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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1. 묵상글 들 ( 부활 4주 토요일-들어서 아는 하느님을 눈으로 뵈올 때까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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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1.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4주 토요일-들어서 아는 하느님을 눈으로 뵈올 때까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오늘 필립보의 말은 하느님을 뵙게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그러니까 더 바랄 것이 없을 거라는 뜻인데
그것이 쉽지 않아서 그렇지 하느님을 뵙기만 하면
정말 그럴 거라고 저는 믿고 또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한눈을 파는 것은
하느님으로 충분하지 않아서가, 더 바라는 무엇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기보다는 하느님을 뵙지 못하고,
그래서 충만하지 못하니 그 대신 다른 것으로 만족하려는 거지요.
소위 대리만족이라는 것이 이것이고,
우상 숭배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으로 충만한 사람 그러니까 충분히 만족한 사람은
더 이상 다른 만족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터인데 뵙지 못하니
불충분하지만 다른 것에서라도 대신 만족을 얻으려는 것이고,
그러기에 대리만족을 이것저것에서 찾지만 늘 불만이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느님 말고도 대리만족할 것이 있기에,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으로 만족하려고 하지 않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으로 만족하려다 만족치 못하고 다른 것으로 옮아가고,
그것으로 만족하려다 만족치 못하고 또 다른 것으로 옮아갈지언정
다른 것으로 대리만족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이 그 대표지요.
이 여인은 남자가 다섯이나 되었지만
그 누구에게서도 만족을 충분히 얻지 못했고 그래서 늘 목말랐는데
그러다가 자기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을 만나 그 갈증을 풀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만 운이 좋았던 것인가요?
아니면 우리가 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있는가요?
물론 그녀가 운이 좋았던 것인데 실은 그녀만 운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다가오는 기회가 많이 있었고 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녀처럼 계속 목말라하지 않고
적당히 이 사람으로 또는 이것으로 만족하자고 하며
더 이상 참 만족을 찾아 하느님에게까지 올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적당히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욕심부리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생각하고,
그것이 또 영성 생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아예 모른다면 모를까,
우리처럼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들어서 아는 사람은
그 하느님을 뵈올 때까지 오늘 필립보처럼 뵙게 해달라고 해야 합니다.
들어서 아는 하느님을 눈으로 뵈올 때까지 예수님께서 너는 이미 보았다고
아무리 말씀하셔도 나는 아직 못 봤으니 뵙게 해달라고 졸라야 합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의 다음 말씀을 자주 마음에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으뜸 선이신
우리 창조주이시고 구세주이시고 구원자이시며 홀로 진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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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1.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다음,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 뿐이다.”(요한 13,33)라는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세 번째 반응이 이어집니다. 곧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라는 베드로의 반응과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라는 토마스의 반응에 이어, 필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요한 14,8) 하고 간청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
내가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도 믿어라.”(요한 14,9-1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의 관계를 밝혀주십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뜻은 ‘예수님을 보고 그가 누구인지를 안 사람은 하느님을 본 것이며, 하느님을 안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사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한 것은 ‘과시해 보여 달다’는 의미의 요청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필요한 것은 ‘과시’가 아니라 ‘보는’ 것이요,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하나 됨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의 무지를 꾸짖으신 후, 참을성 있게 이전의 가르침을 되풀이 하십니다. 사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시며, 당신이 하신 말씀은 모두 아버지의 말씀(참조:3,34;8,18.28.38.47;12,49)이시고, 당신이 하신 일은 모두 아버지께서 하신 일(참조:5,19.36;9,3-4;10,25.32.37-38)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이 이를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관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무지가 여전히 믿음의 부족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그러니, 당신이 제자들을 떠나더라도 당신이 하신 일, 곧 구원하는 일과 하느님을 세상에 알리는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 일은 궁극적으로는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하는 일 안에서 당신의 권능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고 반복하여 강조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3.14)
당신을 믿고 당신께 의탁하면, 당신의 권능으로 다 이루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결국, ‘믿음’이 전능을 가져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믿음’ 안에서 당신이 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요한 14,9)
주님!
당신은 저를 용서하셨지만, 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희망했지만, 저는 절망했습니다.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하소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희망하게 하소서.
함께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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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1.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노동자 성요셉 기념.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大同世上: 노동절에 붙이는 묵상
5월은 성모성월이고 그 첫 날인 오늘은 노동자 성요셉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지난 3월 19일에 성 요셉 대축일을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분을 노동자의 주보로 기억하기 시작한 때는 1955년부터입니다.
그것은 1886년부터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이 날, 5월 첫째 날을
‘8시간 노동제’를 역사상 처음으로 외쳤던 날로 기념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노동의 존엄성과 노동자의 노동 인권을 당사자들이 주장한 첫 움직임입니다.
이를 외면하기 어려웠던 가톨릭교회에서 노동자들의 주보성인으로서
요셉 성인을 70년 만에 전례적으로 소환하게 된 것입니다.
노동절의 기원이 되었던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습니다.
1886년 5월 1일에 미국 시카고에서 8만 여명의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8시간 노동제 쟁취’ 구호를 내걸고 총파업으로 궐기했는데,
경찰과 군대의 발포로 6명이 사망하는 유혈 사태가 처음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2년 후 같은 날에 모든 나라, 모든 도시에서 같은 구호를 내건
국제 시위가 조직되고, 각국 노동자 대표들이 이날을 노동절로 선포하는
제1회 국제대회를 치르는 등 반향이 거세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1년 후인
1891년에는 레오 13세 교황도 노동자의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는
첫 사회회칙 ‘새로운 사태’를 반포함으로써 강경하게 대응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시카고 시위는 지옥과도 같은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노예처럼
장시간 동안 일하고도 최저수준 이하로 살아야 하는 노동자의 처지에
가톨릭교회가 관심을 기울이게 된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다행히도, 레오 13세 이후 역대 교황들은 이러한 사회문제 개입의 노선을
최우선정책으로 삼아 지속했는데, 이는 가톨릭교회의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는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도신경에
빠졌던 주요 계시 중 하나를 2천 년만에 보완하는 획기적인 변화였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던 예수님의 유언이었는데,
이는 또한 성전과 제사를 중심으로 해서가 아니라 삶의 현장과 가난한 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하느님의 길을 찾으시던 예수님의 삶을 상기시키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사실 루카복음서 4장에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성령께서 당신을
보내셨다고 예수님께서 사명을 장엄하게 천명하시는 나자렛 선언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고대교회에서 교회의 정체성을 천명하기 위한 신앙고백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워낙 예수님의 신성을 중심으로 삼고 또 성령까지도 포함된 삼위일체
신앙을 내세우는 일이 중요하고 급했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 명제는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 앉은 듯 했습니다.
