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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성공이 큰 성공을 막을 수 있다. / 조상호 목사
여러분들 가운데 ‘Sophomore Jinx’라는 말을 들어보신 분들이 계십니까?
아마 스포츠를 좋아하는 분들은 이 말을 자주 들으셨을 것입니다.
이 말을 한국말로 하면 ‘2년생 징크스’라고 하는데,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선수들이 그 다음 해에는 여지없이 슬럼프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현상을 ‘Sophomore Jinx’, ‘2년생 징크스’라고 말합니다. 한국 프로야구 선수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한국 프로야구가 1982년에 출범한 이래 역대 신인왕을 받은 선수는 23명인데, 그 가운데 2000년 신인왕인 SK의 이승호선수와 2005년 신인왕인 삼성의 오승환선수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한결같이 신인왕 수상 후 이듬해의 성적이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선수가 2003년 신인왕인 현대의 이동학선수입니다. 그 선수는 8승3패의 좋은 성적을 거두어 신인왕에 올랐지만, 이듬해에는 단 1승도 올리지 못하고 1패만 기록했습니다. 2004년 신인왕인 현대의 오재영선수는 10승9패의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이듬해에는 단 1승만 거두고 패배는 무려 11번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은 투수뿐 아니라, 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순철이라는 선수는 0.304의 좋은 타율로 신인왕상을 받았지만, 이듬해에 0.257로 타율이 곤두박질했고, 김동수라는 선수는 0.290의 타율이 0.196으로 곤두박질 쳐서 ‘2년생 징크스’를 톡톡히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야구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축구나 농구, 레슬링, 등의 스포츠 전반에 걸쳐 해당될 뿐만 아니라, 바둑계, 가요계, 연예계 등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이런 ‘2년생 징크스’가 생겨났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 이유를 꼽아본다면,
첫째로, ‘지나친 부담감’ 때문입니다.
운동선수나 배우나 가수가 처음 데뷔하여 큰 성공을 거두면,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큰 기대와 관심을 보입니다. 그러다보면 본인은 더 나은 차기작을 만들어야 하고, 더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한다는 지나친 부담감 때문에 다음 해에는 죽을 쑤듯이 성적이 좋지 않다고 합니다.
둘째로, ‘약점의 노출’ 때문입니다.
처음 데뷔 때에는 상대 팀들이 장점과 단점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다른 팀들이 철저하게 분석하여 그 선수의 약점을 찾아내기 때문에, 그 다음 해에는 성적이 형편없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셋째로, ‘교만과 자만심’ 때문입니다.
신인상을 받은 선수는 천하를 얻은 듯 교만해져서 훈련과 자기개발을 게을리 하게 됩니다. 온갖 축하행사와 광고 촬영 등으로 정신없이 바쁘다 보면 정신력이 약해지고, 천하를 모두 얻은 듯 교만해빠져서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하여 처음에는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영광의 자리에 올랐다가, 다음 해에 패배와 실패의 자리에 떨어진 안타까운 사람들을 우리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작은 승리를 거둔 후, 그 작은 승리에 도취되어 오히려 큰 승리를 놓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정복을 위한 첫 번째 전쟁인 여리고 전투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여세를 몰아 여리고성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약16Km 떨어져 있는 아이 성을 공격하였습니다. 이 성은 약 12,000명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는, 여리고 성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은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일어났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작은 아이 성 전투에서 전혀 예상하지 않은 패배를 당했습니다. 3,000명의 이스라엘 군대는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한 채, 36명의 병사를 잃고 간신히 도망쳐 왔습니다.
5절을 보면,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금성철벽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감격이 사라지기도 전에,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기진맥진하여 떨고 있었습니다.
호수아 또한 패전의 멍에를 뒤집어 쓴 채, 승리의 환호성 대신에 울부짖었습니다.
다같이 6절과 7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야훼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야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패배 앞에서 여호수아는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울부짖었습니다. 마치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후, 다음 해에 ‘2년생 징크스’에 빠져 괴로워하는 선수처럼 여호수아는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리고 전투에서 승리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갑자기 실패를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그들이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하였을까요?
1) 교만과 자만심
첫째로 교만과 자만심 때문입니다.
