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설교와 나쁜 설교
나 자신이 설교자로서 설교를 전하고 또 설교를 들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과연 좋은 설교란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한 웅변술이 아님은 분명하다. 정작 설교 내용은 초라하게 빈약한데 그것을 만회하려는 듯이 고함만 지른다고 좋은 설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설교란 무엇보다도 전달하는 내용이 우선적이다. 그렇다면 전파하는 설교의 내용을 바로 작성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반드시 준수해야 할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는 이 원칙들이 준수될 때 그것은 좋은 설교이고, 반면에 그 원칙들이 무너질 때 자연적으로 그것은 나쁜 설교가 될 수밖에 없다. 잘못된 성경 해석을 통한 성공적인 설교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 목적이 선하다면,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 또한 선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신약학자로서 또한 설교자로서 좋은 설교를 위하여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적 원칙들을 소개함으로써 설교자들의 사역을 돕고자 한다.
1. 주어진 본문의 일부를 임의로 선택하지 말라.
1.1. 마가복음 2.8; ‘중심’
마가복음 2.1-12은 한 사건을 구성하고 있는데, 설교자는 주어진 본문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애초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찾아서 그것을 설교하려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본문 중 자기 눈에 들어오는, 혹은 자기 입맛에 맞는 한, 두 단어만을 선택하여, 전체 본문의 의미와는 무관하게 설교한다면, 그것을 본문을 왜곡하는 것이다. 애초에 저자가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했을 때의 의도와 의미를 찾아 그것을 밝혀 설교하는 것이 설교자의 의무이지,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한, 두 단어를 뽑아 갖고 설교하는 것은 애초에 그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 하나님의 의도가 거스르는 죄악이다. 어느 설교자는 위의 본문 중 8절에서 중심(中心)이란 단어를 선택하고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중심을 바로 세워라”는 취지의 설교를 했다. 그런데 8절에서 중심으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는 evn pneu/mati, 영어로는 in spirit, 즉 문자적으로 ‘영(靈) 안에서, 영으로’ 이고, 의역하면 ‘(마음) 속으로’라는 뜻이다. 주님이 중풍병자의 죄 사함을 선포하자, 인간으로서 죄사함을 선포하는 데 놀란 서기관들이 수군거리자 그것을 영으로, 즉 마음 속으로 주님이 깨달았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런 본래의 의미와는 무관하게 ‘중심’이란 한글 번역만을 의지한 채 중심으로 바로 세우라고 설교하는 것은 철저하게 본문의 의미를 왜곡한 것이다. 이렇듯 본문을 왜곡하는 사례를 보면, 그런 설교자는 대개가 헬라어나 히브리어 원문은 커녕 영어 번역도 보지 않고, 단지 한글 번역만을 갖고 설교하는 함으로써 본문의 의미를 부지불식간에 왜곡하는 경우가 매우 허다하다. 이러한 처사는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아니다.
1.2. 사도행전 28. 2, 4;‘토인(土人)’ (한글 개역)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개역 한글 성경에서 사도행전 28장 2, 4절을 보면, ‘토인(土人)’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나온다. 멜리데 섬의 원주민들을 개역에서는 ‘토인’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설교자는 이 단어를 역시 한글 번역만을 보고는 아프리카 흑인(黑人)으로 판단하여, 이를 ‘원시인, 야만인, 식인종’ 등으로 간주하여 설교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멜리데 섬 주민들은 넓은 의미에서 셈족 계통의 사람들로서 유대인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1 당연히 얼굴이 검은 ‘흑인’은 아니었다. 물론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바르바로스(ba,rbaroj)가 후대에 영어의 barbarian의 어원(語源)이 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후대의 일이고, 1세기 당시에 그 단어는 의성어(擬聲語)로서,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는 비 헬라인(non-Greeks)들을 가리키는 용어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로마서 1장 14절이다. 거기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빚진 자”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 ‘야만인’이란 단어를 NIV 등 영어 번역본에서는 non-Greeks라고 번역하고 있다. 즉 헬라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여기서 바르바로스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자신이 헬라인과 비헬라인 모두에게 다 복음에 있어서 빚진 자임을 밝히는 것이다. 결코 우리말 번역처럼 문자적으로 야만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리 말 번역만을 갖고 이 단어를 ‘토인’으로 해석하면서, 식인종과도 같은 야만인으로 설교한다면, 이는 이 단어의 의미를 지극히 왜곡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2
1.3. 마가복음 1.16-20; ‘찢어진 그물(?)’
