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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儁 先生傳
柳子厚 著
목차
내제 류동열柳東說 선생
사진 이준 선생 유영遺影, 고종황제의 위임장과 해아海牙 삼 밀사, 이준 선생의 해아 분묘, 기념 우표
제자 이준 선생의 유묵遺墨, 이준 선생의 부인 이일정李一貞 야사의 유묵, 이위종李瑋鍾 선생의 교지敎
旨, 이승만李承晩 박사의 휘호揮毫, 김구金九 선생의 휘호, 이시영李始榮 선생 휘호, 류동열柳東說 선
생의 휘호
서문
기고起稿 변辯
시조是祖와 시손是孫의 유서由緖 변辯
제1편 요람시대
제2편 소년시대
제1장 대원왕大院王께 배알拜謁
제2장 김병시金炳始, 최익현 崔益鉉 양공의 망년교 忘年交
제3편 청년시대
제1장 고관 홍우길洪祐吉을 힐난
제2장 북청北靑에 경학원 설립
제4편 장년시대(전기前期)
제1장 결혼 후 법학연구
제2장 선생과 독립협회사건
제3장 개혁당의 비밀결사
제4장 독립관 국민대 연설
제5장 독립만세의 대몽大夢
제6장 한일의정서 반대운동
제7장 대한보안회大韓保安會에 참가활동
제8장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조직 포진
제9장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의 문화운동
제10장 공진회共進會를 조직 활동
제11장 한미 공수동맹을 제성提醒
제5편 장년시대(후기)
제1장 을사 오조약 전후 반대운동
제2장 청년 안중근安重根의 내방
제3장 신민회新民會 비밀결사
제4장 국체보상운동
제5장 공개재판
제6장 평화회의에 밀현密現 계획
제7장 이상설李相卨 선생과 영서원통靈犀圓通
제8장 전 내대內大 이도재李道宰 씨와 밀의
제9장 전 탁대度大 이용익李容翊 씨와 밀의
제10장 중추원中樞院 의장 서정순徐正淳 씨를 밀방密訪
제11장 여관女官 박 상궁의 활동
제12장 전 주로駐露 공사 이범진李範晉 씨의 노력
제13장 미인 헐벗訖法과 영인 배설裵說의 암조暗助
별편 해아 밀사사건
제1장 어수대魚水臺에서 천안天顔을 봉승
제2장 밀조密詔와 친서를 봉대奉戴
제3장 오궁동五宮洞 전별연餞別宴
제4장 자강회自强會에서 최후 연설
제5장 러시아로 향발
제6장 평화회의에 삼 밀사 출현
제7장 해아 만국평화회의에 제소提訴한 공고사控告詞
제8장 성인成仁의 역사일歷史日
[ 부록 ] 일성一醒 연표
李儁 선생전
기고起稿 변辯
오늘은 단군 기원 4279년 죽 대한민국 28년(서력 1946년 3월 1일이다. 이날은 거금 28년 전에 우리 민족이 세계 평화주의를 외치면서 민족자결주의로 갱생 부활하여 보겠다고 부르짖고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용맹스럽게 피를 흘리던 날이었다. 이날은 참으로 우리 민족이 혈투로써 독립의 초석을 물들여 세워놓았던 기념의 역사의 날이었었다.
작년 77 자유 즉, 8. 15해방 후(8월 15일 해방된 날이 음력으로 7월 7석이었으므로) 처음으로 맞이하게 된 이 3. 1기념일은 참으로 감명이 깊은 날이며 참으로 감사가 새로운 날로써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의 날이었으며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즐거운 날이었다.
3천만 민중은 환천 희지歡天喜地 그대로 태극 국기를 손에 쥐고 독립만세의 산山호성呼聲은 천지를 뒤집는 듯한 날이었었다. 전 국민이 이와 같은 융숭한 환호 속에서 이 기념의 행사를 완전독립의 첫 걸음으로 건국 공작의 첫 역사로 훈련원(서울운동장) 벌판에서 성대히 거행하게 된 우리 민족 우리 국가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씩씩한 경사 날이었다.
나는 특히 이 경사 날을 선택하여 우리 민족국가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희생의 성혈聖血을 뿌려 만국 대표 앞에서 성인成仁한 해아 밀사사건의 주인공 일성一醒 이준李儁선생의 전기를 쓰기로 하였다.
나는 2, 30년 전부터 이 전기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이것을 공개하여 쓸 자유의 날이 없었으므로 한갓 숨은 한숨을 길이 쉬고 있을 뿐이었었다. 그리하여 이 전기의 자료만을 모험하여 가면서 구하여 안고 끼고 숨기고 감추어 그 기회가 오기만 고대하고 있었다. 반드시 이 전기를 내가 자유롭게 쓰게 될 날이 있을 것을 나는 믿고 있었다. 나의 믿음은 헛되지 아니하였다. 나의 성원誠願은 이루어지게 되었다.
해방의 천지에 자유의 일월을 맞이하게 되어 내 마음껏 쓸 자유와 기회를 얻게 되었다. 여기에 나의 즐거움은 이루 측량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전기를 쓰려고 몇 번이나 펜을 잡았다 놓았다 하였다. 그러다가 특히 이 3. 1 기념일을 당하여 잉크병의 마개를 빼게 되었다. 이날을 기다려 펜에 잉크 칠을 하게 된 것은 이 전기로 하여금 더 한층 의의 깊게 하려는 의두意肚에서 나온 것이다. 즉 우리 해아 밀사의 주인공 일성 이준 선생의 영혼英魂으로 하여금 더 한층 기뻐하실 것을 기대하는 동시에 만천하의 독자로 하여금 더 한층 감격한 마음으로 이 전기를 대하게 하자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펜을 잠깐 멈추고 생각을 돌려보건대 내가 이 전기를 쓰는 데에 있어서 다른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두 가지의 기연의 연결이 있다. 첫째는 이 전기의 주인공이 나의 빙부聘父요 내가 그의 사위가 된다는 인륜의 기연이 이것이오 둘째는 이 전기의 시작이 3. 1독립기념일을 해방 후 처음 3. 1국경일로 정하게 된 이날이었었다는 봉시逢時의 기연이 이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기연이 구전俱全된 기록적 생활은 참으로 좀처럼 얻어 만나기 어렵고 또 있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한다. 이 얻기 어렵고 있기 어려운 기연의 기록의 생활을 맛보게 된 나의 필봉筆鋒의 행운은 참으로 다복多福을 느끼지 아나할 수 없는 바이다.
만고 충열의 무궁화가 성스럽게 피어있고 천추千秋 정기正氣의 무량과無量果가 탐스럽게 열리어 있는 영원무한의 강상綱常의 낙원으로 향하여 들어가는 나의 필정筆程이야말로 삼매三昧의 법열을 뼛속에 사무치게 느끼게 되는 영원한 기쁨이라 아니할 수 없는 바이다.
나의 붓끝이 과연 그 거룩한 충열의 꽃으로 하여금 잘 열리게 하여 한이 없이 오고 오는 우리들에게 고루고루 자양滋養케 하여 천추의 번영과 만세의 영양을 길러주는 그리하여 충열과 정기의 성性에 윤택할 수 있는 무량의 위대한 사명을 유감이 없이 발휘할 수 있게 될는지 무한한 큰 욕심이 불타오르듯 하는 바가 있다. 이 욕망이 성취된다 하면 이것은 아마 고 빙부 일성 이준 선생의 생전生前 사후死後를 통하여 유일 최대의 희망일 것이오 나로 하여금 이를 제성提醒케 하는 중대한 책무를 메워준 것이 아닐까 하는 깊은 느낌이 자심滋甚한 바가 있다.
이 천재난우千載難遇의 좋은 기연과 그 영원무궁한 큰 기대를 합쳐다가 나의 지둔遲鈍한 필경筆耕이 능히 여무餘畝가 없이 다 잘 갈아낼 수가 있으며 능히 유구遺區가 없이 다 잘 맬 수기 있다하면 어찌하였던지 유일한 목표를 여기에 두고 필봉을 끌고 나아가 보기로 하겠다. 그리하여 우리 대한민국 3. 1국경기념일에 탈영脫穎한 의의를 만 분의 일이라도 이룸이 있다 하면 이는 참으로 고 빙부 일성 이준 선생의 영령에 대한 모보毛報가 되는 동시에 나의 무이無二의 행복이라 할 수 있으며 무상無上의 광영으로 아는 바이다.
강호의 동포 형제 자매들은 이 전기를 등등상전燈燈相傳하며 그 정기를 심심상인心心相印하며 민족적 역사의 정기를 우리의 영원의 국시國是로 굳게 파지把持함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단군기원 4279년 모춘暮春
서울 백세청풍장百世淸風莊
저자 동초東礎 류자후柳子厚
시조是祖와 시손是孫의 유서由緖 변辯
웅족雄族 호벌豪閥 대가大家 명문인 완산完山 이씨의 선원보파璿源寶派에서 허다한 제왕帝王, 허다한 영위英偉, 허다한 충효. 허다한 의열義熱이 어느 파벌보다도 어느 족당族黨보다도 우리의 사승史乘의 장구章句를 많이 점좌占坐하고 있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긍정하는 바이다.
이 태조와 같은 창업 聖主와 世宗같은 성군을 비롯하여 완풍군完豊君 이원계李元桂 선생,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 선생,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등의 성위영현聖偉英賢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그 외에 충효 의열의 인사人士의 수數는 이루 굴지屈指할 수 없을 지경이다. 취중就中 우리 일성 이준 선생은 완풍군 이원계 공의 18세 손으로 탄생하여 한말의 위대한 충열로 한말의 적막한 역사를 깨쳐 찬란한 훈광勳光으로 휘갑揮甲을 친 분이었다. 이성 이준 선생의 전기를 인식引識함에 임하여 불가불 먼저 인식치 아니하면 아니 될 그의 선조의 약전略傳이 있다. 일성 이준 선생의 선조 즉 18대손 완풍군 이원계 공이 이분이다.
이 완풍군 이원계 공의 관명冠名은 원계元桂요 자도 원계라 지은 분으로 환조桓祖대왕의 제1남이었었고 이 태조의 백형으로 탄생된 분으로 공이 영위의 이자異姿로 려계麗季에 탄생하여 일찍 대지大志와 웅의雄意를 품고 공민왕恭愍王조에 문과에 고탁高擢되어 문무 겸전의 웅재위기雄材偉器로 자타가 임허任許하게 되었다.
려말麗末에 경정經政이 위퇴委頹하여 난적亂賊이 사방에서 봉기하니 이때 공은 건곤乾坤을 휘곽揮廓하여 국운을 만회하기에 분투 전력하였다. 그리하여 서西로는 홍건紅巾의 적을 거拒하고 남으로는 운봉雲峰의 난을 평하였었다. 이 훈공으로 척산군陟山君에 초봉初封되고 완산군에 재봉再封되었을 뿐 아니라 관官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니 위극인신位極人臣하여 일인지하 일인지하一人之下요 억조지상億兆之上으로 일국의 정권을 수람收攬케 되었었다. 그러나 천하의 대세가 려운麗運은 수말垂末하고 이조李朝의 운조運祚가 번연蕃延하니 대하大廈가 장붕將崩에 일주一柱로 난지難支케 되었다.
이때 정도전鄭道傳, 조준趙浚 등이 국사國事가 구비口非됨을 보고 자기의 동생인 이성계李成桂를 추대코자 하나 그 의논이 이미 진숙盡熟되어 자기의 심력心力으로는 어찌할 수 없이 되고 말았었다. 동생을 좇으면 려조麗朝의 역적이 될 것이오 려왕麗王을 의지依支하자니 의지할 바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에
『삼한고국신하재 三韓故國身何在(삼한의 옛 나라 몸둘 곳이 어듸메뇨)
지하원종백중유 地下願從伯仲遊(지하에나 가서 형제 만나 놀아볼까)
동처휴운재처이 同處休云裁處異(같은 곳에서 마르재는 법이 다르다 말마소)
형만불필해부부 荊蠻不必海桴浮(형만(중국의 남방지방)으로 가는 바다에 메를 띄우기는 싫어하노라.)』
하는 영결永訣의 자만시自輓詩를 남기고 드디어 음약자사飮藥自死하니 대풍大風, 폭우, 뇌전雷電이 대지大至하여 천인병변天人竝變에 일국一國이 경동 驚動하였었다 전하여 온다. 그런데 지금 이 전략傳略의 주인공이 될 일성 이준 선생은 한말 판탕板蕩에 제際하여 만국회장에서 일도성인一刀成仁으로 천하를 경동케 하고 순열純烈의 충의를 만고에 전하였으니 이 선조와 이 후손이 요요상대遙遙相對하여 위국충성의 의열을 대성大成하였다. 그리하여 萬古의 강상綱常을 호부쌍식互扶雙植하였으니 실로 우연치 아니한 천고의 기연이라 하겠다.
영원히 우리 혈족血族의 순정純正한 충성의 최고 사표師表로 시조 시손이 우리의 간청簡靑에 요요상전遙遙相傳하여 옴은 참으로 우리 민족의 대 긍지가 아니면 아니요 우리 역사의 일대 광영이 아니면 아니다.
제1편 요람시대
한말 풍운이 봉봉분분蓬蓬紛紛한 속에서 우리 민족의 순혈純血의 충의자忠義者이었으며 우리나라의 위대한 정신과 영원한 사상의 파지자把持者이었으며 우리 민족의 자유해방운동의 선구자이었으며 우리 국가의 완전 독립의 급 선봉이었던 그리하여 우리의 역사에 정의를 부식扶植하며 세계의 역사의 공도公道를 위하여 성스러운 피를 뿌린 일성 이준 선생은 과연 우리의 일대 광채였었다. 이는 사랑하는 동포형제여 각성하자. 사랑하는 동포자매여 피를 뿌려 죽음으로써 항쟁하여 우리 조국의 완전독립을 회복하자는 고고呱呱의 성聲을 우렁차게 성스럽게 외치기는 哲宗황제 10년 己未(단군기원 4192년 서기 1859년) 음력 12월 18일 미시未時였었다.
초연初緣의 탄생지는 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 속후면俗厚面 중산리中山里(용전리龍田里)였었고 그의 조부는 이명섭李命燮 선생이오 그의 부친은 이병관 李秉瓘 선생이오 그의 모친은 이석오李錫五 선생의 따님 청주淸州 이씨였었다. 그의 조부와 부모는 삼강三綱의 인기人紀와 오륜의 민칙民則을 무수홍부務修弘敷하여 순수윤진純粹潤眞하고 신묵함양愼黙涵養하는 분들로서 덕망德望의 가수家數로 유명하였었다.
이 덕스럽고 복스러운 그 집의 원근遠近 전후를 보면 대덕산大德山은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하고 남대천南大川은 창해滄海를 바라보고 흐르며 도경당倒鏡堂은 나는 듯 하고 시중대侍中臺는 평편平便한데 칠사헌七思軒, 삼락재三樂齋, 노덕서원老德書院(이항복李恒福 선생 제향祭享), 향현사鄕賢祠 등은 인산지수仁山智水 사이에서 도덕과 인의를 함양하여주는 명승의 고적으로 유명하다.
이 모든 명승과 고적을 또다시 지도동산성知道洞山城 혹은 용미동산성龍美洞山城, 다탄대산성多灘臺山城 등이 울타리처럼 울을 지은 곳에 높고 높은 차일봉遮日峯이 다소의 풍경을 영솔하고 있는 모양은 일대 기관奇觀으로서 참으로 북관웅진北關雄鎭의 지地로서 가장 우리의 사화史話가 풍부한 곳이었었다. 그 山緖의 배경은 영웅 위인의 요람시대의 보양호육保養護育의 땅으로 他에 비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우리 일성 이준 선생은 이와 같은 역사의 유서가 깊은 명승고적이 빚어내는 풍광 속에서 호흡을 장단長短하여가면서 그 사랑하는 어머니의 젖을 빨며 자라났던 것이다. 요요황주遙遙皇冑의 잠영세가簪纓世家로서 혁혁쟁영赫赫崢嶸한 가풍에서 자라났다는 것보다 세세덕문世世德門의 의로적전義路嫡傳으로 겸겸지성謙謙至誠한 문풍門風에서 자라났던 것이다. 이때 뉘라서 이 보강褓襁속에서 만고 義人이 자라나는 줄 알았을 것이냐.
제2편 소년시대
그의 조부는 이명섭 선생과 그의 부친 이병관 선생의 부자는 이 어린아이의 이름을 의논하여 지었었다. 그리하여 이름을 ‘성재性在’라 하고 자를 여천汝天이라 하기로 하였었다. 성재라 함은 천명지위성天命之爲性이오 솔성지위조率性之爲道라 한 중용中庸의 명도장明道章에서 취의取意한 것으로 천명天命의 명도明道로 신조信條하여 위대한 인물이 되라는 것이오 여천汝天이라는 자는 일월日月은 천상天上의 천사天使라 하는 것과 같이 너는 인간의 천사로 민족과 사회와 국가를 광정匡正하여 천하를 정돈하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었었다. 명명命名과 작자作字의 경위만 보더라도 범연 심상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 있었다. 그 후 향과鄕科를 볼 때에는 이름을 선재璿在라 하고 자를 舜七이라 고쳤었다. 선재라 하였음은 선파璿派의 일맥一脈이 상재尙在한다는 뜻이오 순칠이라 하였음은 순하인야舜何人也며 여하인야余何人也오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이 다 칠서七書 중에서 나온다는 뜻이었었다.
그 후 또다시 이름을 준儁이라 하였었다. 이는 영준英俊의 뜻이었었다. 호는 해사海史니 청하靑霞니 해옥海玉이니 일성一醒이니 이와 같이 여러 번 변하였었다. 해사라 하였음은 해좌海左 혹은 해동海東의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는 뜻이었고 청하는 시인詩人의 취지로 일시 잠용暫用헌 것이오 해옥은 용암蓉庵 김병시金炳始 상공相公이 만나보고 북해北海 상에 여옥기인如玉其人이라 하면서 지어준 것이었었으며 일성은 최후의 자신이 지어 쓰던 아호雅號로서 한번 이 세상을 각성시키고야 말겠다는 의두意肚에서 나온 것으로 그 이름과 그 자와 그 별호의 진화된 곳에서 보아도 선생의 소지所志와 양기養氣와 정신이 잘 약여躍如디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바이다.
이 일성 이준 선생의 부친 이병관 선생께서 어려서 백부께로 양자 가셨는데 일성 이준 선생이 3세 되던 해에 부모가 다 조세早世하고 양가養家 조부 명집 선생도 또한 일찍 작고하니 양가養家측으로 보면 조고早孤의 여생餘生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정生庭측으로 조부, 숙부, 이병하李秉夏 선생이 번갈아 가면서 의방義方으로 유도諭導하여 주었었다.