금성철벽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의 소문이 가나안 온 땅에 퍼져나갔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 있는 6장 27절에서 “야훼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명성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호수아의 명성이 가나안 땅의 이곳저곳으로 퍼졌습니다. 안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적적으로 요단강을 건넜다는 소문이 이미 가나안에 있는 모든 나라에 퍼졌는데, 한 술 더 떠서 난공불락의 요새인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다는 소식까지 퍼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존재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이스라엘을 대적할 마음조차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호수아의 마음속에 교만이 싹이 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자만심에 빠졌습니다.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여러분, 여호수아가 여리고 전투에서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그 명령대로 행했습니다.
‘6일 동안 매일 한 번씩 여리고성을 돌고, 7일째는 7번 돌되 일곱 번째 돌때에는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고 백성들은 고함을 외치라’는 하나님의 작전명령을 받고 그 명령을 잘 따랐습니다.
그런데 아이성 전투를 앞둔 여호수아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판단해서 정탐꾼들에게 아이성을 정탐하고 오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설령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그는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나서 하나님께 물어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아이성은 여리고성과 비교할 수 없는 작은 성이기 때문에 이삼천 명의 군인을 보내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정탐꾼들의 보고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3,000명의 병사를 파송하였지만, 보기 좋게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승리의 기쁨과 감격에 빠진 여호수아는 잠시 동안 교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지혜와 전략을 구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과 경험을 앞세웠습니다. 난공불락 요새와 같은 여리고성도 무너뜨렸는데, 아이성 같이 작은 성은 소수의 병사만을 보내도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다는 자만심에 빠진 결과, 전혀 예상치 못한 패배를 맛본 것입니다.
제가 전에 몇 번 소개한 적이 있는 성 프란치스의 이야기입니다.
성 프란치스의 제자 중 한 사람이 환상 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천국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천국에 보좌가 쭉 있는데 가장 높은 보좌가 있어서, 자기를 안내해주는 천사에게 물었답니다.
"이건 누구 겁니까?"
그러자 천사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성 프란치스가 앉게 될 의자라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스승이지만, 가장 높은 보좌에 앉게 된다는 말에 이 제자의 마음에 질투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 제자가 환상에서 깨어난 후, 성 프란치스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놀랍게도 성 프란시스가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나, 나는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그 제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건 위선입니다. 선생님은 성자입니다. 세상에 강도, 살인, 도적질, 등 악한 사람들이 많은데 선생님이 세상에서 제일 악하다면 그게 말이 됩니까?"
그러자 성 프란시스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그건 자네가 나를 몰라서 그래. 나는 참으로 악한 사람이거든. 그러나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있어서 그 은혜로 인하여 내가 있는 거야. 내게 주신 은혜를 하나님이 다른 분들에게도 주셨다면, 그분들은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고"
이 말을 들은 그 제자는 성 프란시스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장 겸손한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한 순간의 교만으로 날려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낮추면 낮출수록 주님께서는 우리를 높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겸손하면 겸손할수록 주님께서는 더 큰 승리의 기쁨과 감격을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승리로 인해 교만하지 말고 그 승리 앞에 더욱더 겸손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루어놓은 성공 앞에서 더 낮아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집착과 탐심
둘째로 집착과 탐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 여리고 성을 정복한 후에 전쟁에서 빼앗은 모든 물건들의 처리 방법을 명령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6장 17-19절 말씀을 보면, 여리고 전투에서 승리를 가둔 후 빼앗은 모든 물건들은 어느 누구도 취하지 말고,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만약 그 물건들 중에 어떤 것이든지 취하는 사람은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에 이 명령에 불순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같이 11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최고 명문가문인 유다지파 출신의 아간이라는 사람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아간(Achan)’이라는 이름의 뜻은 ‘괴로움’ 인데, 그는 그의 이름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게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여리고성 안에 있던 아름다운 외투를 숨겨놓았습니다. 또 은 200세겔과 50세겔 되는 금덩어리 하나를 자기 장막이 처져있는 땅 속에 묻어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경고했음에도 그는 탐심 때문에 그 경고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순종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간 한 사람이 지은 죄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도록 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이기적인 물질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탐심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징계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간의 죄를 아간 한 사람의 죄로 보지 않고, 이스라엘 전체의 죄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또한 아간 한 사람 때문에 가족 전체와 짐승들이 돌로 쳐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았는데 그곳을 ‘아골 골짜기’라고 불렀습니다. 과도한 집착과 탐심이 자신과 가족은 물론 민족 전체가 고통을 당하는 비극을 초래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집착의 무서움입니다.