이 본문은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취임설교를 하신 후 첫 번째 공적 사역으로서 네 명의 어부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이다. 이 기사의 취지는, 주님께서 어부로서 맡은 바 어부로서의 일에 충성하는 이들을 불러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영적인 일을 맡기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어떤 설교자는 이러한 본문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19절에서 ‘그물을 깁는데’라는 표현에 착안하여, 깁는다는 것은 그물이 찢어진 상태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판단하여, 설교 제목을 ‘찢어진 그물’이라고 잡아 설교하였다. 그리고는 대지를 3개로 나누어, 첫째 가정의 그물이 찢어졌다, 둘째 사회의 그물이 찢어졌다, 셋째 국가의 그물이 찢어졌다고 말하며, 오늘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처럼 이러한 찢어진 그물을 제대로 기워서 고쳐야 한다는 취지의 설교하였다. 설교 내용 자체만을 놓고 보면 매우 그럴 듯하다. 그러나 이런 취지로 설교하려면 거기에 맞는 본문을 택해야하지, 단지 ‘그물’이란 한 단어를 임의로 선택하여 이런 식으로 설교하는 것은 본래 하나님이 본문을 기록하게 하셨던 그 의도를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인 것이다. 이토록 본문의 의도를 무시한 설교가 실제 목회 현장에서 아무리 큰 성공적인 반응을 얻었다한들 하나님은 과연 기뻐하실까?
주(註) 1. 로버트 헐버, 『이해를 위한 신약성서 연구』 (김영봉 역; 서울: 컨콜디아, 1991), 63. 2. 개역개정에서는 다행히 ‘원주민’이라고 번역하였다.
2. 복음서의 경우 본문을 서로 비교하고 분석한 후 그 차이를 설교해야 한다.
2.1. 마가복음 2.12, 누가복음 5. 26 : ‘오늘’
주님이 중풍병자를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치유한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매우 놀라워했다(막 2.12; 눅 5.26). 그런데 여기서 누가는 마가복음의 병행 구절에 ‘오늘’이라는 단어를 추가하였다. 신약성경에서 ‘오늘’(sh,meron)이라는 단어는 주님의 구원사역이 지금 작동 중이며, 동시에 그가 가져오신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이 현재 진행 중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매우 의미 깊은 단어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혹은 실현된 종말론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누가는 이 본문에서 ‘오늘’이라는 단어를 추가한 것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사역의 특징을 보여주기 위함인 것이다. 우리는 누가의 이러한 강조를 누가복음 4.21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주지하는 대로 누가복음 4.18-19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주님의 취임설교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到來)와 그에 대한 준비로서 회개를 강조하는 마가, 마태복음과는 달리, 누가는 이사야 61.1-2을 인용하면서 메시야 주님의 사역의 특징을 가난한 자, 눌린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를 위한 희년(Jubilee)의 복음을 선포하신 것으로 소개한다.1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4.21에서 ‘오늘’이란 단어를 사용하며, “오늘 이 글이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기록한 것이다. 모든 빚의 탕감과 질병으로부터의 치유 및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희년으로 주님 사역의 특징을 묘사하면서, 예수께서 그 희년이 오늘 성취되었다고 선포하신 것은, 역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임하여 작동 중임을 잘 드러내는 장면인 것이다.2 오늘에 대한 누가의 이러한 강조3는 마가복음과의 비교에서 드러난 결과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복음서를 설교할 때는 네 복음서를 서로 비교하여 그 차이를 철저하게 분석한 후 그 의미를 설교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각 복음서를 다르게 기록하게 하신 본래의 하나님의 의도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2. 막 2.4, ‘지붕’; 눅 5.19, ‘기와’
본문 비교에서 드러나는 차이점 중 또 하나는 마가복음에서는 그냥 지붕이라고 표현한 것을 누가는 ‘기와’(ke,ramoj)4라는 매우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한 것이다. 즉 그냥 지붕이 아니라 기와로 된 지붕을 가리킨 것이다. 이는 누가의 청중인 헬라사람들의 문화에 적합한 용어인 것이고, 이로써 우리는 누가의 대상인 수신인들이 유대인이 아니라 헬라인이라는 또 다른 증거를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수신인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누가복음의 신학적 특징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단순히 단어 하나의 차이일 수 있지만, 본문 해석과 이와 관련된 설교 내용에 있어서 그 단어가 미치는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은 것이다. 