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국립박물관에 가보면 뜨락에 버려진 듯 여기저기 목 없는 불상과 몸통 없이 진열된 불상의 머리통들을 만날 수 있다. 몸통만의 불상은 왠지 처참한 느낌을 주지만, 잘려져 세워진 불상의 머리통만을 보면 그 표정의 온화함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처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두상 자체가 부처라는 인상을 준다. 이 시에서는 돼지머리가 산 하나를 방석 삼아 의젓이 앉아 있는 풍경을 보여준다. 눈을 감은 돼지머리는 묵상 중이며 문득 나는 그 모습에서 경주에 있는 몸통을 잃어버린 불상의 머리를 떠올렸다. 그 부드럽고 의젓함이 묻어나는 평화로운 표정. 그 자체가 불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죽어서 돼지는 부처가 되었다. 사람의 권위를 나타내는 자세를 생각해 본다. 서 있는 자세는 아무래도 먹고살기에 바쁘고, 누워 있는 자세는 병들어 있거나 잠자는 자일 것이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 그 앞에다 서 있는 사람을 배치하고 보면 앉아 있는 사람은 권위를 누리는 자이리라. 오연히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야말로 권위의 상징이 된다. 이 시에서 "돼지머리는 / 제대로 한번 앉아보려고 / 목덜미 아래를 버린 것 같다"고 진술된 대목을 본다. 돼지가 제대로 한번 권위의 자세를 취하기 위해서는 죽음이 필요했다는 말이다. 도끼와 선지피를 겪은 뒤에야 돼지는 머리로나마 산 하나를 방석 삼아 의젓하게 앉아 있다는 얘기이다. 발상이 재치 있다. 이정록은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혈거시대」로 당선한 젊은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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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사과의 주름살 ㅡ이정록
어물전 귀퉁이
못생긴 과일로 塔을 쌓는 노파
뱀 껍질이 풀잎을 쓰다듬듯,
얼마나 보듬었는지 풋사과의 얼굴이 빛난다
더 닳아서는 안 될 은이빨과
국수 토막 같은 잇몸과, 순전히
검버섯 때문에 사온 落科
신트림의 입덧을 추억하는 아내가
떫은 핀잔을 늘어 놓는다
식탁에서 뒤 선반으로 치이면서
쪼글쪼글해진 풋사과에 과도를 댄다
버리기에 마음 편하도록 흠집을 만들다가
생각없이 과육을 찍어 올린다
떫고 비렸던 맛 죄다 이디로 갔나
몸 안을 비워 단물 쟁여놨구나
가물가물 시들어가며 씨앗까지 빚었구나
생선 궤짝에 몸 기대고 있던 노파
깊은 주름살 그 안쪽,
가마솥에도 갱엿 쫄고 있을까
낙과로 구르다 시든 젖가슴
그 안쪽에도 사과씨 여물고 있을까
주름살이란 것
內部로 가는 길이구나
鳶 살처럼, 內面을 버팅겨주는 힘줄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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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운묵서(玄雲墨書) ㅡ 이정록
겨울 논바닥 지푸라기 태운 자리 얼었다 풀렸다 검게 이어져 있다
산마루에서 굽어보니 하느님이 쓴 반성문 같다
왜 이리 말줄임표가 많지?
겨울 새떼들이 왁자하게 읽으며 날아오르자 민망한 듯 큰 눈 내린다
반성문을 쓸 때 무릎 꿇었던, 쌍샘에서 소 콧구멍처럼 김이 솟아오른다
온 들녘에, 다시 흰 종이가 펼쳐지자 앞산 뒷산이 깜깜하게 먹으로 선다
-------------- 단무지 ㅡ이정록
분식집에서 공사장 함바까지 끼니끼니 공항에서 열차 식당 칸까지 네가 사람들과 가까이 하는 까닭을 다들 싸고 편하기 때문이라 알고 있지만 나는 공부를 잘 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지금 너는 이파리와 잔뿌리 다 떠나보내고 학생부군으로 아름다이 누워있다 살아생전 다른 무와는 달리 뿌리의 반을 흙 속에 묻고 나머지는 햇살에 맨살 내밀었다 땅 속으로 디민 만큼 하늘 쪽으로 상반신을 들어올렸다 그 힘이다 반달처럼 노랗게 떠올라서 라면에 얹히든지 달빛기둥처럼 척척 김밥에 궁합을 맞추는 까닭은 흙과 하늘을 절묘하게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뿌리 한 가운데를 거대한 땅의 거죽이 에돌았기 때문이다 광활한 하늘 밑바닥이 제 근본이 어딘지 단 한 줄의 나이테로 표시해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도도록한 눈금을 혀로 가늠하며 눈을 감는다 드넓은 무밭에 코를 들이댄 푸른 하늘이 내 가슴 안쪽에다 재채기를 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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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자
나무의자는 날개로 바닥을 짚고 있는 여자다, 나이테마다 새가 갇혀 있다 새 울음소리로 적금을 붓는 여자 피멍의 울대에서 적금을 빼돌리고 대못을 치지 않았는가, 비스듬 걸터앉은 빈 둥우리에서 못대가리가 치민다 울음소리 그득한 통장엔 만기가 없다 낡은 의자 안으로 짐승들이 들이쳤는가 녹물 흥건한 날개로 바닥을 치는 여자 달아날 듯 비껴 앉은 생의 허우대들 그 등짝절벽만 어둡게 바라보는 나무여자, 새소리마저 잦아드는
가장이 아픈 관계로 이 집 아궁이는 숯을 만들어본 적 없다 보릿짚이나 밀짚이 주식이었다 지푸라기는 소여물로도 모자랐다 여자가 배워 뭐해! 바락바락 악써대는 국정교과서는 별식이었다 군불은 없었다 겨우 죽 끓일 정도였다 가장의 등골말고는 냉골이었다
제집으로 병 문안 온 듯 아니, 간병이나 하려고 태어난 듯 서성거리던 마른버짐들 어느 아궁이로 다 빨려 들어갔나 먹은 적도 없는 장작들이 흙벽 틈바구니마다 광대뼈처럼 불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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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내린 뒤 ㅡ이정록
