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투어리스트.

[현기욱]

사람들은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떠나 좀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여행은 그 자체가 행복이고 이완이며, 재충전인 동시에 큰 즐거움이다.

연인과 헤어진 뒤로,그간의 삶을 정리하고자 혼자서 여정을 시작한 프랭크(조니 뎁 분).

프랑스에서 베니스 행 고속열차를 타고 가는데 미모가 출중하고 매혹적인 여인,

엘리제(안젤리나 졸리 분)가 그 남자의 앞 자리에 앉게 되었다.

만남은 또다른 인연이 되고, 그 인연은 필경 사랑으로 이어지는 법.

영화 <투어리스트>는  그런 공식적인 시네마 전개방식의 룰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고속열차의 객실에서도, 식당칸에서도, 그들이 서로 주고받았던 몇마디의 대화와 처연하리만치

깊고 푸른 그들의 눈빛을 보면서 영화 후반부의 스토리들이 어렵지 않게 유추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다만, 평범한 프랭크와는 달리 엘리제가 영국 경찰국 소속, 국제 금융범죄를 수사하는 전문요원이란 것이 

훗날의 범상치 않은 파고를 예견하는 복선이긴했지만.

베니스는 물의 도시다.

물의 도시답게 처음부터 끝까지 운하와 수상보트, 그리고 물과 연해 있는 중세풍의 각종 건물들이

이방인의 시각을 행복하게 간질였다.

이국적인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생경한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열차에서 만남이 있은 뒤로 두 사람은 그날 밤부터 특급 호텔에 함께 투숙했다.

엘리제의 계산된 행동이었지만 프랭크도 싫지 않았다.

매혹적인 여인이 함께 가자하는데 거부할 프랭크가 아니었다.

원래 여행은, 그런 의외성이란 돌출변수가 있어 언제나 사람을 설레게 만드는 법이니까. 

둘은 운하가 내려다 보이는 호텔 발코니에서 만남을 자축이라도 하듯이 부드러운 키스를 나눴다.

프랭크에겐 실로 아찔하고 가슴벅찬 키스였다.

그러나 서로에게 끝까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프랭크와 엘리제의 성숙한 사랑에 대한 본격적인 서사는 그렇게 씌여지지 시작했다.

"당신은 나의 도구였어요. 내가 당신을 나의 목적달성을 위해 이용했단 말이에요"

엘리제의 이런 고백에도 프랭크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착한 프랭크를 위해 그런 진실을 고백하는 엘리제의 마음속에도 이미 프랭크의 존재는 거부할 수 없는

둔중한 닻이 되어 계속해서 영혼의 심연속으로 묵직하게 내려와 박히고 있었다.

미션의 성공을 위해, 완벽한 연출을 위해 엘리제에게 필요했던 프랭크가, 이젠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엘리제의 심박동을 더욱 가파르게 뛰게 만들었다.

엘리제의 눈빛은 흔들렸고, 프랭크의 정신속에도 제어할 수 없는 거센 파랑이 일었다.

격랑이었다.

"당신과의 키스를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요"

프랭크의 사랑도 단호하고 결연했다.

그렇게 서로는 서로에게 피할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빌헬름 텔의 사과'가 되어가고 있었다.

끝없는 감시와 추격 그리고 급박하게 조여오는 음모와 공포.

프랭크는 도무지 그녀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엘리제를 향한 갱단의 죽음의 덫이 가까이에 있음을 직감한 프랭크는, 일단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려고 애썼다.

순박한 프랭크가 위태로운 죽음의 계곡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 갱단을 대적하기란 영 허접하고,

못내 어설펐지만 그게 바로 '사랑의 힘'인 걸, 어쩌겠는가?  

영화 <투어리스트>의 액션과 임팩트는 만찬의 메인 요리에 적당이 버무려져 얹어진 듯한 맛깔스런 소스였다.

'톡' 쏘는 맛은 없었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볼거리'였다.

엘리제는 영국 경찰국 전문요원으로서 이 무자비한 국제 범죄조직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미션에 2번 투입되었었다.

첫번째 미션 수행중에도 갱단 우두머리의 돈을 훔친 한 남자와 만나 사랑에 빠졌고,

두번째로 투입된 미션에서도 엘리제는 고속열차에서 만난 프랭크와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바로 그 첫번째 남자가 2200만 달러를 들여 완벽하게 성형수술을 했던 까닭에 엘리제도, 영국 경찰총국도,

갱단들도 끝내 어마어마한 돈을 감추고 사라진 첫번째의 그를 찾지 못했다.

아니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으므로 애시당초 그를 찾기란 불가능했다.

그 '첫번째 남자'가 바로 프랭크였다.

영화 종반부를 뒤흔드는 완벽한 반전이었으나 비트는 매우 미약했다.

결국 갱단들은 경찰 특공대 스나이퍼들에게 동시에 저격되어 죽임을 당하고, 프랭크와 엘리제는 거금을 찾는데 성공했다.

돈도 찾았고, 과거의 남자가 현재의 사랑이 되어 둘 사이의 사랑도 하나로 뭉쳐졌다.

그들의 변치 않았던 사랑은 베니스의 고색창연한 도시만큼이나 아름답고 위대했다.

상황의 반전이 있었고, 프랭크의 상전벽해같은 변신이 있었어도, 두 사람의 사랑은 시공을 초월하여 한결같이

동일한 곳을 지향하고 있었다.

감독이 전하고자 했던 진솔한 메시지도 바로 이것이었으리라.

치명적인 팜므파탈의 전형같은 엘리제, 그러나 알고보니 그녀는 격조높고 지조있는 비밀 경찰요원이었다.

사랑은, 때로는 죽음을 담보로 한다.

그런 극적 요소가 풍부하게 가미될 때, 관객들의 가슴엔 큼지막한 감동들이 바위같은 앙금으로 남는다.

사랑, 눈물, 진실 그리고 영롱한 휴머니즘 등, 작품성을 승화시키는 요소들이 비등점까지는 숨막히게 치닫다가,

감동의 변곡점에서 일시에 화산처럼 폭발해 줄줄 흘러야 한다. 

비로소 그런 때에만, 사람들은 잘 된 영화라고 극찬한다.

템포의 강약 조절과 격정적인 서정의 흐름이 스타카토 기법처럼 영화 종장부에서 임팩트 있게 변주되어,

그간 뭔가 정리되지 않고 끈끈하게 남아있던 감정의 실루엣들을 일거에 걷어치우고,

눈부신 햇살들이 관객의 영혼에 그대로 꽂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때 사람들은 감탄한다.

"아! 완벽한 카타르시스여!!"

<투어리스트>

많이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베니스가 선물하는 기막힌 영상미만으로도 나는 감사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졸리와 뎁의 깊고 정결한 눈빛이 자꾸만 뇌리의 가장자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영화의 시나리오는 금세 잊혀질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의 사랑으로 빛나던 눈빛과 그들 고유의 선이 굵은 이미지와 캐릭터는 아마도 오래오래 앙금처럼 남을 듯하다.

지난 주 일요일 오후,

강동 CGV에서 올레회 회원들이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 준, 소중한 친구 영준에게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심심한 사의를 전한다.

"영준아, 고맙다"

"사랑해요, 올레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