하지만 로마 교회의 부제 라우렌시오 이래로 수많은 성인성녀들의 삶에서
간헐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1886년에 일어난 시카고 노동자 시위가
불쏘시개가 되어 그 반향이 국제적으로 커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레오 13세 교황이
1891년에 ‘새로운 사태’라는 이름으로 첫 사회회칙까지 반포하자
1919년에 국제노동기구가 발족되었습니다.
후임 교황 비오 11세도 1931년에 ‘사십주년’ 회칙을 반포하는 등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부각시키자, 이런 가톨릭교회의 움직임이 일종의
‘방아쇠 효과’를 발생시켰습니다. 오늘 노동절을 노동자 성요셉의 이름으로
교회가 기념하게 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노동자 문제라는 사회적 잇슈를 가톨릭 전례 안에 도입하는 목적은
이 명제를 신앙의 빛으로 조명함으로써 이에 대한 하느님의 뜻으로
신자들을 깨우치는 한편, 교회도 이 문제를 정식 사도직으로 삼아서
공동선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뜻이 있습니다.
아울러 노동의 존엄성을 위협할 수 있는 이른바 ‘자본주의’의
우상숭배적 경향에 대해 경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하신 말씀이,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요한 14,9)이라는 전권주장이었습니다.
이에 근거하여 레오 13세 이후 역대 교황들은 예수님의 삶을 통하여
노동에 관한 하느님의 뜻을 가톨릭 사회교리로 풀어내었습니다.
특히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1년에 회칙
‘노동하는 인간’을 반포함으로써 앞장섰습니다.
이에 따르면, 노동은 사랑과 함께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존재 이유이며, 노동으로 사랑을 완성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창조의 노동을 하셨으며, 예수님께서도 목수 노동을 하시다가
복음선포의 노동으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닮고 예수님을 본받아야 할 인간은 노동하는 존재입니다.
자본주의자들은 노동의 귀천을 소득과 재산으로 따지지만 이는 무신론적이고
우상숭배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노동에 관한 가톨릭 사회교리에 의해서는
노동의 귀천이란 그 노동으로 얼마나 하느님을 닮을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예수님을 본받는지에 따라 정해집니다.
이러한 노동의 진리에 따라서, 노동으로 인간은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자기를 실현하고 하느님 창조 사업에 동참할 수 있으므로 노동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자본은 수익을 창출하여 사람들을 고용하는 공동선의 도구이며, 이 기술이 경제이고
경제가 노동에 봉사하도록 조정하고 감독하는 것이 정치이고 정부입니다.
노동은 사회를 구성하고 조직하는 원리로서 사랑이신 하느님을 드러내야 하고
인간의 품위있는 존엄성을 해치는 공적(公敵), 즉 굶주림과 공포와 무지와
빈곤 등을 극복하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인간 존엄성의 표지인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 같은 최고선을 실현시켜주는 수단으로서 노동의 존엄성이 지켜져야 합니다.
이러한 가치가 실현되는 사회를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대동세상’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정신으로나 육체로 인간은 누구나 노동하는 존재로서 하나가 되는
그런 사회가 대동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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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1.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노동자 성요셉.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7-14: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7절) 아들은 당신의 모습을 통해서 아버지에 관한 지식을 드러내 주신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을 본 사람은 당신을 낳으신 분을 안다고 하신 것이다.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7절) 그러나 필립보는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는 인간이 되신 아들을 보았는데, 그것이 어떻게 아버지를 뵌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직 그의 눈이 그분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9절) 필립보는 예수님과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지냈지만, 아직 아들을 제대로 알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통하여 계속 아버지를 보여 주셨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상이시다. 이것은 아들이 진리와 하느님의 권능으로서의 모습을 나타내심을 의미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9절) 하신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10절) 예수님은,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이시라는 것이다. 서로 다른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 일치한다는 것은 관계로서 하나이며 일치이다. 이 관계는 바로 사랑의 관계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사랑이라는 관계로 사랑 안에서 하나이시다. 그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며, 이 사랑이 바로 성령이시다.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 하나이시며, 이 말씀을 하실 수 있다. 그것을 믿지 않느냐고 사도들을 꾸짖으신다. 당신이 하시는 말도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하신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다.”(12절)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사랑 안에서 하느님을 모시고 살며, 그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께서 일하시고, 더 큰 일도 해주신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우리는 더욱더 사랑하며 하나를 이루는 가운데 주님을 모시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때 이 말씀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분은 아버지께 가서 우리를 위해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13절)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의 구원에 방해가 되는 것은 주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다. 그것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이다. 우리의 청을 들어주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13절) 하신다.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을 드리도록 하는 일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될 때 우리도 하느님께 참된 영광과 찬미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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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1.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노동자 성요셉.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교리를 가르치거나 강론을 할 때 ‘우리 하느님께서는 어떤 분이시며, 우리가 믿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좀 더 쉽게 가르치고자 찾은 예화나 방법은 때로는 혼란을 불러 오고, 잘못된 것을 가르치거나 오히려 가르치는 사람의 교리, 그 사람의 하느님만을 전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는 필립보의 간청은 오늘날 우리가 잘못 드리고는 하는 기도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제가 생각하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셔야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 아버지, 당신은 저에게 어떤 분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내 안에 가두어 버리고, 그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거나, 때로는 교회의 가르침이 나에게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 때, 하느님과 교회를 원망하거나 외면해 버리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묵상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가 주님 뜻에 맞는다면, 우리가 하는 봉사가 그분의 일이라면,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겠다는 임마누엘 하느님의 기쁨과 평화가 충만하게 됩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 사도가 유다인들의 박해와 내쫓음에도 기쁨으로 가득 찼던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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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1.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노동자 성요셉.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스쿠버 다이빙 강사와 상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날 바닷가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강사에게 상어가 다가왔습니다. 상어의 입을 보니 낚시 바늘이 박혀 있었습니다. 강사는 상어의 입속에 있는 바늘을 뽑아 주었습니다. 잠시 뒤에 다른 상어가 왔는데 역시 바늘이 박혀있었습니다. 강사는 그렇게 100여 마리의 상어를 도왔습니다. 스쿠버 다이빙 강사와 상어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상어는 자칫 사람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스쿠버 다이빙 강사가 상어를 도울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이 통했기 때문입니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세상이기도 합니다. 사자가 어린이와 함께 뛰노는 세상입니다. 어린 양이 늑대와 춤을 추는 세상입니다.