개 밥그릇에 빗물이 고여 있다
흙먼지가 그 빗물 위에 떠 있다
혓바닥이 닿자 말갛게 자리를 비켜주는 먼지의 마음, 위로
퉁퉁 불은 밥풀이 따라 나온다
찰보동 찰보동 맹물 넘어가는 저 아름다운 소리
뒷간 너머, 개나리 꽃망울들이 노랗게 귀를 연다
밤늦게 빈집이 열린다 누운 채로, 땅바닥에 꼬리를 치는 늙은 개
밥그릇에 다시 흙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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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눈이별
고장 난 보일러를 뜯었다 쥐똥이 수북했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제 심장 박동 소리와 비슷했을까 절약 타이머에 맞춰 불길이 멎을 때마다 고 까만 눈동자는 뭐라고 깜박였을까 어미를 우러르는 새끼들의 눈망울도 별처럼 새록새록 젖어 있었으리라 쥐 죽은 듯이란 얼마나 한심한 말인가 작은 창 너머로 그가 물어 날랐을 차가운 양식과 시린 앞이빨이 떠올랐다 세간의 전부였던 똥 한 줌 남겨놓고 어디로 갔을까 세상 어딘가에 분명 사람 다 죽은 듯이란 말도 있으리라 불씨를 살리고 있는 추운 별들 점검해야 할 것이 하늘뿐일까 파르라니, 작은 눈망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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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 ㅡ이정록
오줌을 누다 보고 말았다 담쟁이 이파리가 끝내 가지려 했던 것 보고야 말았다, 城壁 틈바구니에 신방돌이며 맷돌이 박혀있었다 돌확이며 망주석도 어깃장 처박혀 있었다 제 집의 뿌리를 캐서 이고지고 온 사람들, 幽宅만은 안 된 다고 땅을 치던 사람들 담쟁이 넝쿨은 한사코 지붕을 얹겠단 건가 푸른 지붕 아래에다 이승과 저승 다 들여놓고 상석에 젯밥이라도 올리겠단 건가 맷돌의 퀭한 굇구멍이 손잡이를 가늠하는지 내 거시기를 훔쳐본다, 城이란 박복한 아낙의 광대뼈 위에 돌덩어리로 쌓아올린 눈물샘인 것을 하늘만 우러르는 우멍눈, 착한 돌눈썹인 것을 담쟁이는 짐짓 초록눈썹으로 덮어보겠단 건가 망주석 하나만 양기를 모아도 맷돌의 녹슨 중쇠가 암쇠 하나만 궁합을 봐도 우르르, 말발굽소리 들려올 것만 같은데
*굇구멍 : 창, 삽, 괭이, 맷돌 등의 자루를 박는 구멍
― 〈문학들〉2006,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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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겨울 강, 그 두꺼운 얼음종이를 바라보기만 할 뿐 저 마른붓은 일획이 없다 발목까지 강줄기를 끌어올린 다음에라야 붓을 꺾지마는, 초록 위에 어찌 초록을 덧대랴 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 일획도 없이 강물을 찍고 있을 것이지마는, 오죽하면 붓대 사이로 새가 날고 바람이 둥지를 틀겠는가마는, 무릇 문장은 마른 붓 같아야 한다고 그 누가 一筆도 없이 揮之하는가 서걱서걱, 얼음종이 밑에 손을 넣고 물고기비늘에 먹을 갈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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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ㅡ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2006년>
어른의 말씀을 받아 적기만 해도 시가 될 때가 많다. 주름살 사이에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이다. 짧고 두서없이 울퉁불퉁 불거져 나온 말이지만 마늘처럼 매운 맛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어머니가 무심코 던진 말씀으로부터 태어났다. 허리가 아픈 어머니는 앉아 쉴 곳이 눈에 밟혔을 것이다. 어디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허리를 펴고 싶었을 것이다. 이 시가 심상찮은 것은 의자를 내놓을 데를 태연무심하게 열거하는 어머니의 품 큰 생각에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꽃과 열매와 참외밭과 호박과 망자(亡者)에게도 의자를 내주어야 한다는 그 우주적인 마음 씀씀이에 있다. 공생과 배려에 기초한 이런 모성적 마음씨는 식구를 다 거둬가며 밥을 먹여온 삶의 연륜에서 생겨난 것이리라. (우리의 어머니가 아니라면 누가 인생을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것이라고 먹줄을 대듯 명쾌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정록(44) 시인의 시에는 모자(母子)가 자주 등장한다. 시 '꽃벼슬'에서는 한식날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를 모자가 찾아간다. 아들은 무덤에 난 쥐구멍에다 꽃다발을 꽂아드린다. "꽃밥 한 그릇 바치는 것이다". 어머니는 쥐구멍에 술잔을 따르며 "새끼들이 술 갖고 올 줄 알고/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있구나"라고 익살맞게 말씀하신다. 아들이 "무덤 안에서 뭔 소리 들려요"라고 너스레를 떨자 어머니는 농(弄)으로 "그랴 니 불알 많이 컸다고 그런다"라시며 "아예 술병을 쥐구멍에 박아놓는다". (모자 사이에 오가는 이 능청능청한 대화여.)
이정록 시인의 시는 이처럼 곰살가운 살내가 수북하니 풍긴다. 그의 시를 읽으면 옷 벗고 대중목욕탕에 함께 들어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사랑은 울컥이란 짐승의 둥우리"라고 말하는 그는 안간힘을 쓰며 사는, 몸살 앓는 사람들의 머리맡으로 가 슬그머니 앉는다. 식은땀을 흘리는 자식의 머리맡에서 차가운 물수건을 들고 꼬박 밤을 새던 어머니처럼.
