부를 세운다면 반감만 커지고 웃기는 꼴이 될 것은 자명한 일, 차라리 그럴 바에는 새정부를 안세우는 게 낫다. 그래서 앞서 설명해 잘 아는 또 다른 인물 응오딘지엠(고딘디엠) 이라는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낙점이 된다. 그리고 1955년 10월 26일 공산주의와 타협은 없다! 남북선거 무효를 외치며 남쪽의 단독선거로 남베트남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바로 이때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베트남의 분단체제가 확립되는 순간이다.
이런 남북분단으로 오히려 곤란한 상황에 빠진건 호치민이었다.오랜 전쟁은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북베트남은 아직 정치체제나 사회질서도 확립되지 않았고 도와준다던 스탈린 모택동 두 돼지들은 연락도 안 되었다. 오히려 미국+남베트남 연합의 병력들이 밀어붙이면 언제라도 백기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기껏 프랑스를 디엔 비엔푸에서 쫓아냈더니. 미국의 개입한 이 후 공산권의 지원을 받는 공산세력 vs 서구 자유주의의 지원을 받는 자유세력의 대결 양상으로 확실한 구도가 형성된 베트남. 그런데 앞서 말했지만 고딘디엠의 부정부패로 남베트남은 휘청하고 만다. 결국 1963년 11월 1일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형제는 죽고 불교계를 자극하고 급기야 바베큐 운운하던 동생 처인 누여사는 이탈리아로 도망을 갔다.
그런데 이 쿠테타 이후 NLF(남베트남해방전선)에 우호적이기도 하고 정세는 원치않는 방향으로 삐걱거린다. 그 동안 공 들인 수고와 돈이 얼마인데. GO HOME YANKEE! 불안한 정세를 더는 두고 볼 수없는 미국의 입장, 그들은 즉각 본격개입을 시작해서 1962년 남베트남 군사원조 사령부 (MAC-V : Military Assistance Command, Vietnam) 를 설치하고 준 전시상태로 1남 북의 대립과 긴장은 끝도 없이 높아지다가 결국 통킹만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그 무렵 고 딘 디엠이 피살된 후 3주 만에 케네디 대통령도 저격당하여 이제 공은 대통령을 승계한 존슨(Lindon B. Johnson)에게 넘어갔었던 상황으로 존슨은 취임 후 특별한 변화 없이 케네디의 개입확대 정책을 그대로 시행하여 1963년 말에 남베트남 내 미군 병력은 고문단, 군수지원부대, 그린베레 등 16,000명이 되었었다.
1964년 5월 9일 미국은 한국을 포함한 25개 우방 국가에게 비 전투부대를 파견하여 남베트남을 지원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는 군사적인 측면보다 정치적인 측면을 고려한 것이었다. 미국의 요청을 받은 한국은 이동외과 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파견할 것을 결정하고 준비를 하던 중 7월 15일 당시 남베트남 혁명위원회 의장 겸 수상 칸(Khan) 장군 명의의 지원요청 서한을 접수한다.1964년도에 한국군 외에 오스트레일리아 200명, 뉴질랜드 39명, 대만 20명, 필리핀 17명 등의 군사원조단도 남베트남에 파견되었다. 이제 베트남전쟁은 서서히 가열되기 시작하면서 8월에는 확전의 불씨가 되는 통킹 만 사건이 발생하였다.
미군 함정들은 통킹 만 일대에서 정찰활동(암호명 DESOTO)을 실시하고 있었다. 1964년 7월 31일 북베트남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북베트남의 2개의 섬에 기습 상륙작전을 감행했다고 비난하였고 미국과 남베트남은 이는 조작이라고 응수하였다. 8월 2일 북베트남은 12마일 영해밖에 있는 미 구축함 매독스(Maddox) 호에 대하여 3척의 어뢰정으로 공격을 시도하였다. 매독스 호는 고속으로 접근하는 어뢰정에 즉각 응사, 1척을 격침시키고 1척에 피해를 입혔다. 나머지 1척이 어뢰 2발을 발사하였으나 미군의 피해는 없었다. 존슨 대통령은 즉각 정찰활동을 강화하도록 지시하고 구축함 터너 조이(Tuner Joy) 호를 추가로 파견하였다. 3일 밤 남베트남 해군의 어뢰정이 연안에 있는 북베트남 레이다 시설을 공격하였다.
