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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감리교 선교사 “스탠리 존스”는, 감리교에서 감독으로 선출되었지만, 곧 바로 사퇴하고, 인도 선교사로 떠나서, 평생을 인도에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입니다. 인도에서 그가 노방전도를 하고 있을 때, 이슬람 사람이 “우리는 당신들에게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존스 선교사가 “그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슬람 사람이, “우리는 메디나에 가면 마호메트의 시체가 들어 있는 관이 있기에, 마호메트란 사람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기독교인들이 예루살렘에 가면 빈 무덤 밖에 볼 수 없지 않습니까?”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을 조롱했습니다. 그래서, 존스 선교사는 정중하게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한 뒤, “당신의 말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기독교에서 전하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다가 부활했습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에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 밖에는 없는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며, 인도 선교에 몰두하던 그가 중풍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래서, 미국 보스턴으로 돌아가 입원하였습니다. 이때, 자신을 치료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저를 보실 때마다 ‘스탠리 존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라고 외쳐주세요”라며,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의료진들은 이구동성으로, “선교사님! 저는 베드로도 아니고 요한도 아니고 또 부흥사도 아닌데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존스 선교사는 계속해서 만나는 의료진마다 부탁했습니다. 결국, 의료진들은 존스 선교사를 볼 때마다, “스탠리 존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고 했고, 그 때마다 존스 선교사는 침상에서 큰 소리로, “아멘!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입원한지 6개월 만에 그의 중풍이 치료되고, 침상에서 일어나 걸었습니다. 이것을 본 모든 의료진은 놀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존스 선교사는 몸을 회복한 뒤, 인도로 다시 돌아가 선교사로 평생을 보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입니다. 요 1: 12을 보시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합니다. 또, 마 28: 18에서,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심으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역사합니다. 본문에서도,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사람에게,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라고 말함으로,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을 걷게 했습니다. 이 능력이 베드로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된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름, 우리의 권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으로, 더욱 더 하나님을 주목하여 바라보심으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를 통한 하나님의 기적이 우리의 삶 가운데 가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라고 합니다. 베드로에게는 믿음의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혼자인 것 같을 때도,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또, 성도된 우리가 자신만의 문제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도 중보기도하기에, 성도된 우리의 신앙생활은 혼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다니엘을 보면, 하루에 세 번씩 규칙적인 습관을 따라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본문 속의 베드로와 요한도 시간을 정해서, 규칙적인 습관으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눅 22: 39을 보시면,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라고 함으로,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때, 습관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규칙적으로 기도하던 베드로와 그의 동역자 요한이 성전으로 가다가 만난 걷지 못한 자를 일으켜 걷게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습관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그 무엇으로 인하여 중단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벨론의 총리가 된 다니엘은 계속해서 규칙적인 습관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단 6: 10을 보시면,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합니다. 이로 인하여, 모함을 받아 사자굴에 들어갔으나 사자들이 그를 어찌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를 모함한 자들이 사자굴에 던져졌을 때는 그들의 몸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사자의 입에 물렸습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규칙적인 습관을 따라 기도하는 습관이 있어야 하고, 또, 혼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기도하는 기도의 동역자가 있어야 합니다. 미국 리폼드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고, 지금은 명예 교수로 있는 “더글라스 켈리”는, “기도는 역사를 변화시키고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고 자신을 변화시킨다. 다니엘은 기도로 사자의 입을 막았다. 기도하는 젊은이는 참으로 위대하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도 습관을 따라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지만, 제자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도 함께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혼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믿음의 동역자가 필요하며, 또, 누군가의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훌륭한 동역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혼자 여러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곁에는 바나바, 마가, 디모데와 같은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가 이방의 선교사로서 여러 일을 하고,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겁니다. 또,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모세에게도 훌과 여호수아라는 좋은 동역자가 있었기에, 이스라엘을 이끌 수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믿음의 동역자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믿음의 동역자가 되는 것도 복이고, 은혜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 항시,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서로를 붙들어 줌으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교통하는 믿음의 동역자, 기도의 동역자들이 많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5 - 6절을 보시면,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라고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며, 능력있는 이름입니다.
