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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야
딸아,
너와 함께 미소야(maesoya米所牙)에서 2년을 살았으니 미소야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구나.
미소야는 태국 북쪽 트라이앵글에 위치한 순 중국인 난민촌이었다.
동남아에 사는 동안 우리는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기위해 철두철미하게 증국인으로 위장하고 살았다. 덕분에 우리는 완전히 중국인으로 인정받아 차별 같은 것은 모르고 살았다. 미소야는 우리의 새로운 연출 무대였다. 이 새로운 무대에서 장차 무슨 장르가 연출 될지는 나도 몰랐다.
미소야에 살면서 알았지만 이곳은 헬로인과 군수품, 비취, 루비 등 진귀한 보석들이 불법으로 거래되는 비밀 아지트외도 같은 곳이었다. 이 얘기는 뒤에서 다시 하도록 하자.
미소야는 일년 내내 날씨가 온화 했다. 겨울철이 없으니 산천은 늘 푸르러 있었고 야생화는 지천에 깔려 있었다.
학교에서는 우리에게 주방까지 따로 딸린 주택을 제공했다. 미얀마나 태국의 시골 주택은 비바람만 막을 정도의 간이 구조였다. 주택의 주 건축 재료는 대나무였다. 대나무는 식물 중에 성장이 가장 빠르다고 한다.
하루에 평균 60cm이상 성장한다고 하니 가히 그 성장속도를 가늠할 수 있다.
4,5월이면 대나무 뿌리에서 뾰족뾰족한 것들이 땅믈 뚫고 올라 오기 시작 한다. 이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죽순이다. 죽순은 열대 사람들의 주 반찬거리였다. 매년 4,5월이면 집집마다 죽순을 따다가 소금에 절여서 우리가 김치 먹듯이 두고두고 먹었다. 대나무의 성장기는 한달 가량이었다.
열대 사람들은 대나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어디서나 사람 사는데 필수적인 것이 의식주다. 그곳 사람들은 주거를 대나무로 쉽게 해결 했다. 대나무는 천과 종이도 만든다고 하니 입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대나무는 다양한 생필품을 만드는데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수저에서 주거에
이르기까지 대나무는 모든 생활 영역에 깊숙히 침투되어 있었다.
대나무로 집을 짓는 것은 그야말로
간단했다.
우리 집은 네 모서리의 기둥만 통나무이고 벽은 대나무를 쪼개어 샅자리처럼 엮어서 입힌 것이었다. 지붕은 넓은 나무이파리를 연결하여 덮었다. 보기에는 어설프지만 벽과 지붕이 열을 막아 주므로 사는데는 벽돌집보다 훨씬 시원 했다. 벽돌집은 한번 열을 받으면 조만에 식지 않아 오히려 살기가 더 불편 했다. 우리집 정뭔은 상당히 넓었다. 정원 가장자리에는 시내가 흘렀다. 시냇물을 건너면 산이었다. 산에는 원숭이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원숭이들이 괴성을 지르며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 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서커스를 구경하는 느낌이었다.
시냇가에는 레몬나무가 두그루가 있었는데 가지가 휘어지도록 열매가 열렸다. 너는 학교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레몬을 따다 먹었다. 그 먹는 방법이 기발 했다. 너희들은 껍질을 벗겨서 과육을 끄집어내어 소금에다 찍어 먹었다. 우리 어른들은 보기만해도 입안이 시큼시큼한데 너희들은 그렇게 맛있게 먹었다 .
우리 집 마당 한가운데는 큰 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나는 그 나무에 그네를 매었다. 너희들은 그 그네를 타며 즐기기도 했다. 나는 앞 마당에 꽃밭도 만들었다. 그리고 나만 알아 볼수 있도록 꽃으로 코리야를 장식했다. 이 꽃밭이 소문이 나 구경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뒷간은 개울 언덕배기에 대나무로 만들었다. 뒷간이라 하면 한국인들은 다 신기해할 것 같다. 뒷간이 사리진지 오래되었니 말이다.
뒷간에서 일을 보는 것은 특별한 낭만이었다.
앉아서 푸른 산을 보는 것만으로도 참 즐거웠다. 게다가 꽃과 나비와 잠자리를 볼 수있고, 새와 벌레들의 노래소리까지 들을 수 있으니 일보는 시간은 눈과 귀와 마음으로 자연을 맘껏 즐기는 시간이었다.
