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 - 도는 어제보다 깊으나 앞산은 더욱 첩첩하고
영원한 인간사랑 ・ 2023. 12. 17.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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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 도는 어제보다 깊으나 앞산은 더욱 첩첩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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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15. 05:14조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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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도는 어제보다 깊으나 앞산은 더욱 첩첩하고
가야면소재지에서 해인사 들목에 이르는 홍류동(紅流洞)계곡은 봄에는 꽃으로, 가을에는 단풍으로 물이 붉게 흐른다 하여 ‘홍류동’이란 이름이 붙었다. 해인사 들목까지 뻗어내려온 이 골짜기는 그 언저리의 울울창창한 숲도 숲이지만 속세의 소리를 끊어버리기라도 할 듯이 우렁차게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유별난 정취를 안겨주는 곳으로 유명하다. 계절에 따라 진달래와 철쭉꽃이 한 폭의 그림처럼 피어나고 녹음과 단풍의 계절 뒤엔 눈꽃이 정취를 일깨워주며 두 개의 폭포와 푸른 소가 기암절벽에 어우러진 곳에 농산정이란 아담한 정자가 있다.
홍류동계곡
가야면소재지에서 해인사 들목에 이르는 4킬로미터 길이의 계곡이다. 봄에는 꽃으로, 가을에는 단풍으로 물이 붉게 흐른다 하여 ‘홍류동(紅流洞)’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곳에서 최치원은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농산정은 최치원이 살던 시대의 정자는 아니고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최치원은 신라 말엽인 857년에 태어났다. 열두 살 때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던 최치원은 그곳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천재로 널리 알려졌던 그는 28세에 귀국하여 신라에서 아찬이라는 벼슬을 받았지만, 기울어가는 신라 조정의 어지러운 권력 다툼에 환멸을 느끼고 벼슬자리를 그만두었다. 그는 지리산과 가야산을 비롯하여 산수가 좋은 곳들을 찾아다니며 유유자적하다가 38세에 가족들을 데리고 이 산에 들어왔다. 그 후 최치원은 어느 날 가야산에서 갓과 신만 남겨놓고 신선이 되어 홀연히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람들이 치원대(致遠臺) 또는 제시석(題詩石)이라고 부르는 이곳의 바위에는 그가 지었다고 알려진 한시 한 수가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중첩한 산을 호령하며 미친 듯이 쏟아지는 물소리에
사람의 소리는 지척 사이에도 분간하기 어렵고
시비의 소리 귀에 들릴까 언제나 두려움에
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모두 귀먹게 했구나
그 뒤 조선시대의 이름 높은 선비였던 김종직은 다음과 같은 시로 홍류동의 급한 물살을 노래하며 최치원의 생을 애석해하였다.
그림 같은 무지개다리 급한 물결에 비치는데
다리 위 지나는 사람 발길을 조심한다
나의 옷 걷고 물 건너려는 것
그대는 웃지 마소
고운이 어찌 위태로운 길 밟았던가
해인사 일대는 고운 최치원에 얽힌 일화들이 많은데, 해인사의 여관촌이 있는 치인리도 최치원의 이름을 딴 ‘치원리’에서 비롯한 이름이라고 한다.
『택리지』에는 “가야산 바깥 가야천(伽倻川) 연변은 논이 대단히 기름져서 종자 한 말의 씨를 뿌리면 소출이 120~130두나 되며 아무리 적더라도 80두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그리고 물이 넉넉하여 가뭄을 모르고 밭에는 목화가 잘되어서 이곳을 의식(衣食)의 고장이라 일컫는다. 가야산 동북쪽의 만수동(萬水洞)도 깊고 긴 골짜기라서 복지(福地)라 하며, 세상을 피해서 살 만하다”라고 하였는데, 가야천은 고령읍에서 회천과 몸을 합한 뒤 흘러내려가 오광대의 고장 율지나루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한편 가야산의 북서쪽에 자리한 수도산(修道山, 1317미터)에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원조인 도선국사의 일화가 서려 있다. 도선국사가 청암사를 창건한 후 수도처를 찾아 수도산 내를 헤매다가 지금의 이 절터를 발견하고 어찌나 마음이 흡족하였는지 7일 밤낮을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명산 중에서도 절이 있는 산은 좋은 산이고 가장 좋은 터라고 옛사람들은 말하지 않았던가.
그때나 지금이나 수행자들이 끊임없이 몰려드는 이 수도암을 우담(愚潭) 정시한은 이렇게 평하였다. “절이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있으면서도 평평하고 넓게 트였으며, ······가야산을 정면으로 마주 보면서 산세는 둥글게 감싸여 있으니 참으로 도를 닦는 곳이라 하겠다. 봉우리의 흰 구름은 끊임없이 모였다 흩어지니 앞문을 열어두고 종일토록 바라보아도 그 의미가 무궁하여 참으로 절경이다.”
