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눅 17 : 11~19)
인생의 모든 과정을 지나고 죽음을 앞에 두고 뒤를 바라볼 때 감사 할 수 있습니까?
평생 아이들 뒷바라지, 남편 뒷바라지 하느라고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이 땅에 어머니들이 많으십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돌보느라 자신을 돌보지 않음으로 몸에 병이 생겨 힘이 들 때에 그 어머니의 마음은 어떨까요?
자신의 소임을 다한 것에 대한 기쁨이 있을 까요?
아니면, 자신의 인생을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화가 나있을까요?
온전한 감사를 아는 사람은 그 상황에서도 감사가 있을 것이며, 감사가 없다면, 자신에게 처한 상황에 대해서 슬퍼할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는 공짜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좋은 자녀 주신 것, 좋은 남편 주신 것, 싫으나 좋으나, 때로는 울고, 때로는 함께 기뻐했던 시간들, 자녀들이 아파서 잠을 이루지 못할 때에 머리맡에서 지켜보고 아파해줬던 시간들 그 모든 것이 행복했다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모든 것이 공짜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에서나 로마서에는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내 인생이 은혜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진정한 감사가 나올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를 잘 만난 아이들을 보면 감사하지 않습니다.
집안이 좋아서, 인맥이 좋아서, 내가 노력해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열심히 뛰어서 얻은 것이기 때문에 공짜로 받았다는 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 속에서는 감사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감사가 내 공의 앞에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내게 주어진 환경과 사람, 재물과 능력은 모두 나로부터 시작 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 공급해주는 힘으로부터 공급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원인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약 원인이 어디로부터 온지를 안다면 감사 할 수 있습니다.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뿌리를 찾아야 합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 입에서 감사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의 신앙생활에서도 감사가 없고, 태도에서도 감사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충만한 성도를 보면, 외적으로 항시 감사를 입에 달고 삽니다.
내적증거는 기쁨이 넘칩니다.
누가복음 12장의 말씀 중에 어리석은 부자를 보면, 이 어리석은 부자에게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소출이 풍성한 이 부자가 스스로 말하길 내 영혼아 나를 위해서 창고를 더 짓고 쌓아두자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으로 하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의 행동을 “어리석다”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리석은 부자의 결정적인 실수는 그가 소출을 얻은 곳이 어디냐?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통해서 소출을 얻게 하셨음으로, 땅에 소출을 풍성하게 해준 것에 대해서 분명히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모든 것이 자기로부터, 자기가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영혼아 평안이 쉬고 먹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어리석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부자가 하는 말마다 ‘어리석다’라는, 하나님의 평가가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어리석다, 어리석다.
내가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은혜는 누가 느낄 수 있습니까?
많은 순간에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증거를 입으로 시인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너무나 성숙하고, 지혜로우며, 성공신화를 달려갑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나는 한 것이 없어요.’라고 합니다.
‘저는 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남들의 귀에 듣기 좋게 하려고 하는 줄 알았으나 진심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채워주셨음을 깨닫고, 모든 것을 은혜로 돌리고, 은혜로 감사하는 사람,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는 사람, 그래서 감사하는 사람은, 어떤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근본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사마리아 사람이 바로 감사의 사람입니다.
본문 15절의 말씀을 보면,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라고 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병을 낫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아홉은 뭘 하고 있을까요?
아마도 제사장에게 가는 발걸음에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자신의 열심히, 병 고침을 받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자부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역시 난 행운아야, 될 놈은 되, 난 평생 나병환자로 살 팔자가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과정에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지 않으면, 될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설교 잘하는 사람이, 자신이 설교를 잘한다고 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설교는 잘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자기 스스로 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말씀은 2000년 전부터 대대로 물려 내려오고, 또 듣게 되고, 연구한 것을 지금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일은 맡은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고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없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특별히 복음 증거 하는 곳에 불러주셨고, 사용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내게 주어진 것,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내 삶에 모든 것은, 다 뿌리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 뿌리의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심으로, 나는 사라지고, 하나님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셨어도, 가로채는 인생은 감사도 모르고, 삶의 현장에서 발견하지도 못함으로, 결국 그의 영혼이 이 땅에서 분리가 되는 일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전에 더럽고, 추악한 일로 병에 걸려 고통 받았던 시간이 이제는 감사와 찬송과 영광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표현하는 시간으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은,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두 주님이 하셨습니다’라는 감사가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 때문에, 하나님께서 웃으시는, 매일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S.
고통은 좌절이 될 수 없다
“모든 신경증은 정당한 고통을 회피한 대가다”라고 칼 융은 말했다.
고통을 회피한 대가는 회피하고자 했던 고통보다 결국에는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정당한 고통을 회피할 때, 우리는 그 문제를 통해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성장도 회피하는 것이 된다.
배움은 고통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 안성우 목사의 ‘멈출 수 없는 사랑’ 중에서 -
육체가 자라날 때도 성장통을 겪는 것처럼 우리 영이 자라날 때, 역시 고통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의 순간은 결코 좌절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통을 통해 우리의 불필요한 부분들이 잘려나가 주님 앞에 정금과 같이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고통은 우리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주님께로 더 가까이 가도록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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