그는 시와 삶의 거리를 18.44미터라고 말한다. (18.44미터는 투수판에서 홈 플레이트까지의 거리이다.) 18.44미터가 곧 "너와 나, 사랑과 이별, 탄생과 죽음의 거리"라고 말한다. 그만큼 그의 시는 삶을 정면으로 팽팽하게 응시한다. 삶에 근거해 삶의 현장에서 그의 시는 발발한다.
"내 꿈 하나는 방방곡곡 문 닫은 방앗간을 헐값에 사들여서 술집을 내는 것"('좋은 술집')이라고 말하는 시인. 가난하고 쓸쓸한 사람들에게 공짜 술도 나눠주고 봉지쌀도 나눠주고 싶다는 시인. 그는 소년교도소에 가서 한문을 가르치기도 하는 천안 중앙고등학교 교사이다. ㅡㅡㅡㅡ
도깨비기둥 ㅡ이정록
당신을 만나기 전엔, 강물과 강물이 만나는 두물머리나 두내받이, 그 물굽이쯤이 사랑인줄 알았어요.
피가 쏠린다는 말, 배냇니에 씹히는 세상 어미들의 젖꼭지쯤으로만 알았어요. 바람이 든다는 말, 장다리꽃대로 빠져나간 무의 숭숭한 가슴정도로만 알았어요.
당신을 만난 뒤에야, 한밤 강줄기 하나가 쩡쩡 언 발을 떼어내며 달려오다가, 또 다른 강물의 얼음 진군(進軍)과 맞닥뜨릴 때! 그 자리, 그 상아빛, 그 솟구침, 그 얼음울음, 그 빠개짐을 알게 되었지요.
마지막 숨통을 맞대고 강물 깊이 쇄빙선(碎氷船)을 처박은 자리, 흰 뼈울음이 얼음기둥으로 솟구쳤지요. 당신을 만난 뒤에야, 그게 바로 도깨비기둥이란 걸 알았지요. 열길 물속보다 깊은 한 길 마음만이 주춧돌을 놓을 수 있다는 것을. 강물은 흐르는 게 아니라 쏠리는 것임을.
알았지요, 다 얼어버렸다는 것은 함께 가겠다는 것. 금강(金剛)기둥으로 지은 울음 한 채, 하늘주소까지.
--포털싸이트 <다음>2008.12.1 -시, 사랑에 빠지다 ----------------------------------------------- <시작노트> 북한강과 남한강이 얼음으로 진격하다 만나는 자리에 도깨비기둥이 솟구친다. 기둥 하나 깎는데 일 년이다. 하지만 봄이 되면 다시 푸른 강물이다. 그저 쏠림뿐이다. 그 상아빛 뼈 울음에 주춧돌이 되리니, 사랑아. 하늘주소까지 함께 흘러가자. (이정록)
ㅡㅡㅡㅡㅡㅡㅡ 동시
꿀잠 (외2편) 이정록
우리 학교 담장을 모두 없앴다. 꽃동산에 원두막도 지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마실 오시고 동네 강아지들 운동장에 가득하다. 개구멍이 없어지자 꿀밤도 사라졌다. 다리는 울타리 밖에서 버둥버둥 눈알은 담장 안에서 뱅글뱅글 쿵쾅거리던 가슴도 없어졌다. 여러분이 똥갭니까, 도둑입니까? 교장 선생님의 꾸중도 사라졌다. 집에서 교실까지 지름길이 생겼다. 아침마다 오 분은 더 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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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내 콧구멍
앞니 두 개 뽑았다. 대문니가 사라지자 말이 술술 샌다. 침이 질질 흐른다. 웃으면 안 되는데 애들이 자꾸만 간지럼 태운다. 갑자기 인기 짱이다. 귀찮아서 죽겠다. 입 다물고 도망만 다닌다. 콧물 들이마시랴 숨 쉬랴 콧구멍만 바쁘다.
그래 잘 견디고 있다 여기 동쪽 바닷가 해송들, 너 있는 서쪽으로 등뼈 굽었다 서해 소나무들도 이쪽으로 목 휘어 있을 거라, 소름 돋아 있을 거라, 믿는다
그쪽 노을빛 우듬지와 이쪽 소나무의 햇살 꼭지를 길게 이으면 하늘이 된다 그 하늘 길로, 이 마음 뜨거운 덩어리가 타고 넘는다 송진으로 봉한 맷돌편지는 석양만이 풀어 읽으리라
아느냐? 단 한 줄의 문장, 수평선의 붉은 떨림을 혈서는 언제나 마침표부터 찍는다는 것을
식구
그릇 기(器)라는 한자를 들여다보면 개고기 삶아 그릇에 담아놓고 한껏 뜯어먹는 행복한 식구(食口)들이 있다 작은 입이 둘이고 크게 벌린 입이 둘이다 그중 큰 입 둘 사라지자 울 곡(哭)이다 식은 개고기만 엉겨붙어 있다 개처럼 엎드려 땅을 치는 통곡이 있다
아니다, 다시 한참을 들여다보면,
기(器)란 글자엔 개 한 마리 가운데에 두고 방싯방싯 웃는 행복한 가족이 있다 옹기종기 그릇이 늘어나는 경사가 있다 곡(哭)이란 글자엔, 일터로 나간 어른 대신 남은 아이들 지키느라 컹컹 짖는 개가 있다 집은 제가 지킬게요 저도 밥그릇 받는 식구잖아요 밤하늘 별자리까지 흔들어대는 목청이 있다
홍어
욕쟁이 목포홍어집 마흔 넘은 큰아들 골수암 나이만도 십사 년이다 양쪽다리 세 번 톱질했다 새우눈으로 웃는다
개업한 지 이십팔 년 막걸리는 끓어오르고 홍어는 삭는다 부글부글,을 벌써 배웅한 할매는 곰삭은 젓갈이다
겨우 세 번 갔을 뿐인데 단골 내 남자 왔다고 홍어 좆을 내온다 남세스럽게, 잠자리에 이만한 게 없다며 꽃잎 한 점 넣어준다
서른여섯 뜨건 젖가슴에 동사한 신랑 묻은 뒤로는 밤늦도록 홍어 좆만 주물럭거렸다고 만만한 게 홍어 좆밖에 없었다고 얼음막걸리를 젓는다
얼어 죽은 남편과 아픈 큰애와 박복한 이년을 합치면, 그게 바로 내 인생의 삼합이라고 소주병을 차고 곁에 앉는다
우리 집 큰놈은 이제 쓸모도 없는 좆만 남았다고 두 다리보다도 그게 더 길다고 막걸리거품처럼 웃는다
— 시집ㆍ정말ㆍ -------------------
옷 (외 1편) ㅡ 이문영에게 ㅡ이정록
