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11. 주일예배설교
요한복음 4장 19~24절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
■ 익숙해지는 것은 편안해진다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이상하거나 불편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익숙한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익숙한 것이 편안해서 좋기는 하지만, 구태의연해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처음의 감격이나 긴장은 사라지고, 점차 습관처럼 그 일을 반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대는 없고, 기계적 반복만 있을 수 있습니다.
혹시 우리의 예배가 이렇지 않은지요? 감격과 긴장이 사라진 습관적 반복만 남은 예배는 아닌지요? 구태의연함 그 자체가 된 예배 행위는 아닌지요?
예배는 신앙의 중심입니다. 영적 에너지의 공급처이자, 영적 정화소입니다. 믿음과 능력을 얻는 곳이 예배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정결함을 얻는 곳도 예배입니다. 그렇기에 예배는 매우 중요한 신앙의 중심입니다. 예배가 이러할진대, 습관이 되고 구태의연함이 나타난다면 신앙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예배 하나로 신앙 문제 운운하는 것이 지나친 면이 있다 해도, 예배의 태도가 신앙 상태의 가늠자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릴 때, 감격과 긴장감이 떨어진다 싶으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신앙 상태의 가늠자인 예배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가 습관이 되고, 화석처럼 굳어지는 불신앙의 상황으로 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에 정확한 안내를 할 것입니다.
■ 예수님은 굳이 이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도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데, 예수님은 굳이 이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이 길은 사마리아인들이 사는 동네였습니다. 이 길이 지름길이긴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길로 다니지 않았습니다. 이 길은 이방인의 길, 버림받은 길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의 피를 갖기는 했지만, 타민족과 혼인한 후예들이기에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구원이 특정 민족에 국한하지 않고, 온 세상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래서 이를 증명할 한 여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이웃과 단절하며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물론 단절하며 살 수밖에 없는 절박한, 아니 부끄러운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생활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사생활로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을 적극적으로 피하였습니다. 그래서 너무 강렬한 더위 때문에 누구도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 정오에서 2시 사이에 물을 길으러 우물에 나왔습니다. 그날도 이 시간에 우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우연이 아닌데 우연처럼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대화가 시작됐습니다.
대화는 ‘물 한 잔 줄 수 있느냐?’는 예수님의 요청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요청에 대한 여인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거는 일이 없거늘 웬 말걸기냐며 시비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에 오가기 시작한 대화가 ‘영생수’였습니다. 이 주제의 대화 끝에 여인은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시작된 대화의 주제가 ‘예배’였습니다. 19~20절입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자신의 사생활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이웃과의 접촉을 극단적으로 피해온 여인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육체는 비록 부끄러웠어도 영혼은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삶이 부끄러웠기에 예배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에 궁금한 것이 생겨도 누구에게도 질문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사생활/속을 다 들킨 마당에 못할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기왕 가장 궁금했던 말을 내놓은 것입니다.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말은 평서문이지만 의문문입니다.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예배의 장소가 왜 예루살렘이냐?’는 의미와 ‘예배의 장소가 꼭 예루살렘이어야 하느냐?’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므로 여인의 질문의 의도는 사마리아인들의 소외감과 슬픔을 대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과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는데, 정작 유대인들은 이방인 취급을 하기에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예루살렘에 대한 애증(愛憎)이 생긴 것입니다. 이에 나온 질문이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였던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21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그림신)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이 대답은 파격에 파격이었습니다. 장소를 파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속한 사마리아인이든 유대인이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가 중요했습니다. 그렇기에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의 관심을 송두리째 날려버리셨습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과연 예수님은 오랜 세월 예루살렘 그 자리에서 예배를 받으신 것에 대해 전면 부정을 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전면 개편을 하시겠다는 것일까요? 둘 다 아닙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동안의 예배에 대한 종합 평가를 하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든 유대인이든, 장소에 목숨을 걸었지, 예배에 목숨을 건 것이 아니라는 평가를 하신 것입니다.
혹여라도 예수님께서 예배의 장소로 제 삼의 장소를 염두에 두신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장소를 예배의 중요 요소로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시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는 예배 그 자체보다는 참 예배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어디서 예배를 드리느냐 보다, ‘누구에게’ ‘어떻게’ 예배를 드리느냐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2~23절입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22절 말씀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이는 질문을 한 사마리아 여인을 포함해 모든 사마리아인들을 비하하거나 더 비참하게 만드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과정상 유대인의 혈통으로 오셨다는 것이지, 유대인에게서 구원이 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예배는 구원자 예수님께,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에 집중하는 것이지 장소에 목매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23절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는 구원자 예수님께,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에 집중할 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 예배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화려한 예배당, 웅장한 찬양, 우아한 기도문, 잘 짜인 예배 절차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성의 여부가 참 예배의 여부를 가늠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이 있느냐가 참 예배를 가늠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는 예배의 질(質)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예배의 양(量)이 아닙니다. ‘어디서’가 아닌 ‘어떻게’가 중요하듯, ‘얼마큼’이 아닌 ‘어떻게’가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나 예배를 많이 드리냐가 중요할 때가 있지만, 그보다 “영과 진리로 예배” 드렸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습관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닌, 진정한 예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4절은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이렇게 예배드려야 한다고 하시기에 명심해야 할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교회에서,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것이 예배의 최고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예배 시간에만 찬양하고 영광을 드리는 행위는 가소로운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사실을 늘 기억한 상태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예배는 영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예배에 성령님을 초대하고, 성령님의 이끄심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예배에 성령님의 임재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면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예배의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말씀을 따라 살면서 예배를 드릴 때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넷째, 우리는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신뢰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을 노래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수님 찬양이 빠진 예배는 예배일 수 없습니다.
■ 오늘 우리는 지금까지 드렸던 모든 예배를 회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질문했습니다. ‘과연 습관적인 예배였나, 영과 진리로 드린 예배였나?’ 여러분 자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바라기는 우리의 예배가 더 이상 습관적 예배가 아니길 소망합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의 모든 예배가 성령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뜨겁고 감격적이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거룩하고 헌신적이길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 가운데 기쁘고 감사가 넘치길 소망합니다. 참으로 이런 교회, 이런 성도가 되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