복음서에는 병행 기사 혹은 병행 구절에서 이처럼 차이를 나타내 보이는 곳이 허다하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복음서 상의 이러한 차이는 중요하지도 않고, 따라서 큰 의미가 없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만일 그 주장이 맞다면, 일점일획의 오류가 없는 하나님 말씀에 존재하는 그러한 차이가 그냥 우연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러한 차이를 복음서 기자들로 하여금 기록하게 하셨을까? 축자영감설을 믿는 복음주의 진영에서 이처럼 복음서 상의 차이를 외면 혹은 회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애당초 다르게 기록하게 하신 그 이유를 무시함으로써, 하나님의 기록 의도를 거스르는 불순종적 처사일 뿐이다. 복음서들 간의 이러한 차이 중 복음서 해석과 관련이 있는 몇 곳을 필자는 다른 논문에서 다루었으니 이를 참고하기를 바란다.5
주(註) 1. E. Schwiezer, The Good News according to Luke (Atlanta: John Knox, 1984), 88-89; B. J. Malina & R. L. Rohrbaugh, Social-Science Commentary on the Synoptic Gospels (Minneapolis: Fortress, 1992), 309. 2. Joel B. Green, The Theology of the Gospel of Luk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78; J. A.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Anchor Bible; New York: Doubleday, 1981), 533. 3. 눅 2.11; 눅 23.43 4.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이곳에서 단 한번 사용되었다. 5. 김경진, 『공관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서울: 솔로몬, 2012), 145-172: “복음과 문화의 상관성”;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겉옷과 속옷’의 순서상 차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회칠한 무덤과 평토장한 무덤’의 차이”
3. 본문이 놓인 문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은 장과 절이 잘 구분되어 정리되었으나, 이러한 장과 절의 구분은 스테파누스가 1551년 헬라어 성경을 만들면서 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지극히 인위적인 구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이 장과 절이 절대적인 것처럼, 관습적으로 그것에 따라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 성경 말씀은, 특히 신약성경은 장과 절의 구분 없이, 구두점도 없이, 그리고 대문자로 전부 붙여서 기록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후대에 인위적으로 나누어진 장과 절에 매인 나머지, 문맥의 흐름을 통해 전달되어지는 저자의 의도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다음은 이와 관련된 본문들이다.
3.1. 산상설교 중 지복설교와 빛과 소금(마 5.1-16)
일반적으로 우리는 <지복설교(the Beatitudes)>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빛과 소금 기사>를 분리해서 읽는다. 그리하여 지복설교에서 성경적 복을 설교한 후, 그 다음에 나오는 <빛과 소금 기사>는 그와 상관없이 별개의 본문으로 간주하여 빛과 소금의 자연적, 물질적 속성을 들먹이며 그리스도인들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테면 그리스도인들은 소금의 속성이 조미료로서 음식에 간을 맞추듯 그렇게 행동해야 하고, 또한 방부제로서 세상을 썩지 않게 만드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그럴듯하게 가르치는 것이다. 물론 빛과 소금의 속성을 들어 그것을 그리스도인들의 품성과 연결하여 설교하는 것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이 과연 애초에 마태가 그 본문을 기록했을 당시의 의도였는지는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많은 주석가들은 지복설교와 빛과 소금 기사는 서로 연결된 한 문맥으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빛과 소금은 그 자연적 물질적 속성을 따라 설교할 것이 아니라, 지복설교에서 말하고 있는 복의 내용들, 즉 화평하게 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심령이 가난하고 하는 행동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나타나는 방식이며, 그것이 바로 그 문맥의 결론(마 5.16)에서 말하는바 사람들 앞에 비취임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근거가 되는 착한 행실이라는 것이다.1
3.2.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마르다/마리아 기사(눅 10.25-42)