7세가 되자 그의 조부 이명섭 선생은 사랑하는 손자의 손목을 잡고 동리 가운데에 있는 사숙초당私塾草堂으로 데리고 가서 입학을 시켰었다. 이때는 철종 황제는 돌아가시고 고종황제께서 등극하신 지 2년 되던 을축년乙丑年으로서 부왕父王 대원왕大院王이 섭정을 하려던 때였었다. 이때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을 명하여 대전통편大典通編을 고쳐 대전회통大典會通을 만들어 법치 국의 신생면新生面을 가져오는 동시에 경복궁을 중수하고 육조 기타의 공해公廨를 경영하기 위하여 전국에서 원납전願納錢을 받아 올린 일이 있었다. 이때에 대원군의 정치를 비방誹謗하는 사람과 찬양하는 사람이 오푼 오푼五分五分으로서 京鄕에 일대 화제 거리가 되어 있었다. 이때 서당의 선생은 비방하는 편이었었다.
어린 일성 이준 선생은 이를 불가하게 생각하여 선생을 힐문詰問한 일이 있었다. 이때 엄연히 일성 이준 선생은 무슨 까닭에 정치의 개혁을 비난하느냐 하였었다. 어린이의 입에서 나오는 이 말은 참으로 장래의 혁명가가 아니면 토하지 못할 말이었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고루固陋한 선생에게 배우는 글은 쓸 데 없다는 생각이 들어 서당에 가기를 싫어하였었다. 이때 조부 이명섭 선생은 당시 북청의 거유巨儒로서 문장이 수려秀麗한 분이었으나 서당으로 그 손자를 보낸 것은 역자이교지易子而敎之한다는 뜻으로 부탁하였던 것인데 사랑하는 손자가 가지 아니하므로 깊이 채문採問할 것도 없이 차자 次子 병하秉夏와 의논하고 집에서 가르치면서 예세전가禮世傳家의 정신과 가정교육주의로 나아갔었다. 비록 조고여생早孤餘生이었으나 엄격하게 의방義方으로써 교훈 하여 일과日課를 궐闕하게 하지 아니하였었다. 이성 이준 선생은 본래 천자天資가 영오穎悟하며 그 성취가 대단히 예속銳速하고 심숙深熟한 바가 있었다.
이해 11월 11일에 러시아인 수십 명의 일대一隊가 경흥부慶興府로 들어와 투서친납投書親納의 문제로 경향이 소요騷擾하였었다. 어린 일성 이준 선생은 이 전설傳說을 듣고 그 조부와 숙부에게 물었었다. 무슨 까닭에 러시아사람이 왔을까요 하니 그 조부는 개국통상開國通商하자는 뜻이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어린 일성 이준 선생은 통상하자면 하였으면 좋지 않습니까 하였었다. 이 어린이의 말은 그때 국정國情에는 불합不合하였다. 그러나 장래의 개국통상을 예언한 것 같았었다. 그래서 임오壬午이후로 외국과 통상조약이 열리니 아려서의 일을 아는 사람들은 예언자라 일컬은 일도 있었다.
고종황제 3년 병인丙寅에는 선생의 나이 8세였었다. 이해는 참으로 우리나라의 일이 많은 해였었다. 천주교도 홍봉주洪鳳周, 남종삼南鍾三을 비롯하여 불란서인의 사교司敎들은 사학邪學의 죄인이라 하고 수없이 학살을 행하니 이는 대원왕의 실수失數의 폭정暴政의 하나로서 결국은 국제문제를 야기하여 장차 무슨 변이 돌발될 예조預兆의 유행이 성행되어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서 7월 9일에 와서 북미합중국北美合衆國 사람 보래둔寶來屯이 天津의 영국 메토스 상회와 상의하고 범선帆船 ‘셔먼’ 호로 평양에 항도航到하여 통상을 구하니 세계정세에 밝지 못한 대원군과 당시 평안감사 박규수朴珪壽는 이를 방축放逐하기로 하고 화공火攻하여 ‘셔먼’ 호가 소침燒沈된 일이며 또 이해 8월에는 불란서함대가 유언流言대로 내습來襲하여 강화江華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양헌수梁憲洙 장군이 천우신조天祐神助로 최후의 승리를 가져와 불란서함대를 구축驅逐하기는 하였으나 이 병인양요丙寅洋擾의 상처는 불소不少한 바가 있었다.
이 두 사건은 차례로 전국적으로 소요하며 일시는 상하가 물 끓듯 하였었다. 이때 어린 이준 선생은 참으로 걱정하였었다, 그리하여 그의 숙부 이병하 선생에게 묻기를
『작년에 러시아 사람이 와서 소요하였고 금년에는 미국 사람과 불란서함대가 연속하며 와서 통상하자 하면서 급기야에 불란서와는 싸움까지 하여 쫓아버리니 이후에는 또 다시 오지 아니할까요.』
하고 말하였었다. 그 숙부는
『글쎄 알 수는 없어도 앞으로 큰 걱정일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어린 이준 선생은
『아저씨 저도 걱정됩니다. 언젠가 곤여도坤輿圖를 보니까 우리나라는 조그마하고 남의 나라는 큰 나라가 많은 모양이니 자주 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서 부강富强하여야 하겠다.』
이 말을 들은 이준 선생은 한참 있다가
『죽기로 싸우면 이기겠지요.』
한다. 그 숙부는
『그야 죽기로 한다 하면 무엇을 못하겠느냐?』
하니 이준 선생은 어린 마음 속에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잘 알았다 대답하고 서실書室로 들어가서
<살기 위하여 죽기로 싸워야한다.>
는 13 자를 써서 벽에다 붙여놓았다. 그 조부는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이준 선생은 대답하되,
“외국이 우리나라를 침범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기 위하여 죽기로 싸워야하겠다는 뜻”
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의 조부와 그의 숙부는 이 아이는 일가일향一家一鄕의 인물이 아니오 장래에 있어서 반드시 천하 국가의 위대한 인물이 될 소질이 명확하게 보인다, 하고 더욱 애지중지愛之重之하며 항상 회도晦鞱의 진의眞義로 교육에 힘쓰게 하였다.
고종황제 7년 경오庚午에 와서는 선생의 나이 12세였었는데 어찌나 숙성熟成한지 엄연한 성인成人의 관觀을 이루고 사서四書에 능통하여 그 암송暗誦하는 것이 무엇이고 얼음 위에 박힐 듯 하였다. 이 해에 북청 읍에서 전군全郡의 유림촌사儒林村士를 선발하는 향시鄕試가 있었다. 이때 이준 선생도 이 향시에 응하여 입시入試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부후腐朽한 시관試官은 선생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등제登第에 불허不許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창방唱榜을 학수鶴首로 교대翹待하던 선생을 분개케 하였다. 12세의 소년 이준 선생은 글이 부족하다 하면 모르거니와 나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등제를 건지蹇持하는 법도 있느냐 하고 일기一氣로 시청試廳으로 뛰어올라 자기의 시지試紙를 도로 달라하여 찾아 가지고 나와서 남문루南門樓에 올라 원근遠近 읍의 사람들을 향하여 일장 분개의 성토聲討 연설을 행한 후 자기의 시지를 내들고 고성쾌음高聲快音으로 낭음절창朗吟絶唱하니 그 웅운청향雄韻淸響은 참으로 핍인철천逼人徹天의 개槪가 있었다. 이때에 이 광경을 목도目睹한 원근遠近 인사人士들은 누구의 집 자질子侄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상당한 걸출傑出로 반드시 장래에 유망한 대 인물이 되리라 하였다. 그 중에 아는 사람들은 저 소년이 중산中山의 거얼巨孼 이명섭 선생의 손자라 하니 모두 이명섭 선생의 지도와 교훈을 칭송하며 청출어람이승어람靑出於藍而勝於藍이라더니 이 소년은 반드시 천하의 명사로 일세를 진동하리라고 이 입에서 저 입으로 기리는 소리가 연면부절連綿不絶하였다.
이해에 그 조부는 신안新安 주朱씨 주만복朱萬福의 따님을 간선看選하여 이준 선생을 장가들이니 이는 참으로 경천황敬天荒의 早婚이었다. 아무리 숙성하였었지만 무슨 실가室家의 낙樂으로써 부부도夫婦道가 성취된 것은 아니오 혼인의 예약이나 다름없는 행사에 속한 것이었다. 이준 선생은 일직 장가가기를 원치 아니하였으나 남문루의 영시절창詠詩絶唱이 원근에 전파되어 향명香名을 조음早飮한 나머지에 주만복 선생은 아랑我娘의 현서賢婿로 속히 정하지 아니하면 다른 곳에 피탈被奪될 염려가 많았으므로 그와 같이 파례破例의 조혼을 청행請行하게 된 것이었다. 장가 든 후 빙장聘丈 주만복 선생의 권도勸導로 인근隣近사는 문명이 가장 고명한 처족妻族의 친척인 주 선생 서숙書塾에 가서 절차切磋와 탁마琢磨를 계수繼修하게 되었다. 이후로 이준 선생의 문장과 학문은 실로 형출逈出한 바가 있었고 나로 기개氣槪가 고상高尙하여지며 때로 의협義俠이 광활廣活하여져서 벌써 그 비밤초월非凡超越한 품이 일군일읍一郡一邑이나 일현일도一縣一道로서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준 선생은 마음에 교룡蛟龍은 목비지중물木非池中物이라는 생각이 북받쳐 전국의 수도首都요 문화의 중심이오 정치의 근원지인 서울을 동경憧憬하게 되었다.
하루는 그 숙부 이병하 선생의 안상案上에다가 일봉一封의 비서秘書를 던지고 홀연 도타逃他하여 보이지 않았었다. 온 집안이 들끓어 찾다 못하고 급기야에 삼지사방三地四方으로 찾아다니다가 유목柳木을 괄피刮皮하고 써놓은 경고서警告書를 발견하여 가지고 보니
「불청선생지언不聽先生之言하니 가위방탕지자可謂放蕩之子오 용전여수用錢如水하니 가위패가지자可謂敗家之子라 질자侄子 성재性在는 금위상경今爲上京하오니 약유추아자若有追我者면 낭중囊中에 일유一有 소도小刀라 자살刺殺하고 오역吾亦 자살刺殺하리라」
운운云云이라 한 것이었었다.
이때 소년 이준 선생은 벌써 탈구脫臼의 식견과 불기不器의 인물이었었다. 서면에 나타나 있는 문의文意를 보아도 그 촌村 학구學究의 말로는 자기의 고상한 심금을 다스릴 수 없게되고 의협에 불타는 호걸의 심사는 용전여수用錢如水하며 구빈제곤救貧濟困에 힘을 썼던 것이다. 그러다가 대지大志와 웅기雄氣를 신장伸張할 바를 몰라 일국의 황성皇城인 중앙천지를 향하여 십 삼도의 구수구모口誰口某하는 걸인달사傑人達士들과 한번 자웅雌雄을 물어 천하대사를 논정論定하는 석상席上으 인물이 되고자 하였다. 참으로 12세 소년의 쾌사쾌거快事快擧에는 감격의 느낌을 자아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돌연한 걱정에 늙는 무리들은 예나 이제나 부질없는 친절 심을 발하여 남의 장지壯志와 의기를 좌절케 하는 일이 있다. 이때 소년 이준 선생이 비중非中의 생활에서 해양海洋의 생활로 향하려고 골돌骨突히 서울로 향하여 내달아오는 길에 인근 장년壯年과 노인들이 발견하고 수상하게 생각하여 이준 선생의 집으로 기별하였다. 그러나 그의 삼촌이자 선생인 이병하 선생은은 곧 권반勸返하여 회소回巢의 생활을 시키면 청소년의 예진銳進하는 용기를 좌절함이니 이를 양기養氣하기 위하여 일단一段 방임放任하기로하고 동정動靜을 살피기로 하였다. 이는 그의 형출逈出한 기상氣象을 깊이 아는 까닭이었었다.
이때 소년 일성 이준 선생은 관북의 수도인 함흥咸興으로 발을 내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개월 동안을 유람하면서 경성京城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너무 어린 탓으로 유경留京의 판비辦費를 신여信與하는 이가 없을 뿐더러 권반하는 사람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일단 다시 회소의 생활을 계속하기로 되었다. 삼촌 이병하 선생은 그 심상尋常에 형출하는 거동을 본 후로는 더욱 사랑하여 아자我子보다도 귀중히 역이며 불원不遠한 장래에 방롱放籠을 약속하였다. 숙부 이병하 선생은 여러 번 탄복한 바 있어 그다지 권면勸勉을 불용不用하되 소년 이준 선생은 지각이 벌써 이타異他하여 부지불식간에 학식이 더욱 성취되니 이러한 천성天成의 인물은 희한稀罕하다는 것이 당시의 수평輸評이었었다. 이와 같은 추고推敲의 생활을 약 5년 간 하여 오니 벌써 그의 나이 17세의 청년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는 고종 12년 을해乙亥에 선생의 나이 17세로서 평소의 숙망宿望을 달성하는 호운好運이 닥쳐왔다. 그리하여 이준 선생은 이해 정월 보름을 지내고 로비路費 한돈 8푼 즉 18전을 가지고 곧 황성 천리 길을 떠나 근 보름만에 동대문東大門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준 선생은 황성을 들어서자 제일 먼저 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는 동대문의 간판을 쳐다보고 첫 인상으로 우리나라는 참으로 인仁을 좋아하며 인을 숭상하는 나라로구나.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다지 인화仁化치 못하였던가. 이와 같이 자문自問하면서 나는 꼭 성인成仁하는 고상한 인격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게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결심한 후 동대문 문루門樓에 올라 한번 장안만호長安萬戶를 바라보니 적이 흉금胸襟이 떨리는 듯 하였다. 그러나 아주 명랑한 기분과 청쾌淸快한 기상이 도는 것 같이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천문만호千門萬戶가 즐비櫛比하고 오극삼조五劇三條가 종횡縱橫되어 일중日中 교역交易하는 천하도회라고는 하나 임 사방臨 四方의 황거皇居요 관觀 만국萬國의 제주帝州f는 자기가 일찍 가슴속에 그려오던 것과는 대단히 부족한 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간신히 은안수곡銀鞍繡轂의 기라장綺羅場은 이루어 있으나 기족천리驥足千里, 붕정만리鵬程萬里의 전박장展搏場으로는 광홀미廣濶味가 없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단 마음먹고 올라왔으니 아무렇게나 풍운의 장場과 축녹逐鹿의 원原을 마음대로 활살活殺 종횡縱橫하여 보기로 결심한 후 북청인의 수방도가水房都家(지금 청우장학회靑友獎學會의 전신前身)를 찾아들기로 하였다.
일성 이준 선생은 17세의 청년으로 일야一夜를 북청 수방도가에서 보내면서 자기의 한량限量이 없는 거룩한 장래를 그리며 이것을 이상理想의 원圓으로 실현하여 보겠다는 것이 유일한 염원의 전통全通이었다. 그리하여 이 이상의 열정은 중심에서 불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제1장 대원왕께 배알拜謁
17세의 북청 청년 이준 선생은 삼각三角의 구름을 바라보며 한수漢水의 바람을 마시면서 몇 날을 지냈다.
2월 19일 날 밤에는 이 수방도가에서 임시도회가 열려 이곳 저곳에서 수상水商노릇하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회의가 열렸었는데 의제議題는 수상들이 갹금성자醵金成資하여 수방 경제문제 외 또는 장래 청년 자제의 교육기금을 모아 국가번영의 기초인 동량棟樑 인재人材의 교육문제였었다. 수방도가 라 하면 준두무식蠢蠹無識의 하양遐鄕사람들의 변변치 않은 회합장소가 아니라 이와 같이 훌륭한 사상과 정신이 응결凝結되어 있는 신성한 수상 대중들의 보국양인輔國養人의 원천源泉 발상지였다. 그 증거로는 이 수상도가가 지금 와서 청우장학회의 간판을 걸고 있는 것이 이것이다. 이 본 회의를 끝낸 수상들은 여담餘談으로 들어가자 이런 소식 저런 소식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다. 어떠한 사람은 말하되 ‘오늘은 참으로 경사 慶事날이라’ 한다. 이준 선생은 귀가 번쩍 띄어 ‘무슨 경사가 있었소?’하고 물었다. ‘오늘은 상감께서 인정전仁政殿에 나오사 왕세자의 책례수하冊禮受賀를 받으신 후 죄수를 대사大赦하시고 각도의 구舊 환곡還穀 30만석 공인貢人들의 구舊 유재遺在인 1만석을 탕감蕩減하시고 시민들의 요역徭役은 삼삭三朔을 면제하시고 군포전軍布錢, 결전結錢, 승역僧役, 세전稅錢, 공전貢錢을 일병一竝 액감益蜀(합성 글자)減하사 천은天恩의 망극罔極한 날이라 말한다. 이준 선생은 이 전언傳言을 듣고 시정時政의 폐弊는 임금께 있는 것이 아니라 보필輔弼의 책임이 부족함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성주현군聖主賢君의 은전恩典의 소식을 황성에 와서 첫 소식으로 열이희심悅耳喜心케 됨은 실로 자기의 출세의 전도를 양양洋洋하게 열어주는 것 같은 감이 흉중胸中에 왕양汪洋함을 깨닫지 못하였었다.
그리하여 타일他日 자기가 안위安危를 신패身佩하면 화유보쇠煥猷補衰하여 왕실을 봉익奉翼하고 사직을 안위安衛하여 보겠다는 심맹心盟을 굳게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낭추囊錐가 자현自現하고 노금爐金이 자약自躍하는 것과 같이 그 익조翌朝에 대원왕이 계신 운현궁雲峴宮으로 향하게 되었다. 청직廳直은 적이 근지斤持하다가 곧 명함名啣을 통하여 주었다. 이것은 벌써 일성 이준 선생의 준엄俊嚴한 풍채風采가 기압氣壓을 주었던 까닭이다. 궁문宮門으로 회절廻折하여 들어가니 반무半畝의 방당方塘이 은감銀鑑과 옥경玉鏡같이 열리어 태액太液이 적취積翠되어 있고 국운國運을 연상聯想케 하는 회춘정回春亭이며 용현用賢을 말하는 무유각無遺閣 등을 보아도 목하目下 장안에 제주왕거帝州王居로서 천하 양養의 萬人 귀貴를 설명하여 주는 것 같았다. 이 궁중에서 가장 경회慶會와 계합契合의 풍운이 많던 무유각에 들어가 대원군께 일배一拜하니 40 연장年長이나 되었었다.
