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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진짜 누구인가?
셰익스피어를 아는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십중팔구 대답 대신 묻는 사람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볼 것이다.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은 이제 탐구의 대상 이전에 경배를 바쳐야 할 '신전'이다. 그런데, 그 신전의 실체
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셰익스피어는 가공인물일 뿐이고, 그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한 사람은 누
군가 따로 있다는 주장이다.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여러 가지 석연치 않은 점들은 그 실존 여부에 대한
구구한 억측을 낳았다.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때는 공식적으로 1564년인데, 4월 26일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만으로 관례에 좇아
4월 23일로 추정한 것이다. 타계한 해 역시 1616년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 날짜가 묘하게도 생일과 같
다. 고향인 스트랫포드-어폰-에이본 교회의 초라한 묘석에는 "친구여, 제발 여기에 묻힌 흙을/파내지 말
아주오./이 묘석을 아껴주는 이에게는 축복이/나의 유골을 건드리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지니라"는 수
수께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어 빈 묘라느니 하는 소문이 무성하다.
셰익스피어의 실제 인물로 유력한 사람은 고전경험론의 창시자인 프란시스 베이컨이다. 프란시스 베이
컨은 엘리자베스 1세 시절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정치가다. 베이컨을 셰익스피어로 보는 이들은 여러
가지 증거를 든다. 명백한 증거가 바로 베이컨이 남긴 《프로무스(Promus)》다. 베이컨의 사적인 기록
과 편지를 모은 이 책에는 203개의 영국 속담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152개가 그대로 셰익스피어
의 희곡에 나온다는 것이다. 영국박물관(Harleian 수집품목 No. 7017)에 소장된 《프로무스》는 베이컨
이 1594년에서 1596년 사이에 쓴 개인 기록과 편지라서 셰익스피어가 이 노트를 보았을 확률은 거의 없
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베이컨이 베껴왔을 가능성도 없는데, 과연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셰익스피어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벤 존슨은 더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베이컨이 1619년 제임스왕에게 쓴
편지의 "Love must creep in service where it cannot go."라는 문장은 셰익스피어의 '1623년 작품
집' 《베로나의 두 신사》의 4막 2장의 한 문장과 똑같다. 또 1622년부터 23년까지 베이컨이 헨리 8세의
기록을 찾은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셰익스피어의 초기 작품인 《헨리 8세의 역사》는 죽은 지 7년만인 1623년 12월에 초판을 발행했는데,
1623년 2월과 6월에 베이컨이 버킹엄공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신이 헨리 8세의 역사를 쓰고 있다고 밝혔
다. 문서보관소에도 1623년 1월에 베이컨이 헨리 8세의 통치기록을 빌렸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다.
출판기간 역시 의심스럽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활발하게 발표된 1589년과 1607년 사이에는 베이컨이
백수였고, 법무국장으로 지명돼 바쁘게 지냈던 1607년에서 1621년 사이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거의
없었다. 1618년 뇌물수수혐의로 의회의 탄핵을 받아 대법관의 관직과 지위를 박탈당한 이후 셰익스피어
는 다시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베이컨의 뛰어난 저작인 《신논리학》이나 《학문의 진보》는 각각 1620
년 말과 1623년에 발표됐는데, 이것은 이 시기에 베이컨이 집필활동에 힘을 쏟았다는 증거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셰익스피어의 첫 작품집이 바로 1623년, 베이컨이 한창 집필활동을 하던 이때 개정·보
완되어 묶여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베이컨이 셰익스피어임을 숨길 필요가 있었을까. 거기에는 출생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베이컨 연구자들은 여러 자료를 통해 베이컨의 생물학적 어머니가 엘리자베스 1세였다고 주장한다. 임
신 중인 엘리자베스 여왕과 두 아이를 그린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를 그 증거로 든다. 엘리자베스와
함께 그려진 두 아이 가운데 하나는 창을 들고 있는데, 창은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상징이자 베이컨의
상징물이라는 것이다.
'shakespear'라는 이름 역시 '창(spear)을 흔드는 사람(shaker)'으로 아테나의 상징으로 풀이한다. 윌
리엄이라는 말은 라틴어로 투구를 상징하는데, 이것 또한 아테나의 투구다. 셰익스피어와 베이컨 저작
의 타이틀에 나타나는 '더블 A'는 "AthenA"에서 따온 것이며, 베이컨이 자신의 사인 옆에 쓴 아리비아 숫
자 '6'은 메두사를 잡은 아테나의 거울을 상징하는 숫자다. 또, 암호풀이를 통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베이컨의 이름을 찾아내기도 하는데, '템페스트'에서 프란시스 베이컨의 이름은 아테나의 상징인 아치
형으로 나타난다.
