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붕괴를 촉발한 쿠데타는 1991년 8월 중순에 일어났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크림반도 얄타에서 휴가를 보내는 사이, 공산당 강경파 세력이 탱크를 앞세워 모스크바에 진입한 뒤 국가비상위원회를 설립하고 권력을 장악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거사는 옐친 전대통령이 이끄는 '피플 파워'앞에서 3일만에 끝났다. 소련 쿠데타가 '3일 천하'라고 불리는 이유다.
외신으로 쿠데타 소식을 접하고, 주한소련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 1990년에 이어 두번째로 모스크바 공항에 떨어질 때까지 걸린 시간은 대충 열흘 정도였다. 모스크바는 이미 '상황이 끝난' 상태였다.
뒤늦게(?) 찾아간 '쿠데타 저항의 상징'인 '벨르이 돔'(흰색 건물, 백악관?)의 벽에는 '쿠데타 반대' 구호들이 어지러이 남아 있었다. '벨르이 돔'은 소련 러시아공화국의 행정부 청사인데, 옐친 당시 최고회의 의장의 집무실도 거기에 있었다. 그가 집무실에서 나와 탱크위에서 연설했던 역사적 현장 주변에는 몇몇 사람들이 마치 옐친 대통령이나 된 듯, 열변을 토했고 둘러싼 군중 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러시아의 향후 진로에 관한 즉석 토론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련 쿠데타 당시, '다 함께 저항하자'는 호소문을 읽고 있는 옐친 전 대통령(위)와 쿠데타 군의 탱크 진입을 맨손으로 막고 있는 시민들. 탱크 앞에 한 시민이 엎드려 있다/현지 매체 rbc 유튜브 캡처
예카테린부르크 옐친 박물관에 걸려 있는 옐친 대통령 사진/바이러 자료 사진(김원일 제공)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소식을 들은 것은 쿠데타 취재가 대충 마무리된 뒤였다. 주 모스크바 한국 대사관에서 만난 타사 기자로부터 들었다.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은 1991년 9월 17일 제46차 유엔총회에서 159개 회원국 만장일치의 찬성으로 이뤄졌다.
유엔 가입은 워싱턴이나 뉴욕에서 담당하는 기사여서 서울에서 모스크바에 있는 필자에게 굳이 전할 메세지는 없었다. 그래도 소련 측의 반응이라도 송고할 요량으로 소련 외무부의 카운트 파트인 대사관 정무 담당 서기관의 사무실 문을 두들겼다.
당시 소련 반응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다. 다행하게도 유엔 가입을 위해 소련과 협력한 정황들이 담긴 외교문서들이 15일 공개됐다. 비밀 외교문서 보존 기한 30년이 지남에 따라 외교문서 2466권(40만5000쪽 분량)의 비밀이 해제된 것. 당연하겠지만, 남북한이 서로 유엔 가입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다툰 내용들이 그 속에 들어 있다.
외교 문서들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2석)을, 북한은 남북한 단일(1석) 가입을 성사시키기 위해 외교전을 벌였다. 특히 우리 정부는 1990년 9월 수교한 소련을 통해 북한의 최대 우방국인 중국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나타났다.
수교 후 소련은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지지로 돌아섰지만, 중국은 여전히 "남북한 유엔 가입은 남북 간 합의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고 한다. 이 노선을 바꾸기 위해 중국과 북한 설득이 가능한 소련에 매달린 것으로 보인다.
