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친구야. 이 문제를 자료를 더 찾아보니 상당히 중요한 사실이 하나 드러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홍귀달(洪貴達)이 근암서원에 배향되지 않은 것은 홍언충보다 학문·절의·명망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근암서원의 제향이 애초부터 ‘향현(鄕賢) 홍언충을 모시자’는 지역 유림의 운동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그리고 제가 앞서 근암서원이 1665년에 홍언충과 이덕형을 함께 모시면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한 것은 더 정밀하게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1. 근암서원의 첫 주인공은 홍언충 한 사람이었습니다
최근 연구와 한국고전번역원 자료를 따르면 근암서원의 전신은 근암서당(近嵒書堂·근암서당: 가까울 근〔近〕, 바위 암〔嵒〕, 글 서〔書〕, 집 당〔堂〕)이었습니다.
1665년(현종 6), 근암서당에 홍언충 한 사람을 제향(祭享·제향: 제사 제〔祭〕, 누릴 향〔享〕 → 선현을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냄)하면서 향현사(鄕賢祠·향현사: 시골 향〔鄕〕, 어질 현〔賢〕, 사당 사〔祠〕 → 그 고장의 훌륭한 선비를 모시는 사당)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4년 뒤인 1669년에 이덕형을 함께 모시면서 근암서원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이병훈의 2019년 연구도 이 순서를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KCI)
한국고전번역원의 고전자료도 동일한 사실을 전합니다. 특히 근암서원 건립 당시의 통문과 정문 내용이 남아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유교넷)
따라서 근암서원 역사의 출발을 정확히 쓰면,
근암서당 → 홍언충 제향 → 향현사 → 이덕형 병향 → 근암서원
입니다. (유교넷)
2. 그러면 왜 아버지 홍귀달이 아니라 아들 홍언충이었을까요?
이 문제의 답은 당시 유림이 작성한 통문(通文·통문: 통할 통〔通〕, 글월 문〔文〕 → 여러 유림에게 의견을 알리고 동의를 구하는 글)과 정문(呈文·정문: 드릴 정〔呈〕, 글월 문〔文〕 → 관청에 올리는 청원 문서)에서 상당 부분 찾을 수 있습니다.
근암서원 건립 과정에서 활재 이구 등이 홍언충을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로 홍언충의 문장과 직도(直道·직도: 곧을 직〔直〕, 길 도〔道〕 → 바른 도리를 굽히지 않는 삶)를 강조했습니다. 또 다른 통문에서는 그를 “한 고을의 선사(善士·선사: 착할 선〔善〕, 선비 사〔士〕 → 그 고장의 훌륭한 선비)”라고 평가하면서 서애 류성룡의 평가까지 근거로 들었습니다. (유교넷)
이것이 핵심입니다.
근암서원이 처음부터
“부계 홍씨 가문의 가장 위대한 인물을 모시자.”
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 고장에서 살았던 홍언충이라는 향현을 우리 고장의 사당에 모시자.”
라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즉 가문의 대표자를 선발한 것이 아니라 지역 유림이 ‘우리 고장의 선현’을 선택한 것입니다.
3. 특히 홍여하가 올린 글을 보면 이유가 더 명확해집니다
목재 홍여하(洪汝河)가 목백에게 올린 「정목백문(呈牧伯文·정목백문: 목사에게 올린 청원 글)」의 내용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 글에서 홍여하는 홍언충을 연산군 때의 직절명신(直節名臣·직절명신: 곧을 직〔直〕, 절개 절〔節〕, 이름날 명〔名〕, 신하 신〔臣〕 → 곧은 절개로 이름난 신하)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의 문장과 절행(節行·절행: 절개 절〔節〕, 행실 행〔行〕 → 절의를 지킨 행동)을 강조합니다. (유교넷)
무엇보다 중요한 대목은 홍언충이 갑자사화 때 보인 행동입니다.
유배지에서 죽음을 피하자는 주변의 권유가 있었지만, 그는 신하로서 임금의 명령을 피할 수 없다며 도망치지 않았다고 기록됩니다. 중종반정 뒤에는 다시 벼슬할 기회가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홍여하는 이런 그의 출처(出處·출처: 날 출〔出〕, 거처할 처〔處〕 → 선비가 언제 벼슬길에 나아가고 언제 물러나는가 하는 처신)를 특히 높게 평가했습니다. (유교넷)
더 결정적인 기록은 이것입니다.
홍여하는 홍언충이 함창 사람이며 본현 남쪽 무림부곡 도연촌에서 살았다고 밝히면서, 그의 아름다운 행적이 이 지역에 가까이 남아 있기 때문에 후학들이 오랫동안 추모해 왔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지역 유림이 여러 차례 의견을 모아 사당을 세우려 했다는 것입니다. (유교넷)
즉 근암서원의 홍언충 제향은 단순한 ‘유명인 모시기’가 아니었습니다.