집을 뛰쳐나온 열세 살 때 그는 시다였다 양복점 조수였다 재단대에서 꼽추 잠을 잤다 그렇게나 입고 싶었던 교복과 교련복에 단추를 달았다 피기도 전에 구겨진 청춘에 다림질했다 그가 재단하고 남긴 자투리 종이에 나는 수학 문제를 풀고 시를 쓰고 연애편지를 썼다 가위질 된 종이에는 초크 자국과 연필 자국이 선명했다 간혹 핏방울도 찍혀 있었다 그 초크 자국과 연필 선이 모여 사람의 길이 되리라 악수를 건넸던가 치수를 재던 대나무 자가 가로등으로 서리라 그의 어둠과 그늘을 믿었던가 어린 가슴에 심어뒀던 살얼음의 꿈들을 성냥불처럼 조마조마 지켜온 나날들 그 옛날 야근하며 꿰맸던 옷들이 지금은 낡고 해져 버림받았다고 해도 그 옷들이 땀으로 범벅이 되며 세상을 세웠다고 믿는다. 그는 골무처럼 아픈 손끝을 믿는다 옷은 제 상처로 사람을 철들게 한다 한 땀 한 땀 옷을 꿰매던 사람 누더기 많은 어둔 세상에 등 하나 내다 간다 (그의 나이 마흔세 살, 오늘은 그가 장애인 후원회장으로 취임하는 날이다) 불꽃은 작고 바람은 차다 그의 손 곁으로 수많은 손들이 다가와 더불어 작은 불빛을 감싸 안는다 그러자 불꽃 심지가 허공에다 쓴다 세상의 하느님은 언제나 시다다 조수다 기레빠시다
비 그친 뒤
안마당을 두드리고 소나기 지나가자 놀란 지렁이 몇 마리 서둘러 기어간다 방금 알을 낳은 암탉이 성큼성큼 뛰어와 지렁이를 삼키고선 연필 다듬듯 부리를 문지른다
천둥 번개에 비틀거리던 하늘이 그 부리 끝을 중심으로 수평을 잡는다 개구리 한 마리 안마당에 패대기친 수탉이 활개 치며 울어제끼자 울 밑 봉숭아며 물앵두 이파리가 빗방울을 내려놓는다 병아리들이 엄마 아빠 섞어 부르며 키질 위 메주콩처럼 몰려다닌다
모낸 무논의 물살이 파르라니 떨린다 온몸에 초록 침을 맞은 하늘이 파랗게 질려 있다 침 놓은 자리로 엄살엄살 구름 몇이 다가간다 개구리 똥꼬가 알을 낳느라고 참 간지러웠겠다 암탉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논 쪽을 내다본다
—시집 『의자』(2006)
눈
이정록
망치질하다가 보았습니다 못 머리에 십자가 그득했습니다
못을 폅니다 굽은 목덜미마다 칼금 날카롭습니다 빗맞은 순간, 숨통이 눈동자가 된 겁니다
허방에 떠 있던 발끝을 들여다보던 눈입니다 한 번 부릅뜬 뒤로 여닫은 적 없던 눈입니다
녹물은 없습니다 눈물 그친 적이 없든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든지
못을 뽑다가 알았습니다 잘못 박힌 못, 머리마다 십자가가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현대문학》 2011년 3월호
------------------물소리를 꿈꾸다 ㅡ이정록
번데기로 살 수 있다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한겨울에도, 뿌리 끝에서 우듬지 끝까지 줄기차게 오르내리는 물소리 고치의 올 올을 아쟁처럼 켜고 나는 그 소리를 숨차게 쟁이며 분꽃 씨처럼 늙어갈 것이다 고치 속이, 눈부신 하늘인양 맘껏 날아다니다 멍이 드는 날갯죽지 세찬 바람에 가지를 휘몰아 제 몸을 후려치는 그의 종아리에서 겨울을 나고 싶다, 얼음장 밑 송사리들 버드나무의 실뿌리를 젖인 듯 머금고 그 때마다 결이 환해지는 버드나무 촬촬, 물소리로 울 수 있다면 날개를 달아도 되나요? 슬몃 투정도 부리며 버드나무와 한 살림을 차리고 싶다 물오른 수컷이 되고 싶다
껍질이 벗겨진 나무토막엔 방사형으로 뻗어간 주름 무늬가 있는데, 속살을 파고든 이 주름 한가운데엔 뻗어나간 주름보다 조금 더 깊게 팬 골이 있다. 지인은 이 골이 바로 딱정벌레나 노린재 같은 곤충들이 월동을 한 흔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주름은 무엇일까? 곤충이 나무를 갉아먹은 흔적? 곤충이 낳은 알들이 부화한 뒤 기어간 흔적? 아무려나, 번데기 주름 같은 이 주름 무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내 머릿속엔 아쟁의 현과도 같은 음들이 태어난다. '한겨울에도, 뿌리 끝에서 우듬지 끝까지/ 줄기차게 오르내리는 물소리', 혼자 월동하는 것도 힘든데 세든 곤충들을 위해 버드나무가 불러주는 자장가가 그 곡조다. 유모가 된 나무의 자장가는 얼음장 아래 송사리가 실뿌리를 무는 것만으로도 환해지는 결을 갖고 있다. 이 부드러운 결이 겨우내 갈 곳 없는 곤충들을 품어주는 힘이 된다. 실뿌리를 쭉 빨면 우듬지 끝까지 찌르르 젖이 돌 것 같은 나무속에서 누군들 일가를 꾸리고 싶지 않을까. 속살을 파 먹힌 나무토막을 보니, 성충이 된 곤충의 몸을 빌려 하늘을 날아다닐 나무가 생각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이렇게 얼마쯤은 다들 누군가에게 세를 주고, 동시에 세를 살다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손택수 (시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갈대꽃 ㅡ이정록
하늘을 자꾸 올려다보니께 하늘 좀 그만 쳐다보라고 허리가 꼬부라지는 거여. 하느님도 주름살 보기가 민망할 거 아니냐? 요즘엔 양말이 핑핑 돌아가야. 고무줄 팽팽한 놈으로 몇 족 사와야겄다. 양말 바닥이 발등에 올라타서는 반들반들 하늘을 우러른다는 건, 세상길 그만 하직하고 하늘길 걸으란 뜻 아니겄냐? 갈 때 되면, 입 꼬리에도 발바닥에도 저승길인 양 갈대꽃이 허옇게 피야.