본문 5절을 보시면, “바라보거늘”이라고 합니다. 이는, “그 무엇을 주의 깊게 보는 것”입니다. 관찰하듯이, 또는 간절함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기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본문의 구걸하는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기대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우리가 성도로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의지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도 본문의 걸인처럼 간절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이어 본문 6절을 보시면, 이 걸인이 원한 것은, 돈이었습니다. 은과 금이었습니다. 하나님 밖에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욕망만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욕망만을 채우려는 간절함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걸인에게 먼저, 그가 원하지만, 자신에게 없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것은, 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걸인이 모르는 더 큰 것, 더 위대한 것을 주고자 했고, 걸인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것을 치유코자 했습니다.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준다고 하기 전에 뭐라고 했습니까? 본문 6절을 다시 보시면,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라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에게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성도인 우리에게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습니까? 있으시길 바랍니다. “나는 베드로가 아니라서 없습니다” 또는, “나는 베드로와 같은 능력자가 아닙니다”라는 부정적이고, 핑계적인 생각과 말은 하지 마세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던 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랐을 때, 거기서 펼쳐진 상황에 매료되어, 횡설수설했던 자입니다. 그랬던 그에게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다면, 오늘의 우리에게 없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아무리 부족할지라도, 이러한 베드로의 신앙보다도 부족하겠습니까? 우리가 부정적이고, 핑계적인 생각과 말을 하는 것은, 우리의 겸손이 아니라, 우리의 교만 때문이고, 욕심 때문입니다. 곧, 돈이 있다고 자랑하고 싶고, 권세 있다고 자랑하고 싶고, 학벌있다고 자랑하고 싶고, 지식있다고 자랑하고 싶고, 경험있다고 자랑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굽니까?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는 본문의 베드로와 같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요구하는 모든 것이 있다고 해도, 또,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이 많이 있다고 해도, 성도된 우리 안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다면, 우리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입니다. 여러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며, 능력있는 이름입니다. 그 이름 앞에, 세상의 주권자인 사단이 굴복했고, 그 이름 앞에 죽음이 물러갔고, 세상의 희망이 이 이름 안에 있고, 우리의 희망이 이 이름 안에 있기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며, 능력있는 이름입니다. 마 28: 18을 보시면,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하심으로, 성부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은 능력의 이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른 찬 94장의 찬양처럼, 성도된 우리에게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세상의 그 무엇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갈 때, 어렵고 힘든 일이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정신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 “OOO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외치시길 바랍니다. 본문의 베드로와 같이, 성도된 우리 안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음으로, 이 이름으로 세상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8 - 10절을 보시면,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고 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드러냅니다.
본문을 보시면, 사도 베드로의 외침에 따라,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걸인의 발과 발목에 힘이 들어감으로 걸인이 일어나서 걸었고, 뛰었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나면서부터 걸인이었던 자가 걷고, 뛰는 것은 현대 의학으로도,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단 한 마디로 이루었습니다. 이 이름을 통하여 일어난 성령의 은사가 목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침을 받은 걸인이 행한 것이 무엇입니까? 걷고 뛰는 것 뿐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행하시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가 본문에서 걸인을 치료한 것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고, 우리 또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것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행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고전 10: 31에서,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치료를 받은 걸인은 수십년을 그 곳에서 구걸했던 사람입니다. 그 성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걸인은 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들에게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었습니다. 오늘의 우리에게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습니까? 오늘의 우리 안에는 성령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역사하십니까?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발과 발목에 힘이 들어감으로, 일어나서 걸었고, 뛰었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때문이었습니다. 이 이름이 우리에게도 있음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선포되며,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이 충만함으로, 세상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