대원왕: 『동성동본同姓同本은 백대지친百代之親이라더니 매우 반갑소.』
이준: 『저는 일가一家 어른으로 찾아 뵈옵는 것이 아닙니다.』
대원왕: 『그러면』
이준: 『일 국의 대로大老로 찾아뵙는 것입니다.』
대원왕: 『그러면 나도 청년 유생으로 대하겠소.』
이준: 『좋습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지나간 초 5일에 동래부사東萊府使 황정연黃正淵의 치계馳啓에 의하여 일본의 서계봉납書契捧納을 허락하였다 하오니 이것은 각하께서 원치 아니하시는 일을 조정에서 행하는 모양이니 장래에 있어서 그 영향이 어떠하겠습니까?』
대원왕은 이 17세 밖에 안 되는 일가一家 청년이 이 질문을 듣고서 깜짝 놀랐다. 이 청년은 신가身家의 번영을 구하는 청년이 아니라 국가 사를 위하여 동심動心하는 청년으로서 장래 대위大爲의 인물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벌써 그 완명頑冥한 민파閔派들의 등쌀로 인연하여 현거괘관懸車掛冠한 때라 이 유위有爲한 인물을 유일遺逸함을 아까워하면서 속마음으로 후기後期를 작정하고.
대원왕: 『그 일은 지금 영상領相 이유원李裕元과 우상右相 박규수朴珪壽가 맡아하는 모양인데 결국 개문납적開門納賊을 면치 못할 것이라 생각할 뿐이오.』
이준: 『율곡栗谷 선생께서도 왜사倭詐를 불가신不可信이라 하셨는데 결국 임진 난이 있지 아니하였습니까?』
대원왕: 『나 역시 동감이오.』
이준: 『각하께서 다시 건곤乾坤을 정돈하여 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대원왕: 『없기야 하겠소. 그렇지만 그 벌떼같은 민가閔哥들 등쌀에 좀체로 탕평蕩平이 되지 못할 것이오.』
이준: 『율곡 선생의 만민성화萬民聖化의 정교政敎로 나아가시면 필내畢乃는 정화되겠지요.』
대원왕: 『고소원固所願이지만 오늘 같은 이 현상으로는 율곡 선생이 백 명이 오셔도 어려울 것 같애.』
이준: 『그러면 우리 창생蒼生은 어떻게 됩니까?』
대원왕: 『부끄럽소. 저 하느님께 부탁할 뿐이오.』
이 말을 들은 이준 선생은 대원왕의 허심遐心을 동정하며 스스로 더 물어볼 말이 없게 되었다. 이것이 대원왕과 초대면의 수작酬酌으로서 그 후 가끔 만나 뵈옵고 천하 사를 강론講論한 일이 있었으며 장래를 기약한 바도 있었으나 필경 대원왕의 안정적 정권의 출현이 없어 회천적回天的 사업에 논심論心은 환무幻舞의 일 막으로 그치게 된 것은 대원왕도 애석하였고 이준 선생도 缺然하였을 것이다.
제2장 김병시金炳始, 최익현崔益鉉 양 공의 망년교忘年交
청년 이준 선생은 결코 檀玉(?)이 구고求沽하는 것 같은 또는 모수毛遂가 자천自薦하는 것 같은 저비低卑한 누열陋劣한 생각은 호모毫毛도 없었다. 다만 그 천성天成으로 된 성격이 당시 너무나 악평惡評이 있으면 그를 찾아 군국君國의 대의大義로 말하되 당세當世에 영명令名과 아망雅望이 높은 이면 도리桃李가 재문在門이니 삼출蔘朮이 영롱盈籠이니 하는 것 같은 것은 문제 외로 두고 자기가 생각나는 대로 보고싶은 사람은 조금도 서슴지 아니하고 아무 소개 없이 찾아보아 그 인물의 기량器量의 용탄容呑이며 그 인물이 사아槎牙와 규각圭角이며 그 인물의 애안崖岸과 진휴畛畦ㅣ며 그 인물의 겸양謙讓과 持恭이며 그 인물의 권형權衡과 감망鑑望이며 그 인물의 돈후敦厚와 섬민贍敏이며 그 인물의 허실虛實과 의표儀表이며 그 인물의 열심과 지절持節 등을 보고 배워 아유화我有化하여 적어도 봉명예어鳳鳴叡魚와 운룡풍호雲龍風虎의 풍운제회風雲際會에 있어서 즉 보국좌군輔國佐軍과 경국제민經國濟民의 중흥사업中興事業에 있어서 협공섭리協恭燮理할 수 있을 만치 자기를 도야陶冶하여 보겠다는 욕심이 불타오르는 듯한 까닭이 있었다.
당시 아망雅望이 높은 승동대勝洞台 용암蓉庵 김병시金炳始 상공相公을 하루는 아무 천인장薦引狀도 없이 또 표연飄然히 찾아가서 그 문을 두드리게 되었었다. 참으로 담담활활淡淡濶濶한 장부丈夫의 금도襟度를 선연鮮然하게 나타나는 그 청의淸儀가 역력歷歷히 보이는 것 같다.
이때 용암 김병시 상공은 충청관찰사로 있다가 계유년癸酉年 정월에 사귀辭歸하여 형조판서의 중직에 있어 조야에 물망이 아용峨聳한 분으로 그 집은 승동勝洞에 있어 승동 김 대감의 칭호로 통행되어 있는 때였다.
김병시: 『그대는 요전에 대원왕에게 대찬大贊을 받은 이모李某가 아닌가?』
이준: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김병시: 『나는 민씨가 아니니 상관없소.』
이준: 『그저 교훈을 받고자 하여 왔을 뿐입니다.』
김병시: 『들으니 박식博識에다가 경세經世의 대지大志를 품었다 하니 고맙소.』
이준: 『저 같은 백면서생白面書生이 무슨 식견이 있으며 무슨 대지가 있겠습니까? 주인 대감의 계몽啓蒙을 바랍니다.』
김병시: 『그런데 지금 어디서 유숙留宿하고 있소?』
이준: 『수방도가에서 묵고 있습니다.』
김병시: 『수방도가라니 그것이 말이오? 불편해서 되겠소. 오늘부터 우리 집에서 나하고 지내는 것이 어떠하오.』
이준: 『불감不敢합니다. 그리고 저는 소방踈放합니다. 』
김병시: 『천만의 말이오. 소방을 나는 좋아하오.』
이와 같이 일면이 여구如舊하게 논심조담論心照膽 되어 김병시 상공의 깊은 지우知遇를 받게 되었다. 이준 선생은 이 김병시 상공의 지식과 학문을 빼앗아가면서 항상 국사를 분개하여 대백大白의 위로를 받는 일이 많았다. 불기소방不羈踈放하여 예삭禮數에 불관不關한 일도 많았다. 이럴 적마다 김병시 상공은,
『취태수능서醉態誰能恕(취한 몸을 뉘라서 능히 용서容恕할꼬)
평생오소여平生吾所與 (평생 내 더불어 하리라.)
이와 같은 시로 위로한 말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였다. 이 일성 이준 선생이 용암 김병시 상공과 지기知己의 빈주賓主로서 지냈다 하는 것은 결코 그것이 추세趨勢라든가 간구干求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요 또는 식객食客이나 문도門徒로 둔 것도 아니었다.
일성 이준 선생은 당시 추관秋官(형조 즉 법부)의 옥송獄訟이 실의失宜하여 투황홍리投荒鴻罹의 무고無辜와 호천비상呼天飛霜의 억울抑鬱이 처처재재處處在在하여 이대로 나아간다 하면 민원이 창천漲天하여 말내末乃에는 도국멸방倒國滅邦의 탄嘆을 면하기 어려우므로 이 刑判 김병시 상공을 시시時時로 제성提醒하여 뇌우雷雨가 작해作解하고 일월이 회조回照하도록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폐貽弊를 불원不願하게 된 것이오 용암 김병시 상공은 선성先聲을 듣고 대하여 보니 초범탈속超凡脫俗한 불기不羈의 인물이므로 장래의 유위有爲를 복卜하여 비사후례卑辭厚禮로 만류하고 북해北海 상에 옥玉같은 사람이라 일컫고 이때 해옥海玉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보면 이는 초은招隱에 분응賁應하여 서오棲梧의 생활을 하였었던 것이다.
이해 여름을 지나고 가을 8월 23일에 이르러서는 일대 변우邊憂가 일어났었다. 즉 왜국 군함 운양함雲揚艦이 돌연히 강화부 초지진草芝鎭에 나타나 포격을 행하고 그 길로 영종도永宗島로 내려와 또 포격을 행하여 35명의 아국 병사가 죽었다는 소식이 이것이었다. 이는 근세에 처음 보는 왜노倭奴의 위협적 만행蠻行으로서 상하가 비등沸騰하였으나 별로히 이렇다 할 정론定論이 없었다. 6일 후 즉 8월 29일 형조판서 김병시 주인공은 초초悄悄한 모양으로 퇴사退仕하여 나와 일매一枚의 계초啓草를 일성 이준 선생에게 내주며 국세가 이와 같으니 국가의 장래가 매우 염려스럽다고 말하였다. 이 계초는 당시 영의정 이최응李最應 상공의 계언啓言을 초고草稿한 것으로 그 내용은,
「병인양요 이후 십재지간十載之間에 군오軍伍를 증增하고 벽루壁壘를 고固하며 기계를 선繕하고 후량餱糧을 비備하여 기예技藝으 단속과 은상恩賞의 격려와 조가朝家의 주류綢謬의 방方이 靡不川極이로되 이금관지칙以今觀之則 양병천일養兵千日이 천재일일川在一日이어늘 기의과안재호其意果安在乎이까. 대저大抵 통솔이 부득 기인其人이면 수유기방정예雖有其方精銳라도 부전자궤不戰自潰하나니 무론無論 梱帥守令하고 유택시인惟擇是人하며 惟才是取하심을 주청奏請하나이다.」
운운 한 것이 이것이었다.
이 주계奏啓의 초고를 본 일성 이준 선생은 영상 이 공의 고충과 주인 김 공의 민정憫情보다도 자가自家의 분발憤發이지지 아니할 만큼 탱천撐天할 지경이었다.
이준: 『그렇게 武備가 약하단 말씀입니까?』
김병시: 『유구난언有口難言이오.』
이준: 『정부 대관 네 들은 이때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김병시: 『책망責妄 받아 싸오.』
이준: 『대감이 책임을 지시고 분발奮發하십시오.』
김병시: 『그렇지 않아도 오늘 사직소辭職疏를 받치고 나왔소. 나올 때 상감께서 예조판서를 하라고 하시니 속담에 혹을 떼려다가 혹을 붙이게 되는 모양이오.』
이준: 『외교권이 예조에 있으니 잘 되었습니다. 도의道義로 저놈들을 감화시켜 보시지요..』
김병시: 『글쎄, 나의 힘이 자랄지 모르겠소.』
9월 초 7일 과연 김병시 상공은 예조판서의 직에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발만스런 왜놈을 김병시 같은 겸겸謙謙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제어制御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한 달 열 이틀만에 사직하고 말았다. 이후 김대근金大根이 등장하여 왜노倭奴와 화호和好를 강구한다 함을 듣고 이성 이준 선생은 대사휴의大事休矣라 하고 위연喟然 장탄長嘆을 마지아니하였다. 이 사건의 결말은 익翌 병자년丙子年 정월에 와서 어영대장御營大將 신헌申櫶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어 접견대관接見大官으로 윤자승尹滋承은 판관으로 임명되어 강화부로 내려가서 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일성 이준 선생은 당시 염정고강廉正古剛으로 이름이 높은 용암 김병시 상공의 친우인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을 찾아갔다.
이준: 『선생님 처음 뵈옵고 당돌합니다만 서생도 상소上疏할 권리가 있습니까?』
최익현: 『유생소儒生疏가 있지.』
이준: 『그러면 선생님 좀 고쳐주십시오.』
하고 일개一個의 疏章을 내놓았다. 그 대지大旨는 왜노의 주화主和함은 매국賣國이나 다름이 없으니 도의로 회척懷斥의 책策을 써서 물리친 후 부국강병富國强兵에 전력하리라는 뜻이었다. 기실其實은 이때 면암 최익현 선생도 왜노의 무명無名한 침범에 대단히 분개하여 벌써 소장을 만들어 놓았었는데 대동소이大同小異하였다. 여기에 망년忘年의 교交를 맺게 되었다.
최익현: 『기실은 나도 소장을 내가지고 있는데 시인은 의사 동意思 同이라더니 대개 같소.』
이준: 『그렇습니까?』
최익현: 『이 군의 기지其志는 가상可尙하나 유위有爲의 전정前程이 만리萬里같으니 이러한 일은 이 노물老物에게 양보하고 사문적전斯文嫡傳에 일층 노력하기를 바라오.』
이준: 『감사합니다. 그러시다하면 저는 물러갑니다.』
과연 이해 정월 23일 면암 최익현 선생은 부부복궐負斧伏闕하여 척왜斥倭의 상소를 올렸다. 이때 대세는 벌써 집증執證되어 이 투소는 해연駭然한 것이라 하고 최익현 선생을 의금부에 나수拿囚하고 말았다.
4일 후 즉 27일에 아서는 양사兩司 옥당玉堂과 시時 원임대신原任大臣들의 연차聯箚로 익현益鉉의 흉패凶悖를 책責하게 되니 결국 전라도 나주羅州 흑산도黑山島 배소配所로 귀양살이를 가게 되었다. 이때 만조정滿朝廷이 다 추세趨勢하여 충신 최익현 선생을 몰아냈으나 오직 북청의 청년 이준 선생만은 이 최 면암 선생을 경모敬慕하여 남문南門 외에 읍송泣送하였다. 충열의 마음은 충열이라야 아는 것이 있었다. 최 면암 선생이 유배된지 3일 후 즉 병자 정월 30일 소위 대왜對倭 화호조약和好條約 즉 강화조약江華條約 일명 병자조약丙子條約이 체결 비준批准되고 2월 3일에 조인되니 이것이 우리나라의 전도前途에 일대 화태禍胎가 되고 말았다. 청년 이준 선생은 이 조약의 조인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대백大白을 기울인 후 박안대규拍案大叫하였다.
제 3편 청년시대
제1장 고관高官 홍우길洪祐吉을 질난質難
고종황제 16년 기묘己卯 이때 인준 선생은 21세였었다. 이해 4월에 와서 일본 대리공사 화방의질花房義質이 와서 예조판서 심순서沈舜書에게 서계를 정납呈納하니 홍우길洪祐吉을 강수관講修官으로 수호접제修好接濟케 하였다. 이 달 29일 왜사倭使 화방의질이 덕원부德源府 원산진元山津을 개항장으로 선청選請하게 되니 이는 물을 것도 없이 왜노倭奴가 발붙임을 구하는 제일보였었다. 이때 정부에서 여러 가지로 토의하여 본 결과 이를 그냥 괄각恝却하다가는 무슨 생경生硬이 날지도 모르니 북청으로 환제換提하자는 것이 어떠하냐 하여 강수관講修官 홍우길에게 내훈內訓하니 홍우길은 화방의질을 만나 말하기를, 원산은 우리나라의 능침陵寢이 가까우니 북청으로 환의換議하자 하였다. 이때 이 소문을 들은 이준 선생은 몇 날 생각하다가 참을 길이 없어 5월 9일에 강수관 홍우길을 찾아가게 되었다.
이준: 『왜노 화방의질이 와서 개항지를 구한다니 그런가요?』
홍우길: 『그러하오.』
이준: 『무슨 까닭으로 남의 나라에 와서 김 놓고 배 놓는 수작을 할까요?』
홍우길: 『병자 강화조약이 원인인 모양이오. 통상 개항하여야 두 나라뿐 아니라 동양이 잘 살 수 있다는 것이오.』
이준: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개항할 때를 기다리라고 하시지요.』
홍우길: 『오역운운吾亦云云이오.』
이준: 『원산이고 북청이고 허許하지 마십시오. 후세後世에서 매국행위라 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시려거든! 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청년입니다 마는 절대로 반대하고 싶습니다.』
홍우길: 『북청은 저 자들이 원치 아니하는 모양이니까 허불허許不許가 문제될 것 없을 듯 한데 암만해도 원산이 문제일 것 같소. 이 군의 말대로 우리나라에서 개항할 기술과 능력만 있으면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해보겠는데 저놈들이 성화星火같이 졸라내니 나는 참으로 기호지세騎虎之勢와 같소.』
이준: 『영감의 능력으로는 어려울 것입니다. 대각臺閣에서 강경하게 나아가도록 획책劃策하셔야겠지요.』
홍우길: 『이와 같이 독려督勵하여 주니 감사하오. 노력은 하여보기로 하겠소.』
이준: 『우리나라에 치욕이 없는 외교를 원합니다. 젊은 외방外方 청년으로 이와 같이 육박肉迫에 가까운 말씀을 올리게 딘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모욕적인 느낌이 불타오르는 듯 하여 빙각氷却할 도리가 없어 외람猥濫히 제성提醒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 관대寬大히 용해容海해 주기를 바랍니다.』
홍우길: 『천만의 말이오. 나라는 청년의 나라가 아니요? 누구의 나라일 것이오. 당연한 일이라 하겠소. 나는 기골氣骨찬 청년- 열심 있는 청년을 좋아하니 가끔 만나주기를 바라오.』
이준: 『그와 같이 사랑하여주시니 감사합니다. 또 다시 뵙겠습니다.』
이와 같이 열심히 애국의 정신을 피력披瀝하여 강수관 홍우길을 감격케 하니 이는 보통의 무명無名청년이 누구나 할 것 없이 하여지는 일은 아니었다. 이때 강수관 홍우길도 국보國步의 간난艱難을 tr으로 매우 걱정하면서 될 수만 있으면 이 왜노의 개항 요구를 거절하여야 하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은 방침이 없을까 하여 초려焦慮하던 중에 있었다. 그러던 판에 이 격려를 당하고 일층 배용倍勇하여 이렇게 저렇게 위국모충爲國謀忠에 전심전력專心專力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국세의 우열優劣로 원산을 개항지로 허하게 되고 말았다.
이준 선생은 그와 같이 무슨 일에든지 자기의 정의正義의 단斷에 맞지 않는 일에는 자신의 여하如何와 처지의 여하를 고계顧計치 아니하고 활달活達 분방奔放, 솔직 대담하게 무처부당無處不當의 용기를 소양素養하기에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아니 하였다. 그리하여 항상 담膽을 양養하며 성공과 실패는 불문에 붙이고 소신대로 매진하는 것을 자기의 유일한 신조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허하는 대로 용암서고蓉庵書庫에 한우충동汗牛充棟한 고장古藏과 신집新集을 마음대로 저작咀嚼하여 연려마저燃藜磨杵의 공을 쌓아 안았다. 용암 김병시 상공은 여러 번 응과應科를 권면勸勉하였었으나 이준 선생은 이럴 적마다 정연整然히 대답하기를 아 동방我 東方 성인 율곡 선생께서 항상 이 과업科業의 폐해를 말씀하신 것을 뵈오면 도저히 발심發心되지 않으며 또는 용암 상공의 몽비蒙庇의 기譏를 말하여 무릇 학문의 정로正路를 찾기에만 열심 하여 인생의 대의大義를 심공心工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학문의 참 길에 잠심潛心하는 가운데에서도 국세의 거세去勢를 심려心慮하면서 특히 춘추전春秋傳 같은 것은 일독이독一讀二讀에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는 춘추대의春秋大義에서 대의명분을 볼 수 있는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통속通俗 부유腐儒나 백면조대白面措大의 탈은 조금도 없었고 원래에 옥골선풍玉骨仙風 이선재李璿在라는 인물평을 받아온 만큼 천부天賦의 그 얼굴이 옥빛 같이 흰 데다가 염공직화廉公直和, 근실예매勤實銳邁, 할달원융活達圓融한 그 천성이 학문의 공을 쌓기에 면려勉勵하여 사람들이 가리켜 빙심옥호氷心玉壺라 하여 어떤 친지親知는 별호를 옥호玉壺라고 하자 하니 이는 나에게 너무 과한 호라고 겸양謙讓하여 수용受用치 아니하였다는 전설까지 있었다.
