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무덥습니다. 한밤에도 더위는 식을 줄 모르는데, 대낮처럼 밝은 도시의 불빛으로 잠들지 않는 매미들은 짝을 찾는 야단법석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래저래 잠들기 어려운 날들입니다. 그래서인지 소나무를 소재로 한 옛 글을 찾아 읽던 중에 정약용 선생의 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消暑八事’
‘又消暑八事’등입니다. 이 중에 ‘又消暑八事’라는 같은 제목으로 두 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한글로 하자면 ‘더위를 피하는 여덟 가지 일’ ‘또
더위를 피하는 여덟 가지 일’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선비 정약용도 더위를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지요. 이러저러하게 더위를 피하는 방도를 찾으려
애쓴 거죠. 오죽했으면 같은 제목으로 거듭해서 시를 썼을까 싶네요.
모두
세 편의 시에서 제시하는 더위 피하는 방법은 꽤 여러가지가 되겠지만, 그 중에 시 ‘又消暑八事(또 더위를 피하는 여덟 가지 일)’을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먼저 쓴 ‘消暑八事(더위를 피하는 여덟 가지 일)’보다 뒤에 쓴 시의 느낌이 더 좋았습니다. 시 ‘又消暑八事’는
오늘의 나무편지와 다음 나무편지에 두 번으로 나누어 소개하겠습니다. 분량이 많기도 하고, 제가 다음 나무편지를 띄워야 할 즈음에 겨를이 넉넉지
않을 듯도 하여, 미리 준비해두려는 겁니다. 이번 주부터 이어지는 긴 답사에서 보게 될 좋은 나무 이야기는 짬 되는 대로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나무편지와 다음 나무편지의 사진은 모두 소나무 종류로 하겠습니다.
정약용이 시로 제안하는 여덟 가지 일 가운데 오늘 보여드릴 네 가지
일을 우선 각각의 제목만으로 보자면 이렇습니다. 첫째 ‘나무를 깎아 바람을 통하게 한다/잔목통풍(?木通風)’ 둘째 ‘둑을 터서 물이 흐르게
한다/결거유수(決渠流水)’ 셋째 ‘우뚝 선 소나무를 마루로 삼는다/주송작단(?松作壇)’ 넷재 ‘덩굴나무를 처마에
올린다/승도속첨(升萄續?)’입니다. 나무 이야기가 담기는 나무편지에 띄워 마땅할 만큼 나무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뭐 그리 대단한 게 있을까
싶으셨던 분들이라면 실망하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하나 속 내용까지 짚어보면 참 근사한 피서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차례차례 그
내용을 원문과 함께 보여드리겠습니다. ‘하나, 둘, 셋, 넷’이라는 표기는 원문에 없지만, 제가 보기 편하시도록 붙였습니다.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생겼네요. 한시의 원문을 표기했는데, 이 가운데 몇 글자는 표현이 안
되네요. 원문을 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궁금하실까봐 표현 안 되는 한자도 그대로 남겨둡니다. 한자 원문 가운데에 ? 라든가 다른 기호로 표시되는
건 인터넷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한자가 아니어서임을 알려드립니다. 공들여 만든 편지를 제대로 보여드리지 못해 안타깝고
송구스럽니다.
하나 : 나무를 깎아 바람을 통하게 한다 /
?木通風
옹수의 오동나무 늘어진 가지가 눈 앞을 가리는데 / ?水梧枝?眼中 고구의 몹쓸 나무 벨 때와 같은 하례 소리 울리네
/ ?丘?惡賀聲同 천 겹의 번뇌를 탁 틔워 없애고 / 塵勞豁去千重障 먼 길 열어서 만리 밖에서 부는 바람 길 열었네 /
天路遙開萬里風 침상의 거문고 소리 온 산에 울리고 / ?動牀琴絲振嶽 맑은 소리 울리는 처마 끝 풍경이 살랑대네 /
?鳴?鐸羽搖銅 집 옆의 푸른 단풍나무를 남겨 두어 / 唯殘側畔靑楓樹 서리 내리며 서서히 붉어지는 걸 바라보네 /
看取霜前盡意紅
1행의 ‘옹수(?水)’는 강 이름인데 어떤 강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2행의 ‘고구(?丘)’는 중국
영주부(永州府)에 있는 고무담(??潭) 서쪽의 경치가 매우 뛰어난 작은 언덕을 가리킵니다. 당(唐) 시인 유종원(柳宗元)이 이곳을 즐겼다는
고사를 떠올린 표현입니다.
