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8월 4일 오전 4시, 부산행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는 쓰시마섬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배 안을 순찰하던 급사가 허겁지겁 선장에게 달려와 일등객실 손님 두 명이 사라졌다고 보고했다. 배 안을 샅샅이 뒤지고 항로를 거슬러 가며 수색했지만 사라진 사람은 찾지 못했다. 객실 안에서 “미안하지만 짐을 집으로 보내 주시오”라는 글이 적힌 메모지만 나왔을 뿐이다.
실종된 두 사람은 극작가 김우진(金祐鎭 당시 30세)과 배우 출신 소프라노 윤심덕(尹心德 당시 30세)이었다. 조선 내 모든 신문은 두 사람의 선상 실종을 ‘조선 최초의 선상(船上) 정사(情死)’로 단정했다.
유부남이긴 했지만 부잣집 아들에 배운 것도 많으며 인물도 빼어난 당대의 ‘엄친아’와 조선 최고의 소프라노였던 당대의 ‘스타’가 함께 죽을 특별한 이유를 찾지 못한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윤심덕은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효시이며 최초의 여자 관비 유학생, 여류 성악가였고 또한 당대 최다 레코드 판매량을 보유한 최초의 대중 가수 이기도 하다. 더구나 윤심덕이 실종된 직후 그녀가 마지막으로 취입한 노래가 유성기에 실려 곳곳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헝가리(또는 루마니아)의 민족 작곡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경쾌한 왈츠곡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가사를 붙인 노래 ‘사(死)의 찬미’는느리고 무거운 노래가 되어 처연한 진혼곡이 되었다.
1920년대는 자살의 유혹이 거세던 시대였다. 일본 경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후 공황’,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의 ‘진재(震災) 공황’ 등으로 불황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고등교육을 받고도 취직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널려 있었고, 낭만주의니 허무주의니 하는 사조도 횡행했다. 둘의 죽음에 대한 유별난 관심은 당대의 식민지 젊은이들이 자신의 절망을 투사(投射)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킨 두 연인. 식민지하의 조국에서 개화의 씨앗이 되려고 무단히도 노력했던, 시대를 너무 앞서가 불운했던 두 천재 연인. 연인의 최후는 비극이었지만, 그들의 로맨스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두고두고 회자 될 것이다. |
첫댓글 알고 있던 얘기지만, 다시 한번 되짚어 두 연인의 시대적 배경에서의 고뇌와 사랑을 생각해 보게 되네. 근디 어떤 이유로 이렇게 암울한 윤심덕의 노래를 선곡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네.
오늘 8월 4일이 그들이 바다에 뛰어든 날이라네. 중앙일보에서 읽었네. 원본 노래도 있고, 요절한 가수 김정호가 부른 노래도 있는데 원본 노래를 찾아올렸네.
밝은 노래 찾아서 하나 올려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