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고요한 기다림☆]의 앞표지(우)와 뒤표지(좌)
============ ============
[고요한 기다림]
고덕상 시집 / 문학사랑시인선 26 / 오늘의문학사(2014.01.02) / 값 10,000원
================= =================
고요한 기다림
고덕상
손이 닿으면 파란 물이 들 것 같은 새벽하늘
마당 가 두어 뼘 화단
벌 나비도 찾아오지 않는 곳에 노란 영춘화
어루더듬고 있을 때
긴 꽃잎에 맺혔던 엊저녁 빗방울이 조용히
비닐 자락의 말간 빗방울과 몸을 섞는다
저 빗방울같이 정겹게 사랑하며 산다면
이울던 등걸에서도 움 틔우리
봄기운이라곤 아직 먼 시린 땅에
인고忍苦의 화신化身 노란 꽃봉오리여
나 같이 핏기 떨어진 메마른 가슴에도
한 송이 빨간 동백은 피어날는지……
봄꿈
고덕상
경瓊아 가자, 손을 잡고
복사꽃 살구꽃으로
불 지핀 돌담길 돌아
꾀꼬리 임 그리워
이리 저리 펄펄 나는
동구밖 느티 숲 지나
가진 것 다 내주어도
아깝지 않은 우리가
꿈꾸는 밀실로 가자
돈, 명예가 사랑보다
귀하지 않음을 아니
우리 들꽃처럼 살자.
삶의 지혜 - 민들레
고덕상
고향 산천은 언제나
내 어린 가슴에
고봉으로 담아 준
삶의 지혜, 두터운 사랑
시 한 수 얻을 까 싶어
옛 고향 길 걷다가
갑자기 떠오른 순이 모습
삘기 뽑자 꼬여내던 곳
오늘도 그날처럼
민들레 홀씨가
낙하산 타고 무더기로 이 둑에
내려와 앉더니 차례대로
머뭇거림도 없이, 지구를
번쩍번쩍 들어올려.
대둔산 가는 길
고덕상
들과 바다는 보이지 않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하늘이 좁아지고
이 굽이 돌면 저 구이, 이 코송이 지나면 저 코송이
산자락마다 활짝 피어난 키 큰 억새꽃 홰기
덩달아 무더기로 피어난 산국山菊들
마지막 가을 햇살을 끌어당기느라 야단법석이다
수락계곡은 태고의 숨결이 묻어나는 곳
아무데서나 순수가 나뒹구는 곳
신은 왜, 고갱이 같은 수락사람들에게
번영이나 사치 같은 건 모로쇠 했을까
허리띠 졸라매고 자연을 벗하며
찔레꽃마냥 소박하게 살라 하였을까
생이란, 긴긴 겨울밤 억새꽃의 흐느낌이더냐
끝없는 계곡물의 찢어지는 울부짖음이더냐
아파하지 마라 그게 삶이란다
억겁을 외로이 지켜온 수락계곡의 순수여!
꿈이요 희망의 길잡이요
이십일세기 지구촌의 축복이란다.
낙엽에 부쳐
고덕상
세상살이 맵다며, 만취된 몸으로
산야를 누비더니
동부새 몰아치는 길목에 서서
훌훌 벗어부치더니
내 피 한 방울, 욕되지 않게
이웃에게 거름이 되리
살아보니 비 눈 바람 몰아쳐도
‘세상은 살만했노라’고
되짚어보니, 삶은 허무요 고해라지만
‘참으로 행복했노라’고.
없는 걸 보다 - 문예창작 반을 기웃댄 적 있지
고덕상
시 창작 지도교수가
오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 시집을 읽었습니다
무엇을 보셨습니까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본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암벽 앞에서 눈감고 좌선하면
그 속삭임이 보이고요(觀音)‘
‘햇빛이 내 긴 그림자를 지우려고
낑낑거림이 들리고요(幻聽)’
보이지 않는 걸 길 창조해내고
들리지 아노는 걸 형상화하느라
그 외롭고 힘들고 먼 고난의 길
쓸모없는 듯, 참으로 쓸모 있는
오답 같은, 은유의 언어 기교.
