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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이 다른 감사
다니엘 3:13~18
13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오라 말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14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오늘은 11월 셋째 주 주일에 지키고 있는 추수 감사 주일 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의 성서에 따른 바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일곱 절기 중에 맥추절(the Feast of Harvest)에 있습니다. 맥추절은 5월 중순에서 6월 중순 무렵에 밀(wheat)을 거둬들이고 그중에서 제일 좋은 곡식단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이뤄지는 추수 감사제였습니다.
교회에서 추수감사절을 지키게 된 직접적 계기는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이었던 미국으로 이주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영국 헨리 8세와 제임스 1세, 찰스 1세 때까지 이어진 종교 박해를 피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 미 대륙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서도 102명의 청교도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미 대륙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고국을 떠나 63일간 5,440km의 멀고도 긴 여행을 거쳐 1620년 11월 11일 미국 동북부 매사추세츠 케이퍼 카드(Cape Cod) 해안가에 도착했습니다.
청교도 개척자들은 무사히 신대륙에 도착했지만, 더 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11월 중순 도착한 그들은 강풍과 눈보라 치는 혹독한 추위, 질병과 식량 부족, 원주민들의 냉대, 들짐승들의 위험, 거할 집 하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도착했던 102명 중 절반 이상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1-2월의 혹독한 겨울에는 하루에 2~3명씩 죽어 나갔고 결국, 생존자는 50명에 이르렀고 다수의 사람은 지치고 건강이 쇠약해져 갖가지 질병으로 신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생존한 청교도들은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리고 가꾸어, 그해 가을 기대 이상의 추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며 깊은 감사를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첫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리는 유래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추수감사절의 의미는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 주시고 끝내는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지키는 것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고 감사의 의미를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귀한 믿음을 가진 다니엘과 세 명의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라는 청년들이 등장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우상숭배에 젖어 살게 되자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느부갓네살 왕은 금 신상을 만들어 그것에 절하게 하여 숭배하게 했습니다. 금 신상에 절을 하지 않으면 풀무 불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다니엘의 세 친구는 절대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그 세 명의 친구는 극렬히 타는 용광로에 버림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구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또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는 왕의 신에게 절하지 아니하겠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겠습니다”며 단호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다니엘과 세 명의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느브갓네살 왕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었지만, 왕이 만든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기에 평상시 보다 일곱 배로 뜨겁게 달아오른 용광로에 던져지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어여삐 여겼던 느브갓네살 왕은 “이제라도 엎드리어 절하면 살려 주겠노라”고 타일렀습니다.
그들은 극렬히 타는 용광로에 버림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구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또한, 그렇게 해주시지 않더라도 왕이 섬기는 신과 왕이 세운 금신상에 절하지 않겠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어진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성도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무엇인지를 더듬어 다시 한번을 차원이 다른 감사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는 죽음을 이기게 하심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죽음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공포의 대상입니다. 모든 공포는 무지(無知)에서 옵니다. 죽음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데서 공포(恐怖)가 찾아옵니다. 어린아이가 밤중에 자기 집에 들어가려면 불이 켜져 있지 않으면 “엄마, 무서워!”하고 소리칩니다. 그런데, 낮에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 반면에, 밤에는 어두워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 다음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 다음에 무엇이 있으며 자신이 어떻게 되는가를 정확하게 알면 어떨까요? 그래도 죽음이 공포의 대상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평화로운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헬렌 켈러는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죽음은 곧 새로운 탄생’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모태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듯이, 지구라는 모태에서 영원한 세계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스웨덴의 신학자 임마누엘은 영계를 자유롭게 드나드는 신비한 능력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는 <영원한 유산>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지금까지 세상에 태어나 지상에서 생을 다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영원히 소멸한 사람은 역사 이래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놀라운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인간은 죽어서 무덤에 가면 그만인 줄 알았는데, 그 누구도 이 우주에서 소멸한 사람은 없더라는 겁니다. 지상에 두는 가는 것은 육체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 때도 내가 머물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편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지난주에 은퇴를 코앞에 두고 있는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교단의 법에 따라 그동안 섬겼던 교회를 떠나야 하는데 막상 머물 집이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고민하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내 육체를 머물 곳이 없다는 것은 무척 서글픈 것입니다. 하물며 내 영혼이 영원히 머물 것이 없다는 것은 비극 중에서 비극입니다.