수도암 터는 풍수지리상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 즉 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인데, 멀리 보이는 가야산 상봉은 실을 거는 끌개 돌이 되고, 뜰 앞의 동ㆍ서 양쪽에 위치한 탑은 베틀의 두 기둥이 되며, 대적광전불상이 놓인 자리는 옥녀가 앉아서 베를 짜는 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수도암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한국전쟁 때 불타버렸던 것을 최근에야 크게 중창하였다. 절 건물로는 대적광전과 약광전, 나한전, 법전 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보물 제296호로 지정된 약광전 석불좌상과 보물 제297호인 삼층석탑 2기와 보물 제307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는 어제보다 깊으나 앞산은 더욱 첩첩하고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9 : 우리 산하,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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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하
도는 어제보다 깊으나 앞산은 더욱 첩첩하고
가야면소재지에서 해인사 들목에 이르는 홍류동(紅流洞)계곡은 봄에는 꽃으로, 가을에는 단풍으로 물이 붉게 흐른다 하여 ‘홍류동’이란 이름이 붙었다. 해인사 들목까지 뻗어내려온 이 골짜기는 그 언저리의 울울창창한 숲도 숲이지만 속세의 소리를 끊어버리기라도 할 듯이 우렁차게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유별난 정취를 안겨주는 곳으로 유명하다. 계절에 따라 진달래와 철쭉꽃이 한 폭의 그림처럼 피어나고 녹음과 단풍의 계절 뒤엔 눈꽃이 정취를 일깨워주며 두 개의 폭포와 푸른 소가 기암절벽에 어우러진 곳에 농산정이란 아담한 정자가 있다.
홍류동계곡
가야면소재지에서 해인사 들목에 이르는 4킬로미터 길이의 계곡이다. 봄에는 꽃으로, 가을에는 단풍으로 물이 붉게 흐른다 하여 ‘홍류동(紅流洞)’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곳에서 최치원은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농산정은 최치원이 살던 시대의 정자는 아니고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최치원은 신라 말엽인 857년에 태어났다. 열두 살 때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던 최치원은 그곳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천재로 널리 알려졌던 그는 28세에 귀국하여 신라에서 아찬이라는 벼슬을 받았지만, 기울어가는 신라 조정의 어지러운 권력 다툼에 환멸을 느끼고 벼슬자리를 그만두었다. 그는 지리산과 가야산을 비롯하여 산수가 좋은 곳들을 찾아다니며 유유자적하다가 38세에 가족들을 데리고 이 산에 들어왔다. 그 후 최치원은 어느 날 가야산에서 갓과 신만 남겨놓고 신선이 되어 홀연히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람들이 치원대(致遠臺) 또는 제시석(題詩石)이라고 부르는 이곳의 바위에는 그가 지었다고 알려진 한시 한 수가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중첩한 산을 호령하며 미친 듯이 쏟아지는 물소리에
사람의 소리는 지척 사이에도 분간하기 어렵고
시비의 소리 귀에 들릴까 언제나 두려움에
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모두 귀먹게 했구나
그 뒤 조선시대의 이름 높은 선비였던 김종직은 다음과 같은 시로 홍류동의 급한 물살을 노래하며 최치원의 생을 애석해하였다.
그림 같은 무지개다리 급한 물결에 비치는데
다리 위 지나는 사람 발길을 조심한다
나의 옷 걷고 물 건너려는 것
그대는 웃지 마소
고운이 어찌 위태로운 길 밟았던가
해인사 일대는 고운 최치원에 얽힌 일화들이 많은데, 해인사의 여관촌이 있는 치인리도 최치원의 이름을 딴 ‘치원리’에서 비롯한 이름이라고 한다.
『택리지』에는 “가야산 바깥 가야천(伽倻川) 연변은 논이 대단히 기름져서 종자 한 말의 씨를 뿌리면 소출이 120~130두나 되며 아무리 적더라도 80두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그리고 물이 넉넉하여 가뭄을 모르고 밭에는 목화가 잘되어서 이곳을 의식(衣食)의 고장이라 일컫는다. 가야산 동북쪽의 만수동(萬水洞)도 깊고 긴 골짜기라서 복지(福地)라 하며, 세상을 피해서 살 만하다”라고 하였는데, 가야천은 고령읍에서 회천과 몸을 합한 뒤 흘러내려가 오광대의 고장 율지나루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한편 가야산의 북서쪽에 자리한 수도산(修道山, 1317미터)에 우리나라 풍수지리학의 원조인 도선국사의 일화가 서려 있다. 도선국사가 청암사를 창건한 후 수도처를 찾아 수도산 내를 헤매다가 지금의 이 절터를 발견하고 어찌나 마음이 흡족하였는지 7일 밤낮을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명산 중에서도 절이 있는 산은 좋은 산이고 가장 좋은 터라고 옛사람들은 말하지 않았던가.
그때나 지금이나 수행자들이 끊임없이 몰려드는 이 수도암을 우담(愚潭) 정시한은 이렇게 평하였다. “절이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있으면서도 평평하고 넓게 트였으며, ······가야산을 정면으로 마주 보면서 산세는 둥글게 감싸여 있으니 참으로 도를 닦는 곳이라 하겠다. 봉우리의 흰 구름은 끊임없이 모였다 흩어지니 앞문을 열어두고 종일토록 바라보아도 그 의미가 무궁하여 참으로 절경이다.”
수도암 터는 풍수지리상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 즉 옥녀가 비단을 짜는 형국인데, 멀리 보이는 가야산 상봉은 실을 거는 끌개 돌이 되고, 뜰 앞의 동ㆍ서 양쪽에 위치한 탑은 베틀의 두 기둥이 되며, 대적광전불상이 놓인 자리는 옥녀가 앉아서 베를 짜는 자리가 된다는 것이다.
수도암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한국전쟁 때 불타버렸던 것을 최근에야 크게 중창하였다. 절 건물로는 대적광전과 약광전, 나한전, 법전 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보물 제296호로 지정된 약광전 석불좌상과 보물 제297호인 삼층석탑 2기와 보물 제307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도는 어제보다 깊으나 앞산은 더욱 첩첩하고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9 : 우리 산하,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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