사랑해서 결혼했고, 행복할 것 같았던 부부가 살면서 상대방의 허물이 보이고, 대화를 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면서 갈등과 오해가 쌓이곤 합니다. 말은 하지만 상대방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상대방이 쫓아오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남편은 집에 오면 청소도 하고, 정원도 가꾸고, 쓰레기도 치워주고, 요리도 해줍니다. 남편은 자기가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했다고 여깁니다. 아내는 남편이 일을 도와주는 것도 좋지만 서로 마주보면서 대화하기를 원했습니다. 아이들 키우는 이야기도 하고, 같이 차를 마시면서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어 했습니다. 남편은 사랑해서 사다리를 올랐지만 엉뚱한 곳에 사다리를 놓고 올랐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일을 하는 대신에 아내와 함께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 집안 청소를 하였고, 남편의 옷도 수선해 주었습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일을 해주니 가정에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유대인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도들을 모함하고, 박해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율법과 계명의 ‘틀’에 갇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도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복음의 기쁨은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었고,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지만 복음의 기쁨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참된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았지만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성공, 권력, 명예를 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자리에 오르면 한 자리씩 차지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베드로는 닮이 울기 전에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생명을 살리는 말입니다. 권위와 힘이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힘으로 병자들을 치유하셨고, 말씀의 힘으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말씀의 힘으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말씀이 하느님이셨고, 말씀이 진리였으며, 말씀은 빛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한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볼 수 있다면, 우리의 행동과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해진다면 우리는 이미 새로운 길에 있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길을 이끌어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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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1.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노동자 성요셉.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공동체에서 만나는 주님
- 꽃 같은 인생이다 -
오늘은 이러저런 체험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저에게는 피하고 싶은 못마땅해 하는 부정적 세 감정이 있습니다. 하나는 ‘포만감’입니다. 배불리 먹었을 때의 포만감, 참 부끄럽고 후회스럽기에 과식이나 탐식은 절대 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하나는 ‘해방감’입니다. 예전 사제 생활 초창기에 수도사제 둘일 경우는 격주로 강론했기에 한 주간 주례와 강론이 끝났을 때의 해방감, 그러나 십여년 이상, 혼자 1년 365일 매일 미사에 강론을 하다 보니 이제는 매일 강론이 생활화되었습니다. 사실 사제 둘이 격주로 하다 끝났을 때의 해방감 역시 완전히 긴장의 끈을 놓는 느낌이라 못마땅해 합니다. 이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주례하든 않든 매일 강론을 쓰기 시작한지도 꽤 오래 되었습니다.
하나는 ‘비애감’입니다. 몇 달에 한 번 병원에 가서 약봉지를 한 아름 받았을 때 느끼는 좌절감 비슷한 비애감 역시 단연코 곧장 떨쳐버리는 감정입니다. 약먹고 절대 죄를 짓지 말아야 겠다는 다짐을 하곤 합니다. 참으로 주님 안에서 늘 깨어 있는 겸손한 삶이라면, 또 겸손의 수련, 비움의 수련에 충실한 삶이라면, 이런 포만감, 해방감, 비애감은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어제 4월의 끝은 오늘 5월의 시작입니다. 신록과 온갖 꽃들이 만발한 계속되는 부활축제 시기에 오늘부터는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에 성모성월입니다. 성모성월이 되면 떠오르는 참 좋아하는 성가 244장입니다.
“성모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사랑하올 어머니 찬미하오리다
가장 고운 꽃모아 성전꾸미오며/기쁜노래 부르며 나를 드리오리”
코로나로 인해 입에 마스크를 하고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지 못한지도 일년이 훨씬 넘었으니 예전에는 상상도 못한 재앙의 연속입니다. 모자를 쓰고 안경을 쓰고 복면같은 마스크를 하면 외계인처럼 얼굴을 볼 수도 없고 누구인지 알수도 없으니 이 또한 재앙스런 현실입니다. 회개할 죄가 참 많은 현대인들 같습니다. 죄가 많기에 병도 많습니다.
얼마전 60대 중반에 손주를 둔 소녀같은 할머니 자매의 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외손주에게 신혼 때의 사진을 보여줬더니 “충격을 받았다!” 얘기하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어린 아이가 충격이라는 어휘를 썼다는 사실에도 놀랐지만 공감했습니다. 저 역시 32년전 40대 초반 사제서품때 사진을 보면서 나도 이런 젊은 때가 있었나 충격을 받기 때문입니다.
젊어서 성인이지 나이 들어 갈수록 성인이 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넉넉하고 편안한, 너그럽고 자비로운 노년이 아니라 까칠하고 신경질적이고 쉽게 삐지는 노년이 될 위험도 다분하고 주변에서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가끔 할아버지같다. 아버지같다는 말을 들을 때 마다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게 됩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좋듯이 인생사계人生四季도 그래야 좋고 이상적일 것입니다. 가을이나 겨울 인생이 봄 인생이나 여름 인생을 선망하여 모방하는 것도 꼴불견일 것입니다. 그 인생 계절에 맞는 고귀한 품위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일출日出의 찬란함도 좋지만 일몰日沒의 고요와 평화도 좋고, 꽃의 봄향기도 좋지만 수수하고 편안한 단풍의 가을 향기도 좋습니다. 때로는 꽃보다 아름다운, 초연한 아름다움의 가을 단풍이듯 인생도 그러합니다.
어제 수녀원 미사차 들렸을 때 정원은 온갖 꽃들의 향연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떠나면서 노수녀님께 “꽃처럼 사세요!” 덕담을 드렸을 때, 새롭게 떠오른 꽃과 사람에 대한 묵상이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이 활짝 웃을 때는 그대로 꽃같은 얼굴이 웃지 않고 심각하거나 화났을 때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여 보속 처방전에 참 많이도 찍어 드리는 스탬프가 “웃어요!”입니다. 꽃에 대한 자작시 셋을 나눕니다.
-“사람은 꽃이다
늘 피는 꽃이다“-
-“꽃이 꽃을 가져 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언젠가 꽃을 가져온 분께 써드린 시입니다.
-“꽃/존재 자체가 시이자 꿈이요
희망이자 사랑/기쁨이자 평화/위로이자 구원이네요
제각기/고유의 모습/크기/색깔/향기를 지닌
꽃같은 사람이네요/사람이 꽃이네요“-
얼마전 글입니다.
-“꽃은 필때도 아름답지만 질 때도 아름답구나.
인생도 그랬으면 좋겠다!”-
아주 예전에 썼던 짧은 글도 생각납니다.
이런 모든 묵상들에 대한 답을 오늘 복음이 줍니다. 정말 주님을 몰라서, 체험하지 못해서 외로움, 그리움이지 주님을 만나면 충만한 기쁨과 행복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혼자서의 주님 체험은 착각이나 환상이기 십중팔구입니다. ‘함께 죄지으며 살 바에야 이혼하여 죄짓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란 물음에 단호히 거부했던 일화가 생생합니다.