셰익스피어의 존재를 의심했던 찰스 디킨스 이후 이 천재적인 작가의 정체에 대한 의심은 아직도 남아
있다. 얼마전 출간된 존 미셸의 《Who Wrote Shakespear》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자가 누군가에 대한
10가지 설을 종합해 놓은 책이다. 그는 베이컨보다 크리스토퍼 말로위가 더 셰익스피어에 가깝다고 주
장한다. 정말 셰익스피어는 없는가, 그는 누구일까. ?
요건 오마이 뉴스에서 쓴 세익스피어 미스테리 기사~
그많은 작품들, 셰익스피어가 다 쓴 거 맞아?[오마이뉴스 2005-05-24 17:14]
[오마이뉴스 김성수 기자]"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말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영국이 자랑하는 세계적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
(1564-1616)의 비극 <햄릿>의 유명한 일절이다. 그는 이미 400여 년 전에 죽었지만, 영문학계의 거목
으로 작품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그러나 '썼느냐 안 썼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란 상황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듯싶다. 이것은
'셰익스피어 저작 논쟁'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공식적 기록
▲ 공원에 있는 셰익스피어 동상
1564년,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영국의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Stratford-upon-Avon)'이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윌리엄은 어느 정도 부를 축적했던 상인이자 장갑제조업자였던 아버지 존의
덕택으로 유복한 소년 시절을 보냈으며, 고향의 그래머스쿨(대학진학을 위해 가는 중등학교)까
지 교육받았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1583년에 자신보다 8살 연 상이었던 앤 헤서웨이(Anne Hathaway)와
결혼 했으며, 이듬해에 딸을, 1585년에 쌍둥이를 얻어 세례식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 도 그 후 약 7년간 셰익스피어가 어디서 뭘 했는 지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 1592년에 로버트 그린이 "셰익스피어는 런던에서 유명한 극작가 중 하나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다.
1598년은 셰익스피어가 배우로 데뷔한 해다. 벤 존슨의 <유머를 가진 모든 사람>이란 극 출연자 명단 에 그의 이름이 올라 있다. 이후 셰익스피어 는 배우로, 극작가로 명성을 계속 쌓아나갔으며, '체임벌린 경의 사람들'이란 연극단의 극단주가 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는 1611년 은퇴할 때까지 왕성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셰익스피어는 1616년에 죽을 때까지 평생 약 37개의 희곡과 150여 편의 소네트 등 많은 작품을 남긴 것
으로 알려져 있다. 19세기 대영제국 시절엔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란 말이 널리 퍼지기 도 했으며, 지금도 "영국의 르네상스는 셰익스피어의 시대다"란 말이 회자되고 있다.
그는 진짜 대문호였을까?
▲ 셰익스피어 생가.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죽은 후 약 150년 정도 지나서부터는 그의 위대성에 대한 찬양과 더불어 그에 대
한 회의론도 강하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대학 교육도 받지 못했고, 상인의 아들이었던 셰익스피어가
진짜 대문호였을까?"란 문제다. 이것이 바로 '셰익스피어 저작 논쟁(authorship debate)'이다.
언뜻 보기엔 평민 출신으로 위대한 극작가가 된 셰익스피어를 폄하하기 위해 지어낸 소문 같지만 그렇
게 간단하지 않다. 일례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사용된 단어의 개수를 세어보면 약 2만개가 넘는데,
1611년에 출간된 킹 제임스 성경이 약 1만개의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참으로 거대한
어휘력이라 할 수 있겠다.
영국의 소설가면서 영어연구가이자 방송인인 멜빈 브랙은 "21세기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 개수도
셰익스피어가 사용한 단어 개수의 절반밖에 안 된다"고 말한다. 400여 년 동안 단어의 변천을 감안하더
라도, 또한 문학의 특수성과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는 당연히 의심의 대상이라
는 것이다.
