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 카프카(외 2편)
한우진 Ⅰ ‘위에 있기에 그는 이겨낸다’ 나는 밀로슈의 이 말을 기린 카프카에게 주기로 하였다 일생을 통해 한 번도 울지 못한다는 기린, 위에 있으므로 그는 울 겨를이 없다 내려다보는 일만으로도 일생은 벅차다 새털구름은 기린 옆에 들떠 있다 구름이 천상의 악공이 아니라면 내려다보는 일은 격앙된 즐거움일 수 없다 Ⅱ 나는 이 「기린 카프카」를 감았다 풀었다 연을 날리는 자세로 자새를 움켜쥐고 있다 기린 카프카는 위에 있기에 그의 겨드랑이는 점점 드러난다
문지방에 떨어지는 깃털 깃은 그라쿠스를 향해 자라고 털은 눈부신 밤, 격렬한 사정*을 위하여 부풀어 오른다 Ⅲ 그는 신으로부터 수수께끼를 부여받은 인간, 위에 있으면서 온갖 벌레에게 들킨 유일한 인간
*Verkehr : 교통, 교류, 성교
천염(濺染)
비는 여기에서 잉크다 그리고 나는 한낱 종이 한번 흩뿌리고 한번 흠뻑 젖는다 어느덧 잉크는 닦을 수 없는 눈물 잉크는 거기에서 비다 그리고 압축 종이상자를 뜯고 나온 여자들은 실크벽지 흩뿌리고, 젖어도 찢어지지 않는 잇 백 서정춘 1. 에쁘롱(Eperon) 거기서는 며느리발톱이 지배할 것이다 세상에 짧게 만들다니! 그는 얼마나 권위적인가 2. 초월성의 음표, 트랩 초월성을 지니지 않은 문학은 끈적거릴 뿐 개운한 맛이 없다. 재래의 언어로 ‘비애’를 표현할 수밖에 없는 문학은 ‘국물 없는 국밥’에 다름 아니다. 그런 비애는 초저녁에 차려낸 술상의 안주조차 되지 못한다. 그러니 술잔에 술이 그냥 남게 되는 형국은 한마디로 자신의 문학의 전복이나 개진이 아닌, 잔류라는 트랩에 걸리게 되는 것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겠다. 트랩을 통과한 서정춘의 여러 시들은 결심을 끝낸 ‘극약’의 정수리를 견지하고 있다. 그는 사물 혹은 대상과 싸우지 않고 초월한다. 그는 초월함으로써 시가 존재하게끔 만드는 유혹의 작용을 강화한다. 그의 비트는 시의 중간 중간 32분음표를 넘어선다. 그의 울림은 길다. 반면, 다들 짧다고 여기는 그 무엇은 긴 울림 안에 있는 어떤 반짝거림일 뿐이다.
―시집 『대지극장에서 나는, 검은 책을 읽었다』 2024.4 ------------------- 한우진 / 충북 괴산 출생. 2005년 《시인세계》로 등단. 시집 『지상제면소』 『까마귀의 껍질』 『대지극장에서 나는, 검은 책을 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