산과 물이 가까워서 가끔 뱀들이 출몰했다. 하루는 꽤나 큰 뱀이 문앞을 지나 주방 건물 뒷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회들짝 놀라기도 했다
마당에는 리치(여지荔枝)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아직 나무 나이가 어려서 열매는 많이 열리지 않았다.
열매 껍질은 두둘두둘한데 익으면 빨갰다. 빨간 껍질을 벗기면 하얀 과육이 나왔다. 과육은 진주알 같이 윤기가 돌았고 특별이 부드러워 입에 넣으면 씹기 전에
사르르 녹아 버렸다.
리치는 당도가 매우 높았다. 리치의 독특한 향미는 사람을 유혹하기에 충분 했다. 전설에 의하면 우리가 잘 아는 당나라 양귀비가 리치를 특별히 즐겨 먹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매년 리치 수획 계절이면
천리가 넘는 남방에 사람을 보내어
리치를 실어오게 했다고 한다. 아무튼 리치와 양귀비에 관한 설은 넘쳐 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그 모든 설이 황당한 전설에 불과 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리치는 극히 예민한 과일이라 하루면 색갈이 변하고
이틀이면 향미이 변하고
사흘이면 맛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그처럼 예민한 과일을 천리 길에서 운송해 먹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열대 과일은 그야말로 다양했다.
동네에서는 집집마다 마당에 한 두 그루의 과일나무를 갖고 있었다. 열대에 살았댔으니 재밌는 열대과일 얘기를 빼놓을 수 없구나.
나는 부임한 후 학교의 면모와 분위기를 확 바꿔 놓았다. 공터에는 학생들을 동원하여 꽃밭도 만들고 파인애플도 심었다. 수확 철이 되어 파인애풀을 먹어보니 당도가 높아서 맛이 참 좋았다. 태국은 일조량이 많아 모든 과일의 당도가 월등히 높았다. 학생들은 가끔씩 열대 과일을 따갖고 와서
과일 잔치를 벌였다. 한번은 누가 농구공만치 큰 과일을 갖고 왔다.
외피는 두둘두둘한 돌기로 덮여 있었다. 학생들이 이 과일을
터뜨리자 운동장은 삽시에 똥냄새로 진동했다. 이 과일이 바로 과일중의 왕이라는 그 유명한 두리안이었다. 그 냄새 때문에 정부에서는 공공장소에서 먹지 못하도록 규제해 놓기도 했다. 두리안은 한 번 맛들이면 자꾸 먹고 싶어진다고 하여 일명 악마의 과일이라고도 불렀다. 과육은 만두 모양인데 연한 노란 색이었다. 나는 두리안이 풍기는 이상한 냄새가 내 비위에 맞지 않아 먹지 않았다.
방콕에 와서 두리안을 한개 사다가 먹었다. 너엄마와 너희들은 그렇게 밋있게 먹었지만 그때도 나는 먹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두리안의 냄새만 맡아 보았을 뿐 지금까지 시식 한번 해보지 못했다. 과일의 왕이라는 두리안이 내게는 아니었다.
크기나 모양에서 두리안을 닮은 과일이 있었다. 이 과일을 중국인들은 버뤄미(菠萝蜜)라고 했다. 영어명은 잭 프루트(jack furuit)라고 하는구나. 잭 프루트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과일이라고 했다. 그 큰 과일이 무더기로 나무에 열려 있는 것을 보니 정말 신기 했다. 잭 푸르트는 두리안과 많이 닮았지만 맛은 전혀 달랐다. 과육은 깍두기처럼 각이 나 있었는데 그윽한 향미를 발산했다.그리하여 내게는 잭 프루트가 오히려 과일의 왕이었다.
롱간(용안)이란 과일도 아주 재밌는 과일이었다. 껍질은 짙은 밤색인데 쉬이 부숴져서 까기가 쉬웠다. 껍질을 까면 은백색의 과육이 나왔다. 과육은 고양이 눈알같이 빤짝거렸다. 과육이 용의 눈 같다고 해서 중국인들은 용안(蘢眼)이라고 불렀다. 롱간도 맛이 달고 향긋했다.
용과라는 과일이 있었다. 영어로는 드래곤이라고 하는구나.
그 모양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 같아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표면에는 돌기가 여러개 나 있었다. 용과는 익으면 핑크색인데 정말 예쁘고 귀여웠다.
과일을 자르면 살속에 까만 깨알 같은 것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용과는 약간 시고 단맛이 났는데 맛은 별루였다.