본문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가 무섭게 달아오른 풀무불 앞에 서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단 3: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는 단호한 태도를 보입니다. 이에 머리끝까지 회가 치밀어 오른 왕은 “그 풀무불을 뜨겁게 하기를 평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그 불의 위력이 얼마나 거셌던지 세 친구를 붙들었던 사람이 불태워 죽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풀무불에 망설임 없이 던짐을 당하였습니다. 무엇이 그들에게 이런 용기를 얻게 하였을까요? 부활 신앙입니다.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기필코 다시 살아나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죽음의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윈 W. 루처는 『영원한 상급』이란 글에서 심판대 앞에 설 때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 당신이 했던 일을 좋게 만들 수 있는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당신을 대변해줄 변호인이 없다. 그리스도의 눈에 비춰진 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원하든 원치 않든 언젠가 우리가 직면해야 할 심판대의 모습입니다. 고후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심판대 앞에 ‘나타나’라고 말했을 때, ‘다 나타나게 되는’이라는 의미가 있는 헬라어 ‘파네로오, φανερόω’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안에 든 것을 뒤집어 모두 다 꺼내놓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쓰이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행한 선악간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숨길 수 없이 드러나게 됨을 말씀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아야 심판의 날에 이뤄질 진노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용광로라도 죄인이 거쳐야 하는 심판대보다는 덜 무섭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른 자는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나의 거처로 삼을 수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게 하시고 영원한 나라를 약속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단 3:23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떨어졌더라”고 했습니다. 단 하나의 뼈도 추스를 수 없는 맹렬한 풀무불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았던 느부갓네살 왕이 소리쳐 주위 신하들에게 말합니다. 단 3:24~2 “우리가 결박하여 불 가운데에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여 옳소이다 하더라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고 말입니다.
극렬한 풀무불에 주님이 함께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함께 계십니다. 그 결과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실 때 약속하신 말씀이 마 28:20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항상’이란 ‘어떤 상황과 경우에도’란 뜻입니다. 그리고 ‘세상 끝’이라는 것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상까지임을 나타내는 헬라어 ‘아이오노스 αἰῶνος’를 사용하였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으로 지옥의 무서운 형벌에서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주십니다. 육체로 세상에 살 때뿐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 41:13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에 그 어디나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인정하고 늘 감사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는 누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왔습니다. 그들은 총명함과 학문이 뛰어난 모습을 좋게 여겨 비록 이방인이지만 나라에서 중용하여 귀한 직책을 맡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심을 믿었기에 기쁘고, 보람되게 맡은 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모릅니다.
저는 기도할 때마다 “평생 주의 일을 하다가 주님께 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합니다. 제게는 그렇게 기도하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제가 18살 때 시계제조회사에 공원으로 다니며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시계의 용두를 깎는 작업실에서 일하다 2층에 있는 조립실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저와 나이가 같은 친구를 만나 일하는 중에도 장난을 치며 일을 게을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상사가 저를 1층에 있는 기계 공작실로 내려보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제게 주어진 어떤 일도 없는 것입니다. 또한, 아무도 내게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근무 시간 내내 일없이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저의 처지가 한심하고 무척 힘들고 괴로웠습니다. 이를 견디다 못해 두 달 만에 사직하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이 제게는 큰 상처로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간혹 꿈에서 일자리가 없어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할 일이 없다는 것은 참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주어진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일에 대한 대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전 9: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스올(Sheol)은 성경에서 ‘무덤, 땅 밑 세계, 죽음의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스올은 부활의 주님과 함께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일하는 일터에 주님이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내 일이 지루하고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 주님을 초청하십시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무척 부지런하고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배경에는 그들과 함께하시는 주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들이 하던 일들이 멈추더라도 어디서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보람된 일을 할 수 있음을 믿었을 것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 지으며 죽음을 이기신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하십시다.
예수님 없는 죽음에는 두려움이 있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음은 모든 저주의 우두머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저주의 왕인 사망을 십자가에서 꺾어버리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늘 감사할 수 있습니다.
내게 일할 힘을 주시고 여건을 마련하여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합시다. 이렇게 하므로 나의 일터가 복이 되고 기쁨이 넘치는 환경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