8월 4일 5척의 북베트남 어뢰정이 터너 조이 호에 재공격을 시도하였다. 67㎞ 거리에서 이를 발견한 미 해군은 즉각 함재기를 출동시키기고 응사하여 2척을 격침시키고 2척에 피해를 주었다. 이 사건은 미 국방성 기밀문서 Pentagon Papers 에 의하면 매독스 호 레이다 조작병의 미숙으로 잘못 판독한 것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그 당시 미군 당국과 함정의 승무원들은 공격이 있었다고 확신을 했었다. 그러한 이유로 미 의회는 베트남 전쟁을 승인하고 1965.8.5. 미 항모 타이콘데로가(Ticonderoga)호와 컨스텔레이션(Constellation)호에서 함재기들이 발진하여 북베트남의 어뢰정 기지를 폭격한다. 이렇게 2차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무렵 우리나라는 9월 22일 제1이동외과 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이 붕 타우(Vung Tau)에 도착하였고 1964년 12월에 주한 미 대사의 요청과 1965년 1월 2일 남베트남 외무장관의 추가 파견 요청 서한을 접수하고, 공병대대, 경비대대로 구성되는 건설공병단(비둘기 부대)이 1965년 3월 16일부터 남베트남에 파견하였던 때로 전투 병력은 아니었다.
미국의 선거철을 맞은 1964년 11월 , 북베트남의 보복이 만만치 않았다. 1964년 11월 1일 베트콩들은 사이공 북방 비엔 호아(Bien Hoa) 미 공군기지를 공격하여 미군 2명과 남베트남군 4명을 전사시키고 B-57 5대와 기타 다수의 항공기와 헬기를 파손하였다. 베트콩들의 미군기지에 대한 최초의 직접 공격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연예인 밥 호프가 죽을뻔 했던 때가 그 무렵이다. 베트콩들은 11월 3일 탄 손 누트 공항의 스낵바를 폭파하여 미국인 18명이 부상당하였고 크리스마스이브에 사이공 시내 미군 숙소인 브링크(Brink) 호텔을 폭파하여 미국인 2명이 사망하고 미국인 66명을 포함하여 100여 명이 부상하였다.차후 노획된 문서에 의하면 밥 호프(Bob Hope, 미국의 유명 코미디언)를 단장으로 하는 위문단 일행이 그날 밤 브링크 호텔에 투숙하기로 되어 있어 이를 노린 폭파였으나 위문단 일행은 탄 손 누트 공항 사정에 의해 도착이 지연되어 운좋게 살은 것이다.
1964년 말부터 북베트남 정규군이 남베트남에 투입되고 있다는 정보가 확인되기 시작하더니 소규모에서 나중에는 연대까지 확인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전쟁의 성격이 변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지도층이나 국민들도 아시아 지역에서 미 지상군의 개입은 하고 싶지 않은데도 상황이 점점 긴박해지고 있는 것이다.1964년 말에 이르러서는 미국의 전면지원 없이는 남베트남은 지탱할 수 없게 되었고, 미국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의 시도는 성공적이므로 이제는 미국의 지원 없이는 전쟁을 계속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아무리 무기가 좋고 전력이 있으면 무엇하나, 마음이 사분오열인데. 아무튼 현재는 은퇴자의 낙원으로 서로 서로 가고 싶어하는 것인데 그 무렵에 다낭이나 나트랑은 어떤 위치였을까. 이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