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8:3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 30절 주석 참조 그 모든 행위대로...갚으시옵소서 - 32절 주석 참조.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 성경에서 '마음'은 정서 활동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전 인격적 핵심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핵으로부터 정서, 지식, 의지의 활동이 일어나고 또한 외적 활동까지도 포괄하게 되는 것이다
. 그런데 이 인간의 마음은 오직 그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만이 온전히 분별하시고 그에 따라 판결을 내리실 수 있다...
[대하 6:30]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며 사유하시되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 - 본절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 하는 외면적 행위 때문에 구원을 주시는 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실상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 하는 진정한 마음을 보시고 구원을 베푸신다. 그런데 그처럼 인간의 마음을 온전히 분별하고 그에 따라 판결을 내리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 마음을 지으신 하나님뿐이다
[욥 10:5]
주의 날이 어찌 인생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날과 같기로...."
본 구절은 세 번째로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하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원문상 동의어를 다양하게 사용하는 시적 기교를 사용한다. 즉, (1) `인생'에 해당하는 단어를 앞에서는 `에노쉬'를, 다음에는 `가베르'를 사용하며(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동일하게 `인생'이라고 번역함), (2) `주의 날'은 `주의 해'로 대치하여 사용한다.
본 구절은 앞절에서 언급된 두 가지 질문과 연결되어 욥이 인식하고 있던 하나님의 근본적인 속성을 표현한다. 즉, 앞의 두 질문에서는 하나님의 자존성과 전지성을 타나내었으며 본절에서는 시간적으로 초월해 계셔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연대는 무궁하셔서 시간적으로 한계지을 수 없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이 인간의 유한성과 유약성을 초월해 계신 분임을 의미한다.
[잠 15:11]
음부와 유명도 여호와의 앞에 드러나거든 하물며 인생의 마음이리요...."
음부와 유명도 ... 드러나거든 - 여기서 '음부'는 죽은 자들의 영혼이 거하는 곳을, '유명'은 '음부'보다 더 깊은죽음의 세계를 뜻하는 말로 신약에서는 '지옥의 가장 깊은 곳', '무저갱'을 가리키는'아폴레이아'로 번역되었다. 곧 본구절은 그렇게깊은 죽음의 세계조차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겨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물며 인생의 마음이리요 - 여기서 '인생'은 문자적으로 '인간의 자녀'란 뜻으로 보편적인 인간 전체를 강조하여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곧 본 구절은 인간에게 영원한 숙제로 여겨지는죽은 자의 세계까지 훤히 아시는 하나님께서 땅 위에서 활동하는 인간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르실 리 없다는 강조적 표현이다.
[전 2:3]
내 마음에 궁구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어리석음을 취하여서 천하 인생의 종신토록 생활함에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
내 마음에 지혜로 ... 받으면서 - 이는 마음을 지혜로 절제 가운데 거하게 하는 것, 즉 문맥상 마음으로 세상적 쾌락과 즐거움을 누리되 한편으로 그곳에 온전히 빠지지 않고 지혜로 절제받는 것을 암시한다. 육신을 즐겁게 할까 - '즐겁게 할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어 '마솨크'는 '늘이다', '끌다의 뜻이나,
여기서는 비유적으로 '힘을 복돋우다', '기쁘게 하다'의 뜻을 암시한다. 어리석음 - 단순히 우둔함의 뜻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문맥으로 볼 때 술이나 기타 세상적 쾌락 수단에 의해 육신적 즐거움을 취하려는 지혜롭지 못한 행동의 뜻을 함축하는 말이다. 쾌락인지 알까 하여 - 1절의 '낙을 누리라'에 관한 주석을 참조하라.
[전 3:18]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하나님이 저희를 ...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 '재판하는 곳'과 '공의를 행하는 곳'에서 악이 행해지는 바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어 멸망받게 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죽음에 처해지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려 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험하시리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원형 '바라르'는 '밝게깨끗이하다'...
'조사하다', '시험하다', '입증하다' 등의 뜻을 갖는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인생의 면면들을 드러내어 밝히시는 것을 뜻하는 듯하다. 혹자는 이를 키질하는 것과 연결시켜,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분하여 드러낸다는 뜻을 내포한다고 보기도 한다
[전 3:21]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줄을 누가 알랴...."
기자는 사람이 죽음을 맞게 된다는 점에서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여기서는 사후의 차이점을 언급한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짐승과는 달리 사람의 영혼은 위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짐승의 혼이 아래로 내려간다는 것을 끊어져 없어진다는 의미이고
사람의 혼이 위로 올라간다는 것은 사후의 인생의 영혼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소관 하에 들어가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리고 ,혼 , 루아흐이라는 말이 본절에서 사람이나 짐승에게 도일하게 적용되었지만, 우리는 이를 사람에게는 '영혼'으로, 그리고 짐승에게는 '호흡'정도로 적용시켜 이해해 볼 수 있겠다:"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전 9:3]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 혹자는 '악한'이란 말 앞에 관사가 빠져있는 이유를 들어 단순히 모든 악 중의 하나를 뜻하는 것으로 보나 또 다른 사람은 모든 악 중에 가장 큰악을 의미하는 최상급의 형태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아무튼 전조다는 모든 사람에게 같은 사건 또는 운명이 임한다는 사실 자체가 커다란 악이라고 지적하며
나아가 인간 본성 자체가 악하다고 본다. 이러한 악은 인생의 내면 전체를 부패케 하며 '인생의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것이며'평생에 또한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렘 10:23]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 이는 인간의 운명이 궁극적으로는 여호와의 통제하에 있다는 내용이다. 유다의 형편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예레미야의 관심은 계속해서 자기 동포의 운명에 쏠려 있었으므로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다. 그의 탄원의 요지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그들 자신들의 운명을 통제할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으로서 이 점을 고려해 달라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연약하여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죄악에 빠지기 쉬운 도덕적 취약성을 가지고 있다고 탄원한다. 인간이 아무리 자기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운명을 자기가 개척할 수 있다고 큰 소리친다한들, 결국 그것은 인간의 한계 바깥에 있는 것이다. 요컨대, 여기서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들에게 임할 재앙을 걱정하며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것을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단 4:16]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나리라...."
그 마음은 변하여...짐승의 마음을 받아 - 성경의 용레상 '마음'은 전인격의 좌소로 일컬어진다. 따라서 인격의 좌소가 짐승의 마음과 대체되었다는 것은 모든 사고와 행동이 짐승과 같아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정신병으로 짐승처럼 광야에서 유랑하게 될 사실을 예시하는 것이다.
한편 가절의 '받아'는 원어상 미완료형인 '주어질 것이다'란 듯으로 그러한 사역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이심을 암시하고 있다. 일곱 대 - 여기서 '때'로 번역된 '이다닌'은 원어상 '정해진 시간'이나 '알맞은 때'란 뜻이다. 따라서 정확하게 어느 단위의 시간을 의미하는 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많은 학자들은 '년'으로 이해한다. 한편 이 '일곱 때'는 상징적으로 교만에 대한 징계와 연단을 목적으로 느부갓네살에게 주어진 신적 형벌의 기간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