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요하강 (7) 러일전쟁 직후의 만주상황
1895년 청일전쟁 무렵의 만주 인구
1895년경 만주 인구 대략 500만여명중 한족(漢族)은 이미 200만여명에 달했다.
청나라의 1895년경 청일전쟁 패배 후,
청나라와 러시아의 협의에 따라 1897년 만주를 횡단하는 중동로 철도(동청철도)가 건설되기 시작했고, 요동반도로도 남만주 철도(1898~1903, 하르빈과 여순간)가 개통되었다.
조선과 만주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 벌인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후, 제정 러시아는 1908년경부터 60만명 극동이주 계획 등을 추진하였고,
청나라는 일본, 러시아, 미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만주 진출에 대응해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고자 만주로의 한족 이주를 장려할 수밖에 없었다.
한족의 만주 이주 초기에는 산동, 하북, 하남 출신들이 많이 이주하였다.
그 결과 만주의 인구수는 청나라 말엽에 이미 조선의 인구수를 추월하였다.
1905년경 러일전쟁 종전직후의 상황
러일전쟁이 지속되던 시기,
1905년 1월. 시민들의 평화적인 시위를 용납하지 못한 짜르 러시아는 비무장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하여 수백여명을 사살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되어 황제 지배체제가 위기에 빠진다.
러시아 내부에서는 볼셰비키, 멘세비키 등의 혁명세력이 강화되고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러시아 혁명세력의 일부가 러일전쟁 기간중 일본의 돈까지 받아 먹었고, 1차 대전 때는 적국인 독일의 지원도 받았다는 소리가 분명 있다.)
러시아 극동에 위치하여 죄수들이나 유배 오거나, 혹은 농노에서 해방된 사람들, 우크라이나 지역 하층민들, 조선에서 일제를 피해 살기위해 탈출한 사람들이 이주해 오던 시베리아, 사할린섬에서도 혁명 운동에 동조하는 자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당시 시베리아의 특성상 광활한 대지에 사람이 드물게 존재하는 지역인지라, 짜르 러시아는 못살아서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인들까지 받아들여 타이가 개간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1905년 포츠모스 조약으로 러일전쟁은 종전
러일전쟁은 결국 1905년 9월경 미국의 중재로 종전된다.
1905년 9월 5일경에 합의된 포츠머스 조약(Treaty of Portsmouth : Портсмутский мирный договор)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포츠머스 조약 주요 내용 ====
1.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영향권을 인정한다.
(※1905년 11월의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 상태가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대략적으로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등이 모두 한국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인정한 것이다.)
2. 러시아의 요동반도의 관동주 조차지와 남만주철도의 일부(장춘 여순간 철도)를 일본에 양도한다. 당시 만주의 핵심 철도중 하나인 동청철도(블라디보스토크와 만주리 간의 철도)와 북만주의 대도회가 된 하르빈 일대에 대한 짜르 러시아의 지배권은 인정된다.
3. 회담 무렵 일본이 무력 점령한 사할린섬의 북위 50도 이남과 인근 섬들을 일본에 할양한다.
(※북위 50도 이하 사할린섬 남부의 주민에 대한 추방과 학살이 있었다고 한다. 동해의 독도만 이 때 일제로 넘어간 것은 아니다.)
4. 어디까지나 일본측 주장에 따르면 러시아는 동해, 오호츠크해 및 베링해 일대의 어업권을 일본에 양도한다.
(※동해, 오호츠크해, 베링해의 어업권과 쿠릴 열도, 각종 도서 등에 대한 소유권을 놓고는 이후에도 여러차례 다툼이 있었다. 오호츠크해 어장과 베링해 어장, 사할린섬 일대의 가스전 등은 오늘날 한국 어민과 기업들까지 진출하고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어장과 자원의 보물섬이다.
아무르강(과거명칭은 흑수강 혹은 몽고 흑수) 하구에는 무게 수십톤에 이르는 범고래까지 출몰하는 지역이다.)
5. 양측 모두 만주지역 도로의 상업적 사용을 인정한다.
6. 전쟁 포로를 교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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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주라고 부르는 곳은 과거 부여, 요, 금, 원, 후금이 있던 지역인데,
청나라 말엽의 잦은 영토 분쟁에 이어
서구 제국주의 국가중 일본과 러시아의 이권다툼은 러일전쟁으로 일단 정리가 된 것이다.
만주에 대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 지속과 일본의 독점 견재
물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이 남만주의 일본 지배권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러시아가 청나라 혼란기 차지했던 만주를 최소한 나눠 갖자는 것이지 일본이 독점하게 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광대한 면적과 비옥한 토지, 석탄, 삼림, 오호츠크해의 어장, 사할린섬의 석유와 석탄 등을 일본에게 일방적으로 양보할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가 아니었다.
당시 기술부족으로 석유를 제외한 천연가스의 활용도는 낮았다.