------------------------ 따뜻한 시선으로 삶을 바라보는 이정록 시인의 작품입니다. 근래에는 그 자체가 학교일 수밖에 없는 어머니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를 시로 풀어내고 있지요. 스쳐 지나듯이 던지는 어머니의 말 한마디가 명강의입니다. 어머니는 허리가 꼬부라지거나 양말이 자꾸 돌아가는 일상적 경험에서 어떤 의미를 읽어내고 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지는 어머니의 말은 큰 스님의 법어처럼 늘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요. 이것은 기본적으로 시인의 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기본적으로 시인이라 할 수 있지요. 연륜을 쌓는다는 것은 어쩌면 사소한 것으로부터 소중한 의미를 읽어내는 시 쓰기일지도 모릅니다. 박현수(시인, 경북대 교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나비수건 -어머니학교 33 ㅡ 이정록
고추밭에 다녀오다가 매운 눈 닦으려고 냇가에 쪼그려 앉았는데 몸체 보시한 나비 날개, 그 하얀 꽃잎이 살랑살랑 떠내려가더라. 물속에 그늘 한 점 너울너울 춤추며 가더라. 졸졸졸 상엿소리도 아름답더라. 맵게 살아봐야겠다고 싸돌아다니지 마라. 그늘 한 점이 꽃잎이고 꽃잎 한 점이 날개려니 그럭저럭, 물 밖 햇살이나 우러르며 흘러가거라. 땀에 전 머릿수건 냇물에 띄우니 이만한 꽃그늘이 없지 싶더라. 그늘 한 점 데리고 가는 게 인생이지 싶더라.
—《시산맥》 2012년 가을호 -------------
그늘 선물 (외 2편) ㅡ어머니학교 21 ㅡ이정록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마라. 왼손잡이가 이 밭 저 밭 코뚜레 잡아채도 소 콧구멍은 오른쪽으로 삐뚤어지지 않는다. 오른손잡이가 이 장바닥 저 장바닥 고삐 몰아쳐도 화등잔만한 눈알이 왼편으로 뒤집히지 않는다. 워낭 소리도 코쭝배기에 송알송알 맺힌 땀방울도 어느 한쪽으로만 쏠리지 않는 법이여. 낭창낭창 코뚜레만 파이다 동강나는 거여. 땀 찬 소 끌고 집으로 돌아올 때 따가운 햇살 쪽에 서는 것만은 잊지 마라. 소 등짝에 니 그림자를 척하니 얹혀놓으면 하느님 보시기에도 얼마나 장하겄냐?
인물 ㅡ어머니학교 41
생선하고 여자는 자고로 물이 좋아야 하는데 어떠냐?
—아직은 무논 참배미예요.
다행이다. 물 얘기 꺼낸 김에 우스갯소리 하나 하랴?
—곗돈 타셨나, 왜 이리 좋으시데요?
사내는 요물에 죽고 계집은 양물에 죽고 일소는 여물만 우물거리다 죽는 거여.
—재밌네요. 인삼밭에 일 나갔다가 귀동냥하셨어요?
구정물에 정신 빠뜨리지 말고 너는 그저 인물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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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부군신위 ㅡ어머니학교 60
가축하고 빗대는 건 얼토당토않다만 외양간 송아지가 아비찾든? 열두 마리 돼지 새끼들 가운데 아버지 찾아달라고 식음 전폐한 놈 있든? 아버지라면 꼴도 보기 싫다고, 니가 작대기로 장독 깨부쉈을 때가 열여섯 살 때다. 우리 집 묵은 장맛이 그때 대가 끊겼다. 늦잠 자는 새끼들 군불이나 지펴주고 대처로 나갈 즈음 대문이나 열어주는 거야. 아비는 다 쓸쓸한 거다. 공부 못해서 외국 안 나가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애들 공부 못하는 것도 복이다. 새끼들 우등생이라고 으스대고 살았다만 무녀이 한 놈만 있었어도 어미 혼자 농사짓겄냐? 허수아비도 짝으로 서 있는 판에.
—시집『어머니학교』 -------------- 마지막 편지 ㅡ이정록(1964∼)
가지를 많이 드리웠던 햇살 쪽으로 쓰러진다. 나무는 싹눈과 꽃눈이 쏠려 있던 남쪽으로 몸을 누인다. 한곳으로만 내닫던 몸과 마음을 잡아당기려 나의 북쪽은 한없이 졸아들었다.
이제 하늘 가까웠던 잔가지와 수시로 흔들리던 그늘과 새봄까지 다 가지고 간다. 그루터기는 데리고 갈 수 없어 비탈에 남겨 놓는다. 멍하니 하늘 한가운데만 올려다볼 나이테, 그 외눈에 오래도록 진물 솟구치리라. 거기부터 썩어가리라.
