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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의 이름 예수”
[사도행전 3:1-10]
오늘 본문은 앞선 2장 43절에서
‘사도들이 행한 기사와 표적’중 하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1절에서 ‘제 구시’는
오후 3시를 의미합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기도 시간을 정해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 중 오후 3시에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유대 전통에 따라 기도한 것을 수도 있고,
칼빈의 말처럼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이들은
성전 미문이란 곳에 이릅니다.
‘미문’은 영어로 ‘Beautiful gate’라고 합니다.
정확히 어느 문인지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름에 걸맞게 화력하고
아름다운 장식으로 유명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바로 이곳에 ‘미문(beautiful gate)’과
어울리지 않는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혼자 걷지 못하고 남들 손에 의해
들려져서 올라왔습니다.
나이는 40세가 넘었는데
여태껏 단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나면서 못 걷게 된 자’라고
소개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살았을 겁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이기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화장실도 자기 마음대로 갈 수 없는
불쌍한 처지였죠.
어릴 땐 그래도 그럭저럭 지냈겠죠.
그러나 사춘기가 접어들면서
이런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나만 다른 걸까?
다들 저렇게 건강하게 잘먹고
잘 사는데 말이야.’
‘언제쯤 이 고통은 끝날까?’
이런 생각 속에 살지 않았겠어요?
이번 주에 어느 책을 읽다가
이런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어느 청년이 부푼 마음을 안고
군대를 갔습니다.
그것도 장교로 말이죠.
이 청년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열심히 훈련받고
멋지게 군생활 하다가
전역 후 유학가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훈련소에서 남들보다
더 열심히 훈련을 받던 중
다리를 다치고 말았습니다.
고관절에 부상을 입었는데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어요.
군의관이 보더니만
큰 병원으로 가야한다고 해서
국군수도병원까지 갑니다.
거기서도 하는 말이
“당장 수술해야 한다”였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떻게 되는지
물었어요.
되돌아온 건 앞으로 평생 다리를
절게 될 거란 말이었어요.
찬란한 인생을 꿈꿔왔던 청년에겐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었죠.
그날 밤, 수술대기를 하며
혼자 침상에 누워있는데
눈물이 그렇게 나더랍니다.
누구라도 그러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떠셨을 것 같아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무명의 앉은뱅이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 아닙니까?
내 주변에 있는 직장 동료는
계속 승진하고 잘나가는데
나만 제자리인 것 같을 때 그렇죠.
동창회에 나가면 다들
여행 간 이야기하며 떠드는데,
나는 다음 주에 나갈
카드값 때문에 걱정하고 있죠.
다들 성장하며 달려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느끼진 않습니까?
그런 우리에게 오늘 주님이
희망과 소망의 말씀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평소처럼 미문에 앉아 구걸하고 있던 그에게
새로운 만남이 찾아옵니다.
바로 베드로와 요한이었죠.
그는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손을 뻗으며
그들을 바라봤습니다.
바로 그때 베드로와 요한은
그를 주목합니다.
여기서 ‘주목하다’는 단어는
‘응시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를 향해 외칩니다.
“우리를 보라!”
이 말을 들은 앉은뱅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 사람들 왜 이러지?
다들 나한테 동전만 던지고 가는데 말이야.’
아마 그는 이전까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의아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제자들을 바라봅니다.
본문에서는
‘무엇을 얻을까 하여’라고 나왔죠.
아마도 그는
‘이 사람들은 뭔가 더 많이 주겠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죠.
우리 함께 믿음으로 6절을 읽겠습니다.
사도행전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베드로는 무엇인가 받을까 하여
기대하고 있던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없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만 듣고 앉은 뱅이는
실망했을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었거든요.
남들처럼 건강은 없지만
돈만 있어도 살 수 있거든요.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도 경제적으로 부요한 게 좋지,
가난한 걸 좋아하는 분 계십니까?
저는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부요한 크리스천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우리의 삶에
‘은과 금’은 주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통장으로 들어오는 돈보다
은행에서 가져가는 게 더 많지 않습니까?
‘월급은 내 통장을 스쳐지나간다’고도 합니다.
이렇듯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은과 금’일 때가 많아요.
cf) 말씀을 묵상하며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떠올랐습니다.
광야는 식물이나 동물이 살기엔
부적합한 곳입니다.
가져온 식량이 다 떨어지고 나면
자연스레 다이어트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릅니다.
빵이나 과자는커녕,
마실 물조차 구할 수 없죠.
이들에게 하루하루는
치열한 생존 게임이었죠.
그러나 자연스레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은과 금’을 요구했습니다.
바로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죠.
하나님은 이들의 말을 들으셨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돌려보내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바로 ‘만나’였어요.
매일 아침마다 눈을 뜨면
집 주변이 온통 만나로 가득했습니다.
먹을 만큼만 거둬서
가족들이 맛있게 먹었어요.
그걸 40년동안이나 계속 내려주셨어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에게 광야 생활은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은과 금이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거죠.
그들의 공급자는 애굽의 파라오가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8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명기 8: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셨던 이유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게 하려하심이었답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을
만나로 먹이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필요을 아신다는 거예요.
왜요?
하나님은 그들의 공급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주인이며 아버지셔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만나와 같은 것을 매일 공급하세요.
그래서 완전히 굶어 죽지 않게
하시는 겁니다.
도저히 앞이 안 보이고
사면이 막힌 것 같아도,
하늘이 열려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지금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십니다.
당장 그게 보이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러나 돌이켜 보면 우리의 삶엔
만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어요.