사실 월트 휘트먼(미국 시인), 헨리 제임스(미국 소설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정신분석 창시자) 같은 인
문-문학계의 유명 인사들도 셰익스피어가 그 많은 작품들을 당대에 혼자 다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해 왔다. 셰익스피어의 위대성과 의문점이 동시에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가설
과 음모론의 속에는 이런 사정들이 있다
그럼 과연 누가 썼을까? 다양한 가설들과 음모론
▲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의 웹사이트. 저작 논쟁을 설명하고 있다
가장 많이 회자되는 가설은 1500년대 후반 영국 최고의 지식인으로 손꼽혔던 문인 크리
스토퍼 말로우와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경이 '셰익스피어'란 이름으로 작품들을 출간
했다는 설이다. 1593년에 살해되었다고 역사에 기록된 말로우가 실제로는 죽지 않고 이태
리로 건너가서 이름을 숨긴 채 <베니스의 상인> 등을 집필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중 일부 를 당시 군주였던 엘리자베스 1 세 여왕이 썼다는 가설도 있는
데, 이것은 엘리자베스 1세 초 상화의 얼굴과 셰익스피어 초 상화의 얼굴이 비슷하다는데에
서 기인되었다. 그러나 본격적 인 논란의 시작 은 "17세기에 살았던 옥스퍼드 백작 에드워드 드
베르 경의 글이 셰익스피어 작품들과 유사하다"란 내용이 1920년대 옥스퍼드 문인들 에 의해 발표되면서
부터였다.
이후 온갖 이야기들이 생겨났다. 미국의 흑인운동가 말콤 X는 영국의 군주 제임스 1세가 셰익스피어라
고 주장했으며, 1984년에 찰튼 오그번 주니어는 "셰익스피어가 실존 인물이었던 건 확실하지만 그가 썼
다고 말해지는 작품들은 한 사람에 의해 집필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 뒤에서 내용
을 더하고 빼고 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성공회 대학교의 진영종(영문학, 셰익스피어 전공) 교수는 "셰익스피어에 대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가 없다"라며 "당시 희곡은 극작가가 내용을 대략 써 놓은 다음에 배우들이 리허설을 하면서 극작
가와 함께 완성하는 공동 창작 상황이 많았다, 몇몇 작품들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일 것이라고 추측되어
나중에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았다"라고 말한다.
▲ 홀리 트리니티 교회 내부에 있는 셰익스피어의 무덤.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런 의문점들은 그의 작품뿐만이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고향에 있
는 생가도 셰익스피어 생전에 확인된 게 아니라 사후에 생가로 추정되었다. 셰익스피어가가 다녔다고
하는 고향의 그래머 스쿨에도 그의 기록은 전혀 없다. 당시 학생들의 기록은 모두 남아있지 않으므로
그가 이 학교에 다녔을 것이라는 강한 추측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아직도 셰익스피어의 몇몇 작품은 그가 쓴 것으로 생각하는 게 옳은지 여부에 대해 논란이 일고 있는 실정이다
셰익스피어의 고향에서 볼 수 있는 그의 명성과 자취들
▲ 홀리 트리니티교회 외부 모습.
셰익스피어에 대해서는 이처럼 의문의 여지가 많지만, 사실 이 내용들은 그의 명성을 오히려 더 높여주
고 있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가설과 음모론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한 영국인에게 물어봤더니 "오죽하면
이런 가설들이나 음모론들이 나오겠냐?"라고 반문을 한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영국인들의 자긍심이 고
스란히 드러나는 대답이다.
이런 영국인들의 자긍심과 셰익스피어의 명성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이 그의 고향인 '스트랫퍼드어
폰에이번'이다.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130km 정도 떨어져 있는 이곳은 각국에서 오는 관광객들로 북적
대고 있다. 그의 고향에 직접 와서 '셰익스피어'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셰익스피어 저작 논쟁은 공
허한 메아리인 것처럼 보인다
▲ 셰익스피어가 은퇴한 뒤 죽기 전까지 살았다고 하는 뉴 플레이스 터
이곳의 셰익스피어 관련 문화재들은 '영국 셰익스피어 생가 재단'이 통합해서 관리하고 있으며
그가 태어났다고 하는 '셰익스피어 생가(Birthplace)', 런던 생활을 마치고 은퇴해서 죽기 전까지
살았다고 하는 '뉴 플레이스(New Place)' 터, 그의 큰 딸 수재너와 사위인 홀이 살았다고 하는
'홀스 크로프트(Hall's Croft)'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셰익스피어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홀리 트리니티 교회(Holy Trinity Church)'도 유명한데
최근 이 교회는 시급한 보수공 사 문제로 모금 활동이 벌어지 고 있다고 언론에 보도돼 세간 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교회 내부에는 셰익스피어의 세례 및 장례 증서 복사본도 나란히
전시되고 있다.
관광객들은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에 전시되어 있는 셰익스피어의 각종 자취들과 에이번
강변 극장에서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 (Royal Shakespeare Company)의 공연을 보며 자
연스레 셰익스피어에 젖어들게 된다. 여러 음모론과 가설에 관계없이 예나 지금이나 셰익스
피어는 영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위대한 문화유산인 동시에 잘 나가는 문화상품인 것이다.
첫댓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