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5년 10월 24일 열린 한국사회복지실천연구학회,
'예술, 사회복지실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다'에 토론자로 초대받았습니다.
학회 30분 전에 도착하여 마지막까지, 모든 연구자와 실무자의 이야기를 잘 들었습니다.
미리 받은 두 교수님 발제문을 읽은 뒤, 학회 자료집 제작을 위한 토론문을 작성하여 보냈습니다.
학회 당일에는 발표 시간이 무척 짧아, 생각을 다 나누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두 교수님 주제발표 뒤 쓴 토론문을 나눕니다.
귀한 자리 초대해주어 고맙습니다.
두 교수님 글 먼저 읽을 수 있었고, 덕분에 생각도 정리했으며, 글도 쓸 수 있었습니다.
좋은 공부였습니다.
예술과 사회사업의 만남, 두 발제문을 읽고
김세진, 사회복지사사무소 ‘구슬’
1. 들어가며
예술과 사회복지의 관계를 논하려면 먼저 두 개념의 경계를 명확히 합니다. 여전히 사회복지 현장 안에서도 ‘사회복지’가 무엇이며, 어디까지가 우리 일인지 합의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실천 경계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예술과 사회복지를 연결하려 하면, 오히려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회복지사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
우선 ‘사회복지(social welfare)’를 정책·제도 영역, ‘사회사업(social work)’을 실천 영역으로 구분하고자 합니다. 사회복지실천(social work practice)은 말 그대로 사회적으로 행하는 사업, 곧 사회사업(social work)입니다. 여기서 사회사업이란, 실천 현장에서 구체적인 당사자를 돕는 일, 즉 개인·집단·지역 수준에서 삶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통합적 실천을 뜻합니다.
다음으로 ‘예술’은 삶을 풍요롭게 하고, 사람을 어울리게 하는 사회적 행위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미술관을 찾거나, 동네 공방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보거나, 문화센터에서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릅니다. 이런 활동들은 인간의 삶에 윤기를 더하는 예술의 다양한 모습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일상 속’ 예술에 사회적 약자가 접근하기가 여전히 어렵다는 점입니다.
2. 문영민 교수 발표 자료에 대하여
2-1.
문영민 교수는 기존 장애예술 논의가 주로 물리적 접근성에 머물렀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공연장 접근이나 수어통역 같은 제도적 장치를 넘어, 이제는 장애예술을 감각의 다양성과 미적 체험 자체로 확장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회복지 실천 역시 ‘정상성 규범’을 넘어서는 미학적 실천으로 재구성하자는 제안입니다.
이는 장애를 기준으로 몸과 감각을 표준화해온 기존 권력 역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며, 장애를 ‘결핍’이 아닌 ‘미적 주체성’의 조건으로 읽어내려는 의미 있는 통찰입니다.
다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장애예술을 별도의 공간과 제도로 구분하는 순간, 그것은 ‘예술의 확장’처럼 보일 수 있으나, 동시에 ‘분리의 강화’가 될 위험도 존재합니다. 장애예술은 독립된 ‘영역’이 아니라,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로 예술의 한 양식으로 이해되길 바랍니다. 문제는 ‘장르’가 아니라‘ 플랫폼’입니다.
즉, 장애인을 위한 별도 극장이나 영화관은 그들의 접근성을 돕는 듯 보이지만, 비장애인과의 (자연스러운)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습니다. 예술이 타자와 만남을 배제한다면 예술의 존재 목적에 어긋납니다.
예술은 단지 미적 만족을 넘어 타인의 세계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확장하는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만약 분리된 플랫폼이 이러한 상호 이해의 기회를 차단한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회 통합이라는 사회복지의 목표와도 배치됩니다.
사회사업 현장에서 예술은 단지 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관계를 맺는 구실입니다. 예술이 삶을 생기 있게 하고, 사람을 사유하게 한다면, 그것은 결국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힘으로 이어집니다. 즉, 예술은 별도의 영역이기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밀도를 높이는 실천의 언어로 기능합니다.
매슬로는 ‘음악가는 음악을 만들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시인은 시를 써야만 궁극적 행복을 얻는다’고 했습니다(매슬로, 2018, 『매슬로의 동기이론』, 유엑스리뷰). 이 또한 인간관계를 욕구의 바탕에 둔 주장입니다. 음악과 그림과 시는 그것을 들어주고 보아주는 타자가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예술은 타자와의 공명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장애예술은 장애인을 따로 모으는 플랫폼이 아니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리는 장(場) 속에서 실현될 때 진정한 예술이 됩니다.
2-2.
서울 어느 장애인주간센터에서 일하는 이용호 사회복지사와 박아름 사회복지사는 지적 약자인 수현 님을 도왔습니다. 수현 님이 살고 있는 지역의 주민센터 노래교실에 참여해,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거들었습니다. 그래야 일상을 살아가고, 이를 구실로 둘레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아가 수현 님과 함께 노래하는 주민들도, 수현 님을 통해 또 다른 세계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냉혹했습니다. 주민센터 강사와 주민들은 난색을 표했습니다. 수강생이 모집되지 않는다며 신청 철회를 부탁했고, 어떤 주민은 박아름 사회복지사에게 ‘이기적’이라고 했습니다. 또 어떤 이는 ‘그 모습이 거슬린다’고도 했습니다(박아름·이용호 외, 2025, 『조그만 거들면 됩니다 2』, 구슬꿰는실).