그런 면에서 볼 때 오늘 우리의 삶에도,
앞으로 우리 인생 가운데
만나의 은혜가 있을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만나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베드로가 고백하죠.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
지금 베드로가 주는 것은
은과 금이 아니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고 말하는
그것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세상은 천박하다고
무시하는 예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였어요.
유대인들은 모두 무시하던
예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예수의 이름을 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우리 함께 7-10절을 읽겠습니다.
사도행전 3:7-10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런 기적이
우리에게 일어날 줄 믿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을 전해줬습니다.
그랬더니 40년 넘게 그를 묶고 있던
장애가 끊어졌어요.
전혀 걸어본 적이 없었던 다리였으니
얼마나 앙상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발과 발목에 힘이 생겼어요.
그리고 그는 단순히 서는 것 뿐만 아니라
걷고 뛰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정말 들어가고 싶었던
성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전까지 그는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성전 문 앞까지만 갈 수 있었어요.
율법적으로 볼 때 장애를 가진 자가
성전에 올라가면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고침 받은 그는
율법의 모든 저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는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며
성전으로 향했습니다.
그제야 그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대신
찬양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예수의 이름은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이름은
바로 ‘예수의 이름’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구제하지 말자는
의미는 아닙니다.
교회가 영적 구원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건강한 교회일수록 영혼 구원과
실제적인 물질을 통한 구제에 힘을 씁니다.
초대 교회도 복음 전파와 함께
가난한 자들을 돕는 사역을 함께했습니다.
우리도 할수만 있다면 은과 금으로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합니다.
동시에 ‘은과 금’보다 더 강력한 능력은
예수의 이름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본문을 묵상하며 열왕기상 18장이
자꾸 오버랩되었습니다.
여기에 보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이방 선지자 850명과 영적 전쟁을 치릅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는 비를 내려 달라고
애절하게 부르짖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몸에 상해를 입히며 말입니다.
3년 반이나 가뭄이 계속되는 때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비가 오지 않았죠.
바로 그때 엘리야 선지자는
12개의 단을 쌓고 그 위에 제물을 올린 뒤
그토록 귀한 물을 쏟아 붓습니다.
사람들이 보면서
이런 저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헉 귀하고 귀한 물을 왜 붓는 거야?
저거 한 바가지만 주면 소원이 없겠다!”
물이 은과 금인 시대에
그것을 버리고 구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응답을 구했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우고
고랑에 찰랑거리는 물까지 훑어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바알이 거짓 신이고,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은과 금을 구하는 것이
나쁜 건 아닙니다.
그러나 기억할 게 있습니다.
은과 금보다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강력한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우리의 외적인 문제만을
다루지 않습니다.
내면적인 문제까지도 고치십니다.
심지어 죄로 인하여
영원한 불심판에 떨어질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할 것은
그 이름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내 삶에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만으로
만족한 삶을 살게 됩니다.
비록 당장 은과 금이 주어지지 않더라도
날마다 만나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은과 금은 단지 며칠을 살게 할 뿐이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회복된 삶을 주십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청년을 기억하십니까?
그 청년은 원래 목사가 되어
멋진 목회를 하는 게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장애인이 된다는 말을 듣고
큰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그렇게 병상에 누워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정말 큰 소리로 하나님을 부르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세 번이나 하나님을 불렀지만
고요한 정적만 계속 됐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올라왔습니다.
그리곤 자신의 믿음 없는 삶이
비참하게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아, 내가 엉터리 신앙인이었구나!’
‘모태신앙으로 3대째 살아왔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었구나.’
그리곤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있던
은과 금이 무엇인지 보게 하셨습니다.
그는 군목으로 전역하여 안수도 일찍 받고,
유학도 다녀와서
큰 교회 목회를 하는 게 꿈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의 내면에는 하나님을 이용해
성공하려는 야망이 있었던 거죠.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이 청년 목사의 마음을
완전히 바꿔놓으셨습니다.
울며 회개하며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했습니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이 모습 그대로 목사가 되었으면
큰 일 날뻔했겠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다리를 치셨구나.’
그러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했답니다.
“하나님, 저는 이제 진짜
하나님의 종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이 가라 하시는 곳에서,
사명을 감당하고 싶어요.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제가 섰을 때
‘나의 종아 수고했다!’
이 말씀 한 마디만 해주시면
저는 원이 없겠어요.”
그렇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이름으로 새로워진
그의 다리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다리를
절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분이 바로 ‘선한 목자교회 원로목사’이신
유기성 목사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인생의 앉은뱅이로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문제를 만나서
남들과 비교하며 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흙수저의 삶이니까
이렇게 사는 게 당연하다며
인생을 비관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쉽게 넘는 성전 미문을 바라만 보며
신세 한탄만 하고 있진 않나요?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세요.
능력의 이름이 있다.
바로 ‘예수’란다.
그 이름을 믿고 일어서렴!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오른 손을 붙들고
일으켜 세우실 줄 믿습니다.
좌절의 자리에서, 실패의 현장에서,
상처뿐인 골방에서 다시 일어나
주님께 나오라고 하십니다.
주님 손 붙잡고 일어서십시오.
말씀을 준비하며 이 찬양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주님은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여기서 ‘누군가’는 바로 우리 주님이시죠.
주님은 지금도 기도할 힘이 없어
주저 앉아있는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소망 없는 앉은뱅이에게 찾아온 분은
제자들이 아니라,
그들 안에 계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인생을 포기하던 그를 일으키신 것도
예수님이셨습니다.
바로 이 예수의 능력으로
다시 일어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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