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따스한 배려가 곳곳에 숨어 있는 이호준 시인의 『사는 거, 그깟』
2013년 『시와경계』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18년 첫 시집 『티그리스강에는 샤가 산다』를 선보였던 이호준 시인이 6년 만에 두 번째 시집 『사는 거, 그깟』을 현대시세계 시인선 159번으로 출간했다.
이호준의 두 번째 시집 『사는 거, 그깟』에 실린 시들은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 주목한 이유가 있다. 「나는 날마다 유언을 쓴다」라는 시에 “내가 페루 해변으로 간 새처럼 못 돌아오면”이라는 구절이나 「카리브횟집의 저녁」, 「쿠바에서 꾸는 꿈」 같은 시 때문은 아니다. 「새를 묻다」, 「히말라야를 넘는 새들」, 「새들의 러시안룰렛」, 「제비집 요리 드실래요?」와 같은 시 제목이나 시의 행간에 페루 해변에 와서 죽는 새만큼이나 많은 새가 등장해서도 아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기자로, 세계 곳곳을 떠돈 여행작가로, 삶의 애환을 따스한 감성으로 녹인 에세이스트로 살다가 휴전선 근처 경기도 파주에 정착한 동질성 때문만도 아니다. 고독한, 감성 충만한 시인으로 살아가는 이호준이라는 한 개인에 주목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카페 앞 좁은 해변까지 날아와 새들이 죽는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조금 닮았다.
세상을 떠돌던 시인이 모처럼 집에 돌아와 그리운 온갖 것을 햇빛에 널어놓고는 “엄마 냄새”(이하 「모처럼 집에 돌아와」)를 맡는다. “등걸잠 속에 유년의 뜰을 넣어놓고” 잠든 척한다. 어느새 “뒤따라온 고요가 팔베개하고 곁에”(「시(詩)」) 슬그머니 눕겠는다. 그러다가 “하늘이 지상의 공책에 시를 쓰”(「국지성 소나기」)면, 후다닥 일어나 널어놓은 걸 거두어들일 것이다. 비가 그칠 때까지 시를 썼다가 지울 것이다. 그게 요즘 시인의 삶의 방식이다. 페루 리마 해변은 새들의 무덤이자, 영혼의 안식처이다. 조금 몽상적이지만… 이호준의 시가 힘든 현대인의 삶의 피난처, 더 힘든 영혼의 안식처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싶다.
이호준의 시집 『사는 거, 그깟』은 시적 방법론에서 첫 시집의 연장선에 있다. 첫 시집 해설에서 정한용 시인이 언급한 “시적 자아를 점진적으로 대상에 투사시키는 기법” 말이다. 시인은 대상과 자아의 상호 스밈과 투사, 전환을 입체적으로 구사하면서 대상과 내밀하게 조응한다. 시인의 의도겠지만, 시집의 구성도 꽤 닮았다. 하지만 이호준의 시 쓰는 행위는 시 「배려」와 다를 게 없다.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 헤매다가, 문득 소 발자국을 발견하듯 떠오르고, 마침내 소를 만나는…. “감의 씨”가 소 발자국이라면, “감씨의 배를 반으로 가르는 순간” 발견한 “수저 하나”는 소가 될 것이다. 소를 잡고(得牛) 그 소를 길들이는(牧牛) 법이 다 다르듯, 감의 씨가 품고 있는 수저의 생김새도 다를 것이다. 시인은 소를 찾아나서는 일처럼 “감꽃이 감을 잉태하던 봄날부터” 감의 씨 속에 수저를 “꼼꼼하게 준비했을 것”이다. 자연의 배려이다. “홍시로 헛헛한 속”을 달래는 어느 노인에 대한 언급은 시인의 배려이다. 이처럼 이호준의 시에는 따스한 배려가 곳곳에 스며 있다.
류근 시인은 “멀리서 몸을 추스린 능선 같고 가까이서 등을 내어미는 지붕 같다. 삶이 그대로 언어가 되고 악기가 된 사람. 시인 이호준의 시에는 욕망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세속이 그를 욕망하였으되 시인의 언어엔 그물에 걸릴 망설임조차 머물지 않는다. 시대의 중심과 주변을 두루 떠도는 여행자답게 그가 늘 반 걸음 앞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별자리엔 따스한 눈물과 체온이 깃들어 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아니고 무엇이랴. 이토록 깊고 기쁜 시가 아직 살아 있다. 눈물겹다”며 두 번째 시집 추천사를 써주었다.
