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물 (石物)
임병식 rbs1144@daum.net
그동안 마음 언저리에 남아 항상 명치끝이 답답하던 숙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먼 곳에 모셔놓고 석물을 갖추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보냈다. 그런 데는 워낙 거리가 떨어져 있기도 했지만 살아가며 여유가 없어서였다. 마땅히 설치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불가피 차일피일 미뤄왔다.
그동안 나는 다른 이의 선산을 답사하며 비문을 지어주는 등 문사에 관여해 왔다. 그때마다 부러운 마음을 갖고서 석물을 마련하는 일을 언젠가는 해야 할 숙제로 인식하였다. 그간 내가 남의 문사에 관여한 일로는 선배가 자기 숙부의 공적비를 세운다기에 비문을 지어주고 당사자가 세상을 떠날 때도 비문을 써주었다.
그 밖에도 아는 이의 산소를 답사한 곳은 한두 곳이 아니다. 최근에는 친하게 지내는 지인이 자기 부모님 산소에 동행해 줄 것을 청하여 기꺼이 따라나섰다. 가서 보니 누가 보아도 조성이 잘 되어 있고 관리도 되어 있었다. 특별하게 느낀 것은 표창장을 석비에 새겨둔 것이었다. 그걸 보노라니 내 입에서 가벼운 신음이 나왔다.
‘저런 상이라면 우리 어머니도 생전에 받으신 큰 상이 있는데.’
그 사실을 떠올리니 불현듯 그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해서 얼른 폰을 꺼내 표창장 석비를 찍었다. 그리고는 아우에게 보내주며 ‘우리도 석물을 마련해야 하지 않겠냐’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랬더니 아우한테서 즉시 답변이 돌아왔다.
“형님, 우리도 당장 합시다. 제가 미처 그 생각을 못 했네요. 석물 값과 제반 대금은 제가 보내 드릴 테니 형님이 추진해 주세요.” 이렇게 시원한 말이 돌아올 줄이야.
아우는 이역만리 낯설고 물선 카자흐스탄에서 의사면허를 받아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서 그 나라에서 국립병원 의사를 상대로 가르치는 교수 직함을 수여 받았다. 대체의학 전문인데 침술을 병행한다.
아우는 침술과 뜸, 식이요법으로 각종 암은 물론 성인병과 희귀병을 고친다. 그동안 놀라운 성과를 보여 명의로서 인정을 받고 있다.
“자네 혼자 너무 부담을 지는 건 아닌가?”
“아닙니다. 이 나라에 와서 깨끗한 돈을 벌어 부모님을 모시는 일인데 얼마나 영광된 일입니까.”
그 말에 감격하고 말았다. 지인 모친의 표창장을 보고서 어머니를 떠올렸다는 건 다른 게 아니다. 어머니는 대종회에서 수여하는 ‘장한 어머니상’을 받으셨던 것이다. 그해가 2008년으로 봄에 상을 받으시고 가을에 돌아가셨다. 향년 94세였다.
어머니는 우리 집안의 기둥이셨다.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 때 보국대에 끌려가 중병이 들어오신 후, 온전히 살림은 어머니 몫이었다. 어머니는 재봉틀 하나로 험한 세상을 헤쳐 오셨다. 옷을 지어주고 대신 놉을 얻고, 그 일력으로 농사를 지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도 어렸을 적 들은 그 재봉틀 소리가 귓가에 생생하다. 그것 말고 장난삼아 재봉틀 발톱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가 그만 따끔하게 바늘에 찍힌 기억도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는 재봉틀 하나로 사시면서 늘 배고프고 신산한 삶을 이어 오셨다. 그것을 마을 사람들이 모를 리 없고 문중 어른들이 기억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문중에서는 조양군상을 시제 때 수여하지만 해마다 시행하지는 않는다. 여러 해를 건너뛰기도 한다. 그리고 수여하는 상도 효자상이나 효부상이 대부분이고 장한 어머니상은 희귀하다. 오직 모친이 수상한 게 유일하다.
우리 조양임문은 고려 말 좌복야(좌정승)를 지낸 임세미 공이 시조이시다. 보성 조양 땅을 식읍으로 받아 내려와 살게 되면서 자연스레 본향이 조양이 되었다.
