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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합의 믿음
(수2:1-24, 약2:24-26)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2:25)
수요일 저녁 성경공부에 우리는 넉달에 걸쳐 구원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돌아오는 수요일 저녁에 구원의 단락을 마치고 시험을 치를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공부를 잘 하셨을 줄로 압니다. 그래도 우리에게 여전히 혼란스러운 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느냐? 혹은 행함으로 구원을 받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께 우리 대신 십자가 지신 것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중에 하나인 야고보서에서는 “기생 라합이 ....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5)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신성한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입니다.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받은 신성한 생명을 살아내는 생활을 말합니다. 생활은 생명의 결과이므로,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결과입니다. 양자택일할 사항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로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것과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하여 보내 준 것은 그들이 살아 있는 믿음으로 행한 것입니다. 살아 있는 나무는 틀림없이 열매를 맺습니다.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원인이고, 행함으로 의롭게 되어 열매 맺어 성과가 되고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태어 났으면 사는 것과 같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으면, 행위로 의로움이 증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붙어있는 가지이므로 예수님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라합은 여리고에 살면서 소문을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9-11).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 된 것과, 홍해를 걸어서 건넌 것과, 40년 동안 광야를 지난 것과, 가나안 입구에서 만난 부족들 특히 아모리 사람들의 왕 시혼과 옥을 단숨에 무찌른 것을 다 듣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이 이미 다 녹아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의사들이 보기에는 성도는 혈관(Vessel)과 같답니다. 사람이 자기 능력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흐르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그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더 많이 나누고 더 많이 베풀수록 혈관인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더 많은 피가 흘러, 혈관은 더 튼튼해지고 커져서 많은 생명의 피를 흐르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흐르던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려는 노력을 멈추면, 그 혈관은 퇴화되고 더 이상 생명이 전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주변의 다른 혈관이 자라나 그 일을 대신하게 된답니다. 장사하는 분들이 그리스도인을 보면 유통업자랍니다. 물건이 도매상이든지 소매상이든지 손에 들어오면 그걸 다 혼자 먹고 삽니까? 아닙니다. 물건이 돌고 돌아야 합니다. 내 손에 왔다가 남의 손으로 이웃의 손으로 흘러 흘러 갑니다. 더 많이 흘러 가면 더 많이 행복하고, 더 적게 흘러가면 행복이 그만큼 적습니다. 많이 흐르면 조선시대의 거상 김상옥처럼 많은 사람을 얻게 됩니다. 김상옥은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에게서 온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흘려 보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남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유통하다가 그 은혜에 물들어 가는 삶입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그 하나님께 금방 물이 들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11)고 한번도 체험하지 않았는데, 소문으로 듣고 성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혈관이나 유통업자입니다.
믿음은 결단이다.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이 우연히 라합의 집으로 들어 왔습니다. 당시 기생의 집은 여관으로도 사용했습니다. 두 정탐꾼은 주목을 받지 않도록 과객들과 함께 어울려 라합의 집에서 묵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냄새를 맡았습니다. 관아에 신고를 한 것입니다. 이에 군인들이 떴습니다. 정탐꾼을 잡으러 온 것입니다. 아직 군인들이 다다르지 않았을 때에 라합은 망설였을지도 모릅니다. 두 정탐꾼들을 넘겨주어 여리고 왕에게 신임을 받을 것인가 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인가? 군사들은 가깝고 하나님의 축복은 멀었습니다. 군사들은 안심이 되고 하나님의 축복은 위험했습니다. 군사들은 친근한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축복은 낯설었습니다. 군그러나 군사들은 이미 멸망한 아모리 족속과 같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은 영원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라합에게는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망설임은 누구에게나 있었습니다. 야곱은 차자로 태어나서 신세대로라면 차자로 사는 것이 속 편했습니다. 괜시리 형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방으로 쫓겨가면서까지 위험을 무릅쓸 것은 또 뭐가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뭐, 생긴대로, 주어진대로, 욕심부리지 말고 살면 되지 뭐가 문제입니까? 그러나 그랬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믿는 성경에는 야곱에 대한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과 축복에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눈에 들었으니, 눈 한번 찔끈 감으면 팔자가 펴질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서 단호히 결단해야 했습니다. 저는 공무원을 그만둘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결단을 했더니 하나님이 이미 일을 다 만들어 놓고,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안될만큼 사전작업을 다 해 놓으셨더라구요. 미리 내 인생을 사시고, 미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준비 해 놓으신 것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하는 결단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복을 선택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만 선택하면 됩니다. 라합은 모든 현실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우리 앞에서 모든 사항들이 널려 있고, 우리는 하나님만 선택하면 됩니다. 이것이 좁은 문입니다(마7:13,14).
구원에는 시련이 따른다.
세상에 아무것도 거저 얻는 것은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 받는 구원은 이 땅에서는 볼 수도 얻을 수도 없는 하늘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는 데는 시련이 많이 있습니다. 라합은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구원시키기 위하여 위험한 일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이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19). 말하자면 네 집에 있는데 누구 한 사람이라도 다치면 그 피는 이스라엘이 책임지겠다는 것입니다. 대신 네 집을 나가면 아무도 그 피에 책임을 지지 않을테니, 모두 네 집안에 머물게 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6일간 연휴에 집에만 있었습니까? 그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6.25 때 인민군이 쳐내려 오는데, 다른 집들은 모두 피난을 가는데, 혼자 식구들을 집안에 모아 둔다면 가능이나 하겠습니까? 지금 라합이 당한 일이 바로 그렇습니다. 정탐꾼이 돌아간 뒤에 이스라엘은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다 낫기까지 보름은 걸렸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나타나서도 6일 동안은 성을 한 바퀴씩 돌기만 하는 것입니다. 조용한 것이 오히려 더 두려운 경우입니다. 어디 한군데 싸움이라도 벌어졌다면 돌아가는 상황은 파악할 수 있을텐데, 라합의 집에 모여 앉은 가족들은 답답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여리고 사람들은 싸우러 나가느니 도망을 가느니, 살겠는지 죽겠는지, 이스라엘 백성의 동태가 파악이 되느니 도통 모르겠다느니, 그러는 판국에 라합의 집에 들어앉아 있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기생이라면 가족들 중에도 아무에게도 신뢰를 받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술집마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그가 식구들을 모아서 거의 한달간을 정탐꾼들이 요구한대로 구원을 기다리게 한 것은 엄청나게 큰 시련을 이긴 것입니다. 우리 앞에 닥친 시련을 견디지 않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하느라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라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느라고 겪는 어려움에는 감사하며 기쁨으로 맞이합시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운동선수가 이 땅의 상급을 위해서도 죽을 힘을 다 하는데,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받는 연단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생과 내생에 상급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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