대저大抵 유명한 인물은 흔히 조숙조달早熟早達한다 함이 빈 말이 아님은 이 이준 선생의 청년시대의 행사行事와 일화逸話에서도 잘 알 수 있는 바이다. 이준 선생이 그 청년시대에 이와 같이 기걸氣傑하고 탁월하였으나 얼른 두각頭角을 내밀지 못하였음은 당시의 사환정치仕宦政治가 인재를 구열求列하였다는 것보다 모벌某閥 모반某班의 차례 걸음으로 다식판茶食版과 같이 꽉 짜고 있어서 타他의 개입을 용이容易히 허치 않았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이준 선생은 장래의 정치무대는 반드시 우리의 것으로 질타叱咤의 시기가 오기만 기다리고 면면자자勉勉孜孜하기로 하였다.
제2장 북청에 경학원經學院을 설립
용암 김병시 상공이 매양 청년 이준을 보면 애지중지愛之重之하는 마음이 저절로 솟아나 어떠한 때는 청성왕국靑城王局이라고 까지 칭찬하며 할반割飯하여 주며 脫衣하여 주니 선조宣祖 임진 난에 선조 대왕께서 의주義州에 파천播遷하여 계실 때에 호종공신扈從功臣 이힝복李恒福 선생이 정충신鄭忠信을 귀애貴愛하던 이상이면 이상이었지 이하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용암 김병시 상공은 심지어 공거公車를 치를 때에도 매양 데리고 다니었다. 영오怜悟한 일성 이준 선생은 궁중의식이며 조례朝禮절차를 몰수沒數이 알게 되어 시인時人이 별명 하여 말하기를 부副 대신大臣이라 한 일화도 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성 이준 선생이 청장기절靑壯氣節에 너무 과격한 편이 많아 용암 김병시 상공은 혹시나 실수가 있을까 하여 다소 견제牽制하며 대천大川을 심기心期하고 있었다.
고종 황제 24년 정해丁亥에 선생의 나이 29세였었다. 북청 향제鄕第에 내려가 응거應擧하여 초시에 합격하였다. 이때 규례에 초시에 합격되면 서원의 보거保擧를 얻어 경사京師의 회시會試를 치게 되었는데 북청 노덗원老德書院 보거안保擧案에 의례 하여 보거의 단자單子를 정납呈納하였더니 노덕서원의 유생들이 염지厭之하는 혐폐嫌弊로 보거를 허락하지 아니하고 길거拮据하였다.
일성 이준 선생은 자기의 보거의 진로進路를 방해한다 하는 것보다도 가증可憎스러운 그 원생院生들의 부사腐思와 악습이 국가의 유위한 인재의 진로를 두절시킬 염려가 농후하였다. 그리하여 원생들이 작폐를 광정匡正하기 위하여 드디어 함경 감사 조병식趙秉式 씨에게 정장呈狀하였다. 감사 조병식 씨는 이 일성 이준 선생의 정장을 받아보고 대열대희大悅大喜하면서 노덕서원의 부유腐儒들을 불러 대노大怒, 대질大叱, 대책大責하였다.
북청 노덕서원의 유생으로 문학과 재행才行이 이준 보다 우량한 자가 몇이나 있느냐 어찌하여 초시에 합격한 이준의 보거안에 대하여 늑지勒持하느냐 하고 노발대발怒發大發하였다. 그리고 초시 이준을 불러 노덕서원은 백사白沙 이항복 선생(소론少論)을 주위主位로 하고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 선생(노론老論)을 부배副配한 것은 부당한 일이니 군이 대 군주 폐하께 상소를 올려 노봉서원을 별창別刱하여 국가의 참다운 원기元氣인 인사를 배양培養하도록 하며 노덕서원의 악폐를 혁신 숙청肅淸케 하라 하였다.
감사 조병식 씨가 이 일개 초시 보거 문제로 이와 같이 재래在來 서원의 대 혁신을 제안하여 이준 선생의 지기志氣를 영양迎養케 된 것은 여기에 일대 인연의 일화가 있었다.
알성 이준 선생이 용암 김병시 상공에게 그와 같이 현애見愛를 받아 왔던 관계로 그 아들 승지 김용규金容圭와 한 방에서 기와起臥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일성 이준 선생의 친우 김인식金寅植과 친족 이인재李麟在 양씨가 승지 김용규가 없을 때에 찾아왔었다. 김인식, 이인재 양씨는 다 호끽가好喫家로서 흡연하기를 원하므로 방재傍在한 승지 김용규의 전용專用 연관煙管을 허끽許喫하게 하였다. 때마친 승지 김용규가 밖에서 돌아와 자기의 연관을 객이 사용함을 보고 대단히 불유쾌한 표정을 보이자 양객兩客은 무염無廉해서 돌아갔었다. 이 양객이 간 후 승지 김용규는 아직도 여온餘慍이 미진未盡하여 일성 이준 선생을 향하여 주인의 전용 연관을 허한 것은 불가한 일이라고 책망 비스듬이 하고 있었다. 이때 일성 이준 선생은 맹연猛然히 결기決氣를 내어 그 소위 주인의 전용 연관을 집어 충둥을 꺾어버리고
『그대는 사상思想과 정신을 고치라. 그 양반 사상과 지존自尊정신은 결국 사람을 버리게 하는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그대는 물건이 귀중함만 알뿐이오 사람이 귀중함을 모르니 그리하고는 중임 대관으로 보국치민保國治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온 천하의 만물은 다 사람이 있은 후에 이용후생利用厚生되는 것을 어찌하여 모르는가. 그 일개의 연관이 무엇이 그다지 귀중해서 객을 쫓고 또 나를 핍박하는가.』
하고 쾌쾌快快히 대책對責한 후 일어서서
『나는 사람을 귀중히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과는 일시도 같이 있기 싫다.』
하고 표연히 나와 시골집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이 당돌한 승지 김용규는 내부乃父의 위세位勢와 자기의 처지로 이와 같은 모욕을 당하고는 그대로 있을 수 없다 하고 함경감사 조병식 씨에게 이 이준을 체포하여 설치雪恥를 대행代行하여 달라는 청원을 내부 김병시도 모르게 내려보냈다. 일성 이준 선생의 영풍기걸英風氣傑은 소년시대부터 이 관북에 폭파暴播디어 무인부지無人不知하는 터인데 이러한 서간이 내도한 것을 예방禮房 비장裨將이 알고 이준 선생의 장래를 위하여 북청으로 통지하여 피신하라 하였다. 그런데 이준 선생은 이 통지를 듣고 피신은커녕 자현自現하여 함흥 감영으로 나와 감사 조병식에게 면회를 청하였다, 이때 감사 조병식은 곧 체포령을 내리려고 하던 판에 본인이 찾아왔으므로 매우 이상한 생각이 들게 되어 예방 비장을 보고,
감사: 『이 이준이란 사람이 어디 사는 사람인가 알아주게.』
하고 물었다.
비장: 『북청 사는 이준이올시다.』
감사: 『그러면 용암 상공 댁에 유留하고 있던 사람일세 그려.』
비장: 『그렇습니다. 이 사람은 매우 불초초不楚楚한 인물입니다.』
감사: 『나도 서울서 일찍 들어 아는데 그 주인 대감이 아드님과 격隔이 난 모양이야.』
비장: 『황송하오나 대감께 속일 일이 있겠습니까? 소인이 본래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이 함흥 감영에도 저 이준 청년을 중애重愛하는 이가 많습니다. 그리하여 소인이 피신하라 통지하였사온데 도리어 지금 자현自現하여 나왔습니다.』
감사: 『그러면 자네가 청請들었는가?』
비장: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대감! 이 청년에게 관대하신 처분이 계시기를 바랍니다. 이 관북에서는 상당한 인망人望이 있는 청년입니다.』
감사: 『잘 알았네. 여하간 들어 오라 하게.』
비장: 『명대로 하오리다.』
하고 나아가서 청년 이준을 데리고 들어왔다.
이준: 『대감! 처음 뵈옵니다. 체포하시려는 이준이 왔습니다. 처분을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감사가 청년 이준을 한번 보니 그 옥골선풍玉骨仙風같은 인물이 아무 구애拘碍가 없는 활여豁如한 고풍高風이 아무리 보아도 속된 인품이 아니오 반드시 장래에 있어서 불기不器의 인물이 될 것을 엿볼 수가 있었다. 예방 비장이 그 사람을 애써 피신을 하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자현 하여 나오는 것을 보면 자기는 죄과罪過의 사람이 아니라는 자신을 갖고 감사의 위인爲人이 어떠한가 한번 흑백黑白을 다루어 보리라는 생각으로 나온 것이 분명하였다. 이러한 기개氣槪만 보아도 그 인물의 여하如何는 잘 추측되는 것이었다. 도저히 승지 김용규의 대상이 아님을 알게 된 조 감사는 벌할 생각은 천리만리나 도망하고 도리어 옹호하여줄 생각이 간절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인물의 심천원근深淺遠近의 정도가 어떠한가 한번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감사: 『잘 왔소.』
이준: 『죄과罪過가 있으면 국법을 받는 것이 애군애국愛君愛國인 줄 압니다.』
벌서 대답이 엄청 난다. 그러나 감사는 짖 궂게 또 힐난詰難하기로 하고,
감사: 『그대는 예방 비장과 통하여 죄를 면하려 하지 아니하였는가?』
이준: 『반대입니다. 나는 예방 비장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전언傳言으로 피신하라 하였기로 이는 불가한 일이라 하고 자현 한 것입니다. 양반의 담뱃대 한 개로 사람을 죄준다 하면 그것은 공법公法이 아니라 사법私法입니다.』
감사: 『저러한 말이 어디 있노?』
이준: 『대감! 노하지 마십시오. 나를 벌하시려거든 먼저 서울 양반의 자식들을 좀 국법으로 고쳐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 『허허, 저런 말을 어찌 함부로 하노?』
이준: 『저 일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라를 위하여 민중을 위하여 참을 수 없는 고충에서 저절로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때 조 감사는 벌써 말로는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알고,
감사: 『들으니 그대는 술을 좋아한다지.』
이준: 『벌주罰酒를 주시면 사양치 아니하겠습니다.』
감사: 『죄의 유무는 모르겠으나 쾌활한 남자로군.』
하고 이때 함산국咸山菊이란 관기官妓를 부르고 술상을 내왔다. 이준 선생은 대백을 기울이고 나서 함산국을 향하여 종이 대신에 네 치마를 빌려라 하더니 필연筆硯을 당겨 함산국의 치마에다가
『함산시월함산국咸山十月含霜菊(함산咸山 시월에 서리를 머금은 국화꽃은)
불위중양위객개不爲重陽爲客開(중양重陽을 위하여 핀 것이 아니라 손[객-客]을 위하여 피었구나.)』
하는 싯귀를 쓰는 것이었다. 이 시의詩意를 직해直解하면 아름다운 관기 함산국은 조 감사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온 손님인 자기를 위하여 있는 것이란 뜻으로 은연隱然히 감사의 관기를 자기가 뺏는다는 참으로 대담불기大膽不羈한 싯귀였다. 조 감사는 이 싯귀를 보고 하도 엄청난 수작酬酌으로서 그 불기불기不器不羈의 기량氣量은 경탄驚嘆치 아니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조 감사는 걸걸대소傑傑大笑하면서 죄는 사赦하겠으니 마음대로 sf다 가라 하였다. 이준 선생은 조 감사의 그 관유寬宥한 도량에 감격하여 디시 한 귀를 쓰되,
『백발옹금우사직白髮翁今憂社稷(백발 늙은이가 지금 사직을 근심하는데)
靑燈誰復讀春秋(靑燈 아래에 뉘라서 다시 春秋를 읽는가.)』
하는 시였다.
즉 조 감사가 백발로서 저와 같이 종묘宗廟와 사직을 위하여 근심함은 노魯나라 춘추의 대의大義를 지행知行함이어늘 조 감사 이외에 또 저러한 춘추대의로 국사를 동심動心할 이가 있을 것이냐 하는 뜻으로 조 감사를 찬양한 것이었다. 이준 선생은 먼저는 시로 관기 함산국을 뺏고 나중의 시로는 조 감사를 위로하였던 것이다.
꼭 맞는 예라 할 수 없으나 옛날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이 수장隋將 우중문于仲文의 백만 대 병을 섬멸殲滅할 때에 먼저,
『신책구천문神策究天文(신책神策은 천문天文을 연구하였고)
묘산궁지리妙算窮地理(묘산妙算은 지리를 궁진窮盡하였다.)
전승공기고戰勝功旣高(싸움을 이겨 공이 이미 높으니)
지족원운지知足願云止(족足함을 알아 그침을 원하노라)』
하는 이 시공법詩攻法으로 수장 우중문의 담기膽氣를 좌상挫喪케 하여 급기야에 회천적回天的 대 사업을 이룬 일이 있었는데 이준 선생은 조 감사에게 이와 같이 시공법을 사용하여 조 감사의 마음을 환해渙解케 하였다. 그리하여 조 감사는 이 승지 김용규의 청징請懲은 암암리에 메장埋葬하고 말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 소문이 경사京師 용암 김병시 상공의 귀에 들어가 승지 김용규는 용열무쌍庸劣無雙한 허물로 일대 질책叱責을 당하고 김 상공은 전인專人하여 다시 이준 선생을 데려다가 배전倍前 우대한 일이 있었다. 이 일은 전년前年 병술丙戌 10월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준 선생과 감사 조병식 씨의 이러한 계연契緣이 있던 터이므로 그 인물이 동연광달洞然曠達함을 알고 이 역시 개인문제라는 것 보다 국가 인재등용문제로서 분개함을 알고 그와 같이 노봉서원을 별창別刱하여 인재배양의 길을 새로이 개척케 한 것이었다. 조 감사의 권지勸指를 받은 이준 선생은 곧 상경하여 대군주 폐하께 노봉서원 별창의 상소를 올리게 되었다.
고종 폐하께서는 우악優渥하옵신 하비下批를 내리사 노봉서원의 별창을 윤허允許하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북청으로 내려가 노봉서원을 별창 하니 이로부터 노봉서원 유생이 초시에 합격되면 곧 겅사에 올라와 회시會試를 볼 수 있는 특례를 열어놓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북청 인사의 경사 출입이 많아짐을 따라 북청의 개화開化가 고속도로 진전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만근輓近 북청의 유학생留學生이 전국에 있어서 어떠한 골보다도 월등히 많은 것은 그 기풍氣風이 그때에 발흥勃興되었던 것이다.
고종황제 25년 무오戊午 봄에 선생의 나이 30세에 담녕재澹寧齋(지금 산원동璿源洞)를 경학원經學院이라 개액改額하고 노봉老峰 선생의 영정影幀을 이안移安케 하고 가을 9월에 이준 선생이 유사有司로서 24사社를 主務로 간사幹事하여 각사各社에서 총준자제聰俊子弟 2인씩 선발하여 합 44인을 모집하여 강경시講經詩와 현촉작시懸燭作詩의 18구句 고풍체古風體로 시취試取하여 24인을 다시 선발하는 제도를 세워 연령은 15로 30세까지 제한케 하였다. 이때 북청 경학원의 진용陣容은,
도유사都有司 전승진全昇鎭
유사有司 이준李儁
시관試官 김유성金裕成(북청 府使)
이와 같이 조직되었다. 그리하여 북청의 사기士氣를 훨씬 올렸다. 이해 4월 7일에 장자 종승鍾乘의 산경産慶이 있었다.
그와 같이 경학원을 설립하니 이것이 북청의 오도吾道의 연원淵源이 되었다. 그리하여 원근의 인재가 폭주병진輻輳騈臻하여 격擊녑金木(합성글자)각촉刻燭의 청긍재사靑矜才士가 임림제제林林濟濟하였다. 척종戚從 이인재李麟在, 이찬재李瓚在, 조기설趙基卨, 김진극金眞極, 주항선朱恒善(주정순朱貞順의 부친), 주양선朱亮善 등 청년들도 학문으로 종유從遊하였다. 이 주항선의 부친 주승규朱昇奎, 조부 주운환朱雲煥(함흥 판관判官을 지낸 분) 씨는 항상 일성 이준 선생을 대하면 경애敬愛하기를 마지아니하여 장차 위대한 인물될 것이라고 讚道하였었다. 그리하여 청년 주항선은 언제든지 일성 이준 선생을 장형長兄과 같이 모시고 청년 주양선은 이성 이준 선생을 항상 앙모仰慕하여 부하部下로 복종하였다. 일성 이준 선생은 어디서나 이와 같이 사람들이 따르고 추앙追仰하였던 것이다.
이해 가을에 서울로 다시 올라와 사방으로 아망雅望이 높은 인물을 찾아 지성으로 교유交遊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허다 인사와 알게 되었다. 성재惺齋 이시영李始榮 선생과 서로 알게 된 것도 이때로서 당시 이준 선생은 30세의 청년이오 이시영 선생은 20세의 청년이었다. 이시영 선생은 영상 領相 이유원李裕元 상공의 아들로서 부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선생과 동창이었던 만큼 서울서 명망이 높은 청년이었으므로 이준 선생은 심계心契를 통하여 장래 국가 사를 서로 힘써 보려는 성심으로 교유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이준 선생은 이시영 선생을 찾아 취기방농醉氣方濃하자 서울 양반의 패풍悖風을 여지없이 공격하여 각성을 촉기促起한 일이 있었는데 일어서 가려할 때에 문득
『내 술 주정이 과하였소.』
하는 것이었다.
이때 이시영 선생은,
『나는 일성을 영웅 쾌남아로 알았더니 뒤풀이가 왠 일이오?』
한즉, 일성 이준 선생은 얼른
『내 그 말을 들어보자고 한 말이오.』
하였다.