네 눈길 없이는 다시는 싹 나지 않으리라.
......................................... 둘째 연은 이 시를 쓰게 된 모티브이기도 하다. 동네 비탈인지 산비탈에서 화자는 나무가 바싹 베어진 흔적, 그루터기를 본다. 화자가 눈을 돌리지 못할 만큼 커다란 그루터기였을 테다. ‘멍하니 하늘 한가운데만 올려다볼 나이테, 그 외눈에 오래도록 진물 솟구치리라.’ 나이테는 나무의 내부다. 동물만큼은 아니지만, 식물도 감춰져 있어야 할 부위가 드러나 있는 건 섬뜩하다. 베어진 지 얼마 안 돼 눈부시게 깨끗한 나무의 속살, 차츰 거뭇해지리라. 물관과 체관이 한동안 부질없이, 애처롭게 작동하리라. 나무를 벤 이, 아니 나무를 베라고 지시한 이는 알까. 그 나무의 ‘하늘 가까웠던 잔가지와 수시로 흔들리던 그늘과 새봄까지 다’ 알고서도 그러는 걸까. 베어져 나간 나무 그루터기를 우연히 마주친 화자는 그 처연함에 전율하면서 거기 제 모습을 겹친다. 둘째 연의 나무는 쓰러뜨려진 나무인데 첫 연의 나무는 스스로, 아니면 저절로 쓰러지는 나무다. ‘햇살 쪽으로’ ‘남쪽으로’, ‘싹눈과 꽃눈이 쏠려 있는’ 나무는 화자 자신이다. 그런데 화자는 ‘한곳으로만 내닫던 몸과 마음을 잡아당기려’ 했다. 화자는 실제 나무가 아니기에 욕동대로만 살 수 없는 것이다. 이성과 양식의 냉엄함으로 한없이 졸아들면서도 자꾸 기울어지다가, 견디지 못하여 그 나무 밑동을 제 손으로 싹둑 베어버렸나 보다. 그랬으면서도 화자인 나무는 ‘네 눈길 없이는 다시는 싹 나지 않으리라’고 미련을 보인다. 실제 나무는 그루터기만 남은 뒤에는 무슨 수를 써도 다시는 싹 나지 못한다. 황인숙 (시인) ㅡㅡㅡㅡㅡㅡㅡㅡ
사내 가슴 (외 1편) ㅡ아버지학교 1 ㅡ이정록
아들아, 저 백만 평 예당저수지 얼음판 좀 봐라. 참 판판하지? 근데 말이다. 저 용갈이* 얼음장을 쩍 갈라서 뒤집어보면, 술지게미에 취한 황소가 삐뚤빼뚤 갈아엎은 비탈밭처럼 우둘투둘하니 곡절이 많다. 그게 사내 가슴이란 거다. 울뚝불뚝한 게 나쁜 것이 아녀, 물고기 입장에서 보면, 그 틈새로 시원한 공기가 출렁대니까 숨 쉬기 수월하고 물결가락 좋고, 겨우내 얼마나 든든하겄냐? 아비가 부르르 성질부리는 거, 그게 다 엄니나 니들 숨 쉬라고 그러는 겨. 장작불도 불길 한번 솟구칠 때마다 몸이 터지지, 쩌렁쩌렁 소리 한번 질러봐라, 너도 백만 평 사내 아니냐?
——— * 용갈이 : 용이 밭을 간 것과 같다는 뜻으로 두꺼운 얼음판이 갈라져 생긴 금.
새 아버지학교 9
숫눈이 내렸구나. 마당 좀 봐라. 아직 녹지 않은 흰 줄 보이지? 빨랫줄 그늘 자리다. 저 빨랫줄도 그늘이 있는 거다. 바지랑대 그림자도 자두나무처럼 자랐구나. 아기 주먹만한 흰 새 다섯 마리는, 빨래집게 그림자구나. 햇살 받으면 새도 날아가겠지. 젖은 자리도 흔적 없겠지. 저 흰 그늘, 혼자만 녹지 못하고 잠시 멈칫거리는 시린 것, 가슴의 성에로 쌓이는 저 아린 것, 조런 실타래가 엉켜서 마음이 되는 거다. 빨래집게처럼 움켜잡으려던 이름도 미음처럼 묽어짐을, 고삭부리* 되고서야 깨닫는구나. 그리움도 설움도 다 녹는 거구나. 저리고 아린 가슴팍이 눈송이로 뭉친 새의 둥우리였구나. 깃털 하나 남지 않은 마당 좀 보아라. 약봉지 같은 햇살 좀 봐라.
——— * 고삭부리 : 몸이 약해서 늘 병치레하는 사람.