사실 누가는 두 개의 이야기를 한데 묶어 한 쌍으로 만들어 자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요점을 강조하는 습성이 있는 저자이다.2 그러할 때 한 쌍으로 묶여지는 두 이야기는 분명히 둘이 합하여 하나의 요점을 제대로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누가의 문학적 특징이 잘 표현된 곳이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두 개의 사건, 즉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마르다/마리아 기사>이다. 보통 설교자들은 이 두 이야기를 따로 분리하여 각각 그 의미를 설교한다. 그러나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두 이야기를 한 쌍의 이야기(a pair story)로 간주하여 하나로 묶어 연결시켜 해석한다.3 그렇게 할 때 이제 마르다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게 된다. 과연 어떻게 달라지게 될까? 사실 두 개의 이야기를 분리하여 해석할 때, 마르다는 자체 이야기 속에서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마리아와는 달리 책망 받은 인물로 소개된다. 그런데 두 이야기를 한데 묶어 한 쌍의 이야기로 볼 때,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결론에서 주님은 자신에게 누가 이웃인지를 물었던 그 율법교사에게 누가 이웃인지 묻지 말고,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고 말씀하심으로써 오히려 어려움 당한 자의 이웃이 되어주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 다음에 누가가 소개하는 이야기가 바로 <마르다/마리아 기사>이다. 주지(周知)하는 대로, 복음서는 연대기적 방식으로 기술되지 않았다. 이 말은 복음서 기자들은 자신의 신학적 의도에 따라 사건과 이야기를 배열하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마르다/마리아 이야기를 한데 묶어 한 문맥 안에 위치시킨 것은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행한 누가의 작업이다. 다시 말하면 누가는 두 이야기를 서로 연결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만든 것이다. 이처럼 두 이야기를 한데 묶어 연결시킬 때, 이제 마르다에 대한 해석은 달라지게 된다.4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는 전도 여행 중에 있었던 예수님의 일행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대접하고자 하였다. 여행을 위하여 전대도, 배낭도, 돈도 없이 떠났던 그들은 이들 자매와 같은 지역 동조자들(local sympathizers)의 협조를 통하여 그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눅 8.1-3). 그렇다면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가 주님 일행을 자기 집으로 초대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전도 여행에 지친 그들을 접대(接待; hospitality)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두 자매 중 본래의 초대 목적에 걸맞게 대접을 위해 애를 쓴 사람은 마리아가 아니라, 마르다였다. 즉 마르다는 어려운 이웃을 도왔던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전도 여행에 지친 전도자들에게 몸소 사랑을 베푼, 또 다른 선한 사마리아인이었던 것이다.5 그런데 이렇게 해석할 때 직면하는 난점은 누가복음 10.41-42에서 주님이 마리아를 두둔하면서 우회적으로 마르다를 책망한 부분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다. 이 문제를 고려하여, 앞의 내용과 연결시켜 해석한다면, 답은 우선순위의 문제로 보인다.6 즉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배운 마리아처럼 우선적으로 말씀을 배우고, 그 다음에 마르다처럼 그 배움을 바탕으로 하여 사랑을 실천하라는 의미로서 풀이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두 이야기를 한 쌍의 이야기로 묶어 이해할 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다음에 등장하는 마르다는 꾸중을 드는 부정적 이미지가 아니라, 오히려 누가의 문맥에 의해서 사랑 실천의 모델로 부각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문맥을 통해서 성경을 해석해야 하는 당위성을 보여주는 매우 적절한 실례인 것이다.
주(註) 1. 알렌 버히, 『신약성경 윤리』 (김경진 역; 서울: 솔로몬, 1997), 186-187. 2. May Rose D’Angelo, “Women in Luke-Acts: A Redactional View,” JBL 109/3 (1990),” 444-4446. F. Parvey, “The Theology and Leadership of Women in the New Testament” in Religion and Sexism, ed., Rosemary Radford Ruether (New York: Simon & Schuster, 1974), 139-146. 3. W. Grundmann, Das Evangelium nach Lukas (Berlin: Evangelische Verlagsanstalt, 1974), 225; F. W. Danker, Jesus and the New Age (St. Louis: Clayton, 1974), 133-134; J. R. Donahue, The Gospel in Parable (Philadelphia: Fortress, 1988), 138-139; 참고, 김득중, 『복음서의 비유들』 (서울: 컨콜디아사, 1993), 232. 4. 김경진, 『누가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서울: 대서, 2013), 201-203. 5. 마르다/마리아 기사가 제시하는 제자도와 관련된 교훈에 대하여는, 김경진, 『제자와 제자의 길』 (서울: 솔로몬, 2002), 208-211를 참고할 것. 6. Ben Witherington, Women in the Ministry of Jesu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4), 103.
4. 한 단원인 본문을 자기 마음대로 재단(裁斷)해서는 안 된다.