과도하게 집착하기 때문에 탐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탐심이 생기면 그것에 얽매이게 되고, 얽매이기 때문에 마음속에 고민과 걱정과 근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미국 로체스터 대학교의 '리처드 얀' 교수팀은 돈이나 미모나 명성 같은데 집착하는 사람들은 삶의 활력도 떨어지고 자아실현도 제대로 이룰 수 없다고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비해 더 우울하고 행동장애나 심리불안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 연구 발표처럼 집착이 우리의 삶에 부정적인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수염을 길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지나가는 한 아이가 할아버지의 긴 수염을 보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주무실 때는 그 긴 수염을 이불안에 넣고 주무세요? 아니면 이불 밖으로 빼놓고 주무세요?” 할아버지는 대답을 해주려고 했지만, 대답을 해줄 수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자신은 수염을 어떻게 하고 자는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는 수 없어서 할아버지는 그 아이에게 “얘야, 이 할아버지가 오늘 자보고, 내일 이야기 해 줄께.”라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 이불을 덮고 잠을 자려고 하는데, 밤새도록 고민이 됩니다. ‘내가 이것을 넣고 잤던가 아니면 빼놓고 잤던가?’ 밤새도록 수염을 넣었다, 빼었다 하다가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이윽고 날이 새자, 이 할아버지는 그 아이를 만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얘야, 나도 잘 모르겠다.”
우리가 어떤 일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되면 그 집착 때문에 정작 해야 할 일을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전에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어느 시골 장날에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장터에 한 사람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습니다. 그는 돈을 훔치기 위해서 기회를 노리며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돈 뭉치 하나를 들고 달아났습니다. 훤한 대낮에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런 짓을 했으니 몇 발자국 떼보지도 못하고 붙잡혔습니다. 이를 지켜 본 사람들이 모두 어이가 없어 웃으면서 그 도둑에 물었습니다. “아니, 도둑질을 하려면 남들이 보지 못할 때 해야지. 이 많은 사람이 다 보고 있는데, 이렇게 환한 대낮에 돈을 훔쳐 가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러자 도둑질하다가 잡힌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 눈에는 돈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돈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픈 한 곳에 너무 집착하다보면, 아프지 않은 다른 수십, 수백, 수천 곳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자녀에게 너무 집착하다보면, 남편을 등한히 여기게 됩니다.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왔는지, 밖에 나가서 밥을 굶는지, 도시락은 챙겨갔는지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합니다. 성과에 대해 너무 집착하다보면,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한국의 황모교수처럼 불의한 방법으로 부풀려서 논문을 쓰게 됩니다. 물질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다보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처럼 조그마한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다보면, 큰 것을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소탐대실(小貪大失)‘ 한다고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소탐대실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눈앞에 있는 조그마한 이익을 추구하다가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큰 손실을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당장의 편함 때문에 오랫동안 불편하게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집착과 탐심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을까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욕망의 뿌리들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습니까? 내 마음을 예수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내 마음을 다스리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한번은 테레사 수녀가 미국 순회 집회를 하는 도중에 굉장한 부자를 만났습니다. 그 부자가 테레사 수녀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뭐 좀 도와드릴 것이 있습니까? 뭐가 필요하십니까? What do you need the most?” 그러자 테레사 수녀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저요? 예수님만 필요합니다. 주 예수님만 필요합니다. 그분이면 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면 족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먹는 것도 아니요, 돈도 아니요, 명예도 아니요, 권력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고 인도하실 때, 우리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힘이요 능력이요 구원이 되심을 고백할 때, 우리는 집착과 탐심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시며,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안에 참된 자유와 기쁨과 감격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지난 6월 독일에서 있었던 월드컵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당시에 많은 분들이 한국 축구팀이 1승1무1패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16강에 오르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새벽잠을 설치고 응원한 저 또한 다른 분들처럼 매우 안타까워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저보다 아니 한국의 어떤 사람들보다 더 안타까워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입니다. 6월12일 열린 D조 예선 1차전에서 일본팀과 호주팀이 경기를 했습니다. 