수도자들 고백성사 ‘하나마나’란 말도 있지만 대부분 많은 신자들 고백성사 역시 하나마나한 경우도 꽤 많습니다. 함께 살며 죄짓는 것도 은총입니다. 함께 살기에 죄를 지으며 자신을 성찰하지만, 혼자 살면 죄 안 짓는다 해도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기에 영적 진보도 없습니다. 천국입장은 혼자가 아니라 단체입장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부는 혼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간다. 둘의 사랑점수를 합해 둘로 나눈후 평균 60점을 넘어야 함께 천국입장이다. 혼자는 아무리 점수 높아도 천국에 못들어 간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만나는 주님입니다.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겠다 하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 하느님,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함께의 공동체를 찾아 오신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공동체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공동체 덕분에 주님을 체험하는 우리들입니다. 지금 여기 형제 공동체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디서도 못만납니다.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있는 곳에 나도 그들과 함께 있겠다 말씀하신 주님이십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공동체가 주님을 닮아갈수록 그리스도의 몸의 완성입니다. 날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공동체는 얼마나 이상적이고 아름답겠는지요! 바로 매일 미사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입니다.
참으로 공동체의 축복에 감사해야 합니다. 광야인생 혼자 살다 보면 괴물이, 악마가, 야수가, 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함께 살 때 상처도 받지만 받는 위로는 더 큽니다. 참으로 함께 할 때 주님도 만나고 외로움도 그리움도 사라져 주님과 함께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를 향한 주님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주님의 교회 공동체에 몸담고 살아 온 우리 모두를 향합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는 필립보를 한심스럽게 바라보며 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필리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건강하고 온전한 신비주의입니다. ‘너’와 함께의 단수가 아니라 ‘너희 공동체’와 함께의 복수란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주님의 몸이자 거처가 됩니다. 참으로 세례받고 수십년이 지나고도, 또 주님의 집 수도원에 수십년을 살고도 늘 함께 계신 주님을, 주님을 통해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면 정말 헛 산 겁입니다. 정말 깊은 영성가라면 형제들의 얼굴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아버지의 얼굴을 희미하게라도 발견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일도 하게 될 것이다.”
그대로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환상의 콤비 사도들을 통해서만 아니라 오늘은 교회공동체를 통해서도 입증되는 진리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셔서 우리를 통해 당신보다 더 큰 일을 하시게 하십니다. 사도행전에서 맹활약을 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는 정말 공동체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이처럼 신바람 나는 말씀 선포입니다. 박해를 받고 도시에서 쫓겨날 때 제자들의 모습에 대한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라는 묘사가 참 신선한 충격입니다.
꽃같은 사람들입니다. 꽃같은 얼굴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꽃입니다. 꽃처럼 살라고, 지상에서 천국처럼 살라고 끊임없이 피고지는 꽃들입니다. 우울하고 심각한 성인은 모순이요 그런 성인은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을 체험케 하시며 또 함께의 생활중에 당신을 만나 당신의 꽃처럼 살게 하십니다. 저절로 화답송 시편을 노래하게 됩니다. 빨리 마스크를 벗고 맘껏 찬미 노래 할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을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노래 불러라.”(시편98,3ㄷㄹ-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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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1.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노동자 성요셉.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글 쓸 일이 있으면, 특히 많은 양의 글을 써야 할 때면 지금 있는 자리에서 벗어나서 따로 외딴곳을 찾습니다. 그곳은 피정의 집이 될 때도 있고, 호텔이나 펜션일 때도 있습니다.
두 달 전이었을 것입니다. 이때도 3일 동안 글만 쓸 생각으로 호텔에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글이 잘 써져서 이틀 만에 원하는 글을 모두 쓸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자유의 시간을 누리면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낮잠도 자고, 그동안 못 보았던 책도 읽으면서 자유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지가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제가 없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이것저것 궁금해지고 걱정이 됩니다. 오랜만에 누리는 자유의 시간이었지만, 이 자유를 누리기가 힘들었습니다.
결국 자유를 포기하고 성지로 돌아갔습니다. 당연히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자유가 있으면 좋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소속감 안에 갇혀 있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자유를 누릴 시간인데도 그 자유를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성지로 돌아간 것이지요.
우리는 보통 자유는 좋고, 구속은 나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 두 가지 모두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어느 정도의 자유와 구속이 균형을 이루며 함께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신앙 생활하는 것을 자신의 자유를 구속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벗어나 자유롭게 산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주님께 구속된 편안함 속에서 진정한 자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는 필립보를 향해 당신께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할 것을 명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하느님 아버지 안에 있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님 안에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두 분은 진정한 하나를 이루십니다. 이를 구속이라 생각하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를 이루면서 더 큰 자유를 그리고 더 큰 일을 우리를 위해서 해 나가십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이 이루어지면 그 안에서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해 주신 것을 자유가 없다고 거부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를 더 누릴 수 있도록, 이 세상 안에서 더 자유롭게 잘 살 수 있게 하려고 당신 안에 머무르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주님께 대한 믿음을 버리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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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불확실한 삶에서, 외로운 삶에서, 기다리는 삶에서 느낀다(가스통 바슐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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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이용하기
여행을 가서 숙소는 그냥 잠만 자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늘 최저가를 검색했고, 그 숙소에서 잠만 자고 새벽 일찍 나오곤 했습니다. 머리만 대면 곧바로 잠을 자는 ‘나’이기에 시끄러워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냥 값만 싸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호텔의 새로움을 어느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호텔에 가서 글을 쓴다고 말합니다. 정리·정돈할 필요도 없고 식사 걱정도 하지 않고(룸서비스를 이용) 오로지 글에만 집중한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익숙한 환경이 아닌 낯선 장소에서의 글쓰기는 새로운 생각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때 호캉스라고 해서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는 사람이 많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글을 쓰기 위해 그리고 호캉스를 누려보겠다고 호텔 예약을 했습니다. 이제까지 이용했던 숙박비보다 어마어마하게 비싼 가격이었지만, ‘이런 체험도 필요해’라면서 스스로 합리화하며 이용해보았습니다.
그 뒤, 호텔을 자주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글을 몰아서 써야 할 때는 하루 이틀 동안 호텔에 투숙하면서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익숙한 사제관을 벗어나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기에 정말로 많은 도움을 얻게 됩니다.
종종 지금의 자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새로운 나를 만들고 싶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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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1.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노동자 성요셉.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 55)
성 요셉의
시간이
새롭게
다가온다.
어떠한
하루를
어떠한 삶을
살것인가를
성 요셉에게서
다시 뜨겁게
배우게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삶이다.
삶은 건강한
노동을 통해
바뀌게된다.
생명과
노동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노동은
삶의 가장
적극적인
실천이다.
노동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뿌리를
내리고있다.
사람은
노동을 통해
하느님을
만난다.