그 무렵 기술의 부족으로 중동 산유국뿐만이 아니라 시베리아와 사할린주에서도 그냥 버렸던 천연가스는 주요 자원이 아니었고, 활용도도 낮았다.
사할린섬과 만주의 석탄, 철광석, 삼림, 어류의 활용도가 더 높았다.
사할린섬의 유전을 활용했던 일제 역시 대동아전쟁시기에도 사할린섬의 천연가스를 액화, 비료화, 플라스틱 원료화, 화약으로 제조하는 기술 등이 부족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메탄가스를 주성분으로 하는 천연가스의 활용도는 원유 못지 않다.)
일본 제국주의의 친일파 육성과 만주•시베리아 침략 시도
일본 역시 대만, 조선, 만주, 중국, 남양군도, 쿠릴열도, 사할린섬은 국력을 기울인 그들의 침략 방향이었고 양보하기 쉬운 곳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은 러일전쟁부터 1918년 러시아 적백내전, 1931년 만주사변까지 이어지게 된다.
1907년 1월 11일경 청나라 농공상부 상서인 재진, 민정부 상서인 서세창은 동3성의 정세를 보고한다.
당시 만주에서는 장춘 남부와 북부를 경계로 일본 세력권과 러시아 세력권으로 나눠지고 있었다. 또 잦은 전쟁과 마적 및 비적 떼의 출현으로 황폐화된 지역도 많았다.
아무르강, 우수리강, 두만강 등을 경계로 하는 국경지역의 분쟁도 끊임이 없었고, 그것은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1907년 4월 20일경 청나라는 성경(봉천)장군이 동3성 총독 겸 동3성 장군사무를 맡게 하였고, 서세창이 처음으로 동3성의 총독 겸 장군사무를 담당하게 된다.
당시 중국 동북지방은 일본과 러시아 등의 패권 다툼이 한창이었고, 만주 역시 계속해 침식당하고 있었다.
4월 29일경, 동3성 총독 서세창은 육군 3개 진이 동3성에 있고, 2진, 4진, 5진에서 보병, 포병, 기마대를 동원해 2개의 혼성여단을 구성하고 있다고 보고한다.
8월 7일경, 동3성 총독 서세창, 봉천순무 당소의, 봉천 주재 미국 총영사가 양해각서에 서명했으며 해리만은 새로운 신민둔(신민툰) 철도 건설에 투자하기로 했다.
그러나 미국의 금융공황으로 인해 영국 기업인들이 대신 투자하도록 초청되었다.
8월 12일경 아베 모리타로 일본 대리공사는 이 사실을 외무부에 통보하고 항의했다.
청나라는 만주에 대한 개방 정책을 가속화하고,
이곳을 여러 나라의 중요한 무역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은행, 철도, 도로, 토지개간, 광업 등에 막대한 외채를 빌리기로 한다.
1907년 10월 13일경, 청 정부는 동3성 총독인 서세창이 동3성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처리하기 위해 수천만 달러의 외채를 빌릴 수 있도록 허용한다.
10월 26일경, 호북 안찰사 양정분이 원세개와 혁광이 사익을 탐하고 나라를 해친다는 이유로 탄핵했고,
청 정부는 서세창, 양사양, 진기룡 등의 공허한 말과 명성을 얻으려는 시도를 질책했다.
서세창 등은 만주의 상업항 개항, 국채 차입, 타국과의 연결, 철도 건설 등의 조치를 취했으며, 명목상으로는(뒤로는 일본 돈을 받아 먹었는지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일본과 러시아의 중국 동북 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중국 동북 지역 진흥 정책을 시행한다.
1909년 원세개는 (청나라 마지막 임금인 선통제의 아버지인) 섭정왕 재풍에 의해 파직되었다.
서태후가 죽은후,
1909년부터 1911년까지 청나라의 실권자는 선통제의 생부인 섭정왕 재풍이었다.
만주에 친일 마적 출신 등장
그러나 이 무렵 만주에는 마적출신들이 혼란한 만주정세를 활용하고, 일제의 만주침략에 협조하며 폭력과 술수를 앞세워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바로 중국의 혼세 말세에 등장한다는 ‘혼세마왕’ 혹은 ‘일제의 개’였다.
(※이 무렵 만주에서 문제가 된 인물들은 ‘미제의 개’, 혹은 ‘영국의 주구’, ‘볼셰비키의 앞잡이’는 아니다.)
그들 역시 만주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강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참고문헌
권성욱 저, <중국군벌전쟁>
신불해 저, <최강의 군벌>, <이야기 중국사>
쉬처 저, <만주군벌 장작림>
동아일보, 조선일보 보도내용
백도백과 https://baike.baidu.com/item/%E5%BE%90%E4%B8%96%E6%98%8C/472?fromModule=lemma_search-box
첫댓글 매번 잘 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ㅎㅎ
실질적으로 포츠머스 조약으로 한국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인정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