지역적 기억 + 절의 + 학문 + 유림의 공론
이 결합된 결과였습니다.
4. 그런데 홍귀달이 훨씬 유명하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오히려 중앙 정치에서의 위상만 비교하면 아버지 홍귀달이 아들 홍언충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홍귀달은 대제학을 지낸 대표적인 문신이었고, 김종직 문하의 인물이었으며, 연산군의 폭정에 직언하다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의 주거지는 함창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디지털 인문학 센터)
그러므로
“아들 홍언충은 배향할 만했지만 아버지 홍귀달은 배향할 정도가 못 되었다.”
라고 생각하면 완전히 잘못입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홍귀달은 별도의 제향 대상으로 충분한 위상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5. 실제로 홍귀달은 다른 서원에 따로 배향되었습니다
홍귀달은 훗날 임호서원(臨湖書院·임호서원: 임할 임〔臨〕, 호수 호〔湖〕, 글 서〔書〕, 집 원〔院〕)에 배향되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임호서원은 1693년(숙종 19) 지방 유림이 표연말·홍귀달·채수·권달수·채무일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창건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래서 결과적으로 보면 아주 흥미로운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근암서원 → 아들 홍언충
임호서원 → 아버지 홍귀달
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주의점이 있습니다.
근암서원의 홍언충 제향은 1665년이고, 임호서원의 홍귀달 제향은 1693년입니다. (KCI)
따라서
“홍귀달은 이미 임호서원에 배향되어 있었기 때문에 근암서원에서는 아들만 모셨다.”
라고 설명하면 연대상 맞지 않습니다.
근암서원이 먼저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6. 그렇다면 홍귀달을 근암서원에 나중에라도 추가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부분은 “홍귀달을 왜 근암서원에 추배하지 않았는가”라고 직접 설명한 1차 사료를 제가 현재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여기부터는 명확하게 추측입니다.
가장 가능성이 큰 설명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근암서원의 주벽(主壁·주벽: 주인 주〔主〕, 벽 벽〔壁〕 → 서원의 사당에서 중심이 되는 가장 중요한 배향 인물)으로서 홍언충의 위치가 이미 확립되었기 때문입니다.
근암서원은 애초부터 홍언충을 위한 향현사에서 발전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아버지 홍귀달을 뒤늦게 추가하면 서원의 처음 제향 구조와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유교넷)
둘째, 홍귀달은 훗날 함창권의 임호서원에서 독자적인 제향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미 다른 서원에서 지역 선현으로 모셔지는 상황에서 근암서원까지 굳이 추가할 필요성이 줄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추측이지만 조선 후기 서원의 지역적 제향 구조를 고려하면 상당히 자연스러운 설명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셋째, 근암서원이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한 부림 홍씨 가문의 서원이 아니라 상주·문경지역 남인계 유학자들의 서원으로 성격이 확대되었다는 점입니다.
2019년 연구에 따르면 근암서원은 이후 김홍민·홍여하·이구·이만부·권상일 같은 남인계 인물들을 계속 추배하면서 도남서원과 함께 상주 남인계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KCI)
따라서 배향 기준은
혈연 → 혈연
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홍언충이라는 향현 → 지역과 학문·정치적 계보를 공유하는 선현들
로 확대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7.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을 ‘경쟁 관계’로 보면 안 됩니다
저는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홍귀달과 홍언충의 관계를
아버지가 더 훌륭한가 ↔ 아들이 더 훌륭한가
라는 방식으로 보면 답을 찾기 어렵습니다.
서원의 배향은 위인 순위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배향할 것인가는 그 서원이
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8. 오히려 홍귀달–홍언충 부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억되었습니다
이것을 조금 크게 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연산군의 폭정에 맞섰고 결국 목숨을 잃었습니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신하의 도리를 지키고, 중종반정 후에도 처신을 신중히 했습니다.
이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9. 그리고 뜻밖에 활재 이구가 여기서 중요한 인물입니다
친구야, 이번에 자료를 조사하면서 제가 특히 흥미롭게 본 부분입니다.
한국고전번역원 자료에는 「건원시통본주문(建院時通本州文·건원시통본주문: 서원을 세울 때 본 고을에 돌린 통문)」이 남아 있는데, 여기서 이구는 홍언충의 문장과 직도를 들어 근암서재에 홍언충을 모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유교넷)
그런데 이구 자신은 훗날 근암서원에 배향됩니다.
그러므로 근암서원의 계보에는 재미있는 구조가 나타납니다.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