4.1. 눅 5.1-11, 어부 제자들의 부르심
누가복음 5.1-11은 확실히 한 사고의 단위(a thought unit)를 구성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이 이야기 전체를 통하여 본래 저자 누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본문은 많은 설교자들에 의해서 가장 잘못 설교되어지는 대표적 본문 중 하나처럼 보인다. 다수의 설교자들은 이 본문이 전체로서 전달하고자 하는 본래의 메시지를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재단하여 본문 전체를 다 읽고도 실제로는 7절까지만 설교한다. 그리고 설교의 초점은 5절에 맞춘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밤이 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이렇게 설교할 때 설교의 요점은, 전문가 어부가 밤이 맟도록 애를 썼어도 허탕을 쳤지만,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던지니 기대 밖의 엄청난 어획을 얻음으로써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적 노력으로는 안 되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하면 불가능한 기적도 경험할 수 있다는 취지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설교할 경우, 7절의 기적을 체험한 베드로가 8절에서 갑자기 자기를 죄인으로 인정하며 주님께 자신을 떠나가도록 요청한 사실을 설명할 길이 없다. 뜻밖의 기적을 체험했으니 ‘할렐루야’를 외치며 감사해야 할 베드로가 왜 갑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논리적 답변은 그가 이전에 죄를 지은 사실이 있음을 전제로 해야 할 터인데, 본문에서 그에 대한 근거는 결국 5절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5절의 한글 번역은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지 않다. ‘말씀에 의지하여’ (evpi. tw|/ r`h,mati, sou)라고 번역된 원문의 바른 의미는 ‘말씀대로’ at your word, 그래서 NIV는 이를 because you say so 라고 번역하였다. 우리말 번역처럼 결코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한글 번역에서는 이를 ‘말씀에 의지’한다는 의미로 긍정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본문의 의미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말았다. 따라서 본래의 취지대로 5절을 번역한다면, “전문가인 우리 어부가 밤이 맟도록 애를 썼어도 아무 것도 잡지 못했으나, 당신이 말하는 대로 한번 해 보겠소, 어디 한번 두고 봅시다.” 그러면 어떻게 누가복음에서 전문가 어부들이 사역 초기에 목수(木手)로 알려진 예수님의 조언을 들을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이 기사 앞에 기록된(눅 4.38-39) 시몬의 장모 치유 사건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중한 열병으로 앓고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단번에 치유한 사건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존재에 대하여 강렬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고, 따라서 목수인 예수님이 전문가 어부인 자기들이 보기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을 때, 마지못해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절에서 베드로가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한 점을 고려할 때, 5절은 긍정적으로만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학자들은 5절이 ‘베드로의 의심’(Peter’s doubt)을 드러낸다고 지적하고 있다.1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또 하나의 증거로 우리는 주님에 대한 호칭이 5절과 8절에서 달라진 것을 제시할 수 있겠다. 즉 처음에 베드로는 ‘선생님’(evpistata,thj)이라고 불렀으나, 나중에는 ‘주여’ (ku,rioj)라고 부른 것이다. 처음에는 보통 사람들보다는 뛰어난 선생님으로 알았으나, 그분의 말씀대로 행한 후 기적을 체험하고는 예수님이 주(主), 곧 하나님임을 깨달은 것이다.2 위의 사실을 본문 해석에 반영할 때, 누가가 애당초 이 본문을 통하여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단순히 주의 말씀에 의지하라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을 따르려하는 제자들이 우선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 및 절차로서 ‘회심(回心)’을 강조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3 이러한 누가복음의 특징은 마태, 마가복음의 병행 기사와 비교할 때 확연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마태, 마가복음에는 베드로의 회심에 관한 부분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본문인 5.1-11 전체를 함께 고려할 때, 우리는 저자 누가가 이 이야기를 통하여 진정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를 찾을 수 있는데, 설교자들이 저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중간에서 본문을 잘라버리면서 5절에 초점을 두고서 7절까지만 설교한다면, 이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되고 마는 것이다.