목차
1부
모처럼 집에 돌아와 · 13
식탁에 내리는 비 · 14
백열등이 있던 방 · 16
뻔뻔한 유랑 · 18
떠돌이의 생일 · 19
카리브횟집의 저녁 · 20
시(詩) · 21
나는 날마다 유언을 쓴다 · 22
쿠바에서 꾸는 꿈 · 24
열일곱, 서울역에 잠들다 · 26
유전(遺傳) · 27
군부대가 있던 자리 · 28
남편 새끼, 나쁜 새끼 · 30
새를 묻다 · 32
큰기러기 가족이 떠나던 날 · 33
불면 · 34
피싱 문자 · 36
당신을 보내고 난 뒤 · 38
2부
목이 긴 새들의 겨울나기 · 41
재개발구역 · 42
인력시장의 아침 · 44
나무 주막 · 45
어느 성탄 전야 · 46
노숙인의 봄 · 48
1월이면 · 49
개미들의 버섯 농사 · 50
이팝나무 아래서 · 52
이웃 · 54
발자국이 전하는 말 · 56
인과(因果) · 57
사는 거, 그깟 · 58
히말라야를 넘는 새들 · 60
조개 속의 어린 게 · 62
6월에 내리는 비 · 63
슬픔에게 빚지다 · 64
빈집 · 66
3부
무화과의 지조 · 71
신(新) 고려장시대 · 72
고물상이 사라진 동네 · 74
파리와 시인의 무게 · 76
어떤 죽음 · 77
저, 이번 역에 내려도 될까요? · 78
시간을 팝니다 · 80
염소가 떠내려간 이유 · 82
불통시대의 대화법 · 84
사이보그로 거듭나다 · 86
2월 아침에 · 89
말[言]의 기원 · 90
바닷속에 마을이 있어서 · 92
감자밭에서 · 93
선물 · 94
새들의 러시안룰렛 · 96
자연산 길 단종되다 · 98
가을 엽신 · 100
4부
연기(緣起) · 103
염화미소 · 104
단풍잎 지다 · 105
굴참경을 읽다 · 106
조기 말리는 풍경 · 107
자비심의 실체 · 108
자선 보일러 · 109
배려 · 110
썩지 않는 것들 · 111
꽃은 새가 물어온다 · 112
드문 겨울 · 114
첫 꽃 피다 · 116
제비집 요리 드실래요? · 117
국지성 소나기 · 118
오징어 덕장의 아침 · 119
엄마 · 120
텅 빌수록 가득한 · 121
봄비 내리는 밤 · 122
해설 페루 해변으로 가서 죽는 새들처럼 / 김정수 · 123
저자 소개
저 : 이호준 (필명:사강)
서울신문 기자··선임기자··뉴미디어국장 겸 비상임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시인이자 작가로 활동 중이며, 2013년 『시와경계』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티그리스강에는 샤가 산다』, 산문집 『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1, 2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안부』,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와 기행산문집 『클레오파트라가 사랑한 지중해를 걷다』, 『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 『문명의 고향 티그리스강을 걷다』, 『나를 치유하는 여행』, 『세상의 끝, 오로라』 등을 펴냈다.
