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년전 1597년 9월16일 세벽, 세계의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한 불가사의한 승리의 기적을 일궈 낸 이순신의 명량대첩, 23전 23승이란 세계전사의 신기록은 치밀한 계획으로 정탐과 전략수립의 결과였다고 평가한다. 옥포 해전에서 강조했던 '勿令妄動 靜重如山(망령되게 움직이지 말라, 태산과 같이 조용하고 무겁게 움직여라) 의 자세로 전투에 임하여 그 강조의 결과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러던 장군에게 전혀 짐작도 못할 일이 일어났다, 잔인한 고신으로 망신창이가 된 몸으로 다시 통제사로 임명되어 칠천량에서 원균이 말아먹고 남은 수군울 패하고 육군으로 편입하라는 왕의 명을 거스른체 명운을 걸고 싸운 단 하나의 전투가 바로 명량대첩이다. 배설이 끌고 탈영했던 단 12척과 녹도만호가 가져온 1척으로 300척 이상의 일본군과 싸우려할 때 조정의 관리들은 격려는커녕 비아냥거렸다,
남은 120명의 수군을 수습한 장군은 수군을 늘린 후 선조에게 상소를 올린다, 그 유명한 “상유십이 미신불사 (尙有十二 微臣不死 )=오히려 신에게는 열두척의 전선이 있고 미천한 신하는 죽지 않았습니다,” 라며 결전을 준비하고 승리후에는 將軍도 난중일기에서 '실로 천행(天幸)이었다' 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우리나라 바다에서 최고로 물살이 세다는 울돌목(鳴梁)의 전투계획, 울돌목 바닷물의 유속은 초당 6m/s 나 되는 엄청난 물살에 노 젓고 버티고 서 있기도 어려운데 '133대 1' 의 상대로 도대체 어떻게 승리를 할 수 있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쇠사슬을 걸어 왜선을 저지했다는 것은, 해변에서 철 구조물이 발견되여 그동안 추측으로 여겼던 것이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최소 폭 300m에 달하는 명량 해협에서 조류에 밀려 쇠사슬에 걸린 왜선의 船團이 우왕좌왕 할 때 울돌목에 익숙한 조선 수군에게 유리한 전황으로 바뀌였을 것이다,
명량대첩 승리의 원인은 빠른 물살을 결정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는 이곳에 가게 되면 누구나 물살이 얼마나 센지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수영관광지에는 스카이워크를 만들었지만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높이가 낮다, 허나 낮은 높이에서 울돌목의 물살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을 장점으로 애써 위안으로 삼는다.
명량대첩의 수훈자는 손에서 피가 날정도로 노를 저으며 버텼던 격군(格軍)이었다는 생각도 해 본다. 좀더 높은 곳에서 넓게 조망하기 위해서 울돌목을 가로지르는 '명량해상케이블카' 를 타는 것도 방법이다. 해남과 진도 양방향에서 모두 탈 수 있는데, 높은 곳에서 내려오면서 보는 진도 방향에서의 탑승이 좋다.
과거 전라 우수영이 있던 곳이라서 우수영이라 부르는 이 곳의 랜드마크 로는 스카이워크 와 명량대첩기념관, 그리고 케이블카라고 하지만 명량대첩비(보물 제503호)도 있다. 1688년 숙종 때 세워진 것인데 일제 때 뽑혀서 경복궁 어딘가에 뒹굴고 있던 것을 광복 후에 원래 있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다.
울돌목 건너 진도 쪽에도 녹진국민관광지가 조성 되어 있다. 해남의 스카이워크와 비슷한 울돌목 물살체험장도 있고 해남과 똑같이 판옥선 모형도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높이 30m의 충무공 이순신 동상은 규모도 크지만 우리나라의 여러 이순신 동상들 중에서 가장 역동적인 모습으로 성웅의 영웅적 기백을 마음것 표현한 동상이다.
이처럼 장군을 기리는 두 지자체가 경쟁을 하다 보니 동일한 아이템의 중복으로 식상되는 모양새여서 전라남도 차원에서 양쪽의 관광 자원을 좀더 효율적으로 조성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일예로 44억 원을 들여 만든 울돌목 거북배 가 적자 누적으로 운항을 중단한 채 우수영항에 수년간 방치되어 있음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또 하나 서울 세종로의 이순신 동상은 졸작이다. 칼집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는 것은 항복이나 협상하러 갈 때와 같이 싸울 의사가 없다는 표현이고 보물 제326호 쌍수도와 보물 제440호 참도 등 이순신이 썼던 실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전혀 다른 모양의 칼을 차고 있는 점과 갑옷이 발목까지 내려오는 것이 장수의 복장이라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