경기도 어느 장애인주간센터에서 일하는 정아름 사회복지사는 유진 씨의 취미인 드럼을 지원했습니다. 지적 약자인 유진 씨가 다닐 만한 드럼 학원을 꾸준히 알아보다가, 마침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학원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정아름 사회복지사는 학원 원장에게 유진 씨가 다닐 수 있는 다른 학원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원장은 망설임 없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동네 장애인복지관에 가보세요.”(정아름 외, 2025, 『그저, 평범하게』, 구슬꿰는실)
이것이 2025년 사회사업 현장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벽 앞에서 물러나 장애인 예술 영역을 따로 만들어, 그 안에서만 노래하고 드럼 치게 도왔어야 할까요? 장애인복지관 안에 발달장애인 전용 노래방이나 노래교실을 만들고, 그곳에 강사를 초청해 자원봉사로 운영하며, 공모사업으로 후원금을 마련했어야 할까요?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을 가리켜 “장애인도 드럼을 치고 노래를 부른다, 이제 세상이 살 만해졌다.”고 자랑해야 했을까요? 이 모습이 과연 예술을 향유하는 당사자의 모습일까요?
아닙니다. 이러한 ‘별도의’ 예술 활동은 장애인의 기술적 숙련도를 높일 수는 있어도, 타자와 관계 속에서 어울려 살며 사회 규범을 변화시키는 예술의 힘을 발휘하기는 어렵습니다. 복지관 안 드럼 연주는 ‘재활 프로그램’이 될 수는 있으나, 지역 주민의 감각과 태도를 흔드는 ‘미학적 실천’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경기도 어느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하는 음악치료사 강애스더 선생님는 아이들 치료 활동을 되도록 복지관 안이 아닌 지역사회 다양한 공간에서 이뤄지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아이들의 표현이 치료실에서만 머물지 않고 마을에서 표현하고 마음껏 누리길 바라고, 나아가 이 모습이 마을에서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지길’(강애스더 외, 2025, 『장애인친화마을 이야기』, 구슬꿰는실) 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명 지역사회 안에도 수현 님과 유진 님을 환대해 줄 공간이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다시 길을 나섰고, 결국 다른 주민센터 노래교실과 다른 드럼학원을 찾았습니다. 그 속에서 수현 님과 유진 님은 여느 주민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드럼을 쳤습니다. 예술이란 바로 그렇게 다양한 사람을 어울리게 하는 실천의 매개가 될 때, 사회사업이 추구하는 ‘관계’의 가치로 빛납니다.
3. 김기덕 교수 발제문에 대하여
김기덕 교수는 오늘날 사회복지가 예술을 ‘치료나 프로그램 운영의 도구’로만 다루는 현실을 비판하셨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하고도 뼈아픈 지적입니다. 또한 사회사업이 인간에 대한 성찰과 실천가의 자기 성찰을 통해 인격적이고 인간적인 지원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에도 공감합니다. 이때 그 성찰의 도구로서 예술을 가져오는 일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을 통해 사회복지를 철학적으로 다시 사유해야 한다’는 주장은 몇 가지 우려를 남깁니다.
첫째, 이미 사회복지의 정체성이 모호한 현실에서 거대한 예술 담론을 추가로 불러오는 일은, 오히려 실천의 혼란이 커질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술을 사회복지사의 성찰의 도구로 제시하는 접근은 지나치게 개인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사회복지사가 성찰하기 어렵게 만드는 평가 체계와 제도는 학계와 정책이 함께 설계해온 결과입니다. 그런 구조를 성찰하지 않은 채 사회복지사에게만 ‘예술로 성찰하라’고 요구하면 책임 전가로 보일 수 있습니다.
저메인과 기터만(Alex Gitterman & Carel B. Germain, 1976, Social Work Practice: A Life Model, Columbia University Press)은 이런 현상을 ‘희생양 만들기(scapegoating)’라고 불렀습니다. 조직은 사람과 환경의 복합체계이기에, 한 개인의 행동이나 실패는 구조·규범·자원 배분 등과 얽혀 있습니다. 그러나 조직이 위기에 처하면 이 복잡한 구조를 단순화하고, 한 사람(사회복지사)을 ‘문제의 원인’으로 상징화합니다. 사회사업 현장에서도 성찰의 부족이라는 명목으로 이와 같은 희생양 만들기가 반복되는 건 아닐까 조심스럽습니다.
