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금요일) 스물일곱째날 - 여제자 다비다, 죽음 이후를 산 여인
말씀제목
- 여제자 다비다, 죽음 이후를 산 여인
말씀본문 - 사도행전 9장 36절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개역개정)
“그런데 욥바에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있었다. 그 이름은 그리스 말로 번역하면 도르가인데, 이 여자는 착한 일과 구제사업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새번역)
말씀묵상
사람의 죽음은 늘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선행과 구제에 힘써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던 사람이 죽었다면 더욱 그러하겠죠. 하지만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아무리 급사라고 해도 그렇지, 다비다가 죽자 사람들이 마침 근처에 머물고 있던 베드로를 불러오고, 또 서둘러 온 베드로가 그녀를 살려내는 과정이 일상적이지는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나사로를 살리셨고, 제자들 역시 믿기만 한다면 스승과 같은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하셨죠. 하지만 그렇다고 당시 죽은 모든 신자들을 다 살려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초기 기독교 선교에서 꼭 살아나야할 사람이었을까요? 그렇게 치면 순교당한 제자들은요? 그들이 다시 살아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그 해답의 단초를 사도행전 9장 39절의 묘사에서 찾았습니다.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베드로가 도착해보니 ‘모든 과부’가 다락방에서 다비다의 시체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다비다가 그녀들과 함께 있었을 때에 지은 겉옷과 속옷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아니 사람이 죽었는데, 만든 옷은 왜 보여주었을까요? 그 옷들은 시장에 내다팔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비다 자신도 과부였지만, 그곳에 ‘모든 과부’라고 칭할만한 과부들이 모여 있었다면, 필시 욥바에 있는 대부분의 과부는 다비다의 집에 들른 적이 있거나, 생필품인 옷을 거저 받을 수 있었겠지요. 그곳은 욥바 과부들의 생존공간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조금 덜 자고 손을 조금 더 부지런하게 놀리면, 남편 잃고 아버지 잃은 서러운 사람들이 편히, 따뜻하게 지낼 수 있다!’ 그런 마음으로 다비다는 자신이 과로하는 줄도 몰랐을 겁니다. 그렇게 남을 섬기느라 자신을 혹사했던 거예요.
물론 남을 위해 헌신하다가 과로사한 사람은 하나님이 다 살려주신다고 하는 일반론으로 갈 수는 없지요. 이웃을 살리려고 몸을 혹사하다 순교한 신앙의 선배들이 허다하니까요. 하지만 베드로를 통해 다비다를 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을 잃고 막막해하다가 겨우 제2의 집을 찾은 욥바 과부들에게 ‘집’을 돌려주신 것입니다.
스스로를 돌이켜 봅니다. 나의 부재가 많은 이들에게 ‘집의 상실’로 여겨질만큼 나는 누군가에게 ‘집’이 되어주었나? 세상에 각박하고 고독사와 변사가 많은 시절이라서, 다비다와 같이 ‘집’이 되어준 그리스도인의 삶이 더욱 마음을 울리나 봅니다.
찬송
491장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기도
주님, 우리로 누군가에게 따듯한 의식주를 넘어, 마음의 위로와 안식을 제공하는 ‘집’이 되게 하소서. 혈연을 넘어 나의 ‘집’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유지되는, 용기가 더해지는 그런 기적을 허락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