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해야 할 한국교회 위인들 [38]
유관순(柳寬順, 1902-1920)①
유관순은 충남 천안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아버지도 영향을 받아 서양의 개화사상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홍호학교를 세웠으나 부채와 고리대금업자들의 횡포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감리교회를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했고,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교육을 통해 민중을 계몽하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신앙적으로 깊은 영향을 받은 유관순은 공주에 있는 영명학교를 다녔고, 이곳에서 소개를 받아 이화학당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기독교 신앙과 민족 사랑의 마음을 정동교회의 손정도 목사와 이화학당의 박인덕 선생에게 배웠습니다. 안타깝게도 박인덕 선생은 1941년 친일로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유관순이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 3·1운동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유관순은 겨우 17세였습니다. 3월 1일 학생들과 함께 이화학당의 담을 넘어 파고다 공원으로 달려가서 만세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3월 5일에는 서울 지역 학생연합시위에 참여했고, 경무총감부에 잡혀갔다가 풀려나기도 했습니다. 3월 10일이 되자 총독부는 모든 학교에 대해 휴교령을 내렸고, 유관순은 고향 천안으로 내려가 매봉교회 신자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시위 일자를 4월 1일로 정하고, 미리 사촌 언니와 함께 천안 일대, 연기, 청주, 진천까지 돌면서 사람들에게 만세 운동에 동참하라고 권했고, 3월 31일이 되자 매봉산에 올라 기도한 다음 봉화를 올려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이시여, 원수 왜(倭)를 물리쳐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고, 그 기도문을 남겼습니다.
<참고도서>
김재현, 『 한반도에 새겨진 십자가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