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 살이던 1939년, 김인은 충칭(重慶)에서 당시 임시의정원 의장이었던 김붕준의 큰딸 효숙을 만난다. 그 길거리에서 김효숙은 수첩을 내밀며 글 하나를 써달라고 한다. 김인은 철필로 짤막한 즉흥 시구를 적었다. 그게 지금도 남아 있는 김인의 필적이다.
▲ 김인의 자작시. 충칭에서 만난 김효숙에게 준 글이다. ⓒ 홍소연
누이!
우리는 叛逆者(반역자)!
現實(현실)과 妥協(타협)을 拒絶(거절)하는 무리외다.
우리는 革命者(혁명자)!
正義(정의)를 우리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외다.
그리고 우리는 先驅者(선구자)!
先驅者(선구자)인 까닭에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압니다.
김인은 자신을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반역자, 정의를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혁명자,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걸 알고 있다는 선구자로 매겼다. 그것은 사춘기에 독립운동에 뛰어들어야 했던 혁명가의 아들이 정립한 자신의 정체성이었을 것이다.
김인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의 장녀 안미생(安美生, 1914~ )과 연애 끝에 결혼했다. 베이징에서 나서 상하이에서 자랐고 홍콩에서 중등학교를 나온 뒤 쿤밍(昆明)의 서남연합대학(칭화대·베이징대·난카이대의 전시연합 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이 재원은 영어, 러시아어 등 외국어에 능통해 충칭의 영국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김인을 만났다. 둘 사이에서는 딸 효자(孝子, 1941~ )도 태어났다.
1940년 9월에 임시정부는 치장(綦江)에서 충칭으로 옮겼다. 충칭은 중국 서부의 분지 도시로 그 여름은 난징·우한과 함께 양쯔강 연안의 ‘3대 화로(火爐)’ 중 한 곳으로 알려질 만큼 무덥기로 유명했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일본에 밀린 중국이 수도를 충칭으로 옮기자 갑자기 도시 규모가 열 배 이상 커지면서 충칭의 공기는 더 나빠졌다. 고령의 독립운동가들이 폐병을 앓다가 세상을 뜨는 일도 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