코코넛(야자) 얘기도 빠뜨릴 수 없구나.
북방에 살때 나는 코코넛나무를 영화에서만 보았는데 참 멋있었다.
해변가에 우뚝솟아 바다바람에 펄럭이는 부채살 모양의 이파리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남방에 와서 그 나무를 내 눈으로 보니 한없이 감격스러웠다.
우리는 중국 쿤밍昆明에서
코코넛을 처음 먹어 보았다.
코코넛은 자기보호능력이 뛰어났다.
코코넛 외벽은 섬유질로 덮여 있었다. 먼저 겉면의 섬유질 껍질을 제거해야 되는데 너무나 질겨서 잘 벗겨지지 않았다. 섬유질 껍질을 벗겨내면 갈색의 껍질이 나왔다. 이 껍질이 돌같이 단단 했다. 코코넛 껍질 안은 하얀 과육으로 덮여 있었다. 마치 백자사발을 붙여 놓은 것 같았다. 과일 안에는 말간 물이 고여 있었다. 그것은 열대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해갈제, 즉 천연 음료였다. 우리는 물만 마시고 몸통은 통째로 버렸다. 후에 안 일이지만 코코넛의 알짜는 바로 그 흰살이었다. 무식하니 우리는 그 과일의 가치를 몰랐던 것이다. 우리가 먹는 코코넛 오일은 바로 그 흰 살에서 짜 낸 것이다. 코코넛 흰살은 딴딴한데 씹을수록 고소했다. 그때만 해도 내 이빨이 좋아서 원없이 많이 먹었다.
코코넛은 전봇대처럼 키꺾다리였다. 코코넛은 사람들이 함부로 자기를 건드리지 못하게 열매는 맨 꼭대기의 이파리와 줄기 사이에 열렸다.
재주가 좋은 사람들은 줄기를 타고 올라가 열매를 딸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3D작업이었다.
코코넛 전문 재배지역에서는 원숭이를 대체인력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고도로 훈련된 원숭이를 투입하여 열매를 따는데 효율이 높다고 했다. 그곳에서는 원숭이가 고급 노동력이라고 했다. 멀지 않은 앞날에는 AI가 원숭이를 대체할 것 같다.
우리 학교의 편제는 소학교에서 중3까지였다.
학생수는 130여명이었고 교시는 모두 7명이었다. 교장선생은 张德才라는 분이었다.
장씨는 교장일 뿐만아니라 미소야의 실세이기도 했다. 그는 마을의 모든 대소사에 개입하고 관여 했다.
우리 학교는 정식 학교라고는 할 수 없었다. 모든 학생들이 낮에는 태국 정규학교에 다녔다. 너도 태국학교를 2년이나 다녔다.
아쉬운 것은 너는 외국어를 빨리 익혔지만 그만치 빨리 잊어 버렸다.
우리학교의 수업은 태국학교에서 하교 후에 받았다.
학생들이 두개 학교를 다니니 하루 수업시간이 10시간은 되었다. 수업시간은 길지만
학습량이 많아 제대로 배울수는 없었다. 학생들의 큰 수확이라면 두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학교 교실은 밤중에는 가끔 무기를 비롯한 군수품
창고로 사용되었다. 어떤 때는 운동장에 수류탄 같은 것을 흘리고 가서 학생들이 주어 오기도 했다.
학교 마당에는 굵은 티크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한 그루 당 10만 달라를 호가한다고 했다. 티크나무는 가볍고 단단하고 썩지 않아 배를 만드는데는 최상이라고 했다. 부자들은 티크나무로 집도 짓고 가구도 만들었다.
우리가 미얀마에서 살던 너 고아이의 집도 전부 티크나무로 지은 집이었다.
대나무 집은 벌레가 많이 끼지만 티크나무는 벌레 끼는 법이 없어서 살기가 좋았다.
교사(校舍)벽에는 칠판을 두 개나 만들었다. 나는 칠판에 재밌는 글과 그림을 곁들여 실었다. 그랬더니 반응이 좋았다.
소문을 들은 주민들은 일부러 학교에 와서 칠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다. 학교는 국도와 가까워 때로는 외국 관광객들이 찾아 왔다. 관광객들은 대부분 유럽인들이었다. 그들은 칠판이 재밌는지 기념으로 사진을 찍어 가기도 했다.
우리 학교가 밖에까지 소문이 퍼져 외지 학교에서 견학을 오기도 했다
학교의 당면 과제는 교과서였다.
