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버스는 순천버스터미널에 제 시간에 도착했다. 아직 출발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 2km 떨어진 행사장까지는 동천변을 따라 걸어갔다. 얼마나 더운지 행사장에 도착하기 전에 옷이 다 젖을 정도로 땀이 흥건하다. 배번을 받은 후 대회 준비를 할 때도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가 없다.
17시 정각, 6분 30초 주로 주행하자고 마음먹었지만 가슴통증이 생기며 가로막는다. 여러 번 병원에 가보자면서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아 원인도 모른 체 지금까지 방치하고 있다. 통증이 생겼을 때는 속도를 낮춰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순천만 습지 갈대밭 둔덕의 흙길은 푹신하면서도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사진을 찍으며 진행했다. 그러다 보니 가슴통증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희미해져 갔다.
15km 지점 보급터에서 급수를 하고 경광등을 켰지만 불과 몇 초 만에 다시 껴졌다. 건전지가 다 되어 꺼진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방법은 24km 지점에 있는 매점에서 건전지를 구입해서 갈아 낄 수밖에 없다. 주최 측에서 코스선정을 잘한 것 같다. 밤이라 하더라도 익숙한 지명들이 계속 스치며 지나갔고 대부분 낮이라면 꼭 한번 들르고 싶은 곳들이다. 24km 지점 매점에는 다행히 건전지를 팔고 있었다. 경광등의 문제는 해결했다. 핑계에 캔맥주를 사서 그 자리에서 비우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매점에서 10분 정도를 허비했지만, 마침 조**님과 걸어가며 아주 오래전 308 횡단 추억을 얘기하다 보니 시간지체는 더 심해졌다. 아무리 늦어도 14시간 안에는 들어와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배낭끈을 조여 맸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간쯤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기록에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내 몸이 우선이고, 그다음엔 그 상황에 맞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운이 좋아 기록이 단축되기도 한다.
30km 보급터를 넘어서자 계속하여 오르막이다. 울트라마라톤 대회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적당하게 있어야 한다. 밋밋한 한강대회보다는 지방대회를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걸을 수도 있고 속도를 내어 달릴 수도 있다.
바람재 정상은 38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내리막 질주를 하지 말라고 하지만, 다치지 않은 방법이 있다. 허벅지에 힘을 주어 무릎을 쫙 펴지 않고 케이던스를 높여 달리면 된다. 바람재정상에서 내리막 1km 구간은 4분 50초대가 찍혔다. 41km까지는 내리막이라 속도를 내면서 이완되어 있는 몸에 자극을 주었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울트라 마라톤에서 42km 지점을 5시간 안에는 통과했지만, 이번엔 5시간 14분이다. 물론 지체가 되어도 걱정할 일은 아니다. 울트라마라톤은 중간지점 식사를 한 후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2시가 넘어가고 있음에도 더위는 물러가지 않고 있었다. 경로당 앞 수돗가에 머리를 처박고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기도 했다. 뒤따르던 주자도 나를 따라 함께 수돗물로 머리를 식혔다.
43km 지점 공사구간에 나 혼자 남겨져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가 가는 길이 코스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최 측에 전화를 걸었다. 비슷한 전화가 올 것을 예상했는지 자세한 설명과 함께 44km 지점에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괜한 기우였다.
6시간 30분이나 걸려 도착한 48km 지점에서 식사를 마치고 오르막을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이 길이 맞냐며 묻는 젊은 주자와 동행하게 되었다. 첫 울트라 참가자지만 풀코스 싱글을 할 정도로 스피드가 꽤 괜찮은 주자였다.
한참을 올라가다 보니 익숙한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석거리재! 장쾌한 호남정맥 줄기를 만나자 저절로 흥분이 되었다. 섬진강 울타리인 호남정맥은 내장산과 무등산을 거쳐 존재산에 이어 광양 백운산에서 바다로 잠기는 516km의 산줄기다. 호남정맥을 종주하면서 석거리재는 2008년 11월에 지나갔었다. 세월이 흐른 만큼 석거리재엔 터널이 생겼고 차량 통행이 한산한 곳으로 변하고 있다. 1km 정도 내리막에 이어 계속하여 올라가자 빈계재에 이르렀다. 순천의 진산 조계산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 주릉이다. 평소에도 울트라마라톤 대회 직전에 코스 공부를 잘하지 않는지라 순천만 울트라가 호남정맥을 가로질러 가는 줄은 몰랐다. 선선한 바람이 불며 몸의 열기를 식혀준다.