함께 할 수 있다면
고덕상
그리운 이와
함께할 수 있다면
아침 햇살 손 내밀어
어린 들풀 어루더듬듯
그분의 마알간 순정 속으로
햇볕처럼 깊이 빠져들고 싶다
좋아하는 이
함께 할 수 있다면
틈 없이 쌓인 정 나무며
꿀벌 윙윙거리며 식소사분하고
양떼들 한가로이 풀 뜯는
꽃밭을 새도록 걸어보고 싶다
사랑하는 이와
한 곳을 바라볼 수 있다면
시원도 모르는 물방울이 돌 틈 뚫고
풀뿌리 요리조리 돌아서 다다른
저 넓고 푸른 수평선 너머에
새로운 이상향을 꾸며보고 싶다.
물의 교훈
고덕상
아래로 아래로만 흐른다
틈만 보이면 요리조리 찾아들어
그리움 되자고, 흙을 어르고 달래
초목들이 자라나기 알맞게 꾸며 놓고
기울어진 곳이 있으면 그득그득 채워줘
높은 데도 낮은 대도 없이
귀한 곳도 천한 곳도 없이
더불어 살자, 부르짖는 여울물 소리
조금도 따짐 없이, 그저 끌어안고
사모하는 기쁨, 더할 말은 생략과 침묵뿐.
어둠이 걷히는 소리
고덕상
봄바람 살랑살랑 불어오는 날이면
기대나 바람希은 부질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부스스 임에 대한 그리움이
열락없이 도지는 봄날
불현듯 그곳에 가고 싶어
바람소리 새소리 맑은 물소리 흐르는 곳
활짝 열어 놓은 대웅전
아무나 들어와도 좋다고
배시시 웃고 계신 아미타불
우리네 인연은 끝이 없고
제 몸 아낌없이 불태우는 촛불 앞에서
노승의 굶다란 예불 소리
귓전 파고드는 법륜法輪 앞에 손 모으니
빠끔히 눈뜨는 삶의 지혜
집착하가 보면, 고통과 번뇌만 살아나고
욕심 내려놓으면, 근심 걱정 사라져
세사는 별빛처럼 반짝여
내 안에 어둠 막 걷히는 소리.
조삼모사朝三暮四 - 풍신들이 하는 짓
고덕상
‘이익利益’앞에서는
대가리 꽁지 빳빳이 세우고
두 눈에 불 쓰고 덤벼
“권세權勢‘ 앞에서는
눈갈 지릅뜨고 허리 꼬여
두 손 불나게 비비대
‘출세出世’앞에서는
쓸개膽 감肝 다 빼놓고
아예, 홀딱 벗어버려.
잡雜것들이 판치고
고덕상
밭田을 돌아보면 잡것*들이 판을 치고
논沓을 나서 보면 약박골* 호랑이로 놀아나
어지서나 착善한 것들이 모진惡 것들에 당한다
온갖 만물의 여앙이란 인간들은 어떨까
서로 돕고 울력으로 살아가야 할 집단인데
삶이 좀 넉넉해지면 성품이 교만해지고
남에게 불편을 주는 돌부리가 되기도
삶이 빠듯해지면 심신이 고달파져
이웃들에게 수고로움이 되기도 하더라
이웃들의 부족함을 소리 없이 채워주는
이를, 우리는 어른이라 부른다
나도 사는 날가지 어른으로 살아가고 싶다.
*잡것: 바라귀 풍년대 쇠비름 온갖 잡초 지칭
*약박골: (서대문구 현저동 일대의 옛이름)호랑이는 상종 못할 만큼 사납고 무섭다
재미없이 살았나 봐
고덕상
너무
돈, 돈, 수전노처럼 사느라
맛, 멋, 흥도 모르는 얼간이처럼 살았나 봐
조금
슴슴하게 살며
철철이 갈아입고 골고루 골라 먹으면 어째서
더러
쉬엄쉬엄 헤찰도 하며
어깨 쭉쭉 펴고, 으스대며 살면 어떻고
가끔
아내와 더불어
어둡고 춘 곳 찾아, 끌어안아주면 어떠리.