성 요셉또한
노동을 통해
그의 소중한
소명또한
더욱 깊어진다.
삶이란
노동하는
삶의 현장에서
만들어지는
선물이다.
노동은
버겁지만
살아있음의
은총이다.
성 요셉의
노동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다.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한
삶이었다.
성실한 목수
성 요셉의
노동으로
더 중요한 것을
만나게된다.
그것은
삶이다.
삶은
목공처럼
조금씩
하느님과 함께
만들어가는
여정이다.
느리드라도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노동을
응원하신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안에
노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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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1.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노동자 성요셉.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라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청할 때는 ‘예수님의 이름’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내 이름으로 내 바람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하여 청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이기심을 채울 수 없고 남에게 해가 되는 무엇인가를 청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당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구원을 청했듯이 우리도 이웃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게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자주 불러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부합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바람을 알아들어야 하고, 알아듣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찾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말합니다. “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침묵해야 합니다.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은 침묵하는 사람입니다.” 깊은 침묵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사실 눈과 입은 닫고 가슴과 귀를 열면 무엇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많은 사람은 책에서 하느님을 탐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을 발견하는 것은 기도 안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그분 손에, 그분의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음성을 조용히 들어야 하겠습니다.
피아노를 치면서 피아노를 배우듯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 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기도의 참 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잘하려거든 기도를 시작하십시오.“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이며,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기도의 본질적 요소는 많이 생각하는 데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따라서 많이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혹 구해도 얻지 못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했는지 짚어보십시오. 분명 주님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기쁨이며 희망이길 바랍니다. ‘인간 아무개의 이름으로 청하면’ 인간적인 것을 얻을 것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청하면,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의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하느님께 비는 걸인”(프란치스코교황)이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성찬례로 양육되는 사람은 주님의 생각을 닮는 것”이다. 그분께서 다른 이를 위해 쪼개진 빵이 되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을 멈추고,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처럼, 곧 다른 이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프란치스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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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1.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노동자 성요셉.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우리의 관계가 잘 드러납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명확히 선포하신 후 하시는 말씀들은 이 내용의 부연처럼 들리지요. 마치 그 관계성을 제자들에게 이해시키시려는 듯합니다.
사람의 인성을 취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가시적 존재이십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행적이 사랑이고 자비이신 아버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계시지요. 예수님은 율법 조항으로 삭막하게 규격화시켜 버린 절대자의 틀을 깨고 사랑 때문에 앓으시는 진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아버지와 아드님의 관계를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바탕은 믿음입니다. 서로의 존재 안에 머무름은 신비이기 때문에 육의 논리로 풀어낼 수 없는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메시아로서, 사랑의 유대로 아버지와 긴밀히 이어지시고, 아버지와 하나시라는 신비는 이를 믿는 이들을 그 사랑의 유대로 초대합니다. 믿으면서 그 사랑 안에 포함되도록 부름받는 은총의 신비입니다.
제1독서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이루어진 선교의 결말 부분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사도 13,48-50)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전한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일부 백성의 호의를 얻지만 이를 시기한 유다인들에 의해 결국 박해받고 쫓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찼다고 하지요.
아무리 시기와 모독, 박해와 축출, 배척과 거부라는 험하고 불쾌한 일을 겪어도 마음에 주님을 모신 이는 흔들리거나 절망하지 않는다는 걸 제자들이 보여줍니다. 그들이 그저 참아내고 견디는 수준을 넘어서 기쁠 수 있는 것은 스승이 가신 길을 따름으로써 그분을 닮아가다 종래에는 그분과 하나가 된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요한 14,12)
믿음으로 제자들은 더 이상 육과 감정의 원리에 매이지 않게 됩니다. 그들은 담대히 예수님께서 하셨고 또 그들에게 하라고 당부하신 일들을 할 것이고, 성령에 힘입어 주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실현해 나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함께하시며 보호자요 변호인인 성령을 보내시어 제자들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어떠한 환난과 박해에도 무너지지 않는 힘을 주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장애가 되는 걸림돌을 치워주시며, 믿는 이들의 간청을 단 한 마디도 흘려 듣지 않고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성삼위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무르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도 주님 안에 있습니다. 아버지와 하나이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성삼위의 사랑 안에 함께 스며들어갑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랑의 간청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들어주시며, 우리는 주님께서 해 주시는 모든 것이 그 응답임을 믿고 감사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그리고 나. 이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을 관상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아름답고 복되답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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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1.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14,9)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말씀하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14,9)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들조차도 믿지 못했으니,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분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힘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구원을 위해 메시아로 오셨고, 하느님의 모습으로 오셨는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하느님으로 믿지를 못합니다. 특히 예수님 당시 높은 자리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던 사람들이 더 그랬습니다.
하지만 가난하고 병들고 죄인이라는 이유로 그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으며 살아야만 했던 그 반대의 사람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잘 믿고, 그분의 뒤를 잘 따랐습니다.
오늘은 5월의 첫 날이자, 근로자의 날이며,
성모성월의 첫 날입니다.
5월 성모성월은
한생을 당신 아들을 위해 바치신 우리 신앙의 모범이신 성모님, 예수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기억하는 달입니다.
'Fiat voluntas tua'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이 결정적인 응답을 시작으로 성모님은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믿으셨고, 끝까지 당신 아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14,11)
이 믿음이 바로 예수님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성모 어머님의 모습을 본받아, 예수님의 이 간절한 바람이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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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1.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노동자 성요셉. 전삼용 요셉 신부님.
<그리스도인은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 그리스도를 계시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아버지께 가는 길이요, 아버지의 말씀인 진리요, 그리고 아버지의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선포하신 내용에 바로 이어지는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성전으로서 아버지를 당신 안에 품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심으로써 아버지 안에 머무십니다.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필립보는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아버지와 하나이시기 때문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를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계시이기에 예수님을 보고 나서 또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말은 계시 자체이신 예수님을 무시하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라고 하시고,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라고 하시며, 당신의 말과 이루신 업적이 당신 안에 아버지께서 계심을 증명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계시해야 하는 우리에게도 이런 말씀을 해 주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셔서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내실 수 있으시니, 그리스도를 품은 우리의 말과 행동도 인간의 능력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시가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도 말과 행동에 있어서 하려고 하면 못 할 것이 없다는 ‘근거 있는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왓칭’의 저자인 김상운 기자의 지인이 어느 날 딸의 일기장에서 “죽고 싶다.”라는 내용의 글을 발견했습니다. 딸이 어렸을 땐 책 읽는 것을 좋아했었는데 지금은 소위 날라리 아이들과 어울리며 가수가 되겠다고 노래만 듣는다고 합니다.
아마도 모범생인 오빠에게 부모의 모든 관심이 쏠리는 것에 대한 반항인 것 같았습니다.