책 속으로
이십 년 살던 집 파는 서류에 도장 찍고 오는 길
아이들 다니던 학교 담장 밑에 산국 곱다
돌부리에 걸린 척, 내 집을 돌아본다
작년에 절집 불목하니도 그만뒀으니 집도 절도 없다,
-
생각하니 허전하다 그러다 이내 고개 젓는다
저 꽃은 들보 하나 얹은 적 없어도 환하게 웃지 않느냐
재산세 같은 건 잊고 살아도 되니 얼마나 좋으냐
사는 건 맹물로 허공에 그린 그림 같아서
한 뼘도 안 되는 길을 평생 헐떡이며 걸어왔다
열 켤레 넘는 구두굽이 바깥쪽만 닳아 없어진 뒤
남은 건 기울어진 어깨
-
사는 거, 그깟…
-
주춤거리며 따라오던 아내가 밥이라도 먹고 가잔다
단골로 다니던 추어탕집으로 간다
아이들 키운 집 넘기고 정든 동네 떠나려니 서운하겠다
그대와 나, 한 시절 뜨겁게 생을 외쳤느니
밥보다 먼저 소주 한 병 주문한다
언제 우리 다시 이렇게 앉아 서로의 손에 젓가락 쥐여줄까,
제피가루 너무 많이 넣었다고 툴툴거려볼까,
생각하니 또 잠깐 먹먹하다
-
모처럼 마신 낮술이 걸음마다 매달린다
오늘이야 아내가 있으니 그럴 리 없겠지만
나도 모르게 101번 버스에 취한 몸 실을지 몰라서
현관문에 머리댄 채 삐삐삐삐 비밀번호 누를지 몰라서
머릿속에 남아 있던 숫자 몇 개 얼른 지운다
-
사는 거, 그깟…
---「사는 거, 그깟」중에서
감씨의 배를 반으로 가르는 순간
불쑥 얼굴 내미는 잘 만든 수저 하나
긴 감의 씨는 긴 수저를 품고
둥근 감의 씨는 둥근 수저를 품는다
좀 뜬금없어 보이는 이 수저는
젖빛 감꽃이 감을 잉태하던 봄날부터
꼼꼼하게 준비했을 것이다
어느 노인 홍시로 헛헛한 속 달랠 때
흘리지 말고 떠먹으라고
씨마다 잊지 않고 챙겼을 것이다
---「배려」중에서
풋햇살 영그는 오후 포플러 성긴 그늘에 앉아
흐려진 손금 뒤적거려 길 찾는 것
낮잠 든 구름의 주머니 속에 손 슬쩍 넣어
젖은 시 한 편 훔쳐내 읽는 것
는개 푸른 저녁 낮은 처마 밑에 서서
올 리 없는 사람 목 빠지게 기다리는 것
오래전 헤어진 그녀 집 찾아가서
어제 보고 또 보는 듯 밥 한 끼 청하는 것
혼자된 지 오래인 그녀의
자고 가라는 인사에 손사래치면서도 못 이기는 척
신발끈 다시 푸는 것
택배 기다린다는 핑계로 낯선 마을 노인회관서
며칠씩 묵어가는 것
배낭에 차곡차곡 개어 둔 만담 한 자락 꺼내
현대슈퍼 막걸리값 치르는 것
강가 호박돌 당겨 베고 모래밭에 누워
물안개에 눈썹 적시며 천 년 전 이별 듣는 것
목 간질이는 바람의 짓궂은 손 밀어내며
하하 큰 소리로 웃는 것
바람이 집으로 간 뒤에도 뒹굴뒹굴 웃는 것
---「뻔뻔한 유랑」중에서
새벽부터 유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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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보다 먼저 집 나서서 들길을 한참 걸었고
오는 길에 편의점 들러 우유와 맥주를 샀다
집에 와서 조금 오래 씻은 뒤
얇게 썬 늙은 오이 살짝 절여 초장에 무치고
어제 얻어온 배추 넣어 된장국 끓였다
아침 먹은 뒤 볶은 원두 곱게 갈아 밀봉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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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유언이 꽤 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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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페루 해변으로 간 새처럼 못 돌아오면
흐트러진 이불은 악몽에 몸부림친 새벽을 증언하겠지
흙 묻은 신발은 갈림길 앞의 망설임을 전하고
젖은 수건은 만조(滿潮)의 절망을 열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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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를 열면 온갖 유언으로 어지럽겠지
남은 우유는 숲으로 망명하고 싶었던 속내를 떠들고
맥주캔은 오지 않은 시를 투덜대겠다
배추된장국은 내 아이들을 사랑했다고 자백하고
노각무침은 어머니를 그리워했다고 토설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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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많이 갈아놓은 헤이즐넛 커피는
끝내 향기롭고 싶었던 욕망을 차마 감추지 못하고
읽다가 귀접어 둔 시집 82쪽은
늦은 밤 꾹꾹 눌러 삼키던 눈물을 털어놓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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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감동적인 유언 한 줄 쓰기를 꿈꾸지만
문장은 갈수록 창호지 문처럼 축축해지고
지난 유언장 뒤져 함부로 뱉은 다짐 지우고 싶고
---「나는 날마다 유언을 쓴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