55km 지점인 빈계재에서 젊은 주자와 속도를 내어 달려갔다. 2km를 달려 내려오는데 불과 9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또다시 급한 오르막으로 바뀌며 오공재 정상을 터치다운했다. 낙안읍성 뒤편 금전산에서 뻗어 내린 곳이다. 조정래길을 따라가다 보니 마치 소설 "태백산맥" 속에서 금전산을 거쳐 조계산으로 넘어가는 듯한 착각을 하게 한다.
석거리재 삼거리 66km까지 달려 내려온 후 마지막 고개인 밤치재를 향했다. 네 번의 고개 중 고도는 오공재와 비슷하지만 업힐 구간은 가장 짧다. 1km를 걸어올라 가자 정상이다. 밤치재 또한 금전산과 이어진 고개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속도를 끌어올렸다.
평지와 얕은 오르막에서는 예외 없이 달리기와 걷기를 8:2(또는 7:3) 비율로 주행했다. 피로가 누적되기 전에 사용 근육을 바꾸어 줌으로써 활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젊은 주자 또한 나를 잘 따라주었다. 가끔씩 지속주로 달리면서 우리를 추월해도 그 주자를 이내 따라잡을 수 있었고, 많은 주자를 추월하며 앞서 나갈 수 있었다.
73km 지점 보급터에서 바나나를 먹으며 걸어갔다. 84km 지점에 보급터가 있다고 했다. 물을 그즈음에서 채워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왠 걸 85km가 지나고서도 보급터는 보이지 않았다. 한번 더 주최 측에 전화를 하니 주유소를 지나 철길을 건너면 곧 보급터가 보일 거라고 설명을 했다. 거의 86km 지점에 보급터가 있었다. 누룽지를 먹고 비타민C 두 알을 삼켰다. 젊은 주자도 나를 따라 하고 싶은 건지 비타민C를 달라고 했다. 비타민C가 소화에 도움을 주고 활성산소를 제거하는데 역할을 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지만 실제로 확인된 것은 없다.
젊은 주자 랜턴의 배터리가 방전이 되어 이제는 오롯이 내 랜턴에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내리막 질주할 때는 랜턴이 꼭 필요하지만 평지에서는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있어도 괜찮다. 내리막 구간을 다 통과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90km 지점을 넘어서자 내 랜턴마저 방전이 되고 말았다. 당장은 휴대폰을 꺼내 비추며 달려가다가 시내구간으로 근접하며 가로등이 많아지자 휴대폰마저 거둬들였다.
마지막 보급터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마무리를 위해 동천으로 향했다. 주최 측에서 표기한 안내 표지가 실제 거리와 2km 정도의 오차가 있었다. 2km를 더하면 13시간 안에는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 굴다리를 지나 동천으로 진입한 후에는 어느 순간 갑자기 거리표시가 가민시계와 비슷해지며 정상거리로 돌아왔다. 충분히 13시간 내 완주가 가능한 상황으로 뒤바뀌었다. 골인 500m를 남기고 젊은 주자에게 먼저 골인해서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어차피 같이 골인해도 기다렸다가 사진 찍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차를 두고 골인하는 게 바람직했다.
102km를 12시간 53분으로 골인했다. 202명이 참가했고 18등이라 한다. 다른 대회와 달리 고개가 많아 다들 기록이 좋지 않지만, 나는 예상한 기록보다 단축을 했으니 선방한 셈이다. 울트라 첫 대회 완주를 목표로 했음에도 12시간 대 완주를 했다고 무척 좋아하는 젊은 주자의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인근 사우나장에서 샤워를 마치고 막거리 한병을 반주 삼아 아침식사를 했다. 그다지 피곤한 느낌이 들지도 않는, 그야말로 재미있는 주말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