“수진아, 너 나중에 뭐가 되려고 그러니? 이젠 제발 정신 좀 차려!”
엄마는 혼내기도 하고, 위협하기도 하고, 사정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수진이는 점점 더 멀어져갔고 대화도 완전히 끊겨버렸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그녀는 한 학부모 교육 프로그램에 등록하였습니다. 교육을 받으며 분명히 깨달은 것은 ‘문제가 수진이가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 수진이에게 학원에 다니기 싫으면 안 다녀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수진이는 다니던 학원을 모조리 그만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모든 것을 ‘딸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딸이 좋아하는 라디오 음악프로도 함께 듣고, 가사도 함께 외우고, 노래도 함께 따라 불렀습니다. 딸이 좋아하는 가수에 관한 기사가 나오면 스크랩도 해주었습니다. 친구들을 데려오면 진심으로 따듯하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딸이 이해가 되었고 왜 음악에 빠져들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등교하러 집을 나서던 수진이가 물었습니다.
“엄마, 내가 공부 못해도 나 사랑하지?”
“물론이지. 넌 언제나 내 딸이니까.”
어느 날 그녀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소리도 없이 들어온 수진이가 뒤에서 슬며시 그녀의 한 손을 잡았습니다.
“엄마, 나 이번 중간고사에서 100등도 넘게 올랐어. 반에선 5등!”
그녀의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엄마, 감사합니다. 기다려줘서.”
수진이를 꽉 껴안은 엄마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습니다.
[출처: 『왓칭 2』, 김상운, 정신세계사]
성공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있을까요? 100% 다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은 자존감에서 옵니다. 『왓칭』에는 이런 사례도 나옵니다.
미국의 어느 한 고등학교에서 악기를 배우는 특별반을 관찰했습니다.
처음엔 그들의 실력이 비슷했지만 몇 달이 지나자 편차가 4배로 커졌습니다. 같은 시간동안 배우고 같은 시간을 연습해도 그 실력 차이가 4배가 난 것입니다. 그 이유가 아이들의 음악적 소질에 있을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그 차이는 아이들의 음악을 대하는 자세였습니다. 가장 실력이 늘지 않는 아이들은 악기 배우는 것을 정말 특별활동으로 생각했던 학생들이었고, 가장 뛰어나게 발전했던 아이들은 음악을 전공으로 평생을 하고 싶었던 친구들이었습니다. 음악을 평생 하려고 했던 아이들은 자신들이 음악에 소질이 있다고 믿는 아이들이었던 것입니다. 음악에 소질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음악을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실력을 향상시킨 것입니다.
위 사례에서 수진이가 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엄마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사랑을 믿게 되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자신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으면 결국은 원하는 것을 이뤄내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을 받은 이들이 가진 자신감입니다. 이 자신감이 모자라면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봐 현실에서 회피하게 되는데, 게임에 빠지거나 불가능한 목표 속에 자신을 가두는 일 등입니다.
어떤 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것이 잘못인가요?”라고 묻습니다. 그것이 왜 잘못일까요? 가난해야 한다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집착을 버리라는 뜻일 뿐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다 돈과 인기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다만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을 뿐입니다. 그 믿음이 자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게서 왔다면 성공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성공으로 그리스도를 계시하게 됩니다.
2016년 10월 8일 대만 제51회 금종상 시상식에서 ‘이천주’라는 남자 배우가 남우주연상을 탔는데,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당당히 밝히고 수상소감 때 주님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예전에 금종상을 받아본 한 사람이자 40년 전부터 배우였던 저에게 있어서 저는 더 많은 젊은 후배들이 이 무대 위에서 이 상을 받기를 원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들에게 이 상을 내어주고 싶습니다. 사실 저들은 정말 훌륭합니다. 모두가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특히 저를 선택하셔서 이 자리를 통해 얘기하라고 한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할 분이 많지만 저는 이 자리를 통해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저와 하나님의 방식으로 말하겠습니다. 그분은 우리 공동체 모두를 여기에 모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알아야 할 것은 밖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는 나의 하나님께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괜찮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받으시오며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자녀들을 이렇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면 빨리 하느님의 사랑을 믿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게 해 주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품은 자녀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 다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게 됩니다. 유태인들이 이런 믿음으로 사는 민족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부모는 빨리 자녀를 주님께 봉헌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입에서 “나는 안 돼.”라는 소리가 나와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믿음을 지녀야 진정 그리스도를 모신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믿는 바를 성취해가며 자신 안의 그리스도를 계시하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아버지를 계시하며 사신 그리스도의 삶을 닮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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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1.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노동자 성요셉.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 어떤 일에 종사하든 자신의 일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밤이 되면 하늘과 바다 위로 별이 총총한 첩첩산중, 세상 조용한 적막강산으로 들어온지 꽤 날수가 흘렀습니다.
시골이다보니 널린게 일거리들입니다.
일어나면 일거리, 돌아서면 일거리, 하루 온종일 육체 노동에 전념하다보니 좋은 점이 참 많습니다.
일에 깊이 몰입할 때, 거기서 오는 보람이랄까, 기쁨이랄까, 더 나아가서 황홀함까지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일이 어떤 일이냐?’ 인가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가치와 의미 부여 작업인 듯 합니다.
오늘은 근로자의 날인 동시에 노동자 성 요셉 축일입니다.
짧게나마 산업의 역군으로 일하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오릅니다. 땀흘려 일하고 난 후의 뿌듯한 성취감이 참 좋았습니다.
동고동락하던 직장 동료들과의 끈끈한 정도 잊지 못합니다.
부족한 내 두 손으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뭔가 작게나마 기여했다는 데서 오는 기쁨도 컸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나치게 빡빡했던 근무 시간, 강도 높은 근무 조건으로 힘겨워하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상습 피로, 수면부족으로 졸린 눈을 비비며 힘겹게 출근하던 기억들도 떠오릅니다.
마치 큰 시스템 속의 부속품이 된 느낌도 잊지 못합니다.
좀 더 충실하고 모범적인 직원으로 살지 못한 송구함도 큽니다.
이땅의 많은 근로자들이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기쁨의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노사(勞使) 양측의 부단한 대화와 경청, 상호 이해와 배려를 위한 무한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근로자들, 아버지들이 그러하듯 요셉 성인도 하루하루 성실하고 근면한 노동으로
성가정의 생계를 책임지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맡은 일에 충실했습니다. 자신에게 매일 주어지는 일들을 진지하고도 과묵하게 해나갔습니다.
특히 요셉 성인은 하루 종일 일을 하면서도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목재를 손질하면서도 자신의 인생 여정, 신앙여정 속에 담겨있는 하느님의 뜻을 지속적으로 찾아나갔습니다.
