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임병식 rbs1144@daum.net
하치장에 쓰레기봉투를 버리려 나갔다가 의자 하나를 발견했다. 오래된 목 의자였다. 니스칠이 벗겨지고 밑바닥이 닳은 것으로 보아 누군가 오래 사용한 것 같았다. 오래되었다는 건 다른 것으로도 증명이 되었다. 4, 50년 전, 어느 시기에 의자 다리에다 테니스공을 열십자로 갈라서 끼워 쓰던 게 유행했는데 이것도 그러했다. 하지만 온전하지는 않아서 두 개는 빠져나가고 없고 나머지 두 개만 덮버선처럼 다리에 끼워져 있었다.
의자는 용도폐기된 것이 분명했다. 아마, 사용하던 주인이 사망을 했거나, 생활형편이 나아져서 쿠션이 있는 다른 의자로 바꾸었는지 모른다. 이런 의자는 어디서 쉽게 만나기 어렵다. 가격이 저렴한 김밥집이나 시레기 된장국 식장에서도 그런 의자는 쓰지 않는다. 오직 신기료장수가 무릎팍에 가죽포대를 얹고 구두를 고치는 곳이 아니면 만나보기 어렵다.
앉은 자리가 파일정도로 우묵해진 의자를 보니 많이도 사용했던 것 같다. 의자 주인은 무슨 용도로 사용했을까. 앉은 자리의 흔적이 유난한 것으로 보아 책상의자나 식탁의자로 사용했을 것 같지는 않고 몸이 성치 못한 사람이 하루 종일 앉아서 티브이를 보거나 밖을 내다보며 지내지 않았을까. 그 생각을 하니 사용한 분이 퍽 궁금하고도 하다.
사람의 인체 중 가장 수고를 많이한 부분은 발바닥과 엉덩이다. 체중이 실린 몸을 움직일 때는 발바닥이 동원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얼마나 고단한 임무를 수행하는가는 굳은살이 말해준다. 이것은 운명적으로 이족보행을 하는 사람의 신체에 붙은 피부의 예고된 숙명이다. 그렇다고 무슨 대접을 받는 것도 아니다. 호신용도 아니고 체면상 아니, 신발을 신을 때 구색을 갖추는 용도로 양말이나 얻어 끼우는 정도다.
수고를 하는데 비해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은 엉덩이도 마찬가지다. 눕지 않고 서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걷거나 앉아있게 되는데, 엉덩이의 과로도 결코 가볍지 않다. 앉으면 체중이 발바닥처럼 온전히 하중을 받게 되는데, 이곳에 몰려있는 세포들이 소리 내어 표현을 한다면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비명을 내지를 것이다. 그 무게가 예사 무거운가 말이다.
발을 떠받치는 도구로 신발이 있다면 엉덩이를 떠받치는 도구로는 의자가 있다. 한데, 신분을 구분하는 데 있어서 신발은 그닥 표시가 나지 않지만 의자는 다르다. 그 구분이 유난스럽게 세분화되어 있다. 돈이 행세를 하고 돈 가지고 무슨 의자인들 못 살까마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에 속한 일이고, 그것이 대외적으로 자리를 나타낼 때는 신분을 구분 짓는다.
어떤 모임에서 어느 인사가 참석할 때 앉은 위치도 중요하지만 어떤 의자에 앉게 되는가도 중요하다. 앉은 의자가 신분표시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권위의 상징인 안락의자에 앉아 있다가 평의자에 앉게 되면 그 자체로 위상이 추락된 것을 나타낸다.
엊그제께 그런 일이 있었다. 불법적인 계엄령 발동으로 내란혐의를 받은 대통령이 헌법재판소 심의에 참석했다. 헌법재판관이 높은 단상에서 위풍당당한 의자에 앉았고 하루아침에 위상이 추락한 대통령은 피의자 신분으로 아래 단하에서 평의자에 앉았다. 재판관이 물었다.
“피 청구인 본인이 나오셨습니까?”
“예, 나왔습니다.”
