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들어서 명동의 '은좌'가 없어진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지요. 탈렌트이며 연극배우인 최불암의 친모로 알려진 이 여사가 명동극장 옆 골목에 자리한 은좌를 폐쇄하자 명동시대의 낙조가 드리워졌다며 꾼들이 탄식했습니다. ( 강형식작가 어록 중에) 술집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은 주모입니다. 은좌의 이여사가 20여 년간 영화를 누려왔듯이 전주의 은좌를 찾으려, 주모를 찾으려 고군분투 기웃기웃 마시고 또 마십니다. 옹심이, 천년누리 봄, 이래면옥, 홍도주막, 꽃..
멋과 맛의 고장 전북은 맘 놓고 소리와 학문에 정진할 수 있는 터전이 기초하고 있습니다. 서쪽 너른 평야에서 곡식이 들어오고, 해질녘 노을을 안고 들어오는 돛단배에는 근동에서 수확한 미나리,황포묵..등이 실려 왔다는데요 남쪽 싸전다리는 쌀을 비롯해 곡물이 그득그득 쌓이고 흥정이 오고 가던 옛 정취는 한벽청연(寒碧晴烟) 자욱한 물안개에서 잡힐 듯합니다. 징게 맹게(김제,만경)외배미뜰 느린 구릉지에 사시사철 윤기나는 곡식들이 솔찬허고 인근 임실열매, 순창장류, 곰소젓갈...등 주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에서 맛의 다양성이 실험 되고, 응용되어 곰삭다 보니 술상 보기가 용이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봅니다.
이렇듯 지역적 특성에 따른 전주는 막걸리 한 주전자만 시켜도 술상이 비좁아 상다리 아래 밀쳐놓고 마셔야 하는 현실이니 그 주안상을 받지 않고서는 전주구경은 말짱 헛일이 되고 맙니다. 3병들이 한 주전자만 달랑 마시고 일어나기에는 미안한 감이 없지 않지만, 이러한 일은 전주의 인심이자 기본 술상인 만큼 부담감을 가질 필요성은 없습니다.. 두 주전자를 시켜 받으면 못 보던 안주가 덥석덥석 접시와 접시 사이 난간에 얹히고 눈에 성큼 들어오는 것이 간장게장입니다. 게장 전문점에서 시켜먹던 그 맛에 그 양이고 보면 굳이 게장백반 전문점을 찾을 필요성이 있을까 싶습니다. 따스한 밥 위로 김 가루와 참깨를 고명으로 얹고 여기에 주인장이 게 속살을 발라내어 밥과 버무려 굴려주는 토실한 주먹밥은 저녁을 미처 들지 못한 '꾼'들에게 빈속을 채워주는 전주식 배려입니다.
그뿐인가요 묵은김치와 삶은 돼지고기에 홍어를 3단으로 묶어 먹는 홍삼합은 이제 더이상 특이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의 메인이벤트는 산낙지와 덩치 큰 꼴뚜기 안주. 청춘남녀가 난해한 안주에 얌전피우다가 취기가 오르면 도전장을 내밉니다. 숫제 졸고 있는 싱싱한 산낙지와 꼴뚜기 녀석을 몬도가네식으로 씹어 넘기기까지 입과 목에 힘을 줄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 보상으로 싱싱한 바닷냄새를 가득 담을 수 있지요. 여성분들도 만만치 않더군요. 가위를 마다하고 통째로 일격을 가하는 야성에 이날만은 먹는 매력도 있으니 이게 막걸릿집에서만 가질 수 있는 풍요와 여유로움이 있기에 이 또한 가능하다고 봅니다.
두어 순배 돌고 흥이 차오르면 소규모 판이 깔리기도 합니다. 마침 건너편에 정통소리와 퓨전을 아우르며 무대와 대학강단에 출강 중인 이용선 선생이 '전주막걸리가'를 누에 실 풀어내 듯 솔솔 내놓자 담임선생이 교실에 들어온 듯 일제히 조용해집니다. 무반주 젓가락 채에도 소리는 감기고 풀어지고 작은무대에도 그 품위는 여전합니다. "잘게 부신 누룩에다 고슬고슬 고두밥을 참숯다린 항아리에 자분자분 담는구나 차고 맑은 물 한 대접 지성으로 떠다 붓고 하루 이틀 사흘나흘 보름날이 가까울 적 보글보글 오글오글 자글자글 익난 소리 두근두근 울렁울렁 입안가득 침고이네 웃술 걸러 청주하고 아랫술은 약주인디 용수박아 막거르면 요놈이 막걸리라 술빛깔이 탁허다고 탁배기라 부르는 놈 이름이사 어찌됐든 고운 향기 입에 가득 홀짝홀짝 달콤한 술 당콤한 술 벌컥벌컥 배부른 술.."노랫말은 신귀백 선생이 지었는데요 이를 잘 풀어 낼 수 있는 이용선 선생으로 하여금 완성도를 높인 가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옹심이에서 귀한소리가 나와서 그런지 일순간 물이 흐르다 굳듯 사뭇 진중한 술자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아줌마 여기 한 주전자 더 !!" 안주 좋고 술맛 좋다는 암시성 외침에 주방장을 두고 쥔장이 서빙을 도맡는 풍경은 살갑기도 합니다. 이러다 보니 일이 겹치는 경우가 허다한데요 바쁜 나머지 손이 부족 할 때는 객이 직접 나서서 냉장고 문을 열고 꺼내어 먹는 특권(?)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니 이 대목은 알아야 합니다. 술을 시켰는데 "갖다가 마시지..." 라는 말이 떨어지면 곧 단골 인증서가 발급됐다는 뜻. 따라서 거래가 성립되면 안주 가지 수에서 혜택을 봄과 동시에 계산서 기록에도 正 표시가 생략될 수도 있는데요 안방에서처럼 등기대고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시고 계산을 치를 때 양심껏 플러스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따른 부작용도 속출합니다. 표준치 주량을 지킨 주객은 거의 없다는 게 주인장의 설명입니다. 셀프 즉 자유는 파우스트의 탄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내 가슴 속에는, 아 아 ! 두개의 영혼이 살면서 서로에게서 멀어지려하네. 하나는 감각으로 현세에 매달려 방탕한 사랑의 환락에 취하려 하고, 다른 하나는 이 티끌 같은 세계에서 과감히 벗어나 숭고한 세계로 나아가려하네."
첫댓글 옛날에 어떤 선상님이 해킹해서 원고 글씨를 흐트러 놓던데요..
참으세용 ㅎ
에~~
늦은밤 병실에서 미소와 군침을 안주 삼아 잠을 청하려 하오
가을빛이 평온합니다. 양지쪽 산책과 일광욕을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