결국 그는 일하면서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을 기도화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 노동, 근로라는 것이 보통 중요한 것이 아니더군요. 눈만 뜨면 매일, 그리고 평생토록 되풀이해야 하는 일, 그 일이 정말 가치 있고 동시에 재미있으며, 더불어 동료 인간과 세상에 도움이 되고, 더 나아가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라면, 또한 일한 만큼의 정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보람되고 기쁘겠습니까?
인간은 그런 것 같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합니다.
일을 통해 한 존재로서 자부심과 자긍심을 느낍니다.
일로 인해 한 존재가 활짝 꽃피어나며 충만한 인생을 엮어갑니다.
의아해 하실지 모르겠지만 노동에도 영성이 있습니다. ‘노동의 영성’입니다.
이제는 귀천하신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사용하신 용어입니다.
‘노동의 영성’, 그 핵심은 아주 쉽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창조주시며 구세주이신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일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열심히 노동하셨던 한 인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출가하시기 전까지 양부 요셉을 따라 장인(匠人)으로서 매일 이마에 비지땀을 흘리며 사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일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켜나갈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완성시켜나갑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 창조사업을 계승합니다.
따라서 오늘 노동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하나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가치 부여입니다.
그 어떤 일에 종사하든 자신의 일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자긍심을 지녀야 합니다.
오늘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을 맞아 세상의 모든 노동자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하루 노동자 성 요셉의 전구에 힘입어 은총 충만한 하루, 새로운 에너지를 충만히 부여받는 행복한 하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하시는 모든 일들, 세상을 위해,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꼭 필요한 일임을 확신하십시오.
어려운 일이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매일 되풀이하는 이 일을 통해 내가 성장하고, 내가 성화되며, 내가 하느님 창조사업에 참여한다는 의식을 지니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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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1.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복음.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만약 누군가를 잘 알려고 하려면 그 사람과 오랜 시간을 함께해야만 그 사람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저도 한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땐 제가 개신교를 다녔고 또 인터넷상에서 종교로 만났던 것입니다. 같은 경상도이지만 대구 사람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말이 참 정겹고 특히나 옛날 말투로 하는 호칭이 저에겐 참 좋았습니다. 요즘 시대에 ‘오라버니’라는 호칭을 하는 말은 드라마 같은 곳에서나 들을 법한 말일 겁니다. 결혼을 전제로 해서 만났기 때문에 지금으로써는 첫 여자이자 마지막 여자였습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정말 순수하게 사랑한 여자였습니다. 제 심장도 줘도 아깝지 않은 여자였습니다. 바다를 좋아해서 포항에 자주 갔습니다.
다들 연애를 해보셔서 아시겠지만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부터는 눈빛만 봐도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낼 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건 같이 함께한 시간이 많아야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십 몇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살아 있을 때 그 눈망울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시간만 나면 서울에서 대구까지 자주 왔다 갔다 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건 그애와 함께한 시간이 저에겐 아주 중요한 추억과도 같은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전제로 해서 만난 여자라 그 외 만난 여자는 그냥 학창시절에 만난 선후배 여자 정도일 겁니다.
저에겐 여자 선배가 많았습니다. 선후배로 지냈고 오랜 시간 함께했어도 어느 정도로만 선배의 성격이나 마음을 알 수가 있는 정도입니다. 시시콜콜할 정도로 알 수가 없습니다. 제 여자도 아닌데 굳이 그렇게까지 알 필요도 없기 때문입니다. 같이 오랜 시간을 함께했지만 결혼을 생각한 여자와 선배랑 비교해보면 하나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선배는 함께한 시간만 보면 결혼하려고 했던 여자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선배도 있습니다. 졸업 후에 직장이라는 것으로 함께한 시간을 포함하면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신의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결혼할 여자의 마음을 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건 물론 함께한 시간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오랫동안 제자들과 예수님과 같이 함께한 시간도 많은데 어떻게 해서 나를 잘 모르느냐?”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는 이 정도면 당연히 나에 대해 좀 알아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근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건 그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마음에 달렸던 것 같습니다. 마치 제가 여자 선배를 바라본 거랑 장래를 생각하며 만난 여자랑의 차이와 같은 것입니다. 선배를 만날 땐 선배까지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선후배에 대한 예의만 지키면 되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결혼을 약속한 여자는 달랐습니다. 평생을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이가 각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드는 생각은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하는 시간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얼마나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마치 연인처럼 사랑을 나누듯 자신의 마음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연인처럼 예수님께 온전한 마음을 드렸느냐 드리지 않았느냐에 따라 예수님의 마음을 잘 알 수가 있느냐가 결정될 겁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마음이 적게 가는 건 당연합니다.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상대방을 잘 알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알 수 있는 것도 이 이치와 같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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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01. 부활 4주일 토요일 . 김 로마노 형제님.
부활 제4주간 토요일 제1독서 (사도13,44-52)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50~52)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의 유대인들은 그 성(城)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동원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그 성에서 쫓아내 버렸다.
'귀부인들'에서 '귀하다'는 뜻의 '유스케모나스'(euschemonas)의 원형 '유스케몬'(euschemon)은 지위가 있고 영향력이 있으며, 존경할 만한 사람을 지칭하는 형용사이다.
예수님의 시체를 매장한 아리마태아 요셉이 이러한 사람으로 묘사되었고(마르15,43), 베로이아에서 바오로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지체 높은 그리스 여자들도 이런 사람으로 묘사되었다(사도17,12).
아마도 본문의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은 그리스인들로서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의 고위층 관리 부인들이었으며, 유대교로 개종한 여인들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적지 않은 여인들이 황제에 의해 행정관으로 임명된 예가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 이 여인들 중에서 관리직에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이들은 당시 그 지역 사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느님을 섬기는'으로 번역된 '세보메나스'(sebomenas)는 '경건한'(devout) 혹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God-fearing)의 뜻을 담고 있다.
한편, '유지들'(유력자들)로 번역된 '프로투스'(protus)의 원형 '프로토스' (protos)는 지위와 순서, 영향력에서 으뜸이고 최고인 것을 가리킨다.
본문에서는 안티오키아 성에서 행정을 담당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여기에서 '박해하게 만들고' 라는 말은 단순히 말로 박해를 가했다는 의미를 넘어 신체에 해를 가했다는 의미이다.
'박해하게 만들고'라고 번역된 '에페게이란 디오그몬'(epegeiran diogmon; raised persecution; stirred up persecution)은 '핍박케 하였다'는 뜻이다.
코린토 2서 11장 23~26절의 바오로 사도의 술회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의 사건도 포함한다면,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는 붙잡혀 태장으로 맞은 후에 쫓겨났을 가능성도 있다.
