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의 『기다림』
석야 신웅순

신윤복의 ‘기다림’
신윤복의「기다림」이다. 단아한 담벼락과 휘늘어진 버드나무 가지, 치솟은 고목 그리고 말아쥔 송낙과 기다리는 여인, 이 다섯 가지 오브제를 사용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화사한 봄날이다. 여인이 말아쥐고 있는 송낙에 이야기의 키가 있다. 혜원은 여기까지만 보여주고 있다. 나머지는 독자들이 상상해야한다. 도대체 혜원은 이 그림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송낙은 승려가 평상시에 납의(衲衣)와 함께 착용하는 모자이다. 여인의 신발은 짚신이다. 분명 민가 여염집 아낙이다. 여염집 아낙이 승려의 송낙을 말아쥐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화창한 봄 어느 대가의 뒷뜰 버드나무 아래이다. 여인은 주름잡힌 풍성한 치마에 앞치마를 두른 단정하고 수수한 아낙네의 옷차림이다. 멋스럽고 품격이 있어 보인다. 여인은 송낙을 말아쥐고 담장 쪽을 연신 바라보고 있다. 양손은 뒤로 재켜져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동안 기다린 모양이다. 여인 옆에는 큰 고목 하나가 서 있다. 화사한 춘일에 허공으로 치솟은 고목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일까.
왼쪽발은 살짝 들려져 있다. 어딘지 모르게 긴장되고 초조한 빛이 보인다. 안타까우면서도 설레는 모습 같기도 하다. 이 여인은 도대체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무슨 일이,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이 정도의 그림이면 상상력을 동원해 그간의 전말을 구성 해 낼 수 있을 것 같다. 숨겨둔 이야기가 더욱 독자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수 만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순간을 포착, 무심한 시선의 옆 얼굴. 잠시 이 여인은 무슨 생각에 잠겨 있을까.
조선시대에 그림이나 시조에서 승려와 양반가 여성들의 성관계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조선시대 부녀자들은 원칙적으로 절에 갈 수 없었다. 『경국대전』「형전」‘금제’에 “ ‘유생,부녀로서 절에 올라가는 자’는 장 1백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법은 조선시대에 철저하게 지켜진 것은 아니다. 사실상 법회나 불공, 기도를 드리러 간다는데 부녀자들의 사찰 출입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시 사찰 출입은 부녀자들이 남성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으며 기회였고 출구였다. 다른 남성과 성적 관계를 맺는다해도 이를 묵인한다해도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다. 승려와 부녀자와의 접촉은 사찰뿐만이 아니라 일반 여염집에서도 이루어졌다. 제도적으로 막는다고 해서 인간의 본능조차 억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신윤복의 ‘문종심사(聞鍾尋寺)’
‘문종심사’는 ‘종소리를 듣고 절을 찾는다’ 는 뜻이다. 화제 ‘솔이 많아 절은 뵈지 않고 인간 세상에는 다만 종소리만 들린다.(松多不見寺 人世但聞鍾)’ 라고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비녀와 말구종까지 대동한 소복을 한 지체 높은 부인이 산사를 찾아가고 있다. 비구니가 홍살문 밖에까지 마중 나와 있어 부인과 절 사이에 이미 통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무슨 일일까. 부인의 흐믓한 표정과 뭔가 마땅치 않은 비녀와 말구종의 표정. 여기까지 말 할 수 밖에 없으니 이후가 영 궁금하다.
승려와 부녀자와의 성묘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장시조도 있다.
중놈도 사람인양 하여 자고 가니 그리워라
중의 송낙 나 베고 내 족두리 중놈 베고 중의 장삼 나 덮고 내 치마란 중놈 덮고 자다가 깨달 으니 둘의 사랑이 송낙으로 하나 족두리로 하나
이튿날 하던 일 생각하니 흥글항글 하여라
남녀를 송낙과 족두리로, 장삼과 치마로 대체했다. 중을 사람 취급 안했던 시대에 중과 관계한 어느 여인이 중을 떠나 보내고 지난 밤의 즐거웠던 일을 회상하고 있다. 함께 자는 데에는 신분 차별과 도덕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신분은 사람이 만들고 성은 신이 만든 조화이니 음양의 교합은 인간에게도 당연지사가 아닌가. 송낙은 중이 쓰는 모자이며 족두리는 부녀자들이 쓰는 모자이다.
창 밖에 어른어른하니, “ 그 뉘오신고?”
“소승이 올소이다. 어제 저녁에 노시(老媤)보러 왔던 중이러니 각씨네 자는 방 족두리 벗어 거는 말곁에 이내 송낙을 걸고 가자 왔네.”
“ 저 중아, 걸기는 걸고 갈지라도 훗말 없이 하시소.”
어느 중놈이 지난 밤에는 늙은 시어머니와 사랑하고 오늘은 며느리를 찾아와 사랑을 청하고 있다. 며느리는 자신의 몸은 허락하겠지만 대신 소문이 나지 않도록 소승에게 부탁까지 하고 있다. 후자의 말수작에서 그립다는 말, 보고 싶다는 말 같은 언어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족두리 걸어두는 말 곁에 송낙을 걸어두는 것으로 대신했다. 숨은 이야기가 환히 그려진다. 중과 여인 간의 통간이 사찰이나 여염집의 장소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성 풍속이 어떠했고 얼마나 여인들의 성이 억압되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들이다. 성문제는 사찰 출입을 법으로 금한들, 도덕으로 여인들을 억압한 들 막아질 수 있겠는가.
신윤복은 양반귀족들의 위선과 불륜을 대담하게 파헤쳐 은폐되었던 남녀 간의 성풍속을 세련된 감각과 섬세한 필치로 화폭에 담아냈다. 이는 조선시대의 성리학의 이념에 반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존재감이 없었던 여성들을 등장시켜 기방(妓房)이나 여속(女俗)에 대한 관심을 고도의 회화성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의 그림은 조선시대 풍속화의 영역을 보다 다채롭게 넓혀 주었으며 미술사 연구나 당시의 생활사, 복식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두산 백과)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조선 시대 3대 풍속화가로 불렸던, 조선을 뒤흔들 만큼 파격적이고 대담한 그림을 그렸던 신윤복. 새롭고 독특한 화법으로 그린 진정 시대에 반한, 시대를 앞서 간 그는 조선 후기의 천재 풍속 화가였다.
- 월간서예,2017,11월호,143-145쪽.
첫댓글 좋은 글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