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간이 흐를 수록 젊은이들이 성경에 대해 잘 모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자신의 나이만큼 성경을 읽은 사람들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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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통독할 때, 단순히 정해진 순서를 따라 읽는 것보다는 개요를 두고 지금 읽고 있는 내용이 전체의 흐름중에서 어떤 내용인지를 파악하며 읽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은혜를 누리기에 급급하게 되고, 성경 자체가 주는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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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태복음을 읽는다고 할 때, 1-2장은 전체 마태복음의 서론의 역할을 하면서 하나님이 왜 인간이 되셨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싫어했다. 그래서 계속해서 질문을 통해 예수님을 코너로 몰아넣으려고 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로 시험하려다가 되려 당하고,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천국에서 7형제 중 누가 누구의 부인이 되는가 질문했다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른다고 핀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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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찾아가서 '그리스도가 누구의 자손이냐?" 물으시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하는 그들에게 시편을 인용하면서 질문하신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네 원수를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라는 질문을 하면서 왜 다윗은 자신의 자손에게 주님이라고 부르는가? 질문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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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께서 내 주께' 라는 표현은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 라는 말로 다윗은 자신의 자손에게 주님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왜 다윗은 자신의 자손에게 주님이라고 기도하는가? 바리새인들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다는 성육신의 신비를 알지 못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의 생각 정도로 구약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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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마태복음 1-2장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우리의 구원을 필수요소임을 알려주고, 어린 예수님이 애굽으로 들어가고, 또 애굽에서 나오고, 나사렛에서 살고, 세례를 받고 광야로 가시는 이야기가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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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애굽으로 들어가는 것도 구약의 성취임을 알려준다. 헤롯이 죽기까지 애굽으로 도망가 있었던 사건을 단순한 헤프닝이 아니라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라는 호세아 11장 1절의 성취라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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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11장의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내 아들'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님이고, 출애굽을 하는 장면이 아니라 애굽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를 왜 출애굽과 연결해서 말씀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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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예수님이 애굽으로 가시고, 애굽에서 나와서 나사렛에서 사시고 하는 모든 이동이 구약의 성취인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의 실패를 다시 예수님이 대표해서 돌이키시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새로운 이스라엘로 구약의 실패를 대신하여 자신의 순종으로 구원을 이루고 계심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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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도 마찬가지다. 세례는 죄가 있는 죄인이 죄를 씻는 것이지만 죄가 없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을 대표해서 , 우리를 대신해서 세례를 받으신다. 고린도전서 10장은 모세와 함께 홍해를 건넌 사건을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세례는 이스라엘의 홍해의 사건이라면, 광야의 시험도 이스라엘의 실패를 되돌리시는 새이스라엘로 승리하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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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유에 대해 신명기 8장은 '사람이 떡으로 살지 않고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라고 명확히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을 배우지 못했다. 떡이 좋아서 광야에서 실패했다. 신명기의 마지막에 나오는 모세의 노래는 결국 이스라엘이 실패할 것이라는 예언으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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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수동적 순종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가져가신 사건이라면, 예수님의 능동적 순종은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셔서 의를 획득하셨고,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신 사건이다. 은밀하게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기까지 마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대신하여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승리하셨고 구원을 이루셨다는 이야기를 설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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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스터디 바이블도 좋고, 다양한 성경의 개요를 설명해둔 책도 좋다. 건전한 자료들을 옆에두고 내가 지금 읽고 있는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를 살펴보면서 성경을 통독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무슨 내용인지 어떤 문맥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면 내가 원하는 은혜만을 문맥과 상관없이 찾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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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현대를 살아가면서 짧은 큐티 정도, 그리고 급하게 읽는 성경 통독 정도로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 좀 더 시간을 내서 성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성경연구의 과정이 필요하다. 꼭 PBS같이 짧은 본문을 깊이 있게 보는 것이 아니라, 통독의 과정을 좀 더 연구하듯이 보는 것이 더 필요한 것 같다. 1장의 내용과 2장의 내용은 어떻게 연결되는지? 한 장 중에서 이 내용은 앞의 내용과, 또 뒤의 내용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좀 더 생각하면서 읽는 것이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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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오늘날 영적인 침체의 원인 중의 하나가 너무 급하고 단순하게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조급함이라고 말한다. 너무나 피상적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좀 더 많은 시간을 내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점검하지 않는 피상성을 경고한다. 시간이 나면 유투브나 핸드폰으로 눈길이 가고, 영상을 주로 시청하면서 자투리 시간을 보내면서 삶의 무기력과, 어려움을 호소한다면, 결국 계속되는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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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지하철에서 지나가듯 피상적으로 읽으면서 은혜가 되는 책이 아니다. 영어공부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공부를 하는 정성의 10%만 쏟아도 훨씬 더 명확하게 성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란시스 챈은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오늘날 교회는 야성을 잃어버렸다고 한탄하면서 "오늘날 교회는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러 가는 두려움을 모르는 담대한 선교사들을 배출하기는 커녕 부모님 지하실에 얹혀 살면서 싱글 모임이 없다고 불평하는 청년들만 가득하다"고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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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야성은 낯선 하나님, 길들여지지 않는 하나님을 만날 때 생긴다. 넓은 벌판을 달려야 하는 얼룩말이 동물원에 갇혀 있게 되면 늘 삶은 무기력해진다. 하나님의 말씀에 힘을 쓰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말씀이 씌여진 그대로 읽을 때 은혜는 따라온다. 그리고 말씀이 심어지면 기도의 마음이 생긴다. 피상적인 말씀과 피상적인 기도생활을 하면서 여전히 능력이 없다고 한탄하며, 세상을 이기지 못해서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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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현대를 살아가지만 토요일 같은 주말에 1-3시간 정도 시간을 내서 충분히 말씀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삶은 왜 그렇게 힘들고 무기력한가? 인생이 힘든 것은 당연한 것임을 알고 어려움을 복음안에서 극복해가려는 시도가 필요한 시대이지, 불평으과 무기력으로 한탄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적당히 교양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야 하는 사명자로 이 땅에 살고 있는 것이다.
고상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