그리하여 두 분이 악수를 다시금 굳게 하고 더욱 양서靈犀를 상통하게 되었다 한다. 이 편화片話는 필자가 중경重慶에 있다가 들어온 임시정부 요인要人들을 찾아갔을 때에 성재 이시영 선생을 뵈옵게 되었는데 백망百忙 중에서도 일화를 들려주었던 것이다. 생각건대, 이시영 선생이 이준 선생에게 대한 인상이 그때 깊었던 것 같이 생각되는 바이다.
제4편 壯年時代(前期)
제1장 결혼 후 법학연구
고종황제 30년 계사癸巳에 선생의 나이 35세였다. 이해 용암 김병시 상공의 중매로 평동平東 이씨 일정一貞여사(17세)를 재취再娶하니 종고지락鐘鼓之樂과 금슬지정琴瑟之情에 매우 비상非常하였을 뿐이 아니라 총명다지聰明多智한 이일정李一貞 여사는 실로 동지同志와 같은 감을 갖게 되어 군국사君國事의 사회운동 등에 있어서 의논하며 공동共同히 활동함을 약속하게 되었다. 참으로 시부시부是夫是婦의 관觀이 있었다.
고종황제 31년 갑오甲午에 선생의 나이 36세였다. 이해 정월에 전라도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이 탐학무도貪虐無道하여 주구誅求가 심하니 인민이 괴로움을 못 이겨 민란이 일어나자 동학東學의 접주接主 전봉준全琫準이 격檄을 비기飛起하여 이른 바 동학난이 시작되었다. 이 동학난 가운데에 개화당開化黨 영수領袖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 선생이 일본에 망명해 있다가 일본과 상대相對하여 천하사를 의논함은 어린아이와 장난하는 것 같아서 백년 가야 성사成事될 수 없다 하고 대 동양주의東洋主義의 삼화사상三和思想을 품고 청국의 일인자인 이홍장李鴻章을 찾아 한국의 완전독립을 기도企圖하려고 상해上海로 갔다가 자객 홍종우洪鍾宇 손에 살해를 당한 일이 있었다. 니 커다란 두 개의 사건이 발발勃發되니 국내 국외에 뻗치는 정세가 돌변하여졌다. 동학의 난이 점점 창궐猖獗하여 천지를 석권席捲케 되니 이때 관병으로는 도저히 진압할 능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청병을 초청하자는 논이 대두擡頭되어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조병직趙秉稷이 청 총리교섭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 원세개袁世凱를 통하여 北洋大臣 이홍장에게 청병請兵하여 오니 일본이 또한 출병하여 일청日淸 양병兩兵이 동학난을 진정鎭定하여 준다던 것이 일 청 전쟁으로 화하게 되었다.
이해 8월 7일에 이준 선생은 의외에 함흥 純綾 참봉參奉이 되어 부임하였다. 세정世情과 국사國事가 그와 같이 소요騷擾하고 또한 국제의 분란紛亂이 그와 같으므로 능관陵官의 직에 있어 얼마동안 천하의 대세를 규찰窺察하고 있었다. 일청전쟁은 일본이 승리하고 동학난을 관병과 일병과 합작하여 초탕勦蕩하니 일본의 세력이 장대張大하여졌다. 이 결과로 일본에 망명하였던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씨 등이 귀국하게 되어 김홍집金弘集 씨를 총리대신으로 하는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서의 대한 독립국의 체제 하에서 10월에 이르러,
총리대신 김홍집
내부대신 박영효
외부대신 김윤식金允植
법부대신 서광범
군부대신 조희연趙羲淵
농상공부대신 신기선申箕善
경무사警務使 윤웅열尹雄烈
이와 같이 순 개혁파의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것을 김홍집의 제2차 내각이라 하는 것으로 일본공사 정상형井上馨은 대한의 독립은 일본의 힘으로 된 것이라며 일인의 고문顧問을 두기를 청하여 법부 고문관 성형星亨 이외 7인의 고문을 두게 되었다.
여하간 형식적이나마 대한독립국의 이름을 가져오게 되어 왕 전하를 대 군주전하로, 왕비 전하를 왕후 전하라 하는 존호尊號로 고치고 洪範14조를 정하여 대묘大廟에 서고誓告하고 청국의 기반羈絆에서 벗어나 왕정유신王政維新의 유고문諭告文을 환발渙發하시게 되었다.
= 대한제국 독립 유고문大韓帝國 獨立 諭告文=
짐朕 유惟 개국 五百三年 十二月 十二日에
종사宗社에 서고誓告하여 종래從來 청국의 관섭關涉을 할단割斷하고 아 대 조선국에 고유한 독립기초를 확정確定한다 하며 우又 자玆 마관조약馬關條約을 유由하여 더욱 세계에 表彰하는 빛을 첨添하니
짐朕이 신민臣民과 낙樂을 동同하여 금今으로부터 아국我國의 영예榮譽를 축祝하기 위하여 적당한 방법을 설設하는 사事로
짐이 대신에게 명함이니
짐의 신민은 능能히
짐의 의意를 체體하여 永영구久히 독립獨立하는 실적實績을 기념하여
짐의 국國을 위하는 간독懇篤한 정의情意에 부副케 하라. 약부若夫 예년例年의 독립 慶日을 정하여 써 永영구久히 아국의 일대一大 경절慶節을 삼아
짐朕이 신민과 함께 축하하는 규법規法은
짐朕이 다시 짐의朕意를 신민에게 유고諭告하리라.
대 군주 전하의 유고가 있은 후 혁신 개화당의 내각은 허다한 新政의 제도를 발표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이준 선생은 참봉의 능관을 버리고 상경하니 내대內大 박영효 씨와 법대 서광범 씨는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를 신설新設할 터이니 법학을 연구하라고 권고하는 것이었다. 장차 대용大用하고자 함이었다.
고종 32년 을미乙未에 선생의 나이 37세였다. 이해 4월 16일에 내대 박영효씨와 법대 서광범씨가 권하는 것이 자기의 소사所思와 부합符合하므로 초창初刱하는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6개월만에 졸업하자 갑신정변甲申政變에 미국으로 망명한 서재필徐載弼 박사가 거년去年 동冬에 돌아와 협성화協成會라는 정치결사政治結社를 조직하므로 이에 참가하여 같이 조직하여 가지고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선생 등과 같이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중심으로 활양하여 협성월보協成月報를 발행하다가 필경은 정부의 간섭을 받아 배재학당장培材學堂長 아편설라阿扁薛羅의 권고로 배재학당에서 타처他處로 옮기게 되었다. 이 협성월보協成月報는 주로 이승만 선생이 필정筆政을 잡고 있었다.
이해 10월에 민비횡화사건閔妃橫禍事件이 일어나 갑오경장 내각은 도괴倒壞다고 박영효씨 등은 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고종황제 건양建陽 원년 병신丙申에 선생의 나이 38세였다. 이해 2월 3일에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검사보檢事補 주임奏任 6등관等官에 임명되니 이것이 법관 생활의 첫 출사出仕였다. 그런데 이 청년 검사보檢事補 이준 선생은 임명되자 마자 당시 부패안악腐敗頑惡한 조정의 대관 중신의 비행과 불법을 마음대로 지점指點 적발하여 숙청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릇된 대관들의 눈 밖에서 나게 되니 얼마동안 견오見忤의 생활을 하면서 일양一樣 숙청공작으로 나아갔었다.
이와 같이 상대추관霜臺秋官의 본색을 나타내니 모든 부안腐頑한 대관들이 무서워서 입을 모아 가지고 면관免官운동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3월 5일에 면免 본관本官이 되니 추관秋官생활이 불과 1개월 2일만에 막을 닫게 되었다.
이때 전년前年에 서재필 박사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협성회를 강화하여 독립협회가 되니 평의장評議長으로서 이동녕李東寧 선생, 이승만 선생의 일파와 같이 동심同心하여 개혁을 도모하여 오다가 중단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총리대신 김홍집 씨의 기사機事가 불밀不密하여 아라사俄羅斯사람에게 어중취계於中取計를 당하게 되어 총리 김홍집 씨와 농상공부대신 정병하鄭秉夏 씨가 항토현黃土峴(광화통光化通)에서 역괴逆魁의 이름으로 애매하게 피살을 당하니 그 원인은 로일露日 간의 외교적 알력과 당시 우리나라 민심에 항일, 배일, 반일의 기분이 팽창한 가운데에 감홍집 내각이 단발령斷髮令을 내린 것이 이것으로 그 도화선은 장차 확대되게 되니 불똥이 장차 개화당 영수領袖들과 장래 개혁 발전의 책策을 강마講磨하고 있던 이준 선생의 발등에 뛰어오르게 된 것이 이것이었다.
이때 로국공사露國公使 위패韋貝 씨는 시호시호불재래時乎時乎不再來라 하여 한황韓皇을 아관俄館으로 파천播遷하는데 성공하고 친로파로 울을 쌓고 인천에 정박 중인 로국 수병水兵 백여 명을 상경시켜 호위扈衛하기를 철옹성鐵甕城같이 하여 놓았다. 고종황제께서 아관에 계시사 감옥에 있던 안환安煥을 불러 경무사에 임명하시고 김홍집 관계의 개혁 개화파에 연류인連類人은 모조리 체포하라 하시는 칙명勅命을 내렸다.
이날 꼭두새벽에 김탁金鐸이라는 친지親知가 있어 이 일을 알고 와서 고변告變하니 이준 선생은 곧 병적屛迹하고 김탁으로 하여금 동지인 참령參領 한석로韓錫璐를 가서 구해주라 하였다. 이렇게 한 후 이준 선생은 암만해도 불안하므로 부인 이일정 여사에게 나는 망명할 밖에 없다 기별寄別하고 그대로 공조工曹 뒷 골 사는 법부대신 장박張博 씨 댁으로 가서 같이 망명하기를 말하려고 가서 보니 이 법부대신은 아무러한 말도 없는 줄 알고 아관으로 사진仕進하려고 승교乘轎하려는 파이었다. 이준 선생은 기가 막혀서 교자轎子를 잡고 안환이 경무사가 되어 가지고 방금 일망타진하려는 일을 밀통密通하니 장박 씨는 깜짝 놀라 그러면 어찌할 고 하면서 손에 손을 잡고 일본으로 망명의 길을 재촉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경로經路는 일본 동경에 망명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몇 날 지난 후 당시 일본의 정객政客이니 학자니 하는 인물들과 같이 정견政見도 싸워보고 학술도 교구交講하여 보았었다. 이렇게 지내는 동안 일본의 정치니 학술이니 하는 것은 모두 서양을 의방依倣한 것 이외에는 독자성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박영효, 장박 양씨의 권천勸薦으로 동경 조도전早稻田대학(동경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불철주야不撤晝夜하고 한국 법정法政의 장래를 생각하면서 열심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고종황제 광무光武원년 정유丁酉에 선생의 나이 39세였다. 이해 춘 3월에 육법전서六法全書를 손에 들고 혼자 상야上野공원에 가서 송음松陰이 깊은 곳에서 흰 꽃 붉은 꽃이 만발한 사이로 오고가는 무수한 알지 못하는 인간들을 바라보고 우연히 일수一首를 입 밖으로 부르게 되었다.
<어於 일본日本 상야공원上野公園 음吟>
공원삼월객초래公園三月客初來(공원 삼월에 손이 처음 오니)
백백홍홍화정개白白紅紅花正開(희고 흰 붉고 붉은 꽃이 정正히 피어있구나)
종일상봉무식면終日相逢無識面(종일 만나도 아는 얼굴이 없어)
송음심처독배회松陰深處獨徘徊(송음松陰이 깊은 곳에 홀로 배회하였노라.)
우리나라 동경 유학생의 일화逸話에 동경 3년에 상야공원이 어디엔지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 없지 아니하나 이 이준 선생은 참으로 법학 공부에 열심 하느라고 동경 생활을 시작한지 년여年餘에 처음으로 상야공원에 갔었다 하였으니 학계를 위하여 법정을 위하여 군국君國을 위하여 망유열심忘遊熱心하였던 증거의 시였다.
고종황제 광무 2년 무술戊戌에 선생의 나이 40세였다. 이해 9월에 조도전대학을 졸업하여 가지고 귀국하자마자 곧 다시 독립협회로 들어가 다시 경장更張혁신의 운동에 참획參劃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이준 선생은 결혼한지 얼마 아니 되어 동학난 일청 전쟁이라는 전쟁판을 지내고 능관으로 있다가 올라와 법관양성소를 마치고 서재필 박사 등으로 개혁운동에 종사하다가 잠깐 검사 보라는 추관생활을 한 후 다시 개혁운동을 하다가 일본에 망명하여 법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또 다시 경장운동에 참가하였으니 좌석坐席이 미未난할 지경이었다.
어느 때 용암 김병시 상공이
『그대는 결혼을 하고 나더니 법학을 연차連次로 연구하여 학생생활을 좋아하니 웬일인가?』
하고 물으니 이준 선생은
『얼른 유명 남편노릇을 하려고 합니다.』
하여 일좌一座가 끽소喫笑한 일도 있었다 한다. 또 용암 김병시 상공은
『그대가 해내海內 해외로 다니는 가운데에 우리 사람으로 훌륭한 인물을 몇이나 보았는가?』
하고 물으니
『국내에서는 북청 사는 조기설趙基卨과 같이 흉금胸襟이 광활廣濶하고 인품이 기걸氣傑한 이를 보지 못하였고 해외에서는 동학東學하는 손병희孫秉熙와 같이 기량器量이 심원深遠하고 의기가 헌앙軒昻한 이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대답하였다 한다.
조기설趙基卨 선생은 이준 선생의 향우鄕友로서 세간축록世間逐鹿 생활을 하지 아니하고 천석泉石에 고맹膏盲되고 연하煙霞에 고질痼疾이 되다시피 하여 모옥위문茅屋衛門에서 야화제조野花啼鳥를 읊조리고 물외物外에 상양倘佯하는 강산일편江山一片으로 삼공三公을 불환不換한다는 은일隱逸의 현도賢徒였으며 손병희 선생은 마졸주동馬卒走童이 다 아는 분으로 일성 이준 선생이 일본 망명시대에 손병희 선생도 망명하여 동경서 서로 만나 원원源源히 상종相從하였던 터로서 서로 군국중흥君國中興의 국가대사國家大事의 장래를 말하여 본 적도 많았었고 시사평론 등으로 의견의 교환도 많았었던 것이다. 서로 간담肝膽을 상조相照하여 흉금을 토하여 본 결과에 일성 이준 선생은 그 기량이 큼을 보고 불기不器의 인물로 알았던 것이다.
손병희 선생은 이준 선생보다 2년 아래의 청년이었는데 이 청년시대의 교유交遊에 있어서 그와 같이 뚫어지게 인물을 들여다보았음은 가끔 하는 말이지만 영웅이라야 영웅을 알아본다는 말이 과연이었다.
이준 선생은 집에 있을 때에 그 장자長子 종승鍾乘을 대하여서도 ‘나는 손병희와 조기설 같은 굵고 큰 인물은 보지 못하였다’고 말씀한 일이 있었다고 이 기록하는 곁에서 종승 형은 회고담을 하여주는 것이다. 또 이준 선생과 조기설 선생 사이에 일어난 한 마디의 일화를 말하여주었다.
어느 해 겨울에 북청 조기설 선생이 일성 이준 선생을 찾아와서 묵은 일이 있었는데 어떠한 날 이준 선생은 외출하고 조기설 선생이 혼자 앉아있는데 고향 청년 모某가 와서 ‘세시歲時가 임박臨迫하였으므로 부모를 모시고 과세過歲하러 가겠는데 뵈옵고 가려고 왔습니다.’ 하니 조기설 선생은 ‘주인 선생께서는 지금 외출하시고 아니 계시다’고 대답한 후 자세히 그 청년의 의착衣着을 보니 융동설한隆冬雪寒에 거의 헤어져 낡은 겁착袷着으로서 불성모양不成模樣이었다. 이 청년의 모양을 본 조기설 선생은 일어나더니 벽장 속으로서 옷 담은 상자를 꺼내더니 그 가운데에서 햇솜을 많이 둔 좋은 옷 한 벌을 꺼내서 그 청년에게 내주어 입고 가라고 하였다, 그 청년은 너무나 감사하여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입고 갔다. 그 옷은 실상 말하자면 조기설 선생이 가지고 온 자기의 옷이 여餘벌이 있어서 준 것이 아니라 주인공 일성 이준 선생의 부인 이일정 여사가 자기의 소천所天의 신착新着으로 정성을 다하여 좋은 감에다가 햇솜을 두어 한 바늘에 쑥 뽑아 지어 고운 상자에 담아 사랑舍廊으로 내보내 구착舊着과 바꾸시라고 한 것이었었는데 상검尙儉하는 데다가 바빠서 바꾸어 입지 못하고 그대로 사랑 벽장에 넣어두었던 것이었다.
얼마 후에 이준 선생이 돌아오니,
조기설: 『여보게 일성!』
이준:『왜 그러나? 』
조기설:『저 북청 아무의 아들이 서울 와있지 않았나?』
이준: 『그래, 있었지.』
조기설:『오늘 왔는데 과세하려 내려가겠는데 뵈옵고 가려고 왔다 하데.』
이준: 『내가 없어서 못 만나 섭섭하게 되었군..』
조기설:『못 만나 섭섭했겠지만 그러나 좋아서 울고 갔네.』
이준:『좋아서 울고 가다니, 슬퍼야 울지 좋은데 왜 우나?』
조기설:『그 청년의 의복을 보니 다 헤져빠진 겹옷이 너털 너털하데 그려. 그 옷을 입고 점점 더 추운 북관을 가다가는 가기 전에 죽지 살아갈 수는 없을 모양이야. 그래서 엊그제 자네 부인께서 각각 신착新着으로 내보내진 상자의 옷을 입혀보냈네. 그랬더니 좋아 울고 가데.』
이러한 일이 보통 인간 사이에서 일이라 하면 그 주인은 반드시 야단을 하였거나 시비是非를 하였거나 적어도 불쾌한 빛을 보이는 것이 보통의 상례常例라 하겠다. 그러나 이준 선생이나 조기설 선생은 일개의 청년뿐이 아니라 전국의 민족을 구제하려는 위대한 공동적空洞的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이 말을 들은 이준 선생은 유연油然히 희화喜和한 기색이 만면滿面하여지면서
이준: 『참 잘하였네. 참으로 자네는 나를 잘 아는 친구일세. 과연 조기설일세.』
조기설:『자네가 있어도 그렇게 할 줄 알고 자내 대신 내가 손을 쓴 것일세.』
이준: 『참 잘했어. 자네가 그 청년을 구하였네. 지금 이 엄한嚴寒에 겹바지를 입고 어떻게 관북천리關北千里를 돌파하겠나.』
조기설:『그러나 자네가 바꾸어 입을 옷이 없어져서 자네 부인이... 』
이준:『무슨 말인가? 우리 집 세군細君도 여장부女丈夫라네.』
하면서 부인 이일정 여사를 청하여 다른 옷을 요구하니 부인 이일정 여사는 아무 말도 없이 다른 좋은 옷을 내보내는 것이었다. 이때 보통 부인 네 라고 하면 먼저 내보낸 옷을 채근採根할 터인데 아무 채근하는 일이 없이 시행함을 보고,
조기설:『자네 부인도 어지간하시네 그려.』
이준:『왜?』
조기설:『아무 채근이 없이 부명夫命에 잘 순종하시니 말일세.』
이준:『그런 일이야 보통부인네들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나. 옷을 누구에게 주었거니 하는 것쯤이야 더구나 우리 집에서 가끔 그러한 일이 있었으니까.』
조기설:『잘 알았네.』
이와 같이 이준 선생과 조기설 선생 사이에는 의복 한 벌을 둘러싸고 기이奇異한 전설傳說을 짜내게 되었다. 참으로 그 청년에게 주인의 의복을 묻지도 아니하고 내준 이도 높이 탈구脫臼한 인물이었고 돌아와서 그 미행美行을 찬탄讚嘆한 이준 선생의 관후초월寬厚超越한 도량은 참으로 만고萬古의 비부鄙薄한 인생으로 하여금 縮頭하여 궤행跪行케 하는 바가 있었다.