주미 한국대사관이 본부에 보낸 외교 전문. 미국측으로부터 파악한 로가초프 소련 외무차관 방중 결과가 담겨 있다/자료 출처: 외교부
우선, 주미 한국대사관이 작성한 미국 국무부 중국과 부과장과의 면담(1월 15일) 보고를 보면, 제1차 한·소련 정책협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1월 7일 방한한 로가초프 소련 외무차관은 바로 중국으로 가 "한국은 1991년 중 유엔 가입을 희망하는 바, 소련으로서는 중국이 이에 반대하지 않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밝혔다. 중국 측은 이에 대해 “남북한 간에 해결해야 할 문제”라며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러시아는 중국이 한국의 유엔가입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는 못할 것으로 전망했다. 데니소프 소련 외무부 한국부장이 1월 17일 주 소련 한국대사관에 로가초프 차관의 방중 결과를 설명하면서 관련 질문에 "거부권을 행사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본다"고 답변했다는 것이다.
그 해 4월에 한국을 다시 찾은 로카초프 차관에게 이상옥 외교부 장관은 "소련이 북한에 대해 외교정책 일반은 물론, 특히 유엔 문제에 대해서도 현실 감각을 가질 수 있도록 설득해 주기 바란다"고 재차 당부했다. 그러나 로가초프 차관은 "대북한 설득은 소련으로서도 매우 하기 어려운 과제"라고 솔직하게 대답한 것으로 외교문서에 나와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안이 통과됐으니, 소련 외무부도 이를 당연히 환영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91년 4월 4일 이상옥 외무부 장관과 로가초프 소련 외무차관 면담록/자료 출처:외교부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 외에 당시 주모스크바 한국 대사관이 관심을 가진 이슈는 단연 교민 보호였다. 쿠데타 이후 사회 전체가 어수선한 데다 물품 부족 상태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어 눈에 띄는 외국인(특히 동양인)은 범죄자들의 주요 타깃이 됐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차에 기어코 한국 대사관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터졌다. 초대 모스크바 특파원 중의 한 명이 아파트에서 강도를 당한 것이다. 어학 연수 중 쿠데타 발발로 어쩔 수 없이 현장에 특파된 기자로 활동하던 그 기자는 '로컬 아파트'(외국인들을 위한 아파트가 아니라 현지 주민들이 사는 허름한 아파트)에서 혼자 살다가 3인조 강도에게 당한 것이다.
모스크바에서는 대충 나도는 이야기만 듣고, 필자는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이후 당사자로부터 사건 전모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9월 어느날 저녁 8시쯤 아파트로 돌아오다 컴컴한 복도에서 강도를 만났다고 했다. 복도 계단에 숨어 자신을 노리고 있었다고 했다.
3인조 강도는 그 기자의 손발을 묶고 입을 테이프로 틀어막은 뒤 소파에 눕히고는 담요로 덮어버렸다. 그리고 갖고 온 큰 가방에 집안에 있던 물품들을 마구잡이로 쓸어담아 갔다. 그들과 한 공간에 같이 있었던 9시간은 긴 악몽을 꾼 것 같았다고 했다.
그해 12월 소련이 해체된 뒤 모스크바의 치안을 더욱 나빠졌다. '마피아' 단어가 언론에 나오기 시작했다. 모스크바를 처음 방문했던 1990년 4월에만 해도, 모스크바는 진짜 안전한 도시였다. 전기가 부족해 도시 전체가 깜깜했지만, 모스크바 골목 어디에서도 강도나 폭행 등 나쁜 일을 당할 우려는 없었다. 현지 고려인은 "국가(KGB)라는 거대한 마피아의 존재에 동네 깡패(범죄자)들이 설칠 생각을 못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1991년 쿠데타 이후, 굳이 모 특파원의 강도사건을 예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모스크바의 치안을 급격히 나빠졌고, 1995년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다시 갔을 때는 이미 악명높은 '체첸 마피아'가 횡행하고, 안전한 거주가 최고 관심사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딸을 동반한 필자는 당시 외국인이 주로 사는 비싼(?) 아파트에 둥지를 틀어야 했다. 불안한 치안 때문이었다.
외교부가 지난 15일 공개한 외교문서 공개목록과 외교사료해제집 책자는 주요 연구기관·도서관에 배포된다. 외교사료관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원문은 외교사료관을 방문하면 열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