마음의 평정을 잃고
고덕상
퇴임 후 쥔 것이 없어, 밤낮으로 이는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친구의 권유로
증권사 객장에 앉아 기웃댄 덕 있었지
내 마음의 텅 빔 때문
백일기도 들어 삼천 번 절해야
눈길 한번 비켜 갈까 말까한 걸
낭아내에 끌려, 무릎이 닳도록 조아린 적도
내 마음의 덧없음 때문
죽음이 가까워져야 철이 드나 보다
욕심 집착 다 내려놓으니 마음은 거울 속
민들레 홀시가 자유로히 날아가듯
나도 마음의 나래 활짝 피고 날아가리.
빛바랜 사진첩 추억 4 - 향수鄕愁
고덕상
고향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어머니의 따스한 품안
돌아보면 지척咫尺이 천리길
타향하면
번개처럼 스치는 건
겨울밤 잠자리와 먹거리
눈물 보이고 싶지 않은 고픈 길
밤마다 꿈결 따라
향수 앞세우고
고향집 다녀와도 시간은
서울의 첫 전차 고동소리 울리기 전,
빛바랜 사진첩 추억 5 - 쓸데없는 궁상
고덕상
생즉사生卽死라지
태어나면 반드시 사라진다고
한 치의 어긋남 없는 순리
내 아직 살아있는 건, 꿈이 있기 때문
오늘에서 내일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그 말고 먼 순환循環의 길
내 아직 살아있는 건, 할 일이 남았기 때문
빛과 그림자
삶有과 죽음無
빛은 그림자의 어머니
삶有과 죽음無의 영원한 자궁子宮
되돌아본 생
인연은 달함이 없는데
그깟 삶 좀 궁하면 어때
임과 함께 밤하늘의 별을 세며 살리라.
눈물의 밥
고덕상
어머니는
반식기(반반섞기) 밥을 지으시면
위의 하얀 쌀밥만 거둬
자식들에게 나눠 먹이고
밑바닥 보리누룽지만 긁어 잡수셨다
어머니는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
늘려 먹는다고 무밥이라도 하면
밤알만 돌라
자식들에게 퍼 담아 주고
밥알이 십리 가다 하나씩 섞인 밥 퍼다
밥상 밑에 감주추고 참 맛있다고 하신다
어머니는 다 그러는 줄만 알았다
밥솥에 얹어 찐 황석어젖
짚불에 궈, 짚불 내 나는 갈치 도막
살점 발라 자식들에게 먹이고
생선대가리, 뼈, 찾아만 골라놓고
식은 밥 물 말아 아궁이 앞에서 드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해야 하는 줄만 알았다
첫손자 낳아 안겨 드릴 때
함박꽃처럼 웃으시며 내민 젖가슴이
참으로 뜨거웠다
어머니 가슴이 이리 뜨거운 줄 처음 알았다
내가 새끼 낳아보고서야
바보처럼 산 삶이, 지금 소낙비로 내린다.
팔월 막바지
고덕상
팔월 막바지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오후
지친 몸, 보신이나 하자며 곰탕집 찾아
아내와 호반을 돌고 있을 때
험상궂은 두꺼비
탑정저수지 끝없는 파란 수면 위
가장자리 풀방석 앉아
앞다리로 두 눈 비비대며
물잠자리를 응시하고 있을 때
목가지 잠긴 왕 버들 가지에 앉은
청개구리 ‘임마 작다고 깔보지 말라’는 듯
깩 깩 깩…… 극성스레 울어댄다
아내는 하늘을 우러르며
“비가 오려나 봐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끈다.