제2장 선생과 독립협회獨立協會 사건
고종황제 광무光武 2년 무술戊戌에 선생의 나이 40세였다. 이해 10월에 고종께서 대 군주로 계시다가 만승천하萬乘天下의 황제皇帝로 즉위하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역대에 보지 못하던 대황제 즉위의 식전을 거행하시고 국호를 『대한大韓』연호年號를 『광무光武』라 칭하사 세계만국에 향하여 선표宣表하시고 자주독립의 국가 군상群像에 참오參伍케 되었다. 그리하여 영은문迎恩門을 부수고 독립문獨立門을 세우며 모화관慕華館을 부수고 독립관獨立舘을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정동貞洞에 구미인歐美人과 교제하는 社交俱樂部인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를 독립구락부獨立俱樂部로 개칭하게 되었다. 이 정동구락부는 乙未 11월 28일에 일어난 국왕 탈취사건奪取事件에 있어서 주모主謀의 중추기관中樞機關이었었고 건양建陽 원년 병신丙申 2월 11일 국왕 외행外幸 시에 그 후원기관으로써 행동하여 제일배일制日排日의 소위 구미파歐美派의 정치운동의 본진本陣이었다. 이것을 독립구락부로 개명한 것이 즉 독립협회의 최초 발족發足이었다.
이 독립협회의 중심인물은 국내에서 가자 진보적 사상과 개화적 주지主旨로 자주독립의 주의主義를 파지把持한 분들이 악수幄手하여 단합된 것으로 삼일천하三日天下의 감신정변甲申政變으로 미국에 류우流寓하여 미국여성을 부인으로 맞아 미국에 귀화歸化한 서재필 선생을 필두筆頭로 전 주미공사駐美公使 박정양朴定陽, 이채연李采淵, 이승수李承壽, 조민희趙民熙, 민영환閔泳煥, 이완용李完用, 민상호閔商鎬, 김종한金宗漢, 김가진金嘉鎭, 이상재李商在, 윤치호尹致昊, 이동녕李東寧, 이승만李承晩, 그리고 일성 이준 선생 등이 중심으로 입당入黨되어 기타 관민이 점차로 가세하였고 특히 미국인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등이 후원자로서 행동을 개시하게 되자 배재학당을 비롯하여 청년학도들만이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형세는 전연 일변一變하게 되어 청년당의 발흥勃興을 보게 되어 독립협회는 신 국민운동으로 전개하는 시대를 초래하게 되었다.
특히 일본 유학생도 참가하여 당시 망명 중에 있던 박영효의 일파까지 참가케 되니 그 세력이 날로 증대하여 정치적 색채가 극히 농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부의 비위非違를 때로 탄핵 공격하니 그 반향은 정부를 동요動搖케 하는데 까지 이르러 독립협회의 정치운동은 충천衝天의 세력을 갖게 되니 궁중과 부중府中이 더구나 관료계官僚界에서는 그 중압重壓이 무서워서 즉 정변政變이 두려워지게 되어 완고頑固한 관료들이 이를 대항시키기 위하여 보부상단褓負商團인 좌우사左右社의 단체를 암암리에 원조하며 선동煽動하여 이를 황국협회皇國協會라는 이름으로 호황보국護皇保國을 강령綱領으로 메고 나오게 되었다. 이 황국협회의 주추主樞인물은 고영환高永煥, 유기환兪箕煥, 이기동李基東, 조병식趙秉式, 길영수吉永洙, 박유진朴有鎭 등으로서 독립협회는 일본 망명자까지 가세하여 가지고 장차 궁정宮廷과 정부에 일대 위화危禍가 일어나리라고 선창宣唱하여 가지고 급기야에는 고종황제의 칙허勅許까지 얻어 설회設會케 되었다. 그리하여 상기上記한 대관大官 조병식 이외에 박죽이 대신이라는 별명이 있는 심상훈沈相薰, 완고의 전형典型인 신기선申箕善, 민영기閔泳綺, 한규설韓圭卨 등이 또한 황국협회의 지지자로서 궁부宮府안에 방위단防危團을 만들어 가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독립협회와 황국협회는 완전히 대립을 보게 되었다.
독립협회는 당시 문화인과 개화인의 연원淵源으로서 서재필 박사가 사장으로 독립신문을 기관지로 일성 이준 선생, 월남 이상재 선생, 우남雩南 이승만 선생, 남궁 억南宮 檍, 장지연張志淵, 양홍묵梁鴻黙(박영효 파) 등 제 선생의 주간主幹 혹은 寄稿로 자주독립의 정신을 고취鼓吹하는 동시에 정부의 위정違政과 관료의 비행을 사정私情없이 필주筆誅하였다. 그 중에 필책筆責을 주간主幹으로 활약하기 는 이승만 선생으로서 그의 사설社說은 당시 천하의 인심을 파개把開한 공적이 탁절卓節하였다. 이준 선생과 이승만 선생이 서로 영서靈犀가 상통되기는 이때부터 로서 이승만 선생은 이준 선생보다 16년 아래 당년 23세인 약관弱冠시대였다. 이 독립협회가 그 진영陣營을 갖추게 되는 때에 일성 이준 선생은 평의장으로서 회會의 중진中陣인 사명을 띄고 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정동 사교구락부가 이 독립협회로 표변豹變된 동기는 상술上述한 바와 같거니와 그 또 하나의 직충直衝의 이유는 건양 원년 병신丙申에 고종황제께서 정동 로서아공관에 파천하여 계실 때에 허다한 권익을 즉 압록강 상류의 채벌권採伐權을 로서아 인에게, 운산雲山금광을 미국인에게, 경의선京義線철도를 불란서 인에게이와 같이 국중國中의 큰 이익을 자꾸 양여讓與하게된 일이 있어 반정부의 태도로 이 독립협회가 탄생되어 가지고 정부에 대하여 기세를 보이면서 견제牽制하여 군국君國을 보전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기다幾多의 간효間效가 있었다. 광무 2년 무술戊戌 춘春에 와서는 호위병으로 와있던 로서아병兵까지 가게 되었는데 이해 9월에 와서 궁내부 고문관으로 있던 미국 총영사 ‘그레트. 하우스’ 즉 구례具禮라 하는 이가 궁정의 불안을 느끼게 된다 하여 황궁皇宮 수위의 이름으로 다시 각국병各國兵을 인입引入하자는 의안議案을 제출하여 이것이 통과되자 로서아, 英吉利, 불란서, 오태리墺太利 인으로 된 혼성순위대混成巡衛隊 30명을 상해로부터 모집한 일이 있었다. 이 각국 혼성의 순위대가 9월 17일에 입성入城하였는데, 그 소질素質이 불량不良하여 시민의 지탄指彈이 무수하였다. 이를 바라본 독립협회의 회원들은 참을 수 없다 하여 이상재, 이승만, 남궁 억, 장지연, 양홍묵, 윤치호, 그리고 일성 이준 선생 등이 주동이 되어 맹렬히 반대하였다.
이 결과에 그 각국 혼성 순위대는 근근僅僅 10일 내외에 다 해고解雇되어 9월 27일에 퇴거退去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전후에 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니 경부선京釜線의 부설권敷設權을 일인에게 양여讓與한 사실이 나타나고 기타의 害國傷民의 정치가 접종接踵되었다. 이런 것 저런 것 할 것 없이 독립협회의 눈으로는 차마 볼 수 없게 되어 이해 10월 11일에 이르러서는 요망과 주장을 천하만민에게 호소하여 쓸어져 가는 나라를 붙잡기로 결정하고 정부 요로要路의 참회參會를 청하여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라 하고 자주독립의 완전기초를 공작工作하려는 중대 성명聲名을 하고자 하여 운종가雲從街(종로鐘路) 십자로十字路의 광장에 임시 발회식發會式을열고 시민대중까지 참회를 환영하여 대한독립의 기치旗幟를 장엄하게 개최하니 정부측으로는 내부대신 박정양, 외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김가진, 찬정대신贊政大臣 김종한, 법부대신 이윤용李允用 등 기타의 고관대작高官大爵도 많이 참회하여 명실상부名實相副하게 관민공동회가 조직되게 되었다. 이때 회장의 정리整理 주선周旋은 총무위원總務委員 이승만, 장지연, 남궁 억, 양홍묵 제 선생이 있었고 회장에는 윤치호, 부회장에는 이상재, 총무장總務長에는 이준 선생으로서 회장에서는 부지수不知數의 시민과 청년과 학생이 운집雲集하여 곧 천하를 좌우할만한 기세를 이루게 되었다. 곧 이 관민공동회를 다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로(그대로 민회民會라고도 하였음) 改稱하여 가지고 이상재 선생으로부터 이 공동회 조직의 취지趣旨를 간명직절簡明直截하게 설명이 있은 후 회장의 연설이 있어 대중은 환희歡喜하면서 그 신정新政의 도래到來를 축복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뒤를 이어 이준 선생의 비정秘政공격, 시국지탄時局指彈의 매도罵倒연설이 있었다.
소위 정부 대관이 임좌臨座한 면전面前에서 말하기를,
『왈曰 대황제大皇帝라 존칭尊稱하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환칭歡稱하여 천하만국에 향하여 자주독립을 호창呼唱하는 오늘 궁중이 과연 그 어떠하며 부중府中이 과연 그 어떠한가. 인순因循의 고식姑息이 꼬리를 맞물고 있지 아니한가. 철도는 어디로 광산은 어디로 갔나. 회물賄物이 성행하니 이것도 충량忠良한 관료라 할 수 있을까? 국세國勢와 민정民情은 누란累卵에 있어도 자기 자신만 잘 살 궁리만 하면 잘 살아질 것이냐.』
하는 비정非政의 탄핵彈劾과 비행非行의 통매痛詈를 여지餘地가 없어 표절剽切하며 각박刻迫하니 개혁의 목탁木鐸의 임무로서는 더할 수 없었다. 또 이와 전후하여 이승만 선생의 불같은 선동 연설이 대중으로 하여금 크게 분기케 하며 청년 이승만 선생의 인기가 충천되었다. 이때 만민공동회에서는 국가의 권익을 외인에게 허가치 못하게 하는 안案을 즉석에서 채택하니 이날 참석하였던 대신들은 책임문제로 즉일卽日 사표를 봉정奉呈하고 칙재勅裁를 벅대伏待하게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이 선풍旋風이 일어나던 그 이튿날 즉 10월 12일에 와서 고종황제께서는 회장 윤치호를 소견召見하시고 중추원 부의장으로 임명하시니 이는 벌써 권간權奸들이 술채術策을 부려 영수를 관작으로 매수하여 만민공동회의 무력화無力化를 기대企待한 밀주密奏에서 나온 처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신의 결정체結晶體인 만민공동회는 일양一樣공격으로 예진銳進할 뿐이었다. 여기에 확실히 권흉權兇들의 혐기嫌忌를 받게 되어 예비하였던 황국협회를 사주使嗾하여 만민공동회와 알력軋轢을 격화激化케 하였다.
10월 17일 황국협회 회원 부상負商 3백여 명의 일대一隊가 정동 독립협회 본부를 습격하여 난타亂打하려 하니 요인들의 피탈避脫로 다행히 유혈의 쟁투를 간신艱辛히 면하게 되었으나 독립협회의 실기失機는 자못 위세威勢를 멸滅하게 되었다. 이는 궁중 부중이 독립협회를 위험 시 하여 황국협회의 작난作亂을 묵인한 데서 나온 것으로 독립협회에 대한 위해危害는 시시각각으로 박두迫頭하였다.
그리하여 익翌 18일에 와서는 정부의 명령으로 경무청으로부터 순검巡檢이 출동하여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 씨와 부회장 이상재씨를 체포하여 구류하는 거擧에 나왔었다. 그 나수拿囚의 이유는 선량한 시민을 선동하여 안녕을 해해害하게 하였다는 죄명罪名이었다. 회장, 부회장이 나수拿囚된 보도가 전파되자 독립협회의 간부 일성 이준 선생을 비롯하여 이승만 선생, 남궁 억, 이동녕, 장지연 제 선생 들 19인은 독립협회에 회동하여 긴급회의를 열고 생사존망生死存亡을 같이 하기를 회맹會盟하고 일동이 같이 경무청에 출두하여 회장 부회장과 같이 검속檢束하여 구류하기를 요망하는 동시에 독립협회 회원 전부를 일망一網체포하라고 절규絶叫하였다.
이때 경무사는 김영준金永準으로서 외눈이었던 관계로 척안隻眼 경무사의 별명이 있었다. 이는 완고 수구파守舊派와 연장連腸하여 가지고 독립협회의 개화파를 미워하며 중상하기를 일삼고 있었다. 그리하여 불궤不軌의 사상과 무계無稽의 주의主義를 포지抱持한 자 많다고 과대誇大히 악평惡評하여 위증僞證을 많이 만들어 가지고 독립협회를 근절根絶하려는 흉계를 세워 가지고 황국협회를 뒤로 교사敎唆하여 을미乙未 민비閔妃사건에 관련關連이 있는 역적배逆賊輩가 독립협회에 다수히 가세加勢되었다고 성언聲言케 하여 토역보수討逆報讎를 창도唱導케 한 것이 독립, 황국 양회兩會의 충돌의 내인內因이 되어 있었던 만큼 곧 독립협회를 撲滅하려 하였으나 다소 양심에 呵責이 되어 아직 하수下手치 아니하고 더 동정動靜을 보아 하기로 작정하여 일시 명퇴命退하는 거擧에 출出하였다. 그러자 정부는 일안一案을 안출按出하여 양당에서 2백인 씩 창덕궁 인화문仁化門 외에 초집招集케 하여 고종께서 친히 양방兩方을 해산 하라시는 조칙詔勅을 내리게 되었다.
선시先是 북미합중국北米合衆國 공사公使는 고종황제의 의뢰로 독립협회 해산에 관한 일을 맡기는 하였으나 북미합중국 한 나라의 외신外臣으로서 한국 정국의 수습에 당하기는 어려웠다, 그리하여 일본공사 일치익日置益과 협의한 결과 일본공사는 중립하겠다는 주장으로 간여干與치 아니할 의사를 표시하니 할 수 없이 각국 외신外臣이 공동하여 정국의 전면적 협력을 하기로 하였다.
11월 26일 오후 1시경에 고종황제께서 창덕궁 인화문仁化門 밖에 출어出御하사 북미합중국 공사의 제안提案과 같이 궁내대신, 각부 대신, 각국 공사와 및 영사단領事團이 어좌御座의 좌우에 열석列席케 하고 각국 대표의 공동협조으 아래에서 독립협회와 황국협회의 인견식引見式을 거행하시게 되었다. 양회 회중會衆 5백여 명이 어전에 집합集合 배궤拜跪하니 고종황제께서 각국 외신을 환시環視하면서 명랑한 미소로 칙어勅語를 내리시니 우리나라의 帝王의 연설은 이것이 효시嚆矢였다.
『현하現下의 부정否政은 모두 짐의 죄라. 짐이 짐의 허물을 고쳐 장차 선정善政을 펴려 하노니 유중有衆은 각귀各歸 안돈安頓하라.』
하신 것이 이것이었다. 양회 회중들은 진려震慮를 황송惶悚하여 일동은 감읍感泣하고 퇴하退下하였다.
이날 법부에서 칙명하사 그간 양 회의 회중會衆으로서 나수拿囚된 자를 다 석방하라 하시고 그간 손해를 받은 관청과 공사公舍와 민중의 손해를 관판官辦하라 하셨다. 그리고 황국협회의 수령 유기환, 조병식, 이기동李基東 만은 칙명을 배반背叛한 죄로 10년의 유형流刑에 처단을 내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외면으로는 일응一應 독립, 황국 양 회가 융화단원融和團圓된 것 같았으나 기실은 수산빙탄水汕氷炭 그대로의 불상용不相容인 내홍內訌은 근절되지 못 하였다.
고종황제는 특히 독립협회를 후우厚遇하여 독립협회의 간부들에게 중추원 의관議官의 일직一職을 회장 윤치호 씨는 한성판윤漢城判尹으로 부회장 이상재 선생은 내각 총무국장總務局長에 탁배擢拜하시니 이것이 더구나 황국협회에서는 불만을 포회抱懷케 되었다
그런데 12월 21일 하오 2시에 중추원회의 석상에서 독립협회 출신 의관議官인 최정덕崔廷德이 돌연히 일어나 긴급 안을 제출하여 말하기를 현하現下의 급무急務는 정부의 득인여하得人如何가 가장 중대한 일이니 서재필, 박영효를 추거推擧하자 하였다. 이 제안이 1대 2로 통과된 후로 최정덕은 일성 이준 선생을 찾아와서 중추원회의에서 통과된 서재필, 박영효 양씨의 추거 안을 말하고 일본으로 가서 박영효 씨 등을 권동勸動하는 역할을 부탁하게 되었다. 일성 이준 선생에게서 이 역할을 부탁하게 된 것은 선시先是 을미乙未에 민비閔妃사건에 일성 이준 선생이 무단無端한 혐의로 연좌連坐되어 박영효 씨와 같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숙친熟親하였던 인연이 있었으므로 이와 같은 밀촉密囑을 하게 되고 일성 이준 선생은 귀공자貴公子인 금릉위錦陵尉 박영효씨의 혁신사상을 알고 있었으므로 혁신내각을 조직하여 완구파頑舊派를 일소一掃하여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골돌骨突하여 이를 수락受諾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때 궁중에서는 이 중추원의 결의안을 듣고 공포를 느끼게 되어 돌연히 독립협회를 불궤不軌의 단체로 몰아 탄압의 정책으로 돌변하여 독립협회의 출신 의관인 최정덕, 남궁 억, 조한우趙漢禹, 유맹劉猛, 정항모鄭恒謨, 어용선魚瑢善, 홍정후洪正厚, 윤하영尹夏榮 등을 면관免官처분으로 축출하고 일선 이준 선생은 우남 이승만 선생, 이동녕 선생, 장지연 선생, 양기탁梁起鐸 선생 등을 추궁하기로 하니 정정政情이 더욱 혼돈하여 명암明暗을 불변不辨케 되었다. 그리하여 민정民情은 의구疑惧를 품고 정사政事는 퇴폐로 향하니 고종의 유고諭告가 흔들려 다시 독립, 황국 양파는 대립 항쟁하는 암흑천지로 전환轉換하게 되었다.