교과서는 중화민국에서 발행한 것이었다. 책이 낡고 해진데다가 수량도 태 부족이었다. 나는 대만의 관계 당국에 이런 애로 사항을 알리고 교과서 지원을 요청했다. 그것이 크게 효력을 발생하여 전교생이 쓰고도 남을 정도의 교과서를 보내 왔다.
张德才 교장 선생께서는
매우 만족하며 나에게 백퍼센트의 신뢰를 보냈다.
방정렬 선교사를 알게된 후 선교사께서는 가끔씩 우리집에 들렀다. 구제옷도 많이 가져다 주기에 학생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
하루는 교장선생이 나를 불렀다.
- 文老师,(선생) 人为财死 鸟为食亡 인위재사 조위식망 아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는 엄지와 식지로 동그랗게 만들어 보이면서
-세상에서 이걸 좋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잠간 여기서 人为财死 鸟为食亡
이란 문장을 해석하면 이렇다.
사람은 재물을 위하다 죽고
새는 먹이를 쫓아 다니다 죽는다는 뜻이다.
그 한국인 여 선교사를 우리가 후하게 대접할테니 한 번 포섭해 보십시요.
교장선생의 갑작스런 제안에 나는 좀 당황했다. 그러나 거부할 수 없어서 한번 얘기는 해 보겠다고 했다.교장선생은 외교관이나 외국 선교사들이 검문을 받지 않는다는 점을 노리고 선교사를 마약 운반책으로 끌어 들이려고 한 것이다.
얼마 지난 후 나는 교장선생을 찾아 가 선교사께서 강력히 거부 했다는 얘기를 전했다.
사실 나는 방선교사에게 이런 얘기조차 꺼낸 적이 없다. 교장선생은 내 말을 듣고 못내 아쉬워 했다.
미소야는 시골이긴 하지만 전기와 수도가 있어서 생활하는 데는 미얀마보다 훨씬 편했다.
동네 동쪽 국도변에는 높고 괴이하게 생긴 웅장한 산이 있었다.
산기슭에는 크지않은 동굴이 있었다. 그 동굴에서 흘러나와 조성된 못이 있었다.
동네에서 먹는 수돗물은 바로 이 못의 물이었디. 이 물을 파이프로 마을의 모든 가구와 연결 했다.
깊은 지하에서 흘러 나오는 물이라 특별히 깔끔 했다. 물맛도 담백하고 시원 했다. 미얀마에서 마시던 물에 비하먼 정말 약수였다.우리는 이 약수 덕분에 미소야에서는 열대성 질환을 앓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수도괸은 대만 사람들이 출연하여 설치한 것이라고 했다. 못에는 팔뚝만한 물고기들이 산밑 지하수와 못 사이를 드나들며 한가롭게 노닐었다. 물고기는 사람들에게 영물로 인식이 되어 그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 산 아래는 꽤나 넓은 평지가 있었다 평지에는 여러 종류의 야생과일나무가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망고 나무다. 망고는 많이 열려있었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나무가 너무 높아서 따 먹을 수가 없었다.
평지에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었다. 내를 건너면 전부 천연 동굴로 된 산이 있었다.
모든 동굴은 스님들이 도를 닥는 암자로 사용하고 있었다.
방선교사와 너 엄마는 그 동굴에 가서 통곡의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그렇게 울부짖는데도 항의하는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었다. 태국인들은 대체로 다 무던 했다. 지상에는 큰 절이 있었는데 절 앞은 큰 연못이었다.
연못에 만개한 연꽃이 참 아름다웠다.
이곳의 절과 동굴은 태국에서도 알려진 곳이라 가끔씩 불교 행사가 열렸다. 태국 북부는 소수민족 거주 지역이었다. 행사 때면 알록달록한 이색 복장을 차려 입은 소수민족들이 행사에 참석하여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미소야는 태국과 미얀마와 국경을 접한 곳이었디. 국경을 넘으면 미얀마 쪽에 허멍贺猛이라는 곳이 있다. 허멍은 당시 세계 마약왕으로 널리 알려진 쿤사(张奇夫)샨방독립군 총사령부 본거지었다. 쿤사는 3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니 명실공히 마약 왕이었다. 군인들 중에는 중화민국이 패하면서 이 지역으로 유입된 중화민국 국군 패잔병들도 다소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군 2인자인
张苏泉 참모장이었다. 그는 黄浦군관학교 출신으로 중화민국 육군특수부대에서 대대장급 장교로 있었던 사람이었다. 张씨는 키는 작았지만 몸에는 군인다운 풍채가 넘쳤다. 장씨의 고향은 중국 요녕성 庄河라고 했다.