둘
: 둑을 터서 물이 흐르게 한다 / 決渠流水
아직 비 머금은 구름이 하늘에 가득하니 / 餘雨餘雲滿太虛 새벽이 잃어나 삼태기와
삽으로 맑은 도랑을 튼다 / 晨興??導淸渠 우리 안의 오리는 진흙 위에서 즐거이 뛰놀고 / 欣趨欄圈泥居鴨 웅덩이에 넘치던 물고기도
헤엄쳐 나오네 / 好逝塘?溢出魚 호리병처럼 통로 좁아 도랑 물 흐르기 어렵더니 / 窄口葫蘆愁下斧 좀 지나자 구불구불 굽이치며 콸콸
흐르네 / 轉頭?螺沛奔車 듣자니 큰 강도 서로 구술 꿰듯 이어졌다 하니 / 傳聞四瀆如珠貫 선비들이 강물 파내자는 상소가 우습기만 하네
/ 長笑東儒諫鑿書
7행에서 제가 ‘큰 강’이라고 쓴 건 원문 사독(四瀆)의 번역인데, 양자강(揚子江) 황하(黃河) 회수(淮水)
제수(濟水) 등 중국의 네 개 큰 강을 말하기 때문에 그냥 알기 쉽게 ‘큰 강’으로 옮겼습니다.
셋
: 큰 소나무 앞을 마루로 삼는다 / ?松作壇
옆으로 펼친 가지 높이 치켜세운 소나무 / ?支偃蓋作高松 추녀 앞에 우뚝 서서
짙푸른 그늘 짓네 / 軒起前榮積翠濃 마주한 허공은 달맞이하기 좋은 들창이고 / 對立虛明迎月? 맨 꼭대기 푸르름은 구름에 덮인
산봉우리로다 / 上頭紺碧?雲峯 확 트인 동쪽으로는 밝은 빛이 널리 통하고 / 東?恰好通明庶 휘늘어진 서쪽 그늘 아래서는 절구질하기
좋네 / 西?兼須蔭下? 네가 이 곳에 올라 우두머리 된 걸 축하하니 / 賀汝登壇做盟主 훗날 대부 벼슬 쯤이야 안 받아도 되리 /
他年不受大夫封
7, 8행에는 난데없이 벼슬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진시황(秦始皇)이 태산(泰山)에 올랐다가 소나무 밑에서 비바람을
피하고는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라는 벼슬을 내린 고사를 떠올리며 쓴 표현입니다. 정약용은 이 시에서 소나무가 산의 우두머리가 됐으니 고작
오대부라는 벼슬 따위는 받지 않아도 좋으리라고 했습니다.
넷
: 덩굴나무를 처마에 올린다 / 升萄續?
오래 된 줄기는 얽히고 약한 넝쿨은 가냘픈데 / 老幹交舒弱蔓纖 푸른 그늘이 바다처럼
긴 처마를 휘감아 돈다 / 碧陰如海?長? 용의 수염은 몇 차례 얽혀 바람에 흔들리잖고 / ?鬚累?風難動 말젖처럼 톡 불거진 열매의
수액은 목 축일 만하네 / 馬乳成漿渴可沾 빗방울 막아줄 때에는 높이 들어올린 우산 되고 / 雨點?遮高捧傘 달 떠오르면 가는 체에 소금
새듯 달빛 새어든다 / 月光穿漏細篩鹽 누가 알았으랴 한나라 사신이 이끌던 뗏목으로 / 誰知漢使乘?力 산골 집의 더위 피하게 될 줄을
/ 解使山家?暑兼
7행의 한나라 사신은 한무제(漢武帝) 때 사신 장건(張?)이 뗏목을 타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끄집어 온 것입니다.
덩굴나무의 넝쿨이 마치 장건이 타고 다니던 뗏목처럼 엮였는데, 사신의 교통수단 뿐 아니라, 더위를 피하는 피서 수단까지 겸할 수 있어 좋다는
뜻으로 쓴 것이죠.
다산
정약용은 여러 편의 시를 남겼습니다만, 대개는 비교적 여느 한시에 비해 분량이 길고, 시어들은 다소 어려운 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한글로
옮기고 우리 형편에 맞게 음미하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렵게 그가 표현하고자 한 내용을 알게 되면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표적인 지식인의
풍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정약용은 특히 중국의 시풍을 따르기보다는 조선에 맞는 우리만의 문장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또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에 치열했던 좋은 시를 많이 남겼습니다. 여름 무더위를 피하는 법을 쓴 이 시편은 그의 문학 성향을 대표한다 할 수는 없지만, 여름을
보내는 지식인의 지혜를 짚어볼 수 있어 좋습니다.
주 중부터 한 주일 동안에
천육백 년 전에 활동했던 중국의 대표적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흔적을 찾아 떠돌 예정입니다. 도연명의 문학을 공부하는 분들의 고마운 부르심을
받아 떠나게 됐습니다. 아직 외국인들이 많이 찾지 않아서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 강서성(江西省)의 난창(南昌)지역입니다. 낮 기온이 37도로
무덥고, 아침기온도 28도나 29도 쯤 되는 무더운 곳입니다. 여유 되면 그곳에서, 힘 겨우면 다녀와서 인사 올리겠습니다. 그래도 정약용의 더위
피하는 여덟 가지의 나머지 네 가지는 다음 주 나무편지에서 띄우도록 애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