대중들은 그들의 말을 듣고 믿음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데, 고위층 관리들은 유대인들의 사주를 받아 영원한 생명의 소식을 가져다 주는 자들을 박해하고 강제로 추방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 즉 상대가 복음을 영접하지 않을 때에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리라는 명령(루카9,5; 10,11)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먼지'로 번역된 '코니오르톤'(koniorton)은 '티끌'(dust)을 말한다.
그런데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린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나타내는가?
그것은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로서 자신과 그 지방은 더 이상 관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신발에 묻은 먼지 하나까지도 털어내 버림으로써 관계를 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는 많은 영적 결실을 맺었으므로, 그 도시 전체에 대해 이러한 태도를 취했다기 보다는, 그들을 배척하고 쫓아낸 유대인들과 고관들에 대해서 먼지를 털어버리는 상징적 행동을 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서 제자들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믿음을 가진 그곳의 새신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복음에 대항하여 분노에 사로잡히고, 복음 선포자들을 내쫓아 버린 자들과 달리 복음을 통해 구원의 진리를 발견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영적인 선물을 받아 날마다 기쁨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다.
이것은 '가득 차 있었다'(충만하였다)로 번역된 단어 '에플레룬토'(eplerunto)가 계속되는 상황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미완료 과거 동사인 점에서도 잘 나타난다.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상태는 말씀을 받고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된 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사도4,31; 8,8).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하늘을 받아 들이려 하늘이 되는 것, 빛을 받아 들이면 빛이 됩니다.
(요한14,7-14)
7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로 오셨습니다.(요한6,38참조)
(루가11,20)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 손가락으로(엔타울로스)- 내 안에 있는 손가락 으로라는 뜻입니다.
(요한10,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8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 ‘내가 오랫동안 하느님의 능력으로 아버지를 보여 주었쟌아 그런데도 모르겠냐?’ 하시는 겁니다.
보다(오라우)-이해하여 의미를 깨달아 보는 것,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이 하느님의 일로 다 깨달아 보았다면 하느님을 뵌 것이다. 하십니다. (요한6,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 예수님의 말은 못 믿어도 당신이 하신 일들은 믿어라 하십니다. 그 일이 곧 하느님의 뜻이며 우리 구원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한12,47)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요한3,16-17)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 예수님보다 우리가 할 수 있다는 더 큰일이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그분 곁에 믿음으로 남아있었던 사람은 몇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도 믿지 않았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고 그 성령을 받은 제자들에 의해 삼천명이 세례를 받습니다(사도2,41) 그리고 점점 퍼져나가 지금은 온 세상에(온누리) 그 그리스도 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큰일입니다.
물론 성령께서 하신 그 큰일을 우리에게 돌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 예수(구원)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 예수님의 뜻을 청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뜻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구원의 뜻은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창조의 목적이기도 합니다(이사43,7참조)
하느님의 신성과 본성, 그 사랑이 드러나 나타난 것, 영광(독사)입니다.
(마태6,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 주님의 기도를 입으로 주문 외우듯 하며 마음으로는 우리의 뜻이 아버지의 힘으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로 기도하니.....
(요한16,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 예수님은 이 땅에 것을 주시려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구원하시려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값 없이 만들지 맙시다. 우리의 생명, 빛이신 구원자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값 없이 만들어버리면 우리가 받는 용서, 평화, 안식, 구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가 말씀을 전하는 자신을 빛이라 합니다.
(사도13,47)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 하느님의 말씀이~ 육을 입고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입니다.(요한1,14)
그래서 말씀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 빛입니다.
(요한1,9.11-12)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아멘.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복음 (요한14,7-14)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10)
요한복음 14장 10절은 삼위일체의 신비 가운데,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의 동질성과 하나되심을 보여 준다.
먼저 성부와 성자께서 각각 독립된 신적 위격(位格)을 지녔음을 드러낸다. 성자는 '에고'(ego), 즉 '나' 라는 독립된 위격으로 표현되었고, 성부 역시 '토 파트리'(to patri; the Father), 즉 '아버지'라는 독립된 위격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이란 문장에서도 잘 드러난다.
여기서도 '아버지',즉 성부 하느님과 '내', 즉 성자 하느님께서 독립된 위격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여기에 또 다른 신적 위격으로서 요한복음 14장 16절, 17절, 26절에 나타나는 성령 하느님까지 포함시켜 요한복음 14장에는 삼위 하느님께서 모두 등장한다.
요한복음 14장 10절에서 성자 하느님께서 성부 하느님 안에 계시고, 성부 하느님께서 성자 하느님 안에 계시다는 것은 이 두 분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완전한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는 분명히 독립된 위격으로 존재하지만, 본체론적 동질성을 가지며, 신적 속성에 있어서 완전히 하나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자 예수님을 본 자는 성자와 동일 본체이신 성부 하느님을 본 것과 똑같다. 이러한 영적 신비를 필리보를 비롯한 제자들이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는 하나이며, 더 나아가서 성령 하느님도 하나이시라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에서도 유비(analogy)를 찾아 볼 수 없는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비는 오직 말씀에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만 수용할 수 있다. 특히 여기서 '계시다는'으로 번역된 '에스틴'(estin; is)은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되는 '에이미'(eimi) 동사의 3인칭 단수 현재이다.
희랍어에서 현재형은 불변하는 진리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너는 믿지 않느냐?'
여기서 '믿지'에 해당하는 '피스튜에이스'(pisteueis; you believe)는 현재 시제이므로 진행 중인 동작이나 지속적인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3년을 동고동락하며 예수님의 하느님과의 일체성에 대해 거듭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필립보의 영적 상태를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부분에서 '너희에게'에 해당하는 '휘민'(hymin; to you)이라는 복수 표현이 나오므로, 이 문제는 단지 필립보 한 사람의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권능과 메시지, 하느님의 마음 및 우리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생각을 지니고 오직 그것만을 드러내셨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이에서 그분을 모시고 함께 헀던 제자들의 눈에는 여전히 이것이 감추어져 있었다.
이것은 삼위일체를 비롯한 영적 진리가 단순히 경험이나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현세적, 정체적 메시야로서 탁월하며 특별한 지도자라는 점은 인정했지만,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이시라는 영적 지식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그리고 행적이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우선적으로 그들의 믿음의 부족과 영적 무지 때문이었고, 동시에 사람은 결코 하느님을 볼 수 없다는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 역시 이러한 믿음의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끝으로, 요한복음 14장 10절 후반부의 '머무르시는'에 해당하는 '메논'(menon; dwells)은 현재 분사로서 중단 없이 계속 거주하시는 상태를 나타내고, '하시는 것이다'에 해당하는 '포이에이'(poiei; does)도 현재형이라는 점에서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잠시도 분리됨이 없이 당신의 일을 계속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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