일본은 호주와의 경기에 이어 1998년 월드컵대회서 3위를 차지한 크로아티아와 강력한 우승후보 브라질, 등의 강팀들과 계속해서 경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호주와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어야 했습니다. 초반전만 해도 승리의 여신은 일본 편에 선 듯 보였습니다. 양 팀의 공방이 이어지던 전반 26분에 일본이 너무 손쉽게 선취득점에 성공했습니다. 일본의 나카무라 선수가 호주 오른쪽 대각선 위치에서 호주 문전으로 크로스한 공이 일본 공격수와 호주 수비수 누구의 몸에도 맞지 않은 채 그대로 골문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호주의 골키퍼 슈워처가 나카무라의 크로스를 처리하려 나오다가 문전에 있던 다카하라와 충돌했으나, 주심은 파울을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호주의 관중들은 엄청난 야유를 퍼부었고 호주의 히딩크 감독도 불같이 화를 내며 거세게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어이없게 일본에 선취골을 허용한 호주는 만회골을 넣기 위해 총공세를 취했으나, 결국 전반전은 일본이 1-0으로 리드한 채 마쳤습니다. 후반전이 시작되자 천부적인 승부사 히딩크 감독은 케이힐, 케네디, 알로이시를 차례로 교체 투입하여 특유의 승부수를 던졌지만, 일본의 조직적인 수비에 막혀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습니다. 양 팀은 더운 날씨 탓에 시간이 갈수록 체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며, 패스 정확성이 떨어짐은 물론 볼 컨트롤도 부정확해져 갔습니다. 그러나 '히딩크 매직'은 경기 종료 8분을 남겨놓고 시작되었습니다. 후반 39분, 호주의 닐이 롱 드로인한 공을 후반 교체 투입된 케이힐이 일본의 골문 안으로 슈팅하여 기어코 동점골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로부터 5분 뒤인 후반 44분에는 동점골을 성공시킨 케이힐이 일본 패널티에어리어 중앙 부근에서 날린 중거리 슈팅이 일본의 골포스트를 튕기며 그대로 골인되어 호주는 전세를 2-1로 뒤집었습니다. 한번 시작된 골 릴레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인저리 타임이던 후반 47분, 역시 후반 들어 교체 투입된 알로이시가 승부에 쐐기를 박는 세번째 골을 성공시켜 결국, 호주는 3-1 극적인 승리를 거뒀습니다.
저는 그 경기를 보면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전반전에 승리했다고 꼭 후반전에 승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반 45분과 후반 39분까지 총 84분 동안 승리를 하고 있었던 일본팀이지만, 인저리 타임 2분을 포함하여 마지막 8분을 버티지 못하고 세골이나 먹었기 때문에 호주팀에게 패배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전반전에서 승리한 팀이 후반전에 역전골을 먹고 패배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패배할 때보다 승리할 때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반전에 승리를 거두었다고 해서 후반전의 승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작은 성공이 큰 성공을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여리고 전투에서의 승리는 사실 큰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그 승리는 조그마한 승리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여리고 전투만을 생각하면 큰 승리인 것처럼 보입니다. 당시 지상으로부터 14m 정도 되는 높은 둑 위에 내벽과 외벽으로 되어 있는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무너뜨려야 할 성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 앞에는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한 많은 과업이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 앞에는 치루어야 할 전쟁에 많았고, 또 그 전쟁에서 승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리고성에서의 조그마한 승리에 발목이 잡혀, 아이성에서 보기 좋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보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한 순간의 교만으로 날려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직까지 우리의 인생게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까지 열심히 공부해서 NCEA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인생의 승부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뼈를 깎는 고통을 참고 밤잠 설치며 공부해서 법대, 의대를 졸업했다고 인생이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8박9일 동안 태국에, 7박8일 동안 바누아투에 선교를 잘 다녀왔다고 인생에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닙니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영주권을 취득했다고 해서, 불경기인 요즘 어렵게 취직을 했다고 해서, 다른 경쟁업체와 달리 사업이 잘 된다고 해서, 인생에 성공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작은 승리, 작은 성공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작은 승리 때문에 큰 승리를 놓치는 어리석음 범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작은 성공 때문에 큰 성공이 막히는 실수를 범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승리 뒤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끝까지 겸손하십시오.
그리고 세상 것에 과도하게 집착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과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사십시오.
주님 앞에서 낮출 때 주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할 때, 주님께서 더 큰 승리의 기쁨과 감격을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