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의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가 “산수가 좋기로는 첫째가 장성, 둘째가 장흥”이라 했다는 말이 있다. 그래선지 장성에서는 굵직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는데, 장성사람들 중에는 그만큼 이곳에 명당이 많기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곳 장성군에 전해오는 시조 한 수가 있다.
바람도 쉬여 넘 고개. 구름이라도 쉬여 넘 고개. 산진이 수진이 해동청 보라매라도 쉬여 넘 고봉 장성령 고개. 그 넘어 님이 왔다 면, 나는 번도 쉬지 않고넘으리라.
하늘에 떠 있는 구름마저 쉬어 넘을 만큼 장성의 산세가 험한 것은, 이 지방에 전해져 왔다는 ‘사냥놀이’에서도 알 수 있다. 이 놀이는 산신령의 심부름꾼인 호랑이를 죽인 포수가 원님이 내리는 벌과 상을 함께 받는다는 줄거리로 되어 있다. 전라북도와 도계를 이루는 북쪽 땅에는 “봄 백양, 가을 내장”이라는 속담이 생겼을 만큼 산세가 빼어난 백양산이 내장산과 안팎을 이루고 있으며 입암산이나 방장산 같은 높이 700m쯤의 굵직한 산들이 마치 긴 성처럼 군을 둘러싸고 있다. 또한 장성군의 갈재를 기점으로 해서 산맥이 동쪽과 서쪽 두 갈래로 나뉘어 쭉 뻗어 내린 형국이다. 조심조심 오르자 어느 새 정상인 듯싶고, 길도 옛길이다. 대관령이나, 구룡령 엣 길 같이 V자가 파여진 곳이 하늘빛이 푸르다. 여기가 갈재 정상이로구나. 하고 바라보니 바위벽에 영세불망비가 새겨져 있지 않은? 자세히 들여다보자 뚜렷이 보이는 글자, 장성부사 홍병위洪秉瑋의 영세불망비다. 1871년에 장성부사로 부임했던 홍병위가 갈재 길을 넓히고 보수했기 때문에 장성부 사람들이 영원히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세운 비다. 세월은 갔어도 그 비가 남아 길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구나. 그래, 다른 말이 필요 없는 ‘유레카’다. 이럴 수가, 자동차가 생기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어지다가 어느 사이 아주 끊어지면서 잊혀졌던 길이 오늘에야 다시 나타난 것이다. 영남대로의 문경새재나 관동대로의 대관령 옛길이 재조명 되면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땀을 흘리며 넘고 있는데,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멀어졌던 길을 다시 찾았다니 이 얼마나 고맙고도 고마운 일인가? 길은 그것에서부터 이리저리 휘돌아가고 힘들여 찾은 길을 따라서 얼마쯤 내려오자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들려온다. 가쁜 숨을 내쉬며 물가를 찾아 내려가 바닥에 엎드린 채 벌컥벌컥 마신다. 옛 호남선 열차가 지나던 폐굴에 이르고 드디어 갈재를 넘었다. 갈재 입구에서 바람을 쐰다. 제법 쌀쌀하다. 옛날에 장성 청암역에서 갈재를 넘으려면 고개 밑 원덕리에 있던 미륵원에서 쉬거나 여러 사람이 무리를 지어야 했다. 고갯길에서 강도를 만나기 일쑤라 중종 때인 1520년에는 군대를 파견해야만 했던 것이다. 갈재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이 전북 정읍시 입암면 등천리(登川里) 군령마을이다. ‘군령(軍令)다리’라고 부르는 군령마을은 예전에 군량미(軍糧米)를 저축해 두었던 곳이라고 한다. 군령다리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가 예전에 돌부처가 셋이 있었다고 해서 삼부리 골이다. 등천리 중심에 있는 마을이 마을 뒤에 장군봉이 있고 마을 앞으로 큰 길이 나 있는 홍거리마을이며 바로 위쪽에 있는 마을이 장재동마을이다. 정읍에서 장성 쪽으로 넘어갈 때면 대개 군령다리 주막에서 쉬거나 천원역에서 잠을 자고 갔다고 한다. (...) 군령다리 동남쪽에 있는 ‘삼부리골’에는 돌부처가 셋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사라진 지 오래다. 군령다리 앞으로 흐르는 냇가에는 제법 큰 물고기들이 수십 마리가 헤엄쳐 다니고 있다. 동쪽에 새로 생긴 신동 마을을 지나는데 끝없는 논두렁길이다. 이 길을 계속 가서 입암면 대흥리에 도착하면 점심밥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서쪽으로 보이는 입암저수지 바로 아랫마을이 조선시대에 삼례도찰방에 소속되어 있던 천원역(川院驛)이 있던 천원이다. 역말 또는 천원이라고 부른 천원 가운데에는 역터인 역마(驛馬) 터가 있다. 천원 가운데에 있는 도내기 새암(우물)은 이곳에서도 시오리가 훨씬 넘는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사람이 그 마을에 있는 용호동의 용쏘에서 구경을 하다가 낫을 잃어버렸는데, 이 샘에서 찾았다는 이야기가 서린 샘이다. 매월당 김시습도 이곳 천원역을 지나다 누각에 올라서 시 한편을 남겼다.
언덕 펀펀하고 먼 나무가 그럴듯한데 희미하게 인가에 접해 있구나. 땅 기름져 밭에서는 차조를 거두고 산이 낮아 차(茶)를 공물 한다오. 갈재에는 구름이 암담한데, 능악(愣岳) 묏부리가 뾰족하구나. 강호의 경치를 수습하고서 올라가니 해가 반쯤 기울었더라. <매월당집>
이 시를 보면 이 일대에서 당시에 차를 재배하여 나라에 공물로 바쳤음을 알 수 있는데, 요즘 정읍의 여러 곳에서 차를 재배하고 있는 것은 그 옛날의 전통을 잇는다는 점에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잊혀졌다가 다시 발견된 삼남대로 갈재, 명승으로 지정되었지만 관리가 안 되어 어렵사리 넘은 삼남대로를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원 답사팀들과 넘었는데, 다시 걸을 때엔 제대로 정비된 옛길을 걸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