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경제학 진영 비판 여전
규제 등 작은 악재에도 가격 출렁, 초보 투자 ‘코린이’ 불안감에 흔들
지난달 1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만달레이 베이 호텔. 블록체인 관련 콘퍼런스인 체인익스체인지드(ChainXChanged)가 열렸다. 메인 무대에서는 ‘디지털 이코노미’를 주제로 패널 토론이 한창이었다. 한 패널의 발언에 관중석이 술렁였다.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뉴욕타임스(NYT)의 인기 칼럼니스트다. “금은 죽었다. 비트코인은 금보다 유용성이 크고, 앞으로 가치 있는 것이 될 가능성이 크다.” 관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개발자의 말이었다면 전혀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화자가 크루그먼이다. 그는 “비트코인은 악마”라고까지 했다. 지난달 초에 게재한 NYT 칼럼에서도 “투기 세력이 비트코인이 가치가 없다고 집단적으로 의심해 버리면 비트코인은 쓸모없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전통 경제학자의 변신, 바닥 신호?
그가 달라졌다. 왜일까. 육성으로 해명한 적은 없다. 시장은 추정할 뿐이다. 가장 그럴 듯한 해석은 올리버 하트 하버드대 교수의 변신이다. 하트 교수 역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다. 벵트 홀름스트룀 교수와 함께 2016년에 받았다. 주요 연구 분야는 ‘계약 이론’이다. 정보 비대칭 또는 불완전 계약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계약을 맺는 경제 주체들 사이의 의사결정 과정을 분석한다. 계약이론에 따르면 모든 경제 행위의 근본을 이루는 계약의 과정이 투명하고 합의가 잘 이뤄질수록 사회 전체의 효용이 커진다.
하트 교수는 지난달 초 프리즘그룹이라는 블록체인 스타트업의 자문위원이 됐다. 이 업체는 블록체인 경제와 거버넌스(지배구조)를 디자인한다. 계약이론과 시장설계, 게임이론, 사회적 선택 등과 관련해 스타트업들에 자문해 준다. 계약이론으로 노벨상을 받은 하트 교수가 코드로 구현된 스마트 계약에 열광하는 것은 당연하겠다. 그는 “블록체인 기술이 경제 주체들에게 더 좋은 인센티브와 계약을 얻을 수 있도록 개발자들이 설계하는 데 관여할 것”이라며 스타트업 합류 이유를 밝혔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하트 교수의 전향(?)이 크루그먼에게는 충격이었는지 모른다. 전통 경제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비트코인은 기술의 외피를 쓴 사기일 뿐이다. 이유가 뭐가 됐든 그런 크루그먼이 달라진 것은 비유하자면 유시민 작가가 비트코인 진영으로 돌아선 꼴이다.
여전히 전통 경제학 진영에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 지지자는 소수파다. 다수는 여전히 부정적이다. ‘닥터 둠’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비트코인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비판했다. 전통 금융 시스템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은 “비트코인은 사기”라고 평가했다.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은 “쥐약을 제곱한 것과 같다”며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가치 투자의 달인이다. 1990년대 후반 인터넷 버블 때에도 “실체가 없다”는 이유에서 기술주를 단 한 주도 사지 않았던 인물이다.
가격이 하락하면 이들의 목소리가 커진다. 암호화폐에 대한 확신 없이 시장에 들어온 ‘코린이(코인+어린이, 초보 암호화폐 투자자)’들은 흔들린다. 불안과 공포에 가격은 더 떨어진다. 연초 암호화폐 등급을 최초 공개한 신용평가사 와이스레이팅스의 후안 비야베르데 암호화폐 팀장은 지난달 서울에서 열린 블록페스타 콘퍼런스에서 “암호화폐 시장은 참여자들이 부정적이라고 생각하면 가격이 더 떨어질 가능성이 큰 구조”라고 말했다.
여전한 기술 낙관론, 산업은 자란다
전통 경제·금융 진영의 집중 포화에 실리콘밸리를 위시한 기술 진영은 엄호 사격을 가한다. 중국 최초의 암호화폐 거래소 BTCC를 공동 창업한 바비 리는 암호화폐 시장 치어리딩에 나섰다. 지난달 말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2020년 비트코인은 6만 달러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시가총액 7위의 암호화폐(6일 현재) 라이트코인을 만든 찰리 리의 형이다.
암호화폐공개(ICO) 자문 및 리서치 회사인 새티스 그룹은 최근 보고서를 내놓았다. “비트코인 가격이 5년 안에 9만6000달러를 넘을 것”이라는 낙관론을 펼쳤다. 다만 시가총액 3위 암호화폐 리플에 대해서는 “5년 내 0.01달러 수준까지 가치가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 진영은 기술적 우월성 및 수월성 때문에 암호화폐 시장은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 실제로 암호화폐가 실생활에서 전선을 넓히고 있다. 암호화폐 전문 미디어 크립토슬레이트는 최근 “비트코인 거래량이 1조3000억 달러를 기록했다”며 “페이팔 및 몇몇 신용카드사를 이미 앞질렀고, 2022년에는 비자도 추월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ICO 시장은 이미 기업 자금조달 수단의 한 축이 됐다. 글로벌 컨설팅회사 PwC에 따르면 지난 2분기 이뤄진 ICO 규모가 72억 달러다. 분기 실적이 지난해 전체 ICO 규모(70억 달러)를 웃돈다. 미국 시장에서의 기업공개(IPO) 규모의 45%, 벤처캐피털(VC)의 31%에 달한다.
암호화폐 투자에 발을 들인 진성(?) 투자자들은 시장의 미래를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두 가지는 궁금하다. 하나는 ‘언제(when)’다. 시장이 언제쯤 상승 쪽으로 방향을 틀지 알고 싶어한다.
지금 시장은 뉴스에 따라 춤을 춘다. 악재에 떨어졌다 호재에 오르면서 비트코인 6000달러 선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5일(현지시간)에는 월가 최초로 암호화폐 전문 트레이딩 데스크를 설치하려던 골드만삭스가 규제 이슈 때문에 계획을 전면 보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폭락했다. 암호화폐 대장이라는 비트코인조차도 이제 만 열 살이다. 적정 가격이 얼마인지에 대한 시장의 합의가 없으니 뉴스에 가격이 민감하게 반응한다.
일부에서는 기술적 분석에 따르면 바닥에 가까워졌다는 신호가 감지된다고 주장한다. 비야베르데 와이스레이팅스 암호화폐 팀장은 “11월 중순에 바닥을 찍고 상승 쪽으로 방향을 틀 것”이라고 예측했다.
다른 하나는 ‘무엇(what)’이다. 미래를 낙관하는 투자자에게 시점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사느냐다. 경제전문매체 마켓워치에 따르면 지난해 진행된 ICO의 절반이 벌써 실패로 판명 났다. 일부에선 “알트코인의 99%는 사라질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샘슨 모 블록스트림 최고전략책임자(CSO)는 “2013년 말 기준으로 시가총액 상위 20개 암호화폐 가운데 5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비트코인과 라이트코인뿐”이라며 “암호화폐 시장에서는 분산 투자보다 비트코인에 ‘몰빵’하는 게 리스크를 줄이는 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