—시집『아버지학교』(2013)에서 ------------- 제8회 윤동주문학 대상에 이정록의 「영혼의 거처」 이정록 시인(49세)이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와 계간 서시가 주관하는 제8회 윤동주 문학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수상작은 시 ‘영혼의 거처’ 등 10편. 젊은 작가상은 김병호 시인(수상작 '저녁의 계보'는 "좋은 시 읽기"방에 소개됐음), 민족상은 의사 오인동 씨, 예술상은 성악가 엄정행 씨에게 돌아갔다. 대상 상금은 1000만 원이며, 시상식은 9월 28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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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문학 대상 수상작)
영혼의 거처 ㅡ이정록
개구리의 눈은 쌍무덤이다 저승을 열었다 닫았다 이승 쪽에 긴 혀를 내민다 오뉴월에 상을 치러본 사람은 안다 곡비哭婢의 무덤이다 등에는 산판 작업복을 배에는 상복을 지어 입었다
개구리의 영혼은 뒷다리에 있다 넓적다리의 무게가 없다면 물 밖으로 눈을 내놓을 수 없다 먼 하늘로 날아가고 싶은가 물밑 하늘에 배를 대고 구름의 능선을 넘는 상여처럼 비스듬하게 떠있다 뒷다리에서 얼이 빠져나가면 수장水葬이다 상복이 하늘 쪽으로 뒤집힌다
사람의 영혼도 머리나 심장에 있는 게 아니다 허벅지에 있다 위엄 있게 죽는 게 소원이지만 병실에 눕혀진 채 자신의 눈자위에 무덤을 파는 사람들 나날이 솟구치는 *사성莎城, 침상 머리맡 좀 올려달란 말과 죽을 것 같다는 말이 남은 열 마디 가운데에 여덟아홉이다 귓구멍이며 혀뿌리까지 구름이 몰려들건만 새 다리를 허우적이며 바깥세상에 시비도 걸고 싶다
침대 좀 세워 줘! 꺼져드는 묘혈墓穴을 링거 줄이 잡아당긴다 수액이 스미는 만큼 가라앉는 뒤통수, 이장移葬한 무덤자리처럼 베개도 쉬이 꺼진다 땅땅했던 영혼이 졸아들기 때문이다 등짝 어디께로 운석이 떨어진다 화상이 깊다 등창燈窓, 부화의 실핏줄이 번지기 시작한다 뒤통수가 어린 새의 부리 같다
세웠던 침상을 뉘고, 야윈 새처럼 등을 보이며 엎드린다 비상을 도우려는 의사와 간호사의 흰 날개깃이 바빠진다 죽음은 영혼을 부화시키는 일, 허벅다리에서 배까지 올라온 영혼의 새가 머릿속으로 치고 올라온다 이윽고 숨이 멎는다 발끝부터 정수리까지 흰 깃털이 스르륵 덮인다 수평을 잡고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 구름장葬에서 다리가 긴 빗줄기가 내린다
장례식장 사층, 신생아실에선 겨우 발가락만 내민 올챙이들이 물장구를 친다 작은 주둥이가 햇살에 마르지 않도록 탯줄의 이똥이 천천히 떨어진다, 강보에 누워 다리를 들고 꼼작인다 첫 걸음마는 날갯짓을 닮으리라 발가락 끝마디에 물방울 추를 매달고 허공에 걸음마를 내딛는 어린 영혼들
——— *사성(莎城) : 묘혈(墓穴)을 보호하기 위해 무덤 뒤에 반달 모양으로 둘러막은 둔덕.
—《실천문학》 2012년 겨울호
ㅡㅡㅡㅡㅡㅡ 이정록 시인이 작년에 낸 시집 '아버지 학교'에 실린 시 '연탄'이 떠오른다.
'아비란 연탄 같은 거지/ 숨구멍이 불구멍이지/ 달동네든 지하 단칸방이든/ 그 집,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한숨을 불길로 뿜어 올리지/ 헉헉대던 불구멍 탓에/ 아비는 쉬이 부서지지/ 갈 때 되면 그제야/ 낮달처럼 창백해지지'
이정록 시인은 쉰여섯에 세상을 뜬 아버지의 삶을 한겨울 연탄에 비유했다. 아버지는 식구들이 떨지 않도록 온몸을 태운 연탄 같았다. 한겨울에도 결코 얼지 않는 생명의 '불구멍'이었다. 집의 가장 낮은 곳에서 집을 훈훈하게 덥힌 연탄이었다. 그런 연탄이 잿덩이가 되듯, 아버지는 부서지기 쉬운 잿빛 인생이 됐다. 헉헉대며 살았기 때문이다. 시인의 아버지는 연탄재처럼 창백해지고 나서야 더 숨 가쁘지 않아도 됐다. 연탄을 갈 듯이, 아비도 갈 때가 있다.
그는 간병인을 고용했지만 밤에는 직접 부친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다음 날 낮엔 틈틈이 소설을 쓰며 지냈다. 1254일 동안 부친 곁을 지키며 살았다. 그는 "사그라져 가는 육체의 추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이 내 속에 생생하게 자국을 남기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고 회상했다.
그가 간병기를 쓰게 된 동기는 사회적 차원을 지닌다. "우리 사회가 노화와 죽음에 대해 제대로 성찰하자"는 게 책의 주제다. 초고령 환자들의 인위적 생명 연장보다 그들이 품위 있게 죽음을 맞도록 하는 시스템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아버지에게 감사했다. 아버지의 투병을 보며 노화와 죽음을 깊이 공부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통 말이 없는 분이었던 아버지가 나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천수호 시인은 최근 시집 '우울은 허밍'에서 치매를 앓는 아버지를 둔 딸의 안타까운 심정을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딸의 얼굴을 첫사랑 연인으로 착각. 아버지가 '내게 전에 없이 따뜻한 손 내밀며/ 당신, 이제 당신 집으로 돌아가요'라고 하면, 딸은 '가장 쓸쓸한 애인이 되어/ 내가 딸이었을 때의 미소를 버리고/ 아버지 연인이었던 눈길로/ 아버지 마지막 손을 놓는다'고 했다.
손택수 시인의 신작 시집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는 2년 전에 타계한 아버지에게 바친 책이다. 시인의 아버지는 지게꾼으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아버지는 숨을 거두기 전 홀로 목욕을 하곤 달력 뒷장에 유언 한 줄을 적었다. "잘 살고 간다, 화장 뿌려, 안녕."
그러고 나서 아버지는 눈을 감았는데, 아버지의 등에 평생 박였던 굳은살인 '못'이 사라졌다. 시인은 기쁨과 회한을 함께 읊었다. '못도 산 자에게 박히는 것, 허리가 굽었던 사람도/ 죽으면 몸이 곧게 펴진다고 하더니/ 한평생 지게꾼으로 산 양반/ 아들도 해드리지 못한 안마를 죽음이 해드린 것인가.' 시인은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혼자서 마지막 의식을 치르시던 아버지의 고독한 밤이 생각났다'고 탄식했다.