매년 구정이면 전교 학생들을 인솔하여 허멍 총사령부에 신년 세배를 드리러 갔다. 세배를 마친 후 각지에서 온 대표단들이 준비해 온 연출이 있었다. 장참모장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는데 일본 노래였다. 밤에는 오락회를 열어 주흥에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갈 무렵에 사회자의 요청으로 한 30대의 다부지게 생긴 젊은이가 나와서 노래를 불렀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젊은이는 한국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국 타향, 그 것도 세계적인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고국의 노래를 들으니 공연히 가슴이 뛰고 마음이 설렜다.
그는 노래를 마치고 쿤사 총사령관과 그 측근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쿤사와 지근거리에서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은 큰손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아다. 이 비밀스런 곳에서 동포를 만났는데 말을 걸어 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나는 교장선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젊은이 쪽으로 갔다. 나는 먼저 쿤사 총사령관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그 젊은이에게 말을 건넸다. 그도 한국 말을 듣고 놀라며 반색 해마지 않았다. 사진기사들이 이 장면을 담으려고 일제히 플레시를 터뜨렸다.
간단한 인사말을 통해서 나는 그가 재미교포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총사령관과 또 그 젊은이와 대화를 나눴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동료 선생들도 나의 모험적인 행동에 경악하며 우려를 표시 했다.
내가 그날 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오싹하다.
허멍에서는 헤로인을 대량 생산하여 세계에 유통시켰다. 우리가 태국에 살던 시기는 쿤사가 한창 승승장구할 때였다. 세계 헬로인의 80%를 장악하고 있었으니 명실상부한
마약왕이었다.
수입은 군인 양성과 무기 구입, 교육예 사용했다. 우리 학교도 쿤사 직속으로 교사들의 월급과 학교 운영비는 전액 쿤사의 예산으로 충당했다.
미소야는 바로 허멍의 마약과 군수품의 최대 집산지였다. 모든 거래는 깊은 밤 중에 진행되었다. 때로는 태국 정부군들에게 검거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별 문제가 이니었다. 뇌물로 관계 군인들을 무마시키면 되는 것이었다.
그곳은 산악지대라 물품을 운송하는데는 노새를 이용했다. 노새는 힘이 세고 끈질기므로 산악지대에서 부리기에는 노새만한 짐승이 없다고 한다. 어떤 밤 중에는 수십 마리의 노새가 한꺼번에 집결하기도 했다.
마약 운반은 마을 젊은이들의 몫이었다. 작은 거래는 육지에서 하지만 큰 거래는 공해상에서 진행된다고 했다.
마약 운반은 정글 같은 산악지대를
지나 바다에서 은밀하게 거래되니 고생이 많다고 했다. 그리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한 번 임무를 수행하는데 보통 서 너달이 걸린다고 했다.
우리 이웃에 사는 젊은이가 바로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미소야는 그야말로 소왕국이었다. 미소야에는 懂事(이사)가 두명있었다. 이 두명은 매일마약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라 직위는 있지만 유명무실 했다. 동네 대소 사건은 교장과 촌장이라는 사람이 주축이 되어 처리 했다. 만약 누가 마을의 비밀을 외부에 누설하면 그들에 의해 가차없이 살해 됐다.
마을에 체격이 우람하고 힘께나 쓰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신혼 살림을 차린 사람인데 와이프가 임신 중이었다. 그가 무슨 일로 의심을 받게 된 것 까지는 알 수 없다.
적막이 감도는 어느날 밤이었다.
젊은이가 킬러들에 의해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중이었다. 그는 끌려가지 않겠다고 짐승처럼 포효 했다. 그가 지르는 포효와 절규는 마을 어디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아무리 힘장사라고 하지만 전문 킬러들의 손아귀를 벗어 날 수는 없었다. 그는 젊은 와이프와 이복자를 남겨놓고 그날 밤에 사살 되었다.
.그 유복자도 지금은 장성하여 어른이 되었겠다. 그 미망인은 돼지고기를 떼어다가 집집마다 다니며 팔았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다. 우리도 그녀가 배달하는 돼지고기를 참 많이 사 먹었다.