이런 시를 쓰고 싶다
고덕상
꽃이 피면 봄이 오나보다, 화전花煎늘이 하고
잎이 지면 가을이 가나보다, 품앗이 김장하다가
‘배추 고갱이 겉절이’ 입맛 다시라 울이 넘기는
그 순박淳朴한 시골 정서를 노래하고 싶다
앞뒤도 없이 지껄여대는 군더더기 글 기나
미사여구만 늘어놔 번지르르한 시는 더욱 싫어
짧지만 몇 줄의 글이라도 정성을 다해 쓴
읽기 쉽고 알기 쉬운, 그런 시를 쓰고 싶다
김매다 물꼬에 손 휘휘 젓고 탁배기 잔 나누는
따끈따끈한 오지그릇 같은 정을 노래하고파
조금은 모자라도 한번 손에 들면
아무나 아무데서나 흥얼거리는 시를 쓰고 싶다,
.♣.
=================
■ 서언序言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의식주(먹고, 입고 자고)가 필요하듯이 시가 살아가는 데도 언어(먹고, 입고, 살기)가 필요하다.
어떤 시는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빛나고 값지다는데 나는 왜 시를 쓰면 쓸수록 어렵고 안개 속일까?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예순에 시작한 글쓰기를 잘 해보겠다고, 삼다(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기)를 누구보다 적잖이 실천했지만 내 보일 시다운 시 하나 없다.
이제 나에겐 흑자 생산이 내 편이 아니고, 이미 내 곁을 떠났지만 시작詩作 의욕은 꺾이지 않았다. 아직도 마음은 불끈불끈 솟는 이십대의 설레임인데, 몸은 꺼진 질화롯불 같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느 틈에 이렇게 늙었는지 서러워지다가 한편 이 나이 먹도록 아픈 데 없이 젊은이들 틈에 끼어 시를 읽고, 언어기교言語技巧에 대해 논할 수 있어 행이다.
사는 날까지 시와 드잡이하다가 가련다.
그간 써놓은 졸작拙作들을 간추려 한 권의 책으로 엮으려 한다. 몇 편은 타 문학지에 발표된 것도 있음을 밝힌다. 문학 선후배 동료들의 지도편달과 질정질정을 구하면서……
작품이 나오기까지 애써주신 오늘의 문학사 이헌석 대표님과 직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특히 편집장 이영옥 여사님의 후의가 고맙다.
2013. 11.22
논산 구석 우거에서
고 덕 상
.♣.
=================
◆ 표사의 글 ◆
시 창작 지도교수가
오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 시집을 읽었습니다
무엇을 보셨습니까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본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암벽 앞에서 눈감고 좌선하면
그 속삭임이 보이고요(觀音)‘
‘햇빛이 내 긴 그림자를 지우려고
낑낑거림이 들리고요(幻聽)’
보이지 않는 걸 길 창조해내고
들리지 아노는 걸 형상화하느라
그 외롭고 힘들고 먼 고난의 길
쓸모없는 듯, 참으로 쓸모 있는
오답 같은, 은유의 언어 기교.
― 「없는 걸 보다」전문
.♣.
=================
▶고덕상 시인∥
∙ 충남 논산에서 태어남
1. 학력 및 경력
∙ 단국대학 국어국문학과 졸
∙ 33년간 교직 생활 후 퇴임
2. 문학활동
∙ 교평문학에 신세훈님 추천 등단
∙ 한국문인협회 지역 위원
∙ 한국문인협회 충남지부 회원
∙ 한국문인협회 논산지회 부회장 역임
∙ (현) 한국문인협회 논산지회 고문
3. 상훈
∙ 동백장 수훈, 문교부 장관상, 교육감상 다수, 교평문학 신인상, 충남문학 발전 공로상
4. 저서 :『질러온 길』『황산 나물』『늦가을 귀뚜라미』『구름과의 대화』『물빛 고운 저물녘』『덤으로 솎음질 당한 놈이 있다』『인생 특유의 향기』『고요한 기다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