이 독립, 황국 양파의 재차 항쟁의 도화선은 감신甲申, 을미乙未 양 사변의 역적인 박영효를 독립협회가 추옹推擁하려한다는 것으로 김영준金永準, 신태휴申泰休 등이 주동자로서 토역討逆을 선창宣唱하여 동시에 독립협회 박멸책撲滅策을 세워 가지고 황국협회를 선동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일면一面 일미一味를 끌어 박영효, 서재필 등을 매도罵倒하는 기염만장氣燄萬丈의 소장疎章이며 비방통척誹謗痛斥의 토역문討逆文이 답지遝至하여 소청疏廳이 수라修羅의 광경을 이루었다.
이때 고종황제께서는 토역의 소장疎章과 토역 문을 기본으로 증거 삼아 가지고 단호히 탄압의 철추鐵推를 독립협회의 면상面上에 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독립협회출신의 관리官吏에게 전부 면징免懲처분을 내리고 민회民會 근절의 칙명을 내려 독립협회의 집회를 해산하라 하였다. 그리고 일방으로는 황국협회의 수령으로 과형科刑을 받은 자를 다 석방하는 거擧에 출出하였다. 정형情形이 이에 이르니 시국의 풍운은 점박漸迫하고 각국 대신들은 회의懷疑의 눈으로 정부를 환시環視하게 되니 정부의 위신은 타지墮地할 지경이었다.
12월 초생初生에 이르러 황국협회는 독립협회의 내분內紛이 일어나며 대내大內로부터 독립협회를 강압强壓하려는 기미氣味를 보자 장정壯丁 부상負商 수백 명이 길영수吉永洙, 박유진朴有鎭 등 지휘로 독립협회 본부를 습격하니 일성 이준 선생, 이상재, 이승만, 이동녕 제 선생 등 10여 명이 있다가 그 기습에 혹은 미美 공관公舘으로 혹은 아俄 공관으로 몸을 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독립협회 본부가 일시 공허空虛의 상태에 빠지니 황국협회 회원들은 마음대로 들어가서 난장亂場을 치고 나오다가 독립협회의 회패會牌까지 탈취하여 가지고 갔다. 이 황국협회가 독립협회 본부에 와서 야소惹擾하고 갔다는 소문이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전파되니 독립협회 회원이 일제히 분기奮起하였다. 이때 한성漢城의 시민들은 또한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크게 기세를 이루어 가지고 일대 시위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12월 초 6일에 와서는 운종가雲從街(종로 십자가) 상에 연설대를 만들어 놓고 임시대회를 개최하고 황국협회 타도 연설과 정부 탄핵 연설을 행하게 되었다. 이때 이상설 선생은 황국협회 타도 연설을 징長 광고廣告로 토하고 뒤를 이어 남궁 벽, 윤효정尹孝定 등이 격려 연설을 한 후 일성 이준 선생이 회판會版으로 연대演臺에 올라 도도滔滔 수천數千 어語 정부 탄핵의 연설을 열렬하게 표절剽切하니 수천 군중들은 열광적으로 도취陶醉하여 옳소 옳소 하는 소리가 빗발 치 듯 하였다. 일성 이준 선생은 끝으로 결사대를 뽑아 남대문으로부터 용산까지 궤도軌度에 누워 야단치는 소위 와궤臥軌시위운동을 강조하였다.
이때 강세창姜世昌을 비롯하여 187인의 결사대가 조직되었는데 이 결사대들은 철로에 깔려죽기로 맹서하니 비장한 결심의 광경은 족히 완강한 정부를 깨우치고 남음이 있을 만 하였다. 이때 정부는 이 놀라운 정보를 접하고 곧 순병巡兵을 특파特派하여 남대문으로부터 용산까지 철통鐵筩같이 경계망을 펼치니 결사대의 결사 시위운동은 여의치 못하게 되었다. 이때 이승만 선생은 배재학당의 동창을 휘동揮動하여 종로 대가大街에 수천 회중을 지휘하여 규율 있게 대오隊伍를 편성하여 가지고 성외城外 마포麻浦에 본진을 둔 부상단負商團 즉 황국협회 본부를 습격하여 보복의 진군進軍을 시작하였다. 부중에서 이 양파의 충돌이 긴급 절박切迫하다는 정보를 들었으나 정부 요인들은 멍멍히 앉아서 이를 제지制止하여 성문의 치안을 담당할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려 군軍, 경警 양대兩隊는 좌왕우왕左往右往 도리어 분잡分雜 혼란할 뿐이었다.
마포로 향한 독립협회의 습격대는 이승만 선생의 지휘로 좌우 이대二隊에 분分하여 좌대左隊는 남대문으로부터 아현阿峴을 경유하여 한강 안岸으로 내려가게 하고 우대右隊는 서대문으로부터 공덕리孔德里로 향하게 하였다. 이때 독립협회가 복수 습격을 하러온다는 급보를 접한 황국협회의 회중들은 마포 본 진에서 분연히 전진하여 용장龍杖, 곤봉棍棒, 도검刀劍을 가지고 독립협회의 습격 우대를 맞아 함성고각喊聲高角으로 일대 격투가 일어나니 그 광경은 굉천감지轟天撼地 그대로서 동포와 동포 사이에 유혈의 극劇이 낭자狼藉하게 되었다.
이때 황국협회는 장정 강력자强力者가 많았었고 독립협회는 학생과 文士와 사회인이 많았으므로 황국협회의 장정에게 시달리게 된 독립협회는 12인의 사자死者와 백여 명의 부상자를 내고 남대문으로 우대가 퇴수退守하니 한성 시내는 술 끓듯, 물 끓듯, 돌연 전장화戰場化하여 시내는 전부 철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독립협회의 기습奇襲 우대右隊는 황국협회가 본부를 비고 아현 방면으로 우대와 접전하는 사이에 기습에 성공하고 돌 쳐서 남대문으로 향하니 황국협회는 필경은 독립협회의 좌우 기습대의 사이에서 오고갈 수 없이 되었다. 이 위급危急을 본 황국협회 회중 들은 독립협회에게 본 진을 뺏기고 할 수 없이 양화도楊花渡로 퇴진하게 되었다. 사기事機가 이와 같이 qf상不祥하므로 궁중, 부중은 놀라 이날 밤 군병을 풀어 서대문과 남대문 전前을 파수하여 황국협회[독립협회??]의 침입을 방지케 하여 익조翌朝까지 무사함을 얻었다. 그러나 독립, 황국 양파가 언론전言論戰을 집어치고 이와 같이 혈탄전血彈戰으로 대치對峙하니 실로 암흑시대가 온 것 같았다. 그리하여 시민들은 공포와 회의懷疑에 방황하면서 독립협회의 승리를 원축援祝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불포천不怖天, 불외지不畏地하는 무리가 많은 황국협회가 권토중래捲土重來하여 독립협회를 육박하니 급기야에는 독립협회가 고립무원孤立無援에 빠져 패퇴敗退의 비운에 이르니 황국협회를 조종하고 있던 정부 요인 중 소인小人들과 황국협회 간부들이 흉계를 꾸며 선전전宣傳戰을 겸용兼用하니 독립협회의 존재는 국가정치 상 위험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독립협회의 중요 간부가 다 경안검망警眼檢網에 걸려 다부분多部分이 체포되니 이때 일성 이준 선생, 이승만 선생, 이동녕 선생 등을 비롯하여 개화 독립의 사상을 펴지 못한 가슴을 잡고 억울하게 영어囹圄생활을 하게 되엇다.
황국협회는 필경은 칙명으로 독립협회와 같이 이때 전부 해산되었다. 일성 이준 선생은 정치운동으로 1년에도 몇 번씩 누설累絏의 생활을 겪어오던 터로 이 독립협회의 사건에 걸려든 것은 의례 당연當然 이상 당연에 일로서 이러한 옥고獄苦가 있을수록 개화 자주 완전 독립의 정신과 사상은 더욱 굳어지고 더욱 빛나게 세련되었다.
이 풍파를 겪고 난 이준 선생의 신변은 항상 위험을 느끼게 되었으나 이 심신은 군국에 받친 이상 조금도 개의치 아니하고 더욱 국권회복, 혁신개화의 운동에 일로예진一路銳進하기로 하였다. 당시 독립협회의 선전문宣傳文을 좌左에 소거紹擧하여 참고에 공供하겠다.
<독립협회 선전문>
광무光武 이년二年 시월十月 이십팔二十八日에 독립협회에서 발기發起하여 관민공동회를 종로에 개설하고 민국을 유지할 장책長策을 강구하여 조개左開한 육조六條를 취결取決할 새 만민은 제성창가齊聲唱可하고 참회參會한 정부 제 대신은 특히 가자可字를 서書하고 일제히 착함着啣하였으니
一. 외국인의게 의부依附치 말고 관민이 동심합력同心合力하여 전제專制, 황권皇權을 공고鞏固케 할 사事.
一. 광산, 철도, 매탄煤炭과 삼림 급 차관借款, 해병偕兵과 정부 여與 외국조약 사를 약비若非 각부대신과 중추원의장이 합동合同 착함날인着啣捺印 c칙則 부득不得 시행할 사.
一. 전국 재산은 무론無論 모세某稅하고 탁지부度支部로 구관句管하되 타 부부他 府部와 사회과私會社는 무득간섭無得干涉하고 예산과 결산을 인민에게 공포公佈할 사.
一. 자금위시自今爲始하여 범천중대凡千重大한 죄범罪犯을 과행行 공판公判하되 피고가 돚到底 설명하여 구경자복究竟自服 후에 시행할 사.
一. 칙임勅任은 대황제 폐하께옵서 자순諮詢 정부 하여 종기從其 과반수過半數 하여 임명하실 사 .
一. 실천장정實踐章程할 사.
차此 육조를 들어 의정부議定府[議政府??] 참정 박정양朴定陽 씨 등이 주본奏本을 올렸는데 내개內開에 본월本月 이십구일 인민 등 대회 우于 종가鍾街 칭이稱以 官民共同會 위유謂有 국폐민막國弊民瘼 가이의거자可以議袪者 요정부제신일동부회要政府諸臣一同赴會 신등臣等 절복염竊伏念 관민협상官民協商 수계창유인민등雖係創有人民等 기이의거국폐민막위사칙직재정부리난배각旣以議袪國弊民瘼爲辭則職在政府理難排却 상솔앙회의相率往會矣 회중인민會中人民 유육조강령有六條綱領 헌의자獻議者 만구제성萬口齊聲 일사창가一辭唱可 차요신등且要臣等 장차상將此上 주신등奏臣等 우복염해육조내존국체 우복염해육조내존국체又伏念該六條乃尊國體 정재정整財政 평법률平法律 준장정지사야遵章程之事也 구계합행俱係合行 고근장해접본좌개故謹將該摺本左開 주문복후성재奏聞伏候聖裁
광무 이년 시월 삼십일 봉奉
지령旨令 정부조처政府措處하라 하시옵고 인因하여 조칙詔勅을 특하特下하여 가라사대 만근이래挽近以來 장정정언章程定焉 율령차언律令次焉 수유고금지부동雖有古今之不同 역족위일왕지제亦足爲一王之制 구사정부제신苟使政府諸臣 실심항천행實心巷踐行 하지의지비등호何至議之沸騰乎 짐朕 심개연甚慨然 장국사의지위금일급무자將民國事宜之爲今日急務者 개열어포고중외開列於布告中外 유이신인회준모홀惟爾臣隣懷遵母忽 용부用副 짐朕 출치지지의朮治之至意
일. 간관폐지후諫官廢止後 언로옹체言路壅滯 상하무권면경려지의上下無勸勉警厲之意 함정중추원장정函定中樞院章程 이위실시사以爲實施事.
일. 각항규칙各項規則 기유일정旣有一定 각여신문各與新聞 역불가무방한亦不可無防限 회규會規 영의정부중추원令議政府中樞院 참작시의參酌時宜 재정裁定 신문규례新聞規例 영내부令內部 농상공부農商工部 의방각국례依倣各國例 제정시행사制定施行事.
일. 관찰상하觀察使以下 지방장관급지방대장관등地方長官及地方隊長官等 무론현임여이체無論現任與已遞 약유건몰공화자若有乾沒公貨者 의장율시행依贓律施行 편탈민재자騙奪民財者 저젗급본주후這這推給本主後 안율징감사按律懲勘事.
일. 어사관찰등원지작폐자御史觀察等員之作弊者 허령본토인민許令本土人民 부소우내부급赴訴于內部及 법부法部 이위사구징치사以爲査究懲治事.
일. 설립상공학교設立商工學校 이권민업사以勸民業事.
유아惟我 대황제大皇帝 폐하陛下께옵서 상항上項 소진所陳 육조六條를 구허久許하옵시고 인因하여 조칙詔勅으로 오조五條를 특하特下하시고 십일월十一月 이십육일二十六日에 인화문仁化門 외外에 친임親臨하사 만민萬民을 초대招對하사 가라사대 향일嚮日 관민공동회官民共同會에서 헌의獻議한 육조六條와 칙하勅下하신 오조五條를 차제次第로 실시實施하여 인민人民에게 신의信義를 시示하리라 하셨으니 범凡 아我 동포同胞들은 기도期圖실천實踐하여 홍대弘大하옵신 성은聖恩을 보답報答하기를 옹축顒祝하오.
대한大韓 광무光武이년二年 십일월十一月 일日
독립협회獨立協會 발간發刊.
제3장 改革黨의 秘密結社
고종황제 광무 6년 壬寅에 선생의 나이 44세였다. 年來로 宿題 중에 있던 개혁당의 비밀결사가 조직되었다. 당시 이 개혁당의 首腦部 인물로는 桂庭 민영환 선생이 있었고 중심 核體의 인물로는 일성 이준 선생, 월남 이상재 溥齊 李相卨, 李道宰, 李容翊 兩台, 誠齊 李東輝, 朴殷植, 李甲, 盧伯麟, 남궁 억, 양기탁, 장지연 등 제 선생이었다. 이 개혁당의 首唱者는 실로 민영환 선생이었다. 민영환 선생이 처음 宦路생활에 있어서는 그다지 좋은 이름을 갖지 못하였다. 즉 壬午軍亂의 장본인인 閔謙鎬의 아들로서 閔中殿의 가장 近 친척인 관계가 있어 약간의 貪非가 없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민가 세도의 일 大家로서 一駿(閔泳駿 後改 泳徽), 二達(閔泳達), 三煥(閔泳煥), 四韶(閔泳韶)의 稱까지 들었었다. 그래서 비록 市童의 憐的은 받을 지언정 도리어 識者의 指視를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權貴세도의 생활을 矜持하게 된 것은 그 天性이 그러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 주위의 환경이 부지중 그러한 국면의 생활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列鼎重茵이며 肥馬輕裘로 出將入相하여 輻輳하는 朱門에서 登天摘星의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본래에 天資가 穎悟하고 貫日의 충의로 뭉쳐 나온 민영환 선생은 항상 誡懼의 念을 일으키게 되자 때로 內局의 非違가 더욱 驚愕하게 하는 바가 있으며 나로 외세의 變向이 더욱 翻悟의 생활로 들어가자 로서아 황제 니콜라이 제2세의 戴冠式에 全權特命賀儀使로 가게 되고 연하여 구미 각국을 특명전권공사가 되어 만국의 풍물을 일시에 흡수하게 되니 曰孔云孟이며 曰中云日의 管窺의 井觀을 自悲自哀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조국의 산천을 향하여 개혁의 聯想을 자아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귀국 奉命한 후 시세를 검찰하며 인물을 더욱 採引하기에 고심하였다. 그러나 소위 重臣大官이니 喬木世臣이니 兩班淸宦이니 하는 類輩의 가운데에서는 개혁 광복이라든가 回泰中興할만한 善良有爲의 傑人達士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英賢을 野下에 구하며 俊傑을 草舍에 採하기로 하였다. 여기에 이준 선생을 비롯하여 純誠俊逸한 인물을 文武竝選에 노력하여 極秘裡에 국정 개혁을 算籌하였다가 적당한 시기가 到來하면 倒閣運動에 착수하여 개혁 내각을 수립코자 하였다. 이 중대한 계획을 비밀히 진행함에 있어서 제일 먼저 만나 胸襟을 披瀝하게된 이는 일성 이준 선생이었다.