그곳의 돼지는 전부 토종이어서 고기 맛이 부드럽고 좋았다.
그녀는 남편이 그렇게 죽었어도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숨죽이고 사는 그녀가 정말 불쌍 했다. 그녀를 지켜 보는 사람들도 위로의 말 한마디도 해 줄수
없었다. 만에 하나 연루가 되면 큰일 나니까 말이다. 이럴 때는 모두가 벙어리가 되는 것이었다. 동네 수석 킬러는 이씨라는 사람이었다. 키가 크고 살결이 검고 눈은 독을 품은 독사의 눈 같았다. 이 자는 사람을 살해 한 후에 간 같은 내장을 끄집어 내어 술안주로 먹는다고 했다. 그게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리니 기가 막혔다. 사람이기를 포기한 흉악한 마귀였다.
살륙은 동네 북산 뒷편에서 집행된다고 했다. 살륙장으로 가는 길은 동네 서쪽으로 돌아 간다고 했다 .가는 도중에는 움푹 파인 으슥한 지형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귀신이 자주 출몰하여 괴이한 소리를 지른다는 소문도 나 돌았다. 그 길을 지날 기회가 있어서 학생들에 이런 얘기를 들으니 소름이 끼쳤다.
혹자는 내가 그곳 소식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가고 물을지 모르겠다.
나는 가끔 학생들과 함께 등산도 가고 죽순도 따러 다녔다. 그러면 학생들은 내가 묻지 않아도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을 신나게 얘기해 주는 것이었다.
내가 방선교사를 알게되면서 우리 집에는 한국인들이 가끔 찾아왔다.
만약 나를 찾은 손님들이 마약거래로 왔다면 교장선생은 오히려 크게 환영할 것이었다. 그러나 나를 찾은 손님들은 마약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보니 교장선생이 나에 대하 신뢰가 깨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와중에 내가 주민등록증을 만들려고 칭마이에 갔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일이 순조롭지 않아 하루 늦게 집에 돌아 왔다. 이로 인하여 수업에 차질이 빚어 진 것이다. 교장선생은 너엄마를 찾아와 격앙된 어조로 나에 대해 크게 불만을 표시했다고 한다. 나는 이 얘기를 듣고 즉시 교장을 찾아가 사유를 설명하고 사과를 했다.
교장은 나를 이해하며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미소야는 관계자 외에는 외부인들이 함부로 다닐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교장선생이 나를 많이 감싸고 묵인해 준 덕분에 별 일 없이 지내 왔다.
그런데 어느 날 메홍손에 사는 양견용(杨甄勇) 씨가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같은 대륙에서 온 사람이라 평소에 친하게 지냈다. 그는 한동안 우리 학교에서 교시로 근무 하기도 했다. 후에 태국 아가씨와 결혼하여 메홍손에 와 살았다. 그는 처가 덕분에 메홍손 시내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 이 마을의 비밀은 물론 주의할 점에 대하여 나에게 많은 조언을 해 주었다. 이번 양씨가 나를 찾은 목적은 나를 구출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양씨를 통하여 동네 지도부에서 나를 사살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정말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친구다. 모르면 그대로 눌러 살 수 있었지만 비밀을 안 이상 나는 더는 미소야에 지체할 수 없었다.
1994년2월6일 날 (일요일) 에 우리는 탈출을 강행했다.
우리 네 식구는 사람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하여 2인1 조가 되어 따로따로 버스를 타고 메홍손으로 나왔다.
나는 양씨의 가게를 찾아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역시 따로 따로 공항으로 나왔다. 나는 양씨에게 탈출을 한다는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양씨는 느낌으로 알아 채고 오토바이를 타고 공항까지 전송을 나왔다. 양씨는 미행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그는 너무 긴장되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포켓에서 봉투를 꺼내어 나에게 쥐어 주었다. 나에게 봉투를 쥐어주는 그의 손은 심하게 떨렸다. 그가 준 돈은 방콕에서 호텧 투숙비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그는 급히 오토바이를 돌려서 시내로 들어 갔다. 너무나 급박하게 벌어진 일이라 再见(안녕)이란 말도 못한 채 헤어졌다.
그날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니. 그가 고인이 된 후에 나는 얼마나 후회막심
했는지 모른다. 내가 양씨의 이름을 공개하는 것도 그가
고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간은 절대로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은혜를입었으면 뒤로
미루지 말고 찾아가 뵈야 한다.
양씨의 희생정신으로 미소야에서의 나의 연출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