그는 아버지 유골을 강물에 뿌렸다. 강물은 겨울에 꽁꽁 얼어붙었다. 마치 시인에게 '어여 건너라'고 권하는 듯했다. 그 얼음은 아버지 음성의 형상화처럼 보였다. '그 옛날 젊으나 젊은/ 당신의 등에 업혀 건너던 냇물'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연의 일부가 돼서도 아들을 업고 물을 건너고 싶었나 보다. 아니면 아들이 아버지의 등에 업혔던 시절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거나.
연말연시가 되면 지금껏 이승을 떠난 아버지들이 철새 떼처럼 되돌아오기도 한다. 해가 바뀌며 자식들의 얼굴에도 주름살이 늘거나 연륜의 고랑이 깊어지기 때문이다. 거울에 비친 자식의 얼굴에서 아버지가 서서히 인화(印畵)되는 날이 잦아진다. 그렇게 삶은 계속 흐른다. (*) ㅡㅡㅡㅡ
머리맡에 대하여 ㅡ이정록-
1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머리맡이 있지요 기저귀 놓였던 자리 이웃과 일가친척의 무릎이 다소곳 모여 축복의 말씀을 내려놓던 자리에서 머리맡은 떠나지 않아요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던 첫사랑 때나 온갖 문장을 불러들이던 짝사랑 때에도 함께 밤을 새웠지요 새벽녘의 머리맡은 구겨진 편지지 그득했지요 혁명시집과 입영통지서가 놓이고 때로는 어머니가 놓고 간 자리끼가 목마르게 앉아있던 곳 나에게로 오는 차가운 샘 줄기와 잉크병처럼 엎질러지던 모든 한숨이 머리맡을 에돌아 들고났지요 성년이 된다는 것은 머리맡이 어지러워지는 것 식은 땀 흘리는 생의 빈칸마다 머리맡은 차가운 물수건으로 나를 맞이했지요 때론 링거 줄이 내려오고 금식 팻말이 나붙기도 했지요
2 지게질을 할 만 하자/ 내 머리맡에서 온기를 거둬 가신 차가운 아버지/ 설암에 간경화로 원자력 병원에 계실 때/ 맏손자를 안은 아내와 내가 당신의 머리맡에 서서/ 다음 주에 다시 올라올게요 서둘러 병원을 빠져나와 서울역에 왔을 때/ 환자복에 슬리퍼를 끌고 어느새 따라 오셨나요/ 거기 장항선 개찰구에 당신이 서 계셨지요/ 방울 달린, 손자의 털모자를 사 들고/ 세상에서 가장 추운 발가락으로 서울역에 와 계셨지요/ 식구들 가운데 당신의 마음이 가장 차갑다고 이십 년도 넘게 식식거렸는데/ 얇은 환자복 밖으로 당신의 손발이 파랗게 얼어있었죠/ 그 얼어붙은 손발, 다음 주에 와서 녹여드릴게요/ 그 다음 주에 와서/ ,/ 그,/ 그 다음 주에 와서 녹여드릴게요/ 안절부절이란 절에 요양오신 몇 달 뒤/ 아, 새벽 전화는 무서워요/ 서둘러 달려가 당신의 손을 잡자/ 누군가 삼베옷으로 꽁꽁 여며놓은 뒤였지요
3 이제 내가 누군가의 머리맡에서 물수건이 되고 기도가 되어야 하죠 벌써 하느님이 되신 추운 밤길들 쓸쓸하다는 것은 내 머리맡에서 살얼음이 잡히기 시작한 거죠 그래요 진리는 내 머리 속이 아니라 내 머리맡에 있던 따뜻한 손길과 목소리란 것을 알고 있지만 말이에요 다음 주에 다음 달에 내년에 내 후년에 제 손길이 갈 거예요 전화 한 번 넣을게요 소포가 갈 거예요 택배로 갈 거예요 울먹이다가 링거 줄을 만나겠지요 금식 팻말이 나붙겠지요 내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기도소리가 내 머리맡에서 들려오겠지요 끝내는 머리맡 혼자 남아 제 온기만으로 서성거리다가 가랑비 만난 짚불처럼 잦아들겠지요 검은 무릎을 진창에 접겠지요
ㅡ계간 ㆍ문예중앙ㆍ 2014년 겨울호 발표ㅡ ㅡㅡㅡㅡㅡㅡㅡㅡ
시 -어머니학교 10 ㅡ이정록-
시란 거 말이다 내가 볼 때, 그거 업은 애기 삼 년 찾기다. 업은 애기를 왜 삼 년이나 찾는지 아냐? 세 살은 돼야 엄마를 똑바로 찾거든. 농사도 삼 년은 부쳐야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며 이 빠진 옥수수 잠꼬대 소리가 들리지. 시 깜냥이 어깨너머에 납작하니 숨어 있다가 어느 날 너를 엄마! 하고 부를 때까지 그냥 모르쇠하며 같이 사는 겨. 세쌍둥이 네쌍둥이 한꺼번에 둘러업고 젖 준 놈 또 주고 굶긴 놈 또 굶기지 말고. 시답잖았던 녀석이 엄마! 잇몸 내보이며 웃을 때까지.
ㅡ 시집ㆍ어머니학교ㆍ열림원 ㆍ2012년 10월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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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그랑주머니 -어머니학교 1
노각이나 늙은 호박을 쪼개다 보면 속이 텅 비어 있지 않데? 지 목 부풀려 씨앗한테 가르치느라고 그런 겨. 커다란 하늘과 맞닥뜨린 새싹이 기죽을까 봐, 큰 숨 들이마신 겨. 내가 이십 리 읍내 장에 어떻게든 어린 널 끌고 다닌 걸 야속게 생각 마라 다 넓은 세상 보여주려고 그랬던 거여. 장성한 새끼들한테 뭘 또 가르치겄다고 둥그렇게 허리가 굽는지 모르겄다. 뭐든 늙고 물러 속이 텅 빈 사그랑주머니를 보면 큰 하늘을 모셨구나! 하고는 무작정 섬겨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