4.2. 고전 11.17-34, 성만찬에 대한 오해
오늘날 교회에서 성찬예식을 거행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본문은 아마도 고린도전서 11.17-34일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17-34절까지가 한 단락이고 한 단원인데, 성찬식에서 사용되는 구절은 23절에서부터 시작한 후 마지막까지 읽지 않고 32절에서 멈춘다. 이렇게 본문을 설교자 마음대로 재단해 버리게 되면4, 자연히 본문에서 바울이 책망하고 있는 죄는 하나님과 성도 개인 사이의 도덕적 죄가 되고 만다. 그런데 과연 여기서 사도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의 문제만일까? 본문은 분명히 17절부터 시작하는데, 바울이 성만찬에 대하여 언급하게 된 계기를 설명해 준다. 고린도 교회 내의 일부 부자 교인들이 예배 시간 이전에 일찍 교회에 와서, 자기들이 가져온 음식과 포도주를 먼저 먹고 마셔버린 나머지 술에 취해버린 것이다. 당시 교회 모임의 일반적 관습은 부자 교인들이 음식과 포도주를 넉넉히 가져와서, 그것을 막노동자나 노예들과 같이 가난한 교인들과 함께 나눠먹는 것이었는데, 아마도 고린도교회에서는 이러한 관습이 무너진 까닭에 부자교인이 방자하게 처신했던 것으로 보인다.5
아울러 당시에는 공동식사인 애찬과 성찬이 아직 철저하게 구분되지 않았던 까닭에 애찬 전, 혹은 애찬 중, 아니면 애찬 후 성찬을 나누었는데, 이렇듯 일부 부자 교인들은 먹고 취한 상태에 있고, 뒤늦게 도착한 가난한 교인들은 굶주린 상태에 있다면, 결국 성찬이 의미하는 바 공동체성은 깨어져 버린 꼴이 되는 것이다. 무릇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찬이란 한 떡과 한 잔에 참여함으로써 하나 됨에 의미가 있는 것인데, 부자 교인들과 가난한 교인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극명한 차별은 결국 성찬의 본질적 의미를 훼손시켜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부자 교인들에게 본문의 결론 부분에서(33-34절), 시장하면 집에서 먹고 오면 될 것을 구태여 공동체 모임인 교회에 와서 방자하게 먹고 취함으로써 가난한 교인들을 멸시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본문의 서론과 결론이 한결같이 공동식사로 인해 야기된 교회 공동체 내부의 빈부 갈등을 말하고 있는데, 중간에서(23절) 이를 뚝 잘라버린 후 설교하게 되면, 이것은 본문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럼으로써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들의 횡포(?)로 말미암아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고린도 교회 내에 존재했던 빈부 간의 경제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주요 메시지인데, 만일 설교자들이 이를 중간에 마구 잘라버린 채 설교하게 된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교훈을 듣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 자신이 하고 싶은 개인의 견해를 성경을 핑계 삼아 전하는 셈이 되고 마는 것이다.
5. 나가는 말
무릇 설교자는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을 전하는 도구(tool)가 되어야 하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외면한 채,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성경 본문(text) 을 핑계(pretext) 삼아서 설교해서는 결코 안 된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성경 말씀 아래 앉아서(sit below the Bible)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을 귀담아 들어야 하지, 성경 말씀 위에 서서(stand above the Bible)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성경을 구실로 삼아 설교하는 교만함을 가져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강단에 만연되어 있는 공공연한 행태를 보면, 하나님 말씀이 설교자의 목표가 아니라 설교자 개인의 철학이나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는 설교자의 수단으로 전락되어 버린 현상이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렇듯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설교의 목표가 아니라 설교자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릴 때, 강단의 힘은 약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교자는 자기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성경 본문을 빙자하여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을 부지런히 연구하여 찾아내어 그것을 전달하는 도구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주변의 강단에서는 이러한 불경스런 행태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참으로 참담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성경 말씀이 설교자가 말하고 싶어하는 내용의 수단이 되어버릴 때, 그것은 더 이상 설교가 아니라 공허한 궤변이 되고 말 것임을 우리 모두는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주(註) 1. E. E. Ellis, The Gospel of Luke (The CenturyBible; London: Nelson, 1966), 103; Schweizer, The Good News according to Luke, 104. 또한 레온 모리스는 베드로의 이러한 불만을 ‘함축된 책망“ (an implied rebuke)이라고 불렀다(Leon Morris, Luke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ies; Leicester: IVP, 1986], 112). 2. 8절의 기적은, 결국 주님이 베드로의 항변을 기적으로 응답하신 것이라고 엘리스는 설명하고 있다(Ellis, The Gospel of Luke, 103). 3. 김경진, 『누가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 80-82. 참고, R. E. O. 화이트, 『누가신학 연구』 (김경진 역; 서울: 그리심, 2003), 22-24. 4. 김경진, 『역사와 해석』, “고린도 교회의 경제적 갈등과 처방” (서울: 대서, 2015), 307-308. 5. Wayne Meeks, The First Urban Christians: The Social World of the Apostle Paul (New Haven: Yale University, 1983), 159; John K. Chow, Patronage and Power: A Study of Social Networks in Corinth (JSNTSS 75; Sheffield: JSOT, 1992), 183; David Horrell, “The Lord’s Supper at Corinth and in the Church Today,” Theology 98(1995), 198; D. C. Passakos, “Eucharist in the First Corinthians: A Sociological Study,” RB 104(1997), 195-198.
김경진 교수/ Ph.D, 호주 알파크루시스 대학교 박사원장/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8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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