사회복지의 철학적 성숙은 사회복지사의 내면에서만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천가가 ‘성찰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가질 수 있게, 제도와 구조를 함께 정비하고 만들어가는 다양하면서도 통합적 변화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예술은 그 성찰을 돕는 하나의 귀중한 도구일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구조적 모순에 대한 해답은 될 수 없습니다. 사회복지사의 내면적 성찰을 요구하기에 앞서,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조건을 마련하는 일이 학계와 정책 연구자들이 우선해야 할 철학적 실천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김기덕 교수의 주장은 사회복지 현장에서 예술로 성찰하길 바란다고 하지만, 그 성찰의 주체가 사회복지사인지, 연구자인지를 명확히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학술대회의 ‘기획의도’에서 언급되었듯, 현장의 실천이 매뉴얼에 갇히고 수치화되는 현실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만든 근본적 원인은 무엇입니까? 자칫 그의 주장은 사회복지사에게만 책임을 묻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저자는 글 서두에서 ‘이 글은 예술의 도움으로 사회복지를 사유하려는 의도를 가진다’고 밝히며, ‘예술에 관한 사회복지의 관심과 탐구는 필수적’이며 ‘사회복지와 예술의 관계에 대한 사유로 자리매김된다’고 했습니다.
이는 사회복지학이라는 학문 분야 자체가 예술이라는 철학적 도구를 빌려 자신의 본질, 역할, 가능성과 한계를 포착하자는 ‘학문적 성찰’을 주로 요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주된 수신자는 ‘사회복지 학계’라고 해석할 여지가 큽니다.
그러나 결론에 이르러 ‘예술이 사회복지에 주는 선물’을 논하며, 사회복지사들은 인간에 대한 성찰과 함께 자기 성찰을 통해 인격적이고 인간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부분에서 논의의 무게중심이 ‘학문적 사유’에서 ‘실천가의 태도 변화’로 이동하면서, 구조적 문제를 외면한 채 개인(사회복지사)에게 윤리적 책임을 묻는 듯한 인상을 남깁니다.
학계가 먼저 예술을 통해 사회복지의 근본 철학을 재정립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글의 무게 중심이 ‘실천가의 자기 성찰’로 귀결됨으로써, 실천 현장의 제도적, 구조적 문제를 외면하고 개인에게 윤리적 책임을 묻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습니다.
결국, 글은 학문적 사유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도, 성찰의 책임을 ‘사회복지사(사회사업가)’ 개인에게 향하고 있어, 책임 주체가 명확하지 않은 채 실천 현장의 부담만을 남깁니다.
우리는 사회복지를 예술로만 다시 사유할 것이 아니라, 예술이 일깨우는 감수성과 상상력으로 사회복지의 ‘구조와 실천’을 함께 성찰하길 바랍니다. 예술이 개인의 마음을 열 듯, 사회사업도 개인의 내면과 제도의 틈을 함께 돌아보는 일이길 바랍니다. 사회복지사는 자기 실천을 기록하며 성찰하고, 학계와 정책은 그 성찰이 가능하도록 구조를 돌아봅니다. 그럴 때 예술은 실천가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자, 제도와 현장을 잇는 매개가 됩니다. 예술이 사회사업 속에서 빛나는 순간은, 사회복지사가 혼자 성찰할 때만이 아니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회(사회사업 현장)를 만들어갈 때입니다.
4. 종합 제언
결국 예술은 삶을 생기 있게 합니다. 장애가 있든 없든, 인간은 예술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타인과 연결되며 세계를 새롭게 인식합니다. 문제는 예술을 치료나 프로그램의 수단으로 축소하는 데 있습니다. 예술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삶의 한 장면, 어울림의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이번 학술대회 두 발제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 사회복지와 예술의 관계를 조명했습니다. 문영민 교수의 글이 예술을 관계의 매개로 이해하며 장애와 비장애를 잇는 ‘공존의 미학’을 제시했다면, 김기덕 교수의 글은 예술을 성찰의 매개로 이해하며 사회복지실천(사회사업)과 학문이 자기 본질을 돌아보게 하는 ‘사유의 미학’을 제시했습니다. 전자는 현장의 실천성을, 후자는 학문적 성실천을 중심에 두었지만, 결국 두 관점 모두 사회사업이 지향하는 인간적이고 인격적 실천을 회복하고자 하는 공통된 제안을 담고 있습니다.
예술은 관계를 만들고, 동시에 성찰을 가능하게 합니다. 관계 없는 성찰은 현실을 잃고, 성찰 없는 관계는 방향을 잃습니다. 사회사업은 이 둘을 이어가는 실천입니다.
사회복지사(사회사업가)는 자기 실천의 정체성 안에서 예술을 어울림과 성찰의 도구로 삼습니다. 예술을 특별한 대상을 위한 서비스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관계의 언어로 되살릴 때, 사회사업은 한층 더 인간적이고 풍요로운 실천으로 펼쳐집니다.

첫댓글 김세진 소장님의 「예술과 사회사업의 만남」을 읽고, 예술은 미학을 넘어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가꾸는 사회적 실천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예술이야말로 서로 다른 존재들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힘이자, 사회사업의 본질인 관계를 되살리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장애 예술을 분리된 영역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관계의 장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는, 사회통합을 이야기하면서도 여전히 분리된 공간을 만들어내는 우리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춥니다.
예술을 어울림과 성찰의 도구로 삼고, 모든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관계의 언어로 되살리자는 말을 깊이 새기며 짧은 소감을 마칩니다. 현장의 언어를 학회에 전달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