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길목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가을이 오면 '회남자'
(淮南子는 중국 서한 시대
회남왕 안(安)이 빈객들을 모아
편찬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라는
중국 고전에 나오는 글귀가 생각난다.
춘여사 추사비(春女思 秋士悲)는
봄은 여인을 사랑하게 만들고,
가을은 남자를 슬프게 만든다.
한 잎 한 잎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남자들은 비감에 젖을 것이다.
가을이 짙어지는 처서(處暑) 지나
백로(白露)에 가까우니
아침저녁으로 선선하다.
귀뚜라미 소리가 벌써 창문을 넘나든다.
청명한 하늘만큼
광안리 바다의 물빛도 깊고 푸르다.
여름에서 가을로 들어서는 길목,
뭇생명들이 제 빛깔로
웅숭깊은 날들이다.
가을이면 마음을 끄는 작곡가가 있다.
슈만, 클라라 & 브람스
브람스는 은사의 부인 클라라를 사랑했으나
클라라는 슈만과 함께 묻혔다.
브람스 악보, 브람스 동상,
슈만과 클라라의 무덤
요하네스 브람스다.
클라라 슈만과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이
가을의 정취와 맞닿아 있기 때문일까.
브람스 특유의 고독과 낭만이
그 자체로 가을을 닮아서일까.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브람스를 빌어 사랑이라는
미묘한 감정의 색채를 그린 소설이다.
서른아홉의 중년여성 폴은
실내장식가로
만족스러운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바람둥이 연인 로제 때문에
늘 외롭다.
어느 날 폴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다.
열네 살 연하의 시몽이
플레옐홀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함께 가자 청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소녀시절에나 들었을 법한
상투적인 질문은
이내 폴의 삶을 출렁이게 했다.
브람스를 좋아했던가.
느닷없이 찾아온 사랑을 어찌해야 하나.
사랑에 대한 탐문을 넘어
끝없이 밀쳐 두었던
자기 자신과 냉정하게 마주한다.
물음표가 아니라
말줄임표를 제목으로 삼은
까닭이기도 하다.
‘이수’(離愁, Goodbye Again)는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흑백 스크린에
화사함과 스산함이
교묘하게 갈마들며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다.
로제와 달리 시몽의 사랑은
지고지순하다.
그러나 폴은 시몽과 함께 있을 때
젊어 보이려 애쓰는 자신을 깨닫는다.
좀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며
사랑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시몽은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로
폴에게 고독형을 선고한다.
시몽과 함께한 음악회에서
브람스 교향곡을 들으며
로제와의 첫 만남을
떠올린 것은 복선이었을까.
폴은 결국 로제에게 돌아간다.
시몽의 선고대로
또다시 고독 속에 유폐될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잉그리드 버그만의 우수 가득한 표정은
주제음악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브람스 교향곡 제3번 제3악장이다.
첼로가 그윽하게 선율을 이끌면
바이올린이 화답한다.
마음을 속절없이 무너뜨린다.
계절이 바뀌는 이 무렵을 사랑한다.
가을은 풍요로운 결실의 끝자락에서
운명처럼 쓸쓸한 대지로
돌아가는 계절이 아닌가.
봄의 광휘나 여름의 정열이
마치 환상처럼 아득해지는 이즈음,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담담하게 바라보는
여유를 가지는 것은 어떨까.
세상에 휘둘리지 않고
타자의 삶을 추수하지 않는,
오롯이 나를 사랑하는
그런 날들을 위해서 말이다.
나날이 가을이 깊어갈 때
온갖 물것들은 제 빛깔을 드러내며
익어갈 것이다.
브람스가 있어 다행이다.
가슴을 파고드는 선율에
온통 출렁여도 좋을 가을,
어김없이 가을이 온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남영희의 글을 읽고
별이 빛나는 밤에
[노트]
https://youtu.be/4L0MqnAoEJM
브람스가 1876년 완성한
교향곡 1번은
구성에서 완성까지 21년이 걸렸다.
그 뒤 교향곡 2번은
실질적으로 4개월 채 안 된
짧은 시간에 완성했다.
그렇다면 교향곡 3번은
역시 작업의 속도가 상당했지만,
시기적으로는 2번 완성 이후
6년 뒤에 작곡되었다.
브람스가 50세 때였다.
1961년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을 영화화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Aimez-vous Brahms)에
3악장 포코 알레그레토가 삽입된 후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고,
현재도 브람스의 전곡 중
가장 인기있는 작품으로
사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