이준: 『무슨 일이 있습니까?』
민영환: 『騷人腸肚는 元來酒라는 詩句를 실행하겠소.』
이준 선생이 어떠한 해 가을에 친구들과 같이 종일 남산에 올라 시를 지은 가운데에 『騷人腸肚元來酒오 寒土胸襟本色秋』는 寓意의 絶唱이 있었는데 이 시를 桂庭 민영환 선생이 轉聞하고 李杜가 更生하여도 이 이상 더할 수 없다고 極口絶讚한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민영환 선생은 이 일성 이준 선생의 詩意를 實行함으로써 이준 선생의 반드시 有心有意한 對言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준:『술을 주신 단 말씀이십니까?』
민영환:『그렇소.』
이준:『술을 주신다 하시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대감! 대감은 남의 詩句의 해석 실행은 잘 하시려 하시면서 다른 獻言은 어찌하여 실행치 못하십니까?』
하고 이성 이준 선생은 傑傑의 豪傑웃음을 웃으니 계정 민영환 선생이 요구하던 對言이 이것이었다. 다른 獻言은 어찌하여 실행치 않느냐는 이 말을 할 줄 알았고 듣고 싶었다. 그리하여 민영환 선생은 이준 선생의 손을 꼭 잡고
민영환:『일성이 자주 깨우쳐준 개혁의 一事를 잊을 리가 있소. 그렇지 아니하여도 오늘 내가 일성을 만나자고 한 것은 일성의 의견을 좀 討懲하여볼까 해서 오시라 한 것이오.』
이준:『오늘이야 우리 한국이 通運으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를 대표하여 먼저 감사의 뜻을 올립니다. 대감이 결심하시면 저 역시 결심하겠습니다.』
민영환:『자, 저녁때가 되었으니 우리 晩餐을 같이 한 후에 이야기를 하여 봅시다.』
이때 저녁상이 나와 서로 對盤을 하게 되니 桂庭台는 自手로 술을 부어주면서,
민영환:『우선 일성의 詩句를 실행하니 마음대로 많이 자시오.』
이준:『이와 같이 騷人의 詩句를 실행하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연하여 大白(큰 술잔)으로 몇 잔을 기울이고 만찬을 마친 후
민영환:『그런데 어떻게 계획을 세웠으면 좋겠소.』
이준:『지금 외세는 나날이 불리하게 생각됩니다. 英 日동맹이 수이 결성될 모양인데 이 영 일동맹이 가져오는 압력이란 대단히 중대할 줄로 압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뿐이 아니라 청국에도 그러할 것으로 동양 전체에 대하여 대단한 영향이 올 줄로 압니다.』
민영환:『그래요. 그런데 이 영 일동맹은 로 일 전쟁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로 일이 붙을는지가 우리의 진로에 막대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준:『로 일 전쟁을 假想으로 두고 체결되는 영 일 동맹이므로 영 일동맹 조약이 조인되면 반드시 로 일 전쟁이 일어나리라고 봅니다.』
민영환:『그는 나의 생각과 일치하오. 그러면 어느 쪽이 이길 것 같소?』
이준:『열에 아홉 사람은 로서아의 衆大한 것을 보고 일본이 패할 것으로 보지만 나는 반대의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年前에도 말씀한 일이 있지만 로서아의 남하정책은 세계가 다 싫어하는 바이므로 그 중에도 미 영 일이 합작하여 대항할 것 같습니다. 영 미가 遠東작전에 곤난을 느끼는 때에는 일본으로 하여금 當케 하고 병기 물자를 담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대감도 아시는 바 어니와 로서아는 人衆하다 하여도 일본인같이 단결이 없는 데다가 그 나라의 역사상으로 내려오는 발칸 문제로 隣國인 佛 獨과는 讐怨이 쌓여있으니 이것이 또한 후환이 될 것 같습니다.』
민영환:『이 역시 나의 의견과 꼭 같소. 그러면 우리나라가 그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保障되겠소?』
이준: 『李容翊 台와도 말한 일이 있습니다마는 그렇게 되면 어떠한 나라가 이기든지 지든지 우리나라는 嚴正中立으로 對外宣言하고 속히 內政을 개혁하여 국권을 掌固히 하는 방법 이외에는 別無 도리로 생각됩니다. 이 생각은 월남 이상재나 李甲 등이 다 그렇게 생각들하고 있습니다. 이갑, 이동휘, 노백린 등은 참 有爲한 청년들입니다. 대감께 特薦하여 둡니다.』
민영환: 『이 역시 나의 생각과 같은데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국정 개혁을 할까가 焦點이오.』
이준:『지금 형편으로는 도저히 공공연하게 結黨集社할 수는 없으나 우선 비밀결사로 동지를 叫合하여 진행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倒閣운동으로 표면화시킬 수밖에 없다 생각됩니다.』
민영환:『일성! 그런데 내가 洋行하고 돌아온 후에 나의 심경이 변화하여 그렇게 보이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렇게 묵은 대관들이 보기가 싫고 또는 나의 행동을 의심하여 감시하는 양 싶으니 주로 일성이 애를 써주는 것이 좋을까 하는데 어떠하시오?』
이준:『水火라도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를 위하여 하는 일에는 죽기를
기약하고 명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대감하고 연락이 문제입니다. 너무 頻煩히 출입하게 되면.....』
민영환:『그 亦 그러하오. 그러면 좋은 수가 있소. 월남 이상재가 내각 총리국장으로 있으니 公事로 憑藉하기에 제일 좋소.』
이준:『그것이 明案입니다. 그러면 대감 의중의 인물들을 말씀하여 주셨으면 좋을까 합니다.』
민영환:『이상재, 남궁 억, 장지연, 이용익, 이동휘, 양기탁, 이상설, 노백린 등이 좋을까 하는데 일성의 생각에는 어떠하시오?』
이준:『다 靈犀가 상통되는 터입니다. 대감의 선정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민영환:『독립협회시대의 인물 가운데에 有爲한 인재와 일본에 망명하고 있는 인사 가운데에서도 추려보기로 합시다.』
이준:『좋겠습니다.』
민영환:『그러면 어느 날 우리 몇 사람이 우선 만나기로 합시다.』
이와 같이 개혁당의 비밀결사에 대한 조직과 인물 선택에 대한 抽象的 案을 세우고 자리를 일어서서 나오게 되었다.
堅志洞 골목을 벗어나 安洞 別宮 담을 끼고 한참 올라오면 「太宗十八擧義兵, 擒充戮杜四海淸」이라는 古詩를 생각하게 되었다. 즉 唐 太宗이 十八歲에 義兵을 募擧할 때에 蠢國傷民하는 當世 屈指의 小人인 王充과 杜建德을 잡아버리니 천하 四海가 숙청되었다는 시로써 조정의 奸權들을 壓制할 수만 있었으면 국정의 쇄신이 빠르겠다는 籌算이었다.
이때 집은 苑南洞으로서 네 살 먹은 딸 金鈴을 항상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걸음을 재 쳐서 집으로 돌아오니 부인 이일정 여사는 어린 딸 금령을 안고 앉아 있다가 일어 나와 맞이하면서 한 장의 명함을 내어주니 이는 ‘題鳳而歸(題鳳은 옛날 崔鳳이라는 사람이 친구를 찾아갔다가 못 만나고 鳳字를 써두고 온 일이 있어 후세 사람이 인용하였다.)라 쓴 월남 이상재 선생의 명함이었다. 일성 이준 선생은 어린 금령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이상재 아저씨를 좀 만났더라면 좋았을 걸’하고 부인을 명하여 大白 一杯를 거우르고 자리에 나아갔다.
그 이튿날 아침에 잠을 깨어 가지고 생각하여 보니 어젯밤에 桂庭台와 월남이 나란히 찾아 들어와서 개혁당 조직을 急速히 진행하자 하고 손을 잡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이 꿈이 내가 怠慢할까 하여 天神이 引導한 꿈으로서 시인의 意思는 같다는 것과 같이 동지들의 의사가 꿈에까지 통해진 것이라 생각하고 일어나서 부지런히 洗漱와 朝飯을 마친 후 대략 桂庭台와 협의한 사람들을 찾기로 하여 제일 먼저 월남 이상재 선생을 찾아갔다.
이준: 『어제 오셨더라 는 것을 못 뵈어 죄송하였소. 』
이상재:『천만에요. 한참동안 못 뵈었기로 其實은 지나가는 길에 들렸소이다.』
이준:『어젯밤에 桂庭台가 만나자 하여 밤늦게 야 집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상재:『무슨 일이 있었나요?』
이준:『우리가 항상 말하여 오던 그 일에 대하여 좀 협의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상재:『그래, 桂庭台가 결심하셨나요?』
이준:『이번에는 우리가 뒤졌다할 수 있으리 만치 매우 강렬하여졌습디다.』
이상재:『역시 秘자로 말씀이겠지요.』
이준:『그야 물론이지요. 우리에게 강력한 조직체라든가 兵權이라든가 경찰권이 장악되기 전까지야 어찌할 수 없으니까 당분간 秘자로 진행할 수밖에 있소.』
이상재:『그건 그렇고 또 중심인물에 대해서는 역시 우리의 忖度과 같겠지요.』
이준:『물론이지요. 그 이외에 뻗쳐볼 곳은 어디 있소?』
이상재:『그러면 桂庭台가 수령으로 앉는 데는 異議가 절대 없겠지요.』
이준:『그야 물론이지요.』
이상재:『옛날 계정은 아니로군.』
이준:『소위 喬木世臣 가운데에서는 一蓮선생이 아닐까 합니다.』
이상재:『나도 오랫동안 信從하는 터이지만 이와 같이 冒險의 대 결심에는 敬服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준:『그래요. 나도 어제 그 결심을 보고 國脈을 扶持하여 싸울 사람을 쾌히 발견하게 되어 매우 유쾌하였습니다. 요전에 만났을 때에 해는 천만리의 長天을 두려워하지 아니 하고 참된 사람은 千萬種의 難事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는데 어젯밤 그 참 스러운 태도는 果若其言으로 보입디다. 그런데 문제의 초점은 이 일의 진행 상 중심연락의 인물이 제일 난 문제인데 솔직히 말하면 월남형이 제일인자라 합디다. 어떻게 생각되시오?』
이상재:『일성 형이 좋다 생각되는데요.』
이준:『내 문제도 등장이 되었었는데 월남형이 제일 무난하다는 이유는 지금 내각 총무국장의 任에 있으니 官公의 일로 연락 상 출입이 빈번한 것 같이 하면 他人 所視에 無礙하겠다는 것이 桂庭台의 意肚인 것 같소.』
이상재:『그렇다 하면 다시 두 말이 있을 리가 있겠소?』
이준:『감사하오.』
하고 서로 악수를 굳게 하고 일어서 노백린, 양기탁, 장지연 등을 歷訪하여 다 승낙을 얻은 후 며칠 후 桂庭台와 만나 李範晉, 金錫恒, 洪在箕, 閔丙斗, 김병시, 金德基 諸人의 引入운동을 更提하며 성공하였다. 就中 이범진 선생은 駱洞 將臣 李景夏의 아들로서 영특한 인물이었다.
이는 일찍 驍名을 飽飮한 분으로 법부대신, 경무사, 派美全權公使로 俄, 法. 奧, 德 諸國 駐箚公使 등을 지나게 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 혁명적 기분은 丙申年 俄館播遷 시대에 萌芽되어 隱然히 개혁파의 袖首級 인물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대게 陣中이 서자 제반 준비와 절차를 桂庭台와 협의하고 견지동 桂庭台의 邸宅안 別堂에서 야간 비밀 회합을 하여 천지신명께 맹서하고 개혁당의 명의로 비밀결사가 조직되었다. 비밀결사이므로 部署조직은 後日에 밀고 이준 선생이 교섭한 바와 같이 중심 연락인물로는 월남 이상재 씨가 취임하여 會務를 추진키로 작정하였다. 月餘를 두고 비밀히 활동한 결과에 이 개혁당의 기초가 매우 공고하게 되었다.
때는 駐英 일본 전권 林董이 영 정부와 절충하여 영일 동맹의 조인이 끝나게 되어 陰으로 陽으로 그 영향이 동양 판국에 불리를 가져오게 되었으므로 聲援이 없는 약소 한국의 向後 입장이란 참으로 累卵의 勢에 놓여있게 되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정부 要路의 소위 대관 중신들은 오히려 五里雲霧에 왕래하면서 漆室甘夢이 如復하니 具眼者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리하여 개혁당 동지들은 기가 막혀서 울끈 불끈 하게 되어 장차 乾坤一擲의 劇이 연출될 번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범진 선생은 이준 선생을 찾아 熟議한 바가 있었다.
이범진:『일성! 곧 倒閣운동을 전개하자는 기분이 濃厚한데 成算이 있겠소?』
이준:『이는 누구보다도 이동휘, 노백린, 이갑 세 사람이 가장 강경합니다. 그 이유는 노백린, 이갑, 양군은 後日 해야할 일도 있어 쇠뿔도 斷決에 빼야 한다 합니다. 이동휘는 이 倒閣운동을 遷延하다가 世祖大王때 雲劒會 모양으로 兪應孚 장군의 탄식을 면치 못하게 되면 어찌하려느냐 고 하는 것입니다.』
이범진:『그렇기는 한데 만일의 준비가 없으니 딱하지 않소. 이동휘의 부하와 이갑과 노백린의 동지쯤으로야 어찌 전폭적으로 신뢰할 수가 있겠소?』
이준:『그러합니다. 그러나 桂庭台의 말씀과 같이 두 분 중에서 군부대신이 되어 가지고 心腹의 장병을 찾자면 그 역시 여간한 기한이 걸리지 아니할 모양이니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범진:『그러나 노백린, 이갑 등은 일본 사관학교 관계로 細音 數에 빼는 것이 옳고, 결국은 이동휘 하나가 전부 담당하여야 할 터이니 成算이 있소?』
이준:『그러하면 불가불 병권을 파악한 후에 萬全之策을 세우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범진:『그래요. 甲申政變 이후 이를 잘 증명하지 않소?』
이준:『잘 알겠습니다. 金玉均 씨의 사상은 매우 찬성합니다. 그러나 그 급진이 유감이었어요. 그러면 蔽一言하고 李容翊 台와 상의하여 군권을 장악하도록 주선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이범진:『그 의견이 옳소.』
이와 같이 萬全策을 세워 緩進主義로 黨의 방침을 세워 가지고 나아가기로 하였다.
며칠 후 서대문 밖 독립문 옆에 서있는 독립회관 국민연설대에서 명사 연설회가 문제되어 이상재 선생과 같이 나아가 이상재 선생의 後陣을 맡아 일대 氣燄을 토하게 되었다.
제4장, 독립관 국민대 연설
이해 英吉利駐箚 일본 전권 林董은 가진 아양을 떨어가면서 당시 영국 외무대신 ‘라싱톤’과 사이에 영 일동맹의 議事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는 청국의 北淸事變 당시부터 俄國이 극동에 대한 야심이 胎動되어 북청사변이 終熄하자 漸漸히 擡頭化하며 勃勃히 노골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후 만주 경영에 着着 성공을 보이며 韓 淸 兩邦에 대한 脅威가 날로 澎漲하니 극동의 평화가 未久에 攪亂될 兆朕이 濃厚하여졌다. 그리하여 從來로 극동의 이해와 평화유지에 있어서 보조를 같이하여 오던 영국 일본의 兩 황제가 시국 풍운이 漸危함에 鑑하여 영 일동맹을 체결하고 따라서 동양평화를 보장하자는 일을 약속하고 서력 1900년 1월 30일에 영 일 조약에 대하여 양국 전권이 조인하여 가지고 동 2월 12일에 이를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간접 혹 직접으로 위협을 느끼게 된 나라는 韓 淸 양국으로서 당시 우리 한국의 有志로서 憂國憂民하는 이는 누구나 할 것 없이 경계와 注視에 不怠하게 되었다. 이때 유지들은 회합을 자주하면서 이 세계의 동향과 동양의 來勢와 영 일 동맹을 가져온 북청사변의 연구에 몰두하게 되어 하루는 서대문 밖 독립회관에서 연설회를 개최케 되었다. 이때 辯士로는 일성 이준 선생, 남궁 억, 이상재 등 제씨였다. 이날 이준 선생의 연설제목은 <북청 사변이 가져온 영일 동맹>에 대한 것으로 要旨는 左와 같은 것이었다. 회장에는 관민 각 사회의 各界人이 雲集하여 立錐의 여지가 없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이 먼저 登壇하여 悲憤快壯한 어조로 국내 국외의 정세를 熱辯한 후 일성 이준 선생이 등단하니 만장의 박수 歡迎은 참으로 雨雷같았다.
『여러분께서 百忙을 捐棄하시고 이와 같이 다수히 枉臨하여 우리의 말을 듣고자 하시니 감사한다. 내가 오늘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문제는 북청 사변으로 영 일 동맹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외국의 사정을 말하는 것 같으나 기실은 우리나라에 대한 관심이 큰 바가 있으니 잠깐 동안 靜聽하여주시기를 바란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에 봄으로부터 여름에 걸쳐서 독일, 영국, 불란서, 로서아 등 4대 강국은 虎牙를 相磨하여 가면서 청국 정부에 대하여 租借地의 설정을 강요하게 되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외국에 의뢰를 일삼던 청국은 이 강요를 당하고 나서 점점 불만의 反感을 抱懷케 되었다. 列國이 이와 같이 벌떼처럼 덤벼들게 된 것은 참으로 그 중대한 원인이 일 청 전쟁의 결과 조그마한 왜국에게 勝點을 주고 자기의 약점을 온 세계에 폭로하게 된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로서아는 遼東半島를, 독일은 膠州灣을, 영국은 威海衛를, 佛國은 廣州灣을 租借하여 철도 敷設이니 광산 採掘이니 하는 이권 획득의 逐鹿場으로 화하게 되니 이에 청국은 날로 國事가 多難하고 世評이 多端하여 열국에 대한 반감이 전국 朝野에 漲溢하니 主義와 政見에 있어서 또 自然派生을 보게 되어 進步黨과 守舊派의 양 派黨이 분립하게 되었다. 전자 즉 진보파는 變法自强의 說을 수립하여 제도를 개량하여 民富國强의 策으로 나아가자는 것이었고 後者 즉 守舊黨은 排外와 攘夷의 論을 固執不通하여 互相論爭하게 되었다. 이 유래를 잠깐 말하면 淸의 道光황제는 7남매가 있었는데 장자는 夭死하고 제2, 제3은 여자요, 제4는 咸豊帝(文宗)가 되고 제5자는 恒親王, 제6자는 恭親王, 제7자는 醇親王으로서 함풍 황제가 죽은 후 妃 西太后의 遺腹子인 同治 황제가 立嗣하였으나 繼代가 없이 또 죽으니 순친왕의 아들을 서태후가 取立하게 되었다. 이 醇親王妃와는 서태후가 姉妹관계 상 光緖 황제로 즉위케 한 것이었다. 즉위 24년 후 戊戌年에 와서 廣東의 國學者 康有爲의 명성이 播多하자 당시 袁世凱는 야심만만한 영웅으로 自處하여 서태후를 농락하는 판이었는데 서태후는 어떤 좋은 생각이 잠시 들었든지 이 강유위를 召上하여 國師로 대우하고 국가대사를 下問하게 되었다. 이때 강유위가 說道한 것이 變法自强의 立憲君主制論이었다. 서태후는 이 국학자의 蘊蓄이 깊은 학설의 정책을 한 번 듣고 나서는 대단 좋아하여 개혁 실행을 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강유위는 變法自强의 論을 把持한 進步黨의 領袖로 극 비밀리에 梟雄 원세개를 찾아 가지고 설명하였다. 이는 政變에 있어서 군권을 장악한 원세개를 모르게 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 <계속>=
첫댓글 좋은자료 감사드립니다.스크랩 하오니 양해바랍니다.감사합니다.
'이준 선생전'은 일성 이준 선생의 사위되시는 한국화폐사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류자후 선생의 역저입니다. 마침 어느 출판사에서 '이준 선생전' 원본이 너무 한문이 많고 난삽하여 쉽게 옮겨줄 것을 제게 읠히해왔으므로 지금 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어느 분의 '이준선생 전기'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는 이 전기를 끝까지 탐독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3/1도 못 정리해서 걱정입니다. 그러나 본 자유게시판에는 끝까지 이 내용을 소개해 드릴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dantong 선생님 그동안 인사도 드리지 못하여 죄스럽습니다. 귀한 자료들을 올리시는 선생님께 마음깊이 감사와 존경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와 가르침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김상철 드림 바쁘시지만 허락 하신다면 저의 멜 주소는 indehero@naver.com 입니다.
'이준 선생전' 정리 작업 무사히 마치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항상 귀한 자료들을 올려 주시는 단통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