성씨 통계를 보면 조양임씨는 176위에 해당한다. 9,900여 가구에 인구는 3만 2천 명이다. 참고로 보성에 본을 둔 성씨로는 보성 선씨와 보성오씨, 조양임씨가 있다. 모친이 대종회에서 ‘장한 어머니상’을 받은 건 집안의 영광이자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석물을 준비하면서 함께 표창장을 세워놓게 되어 마음이 뿌듯하다.
이번에 석물을 준비하면서 후손들을 헤아려보니 부모님 후손이 적잖게 32명이다. 적은 숫자가 아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자손은 그예 고손까지 이어오고 있다. 활동하는 자손을 꼽아보니 분야가 참으로 다양하다. 작가, 의사, 변호사, 감정평가사, 첼리스트, 교수, 화가, 기업체 지점장 등 다양한 면모들이다.
어머니께서 조양군상을 받은 내력을 짚어보면 나는 자식으로서 할 말이 없다. 고생시켜 드린 내력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내가 장기 와병에 들어 무려 22년을 누워 지냈다. 그러는 동안 병수발을 어머님이 많이 하셨다. 남편이 오랜 병석이 있던 것에 더하여 며느리가 쓰러지자 돌봐야 했으니 얼마나 불효를 저지른 것인가.
“이 어미도 이제 늙었어야. 많이 힘이 든다.”
말씀하실 때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목이 멜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움을 겪는 속에서 받으신 상패를 꺼내어 비석에 새기려니 기쁜 마음이 넘치는 한편으로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하다.
석물을 준비하면서 부디 바람이면, 자손들이 어려운 가운데 가정을 지켜 오신 당신의 행적을 잊지 않고 오래도록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차제에 특별히 아우의 국위 선양을 아뢰고 싶다. 당신이 돌아가실 무렵은 아직 아우의 공부가 끝나지 않아서 몹시 불안해하시며 걱정하며 돌아가셨는데, 이제는 낯선 외국에서 당당히 인정을 받고, 존경받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하고 싶다.
돌아보니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은 가족사였다. 늘 무언가가 부족하고 아쉬워서 애면글면하고 살아온 가족사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상석만은 마련해 드리려고 했는데, 그날이 비로소 찾아와 마음이 떳떳하다. 나이를 먹다 보니 어느새 내가 집안의 최고참 어른이 되었다. 그런 마당에 미뤄두었던 숙제를 마치니 홀가분하다. 이 석물 설치를 계기로 석비에 새겨진 글을 보며 후손들이 더욱 단합하고 화합하며 조상을 기리는 마음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2024)
첫댓글 聽石님이 平素 가졌던 宿題를 풀어 祝賀 드립니다.
慈堂님이 3만 2 천 가문을 가진 조양임씨 집안에 오시어 유일하게 壯한 어머니상을 受賞하셨으니
큰 영광이고 碑石에 당연히 새겨야 할 일입니다.
자당님 직계 자손 중에 作家, 醫師, 변호사, 감정평가사, 敎授, 화가, 기업사장, 첼로이스트가
輩出되었으니 너무 나도 당연합니다.
石物에 새겨진 後孫들이 앞으로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正義롭고,
건강하고, 團合하고 和合하여 千秋에 빛나기를 祈願합니다.
부모님 후손을 헤아려보니 후손이 32명이나 됩니다.
이번에 과제로 남아있던 석물작업을 하게 되어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자당께서 며느님 병수발하시던 적에 뵈온 풍모가 생각납니다 특히 자상한 분위기와 부처님 귀를 닮은 큰 귀가 인상적이었지요 오늘에 이르러 자당님의 헌신과 정성이 빛을 발하여 후손들이 각계에서 명성을 떨치니 선생님의 감회가 어떠실지 짐작 됩니다 소원하신 석물을 갖추어 자당님의 공덕을 비문에 새겨 후손은 무론하고 주민의 본이 되게 하셨으니 더욱 뜻 깊습니다
이선생께서 전에 모친을 뵌적이 있었지요.
윤행원 선생님도 집에 들러 모친을 만난 기억을 늘 말씀하십니다.
고생만 하시다가 생을 마치셨는데, 떠롤리면 가슴만 먹먹합니다.
석물을 해드리고 자손들이 나름대로 활동하니 그것이 위안을 드리며
보답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024 창작수필 가을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