엉거주춤 일어나면서 대통령이 대답했다. 그것을 보자니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위상이 이렇게도 바뀌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위세를 떨치던 자리였던가. 회의장에서는 언제나 먼저 앉은 사람이 없고, 도착하여 의자에 앉을 때 의전비서관이 의자를 밀어주면 끌어당기지 않고서 그냥 않기만 하던 분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좁은 자리에 앉아서 인정신문에 대답하는 모습이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새삼 의자의 권위와 위상을 실감했다, 예전 직장생활을 할 때, 의자의 위치와 서열 문제로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더러 보았다. 총무과 의전담당 직원의 주요임무는 자기 상사 앉을 자리가 격에 맞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앞자리를 마련해 놓았는데 다른 기관장이 먼저 앉아 버리면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해서 기분이 상한 해당기관장이 돌아가 버리는 일도 발생했다. 그 의전비서관이 문책을 당한 것은 물론이다. 그런 일 때문에 나중에는 궁여지책으로 의자에다 참석기관장의 표시를 해두는 일까지 발생했다.
의자는 따로 주인이 없다. 비워둔 의자는 누군가는 앉게 되고 그것은 노력하는 자의 몫이다. 그래서 유행가의 가사도 “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이지”라는 말도 생겼다. 그 노래가 탄생할 때만 해도 ‘회전의자’는 성공한 사람, 화장이나 앉은 의자로 인식되었지만 지금은 흔해빠진 것이 회전의자다.
회전의자는 지금은 더 이상 상분상승의 대명사도 아니다. 그런데, 내다버린 의사는 등바지가 있긴 하지만 딱딱한 것이었다. 주인은 그 의자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활형편이 곤궁한 신세를 한탄하며 지냈을까, 아니면 몸이 아파 자유로이 거동을 못하는 형편을 탄식하며 지냈을까. 그도 저도 아니면 주어진 운명대로 하냥 생각없이 엉덩이를 붙인 체로 세월이나 죽이고 있었을까.
집에 돌아와 지금까지는 생각없이 사용하고 있던 의자를 둘러보았다. 나하고는 그간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함께 지내온 의자가 세 개나 있다. 책상의자와 식탁의자, 소파가 그것이다. 모두가 다 나의 엉덩이를 위해서 말없이 봉사해온 것들이다.
그간은 고마운줄 모르고 지내왔는데, 수고를 많이 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당연히 엉덩이도 많은 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감사한 마음은 꼭 사람한테만 해당된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한다. 그것을 생각하면 흔히 듣는 ‘매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지 않는가 한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더불어 사는 이웃에 감사하고, 먹거리를 제공해준 사람에게 감사하고, 사는데 편의를 제공해준 모든 것들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버려진 의자를 보면서 누구에게 한생을 봉사한 흔적이 느껴져 새삼 관심이 없던 사용 중인 의자를 떠올리며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2025)
첫댓글 倚子考를 통하여 윤석열의 몰골을 봅니다. 내란 수괴 피 청구인이 되어 요즈음 김밥집이나 시레기 된장국식당에나 가서 앉을 만한 의자에 앉아 시종 거짓말을 밥 먹듯하니 식상하고 추잡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과거 김재규장군은 '10,26의거' 사건 피고석에 앉아서 "내 부하는 아무 잘못이 없으니 나만 처벌해 달라"고 말했던과 비교하여 너무 추잡스러웠습니다. 5천만을 대표하는 국가원수에 있었던자가, TV를 통해 내란 수괴임을 뻔히 아는데 거짓말로 장관설을 늘어 놓으니 윤석열은 졸장부였습니다. 倚子考 작품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쓰레기 하치장에서 용도폐기된 낡은 의자를 보니 여러가지 생각이 스쳤습니다.
의자는 종류도 많고 의자에 따라서나, 그 의자에 앉은 사람에 따라서 풍격도
달라지는데, 그런 풍격이 있는 의자에 않을 능력이나 자격이 못된 사람이
그런 의자에 앉아있으면 그 의자에게 욕보이는 일이 되지 않는가 합니다.
위치가 바뀐 자리에서 앉아있는 모습을 보니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격식있는 의자는 앉을 사람이 따로 있지 않나 하는 생각들었습니다.
의자의 위상과 역할
숙연해 집니다 지금도 의자는 권위와 서열의 상징이라 생각됩니다 쓰레기장에 내버려진 낡은 의자에 새겨진 그 주인의 면목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초등학교에 압학해 인생 첫 의자를 만났던 것 같습니다 저도 의자를 내려다봅니다 둘 다 십년 세월을 함께해왔지 싶습니다 낡았지만 정이 든 기물인데 왠지 짠해 보입니다 제가 즐겨듣던 정수라의 '아버지의 의자'를 듣고싶어집니다
의자는 인 인간의 삶이 베어있는 물건이기도 하지요.
쓰레기장에 버려진 낡은 의사를 보니 많은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그 의자의 주인공도 의자와 함께 하면서 인생의 희로애락의 고비고비
를 넘겼지 않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