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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 4,1-15.25
1 사람이 자기 아내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아이를 얻었다.”
2 그 여자는 다시 카인의 동생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기가 되고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다.
3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4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6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7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8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9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11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12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
13 카인이 주님께 아뢰었다.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큽니다.
14 당신께서 오늘 저를 이 땅에서 쫓아내시니, 저는 당신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하고,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어,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아들을 낳고는, “카인이 아벨을 죽여 버려, 하느님께서 그 대신 다른 자식 하나를 나에게 세워 주셨구나.” 하면서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8,11-13
그때에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오늘 복음은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께 대한 바리사이들의 시험을 전해줍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마르 8,11)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마치 모세 때에 광야에서 내린 ‘만나’(탈출 16장)나, 여호수아의 간구로 해와 달이 멈춰졌던 일(여호 1,12-14)과 같은 하늘에서 오는 초자연적인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저의는 이러한 표징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데 그 초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뜨리기 위해서 시험합니다.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에게 빵이 되라 해보시오.”(마태 4,3)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메시아인지를 스스로 증명해보이라는 지극히 도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심문하듯이 예수님을 다그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르 8,12)
이에 대해서 마태오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그들이 시대의 표징을 분별하지 못함과 함께 표징을 요구하는 이유를 밝혀줍니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3-4)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시대의 표징을 드러내셨지만, 특히 바로 앞 장면에서는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통해서도 드러내셨지만, 그들이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이기 때문임을 말해줍니다.
어쩌면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여전히 무시하고 거부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바로 그럴 것입니다.
과학자 아인쉬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부류는 세상에는 기적이 없다는 사람들이요, 또 한 부류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믿고 받아들이는 이의 눈에는 모두 것이 기적이요 신비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표징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마르 8,12)
주님!
당신의 진실은 오늘도 저의 믿음을 다그칩니다.
오늘 저희에게 불신으로 왜곡된 마음을 밝혀주소서.
가리고 눈 감은 마음을 뜨게 하소서.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무시하고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은 잘못이 없으신가>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을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창세기 4,4-5)
오늘 저의 강론은 도발적인 질문으로 시작하렵니다.
하느님은 잘못이 없으신가?
인간만 잘못이 있고 하느님은 없으신가?
카인의 죄악에 하느님의 잘못은 없으신가?
저는 오래전부터 하느님의 원죄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원죄의 원죄가 하느님께 있다고.
인간 원죄의 원죄가 하느님께 있다는 얘기지요.
자식의 모든 죄에 부모의 원죄가 있다는 것과 같습니다.
유전자적으로 그런 자식을 낳았고, 그렇게 양육했기에 자식이 그리된 것이 아닙니까?
똑같습니다.
낳은 분은 하느님이나 부모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의 잘못에 대해 할 말이 없습니다.
사실 인간의 잘못에 대해 하느님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부터 하느님의 원죄이니, 인간이 그 자유의지를 가지고 죄를 지은 것에 관해 할 말이 없습니다.
물론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또 사랑하시기에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며, 자유를 주신 이유도 자유의지를 가지고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기에, 다시 말해서 억지로가 아니라 자유롭게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기에, 그 사랑에 관해서는 감사하지만, 인간의 원죄에 하느님의 원죄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카인의 죄에 관해서도 하느님의 원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아벨의 제물만 굽어보셨습니까?
제물을 안 바쳤다면 모를까 바쳤는데 왜 카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하느님이 분명 잘못하셨고 카인의 죄에 하느님의 원죄가 있습니다,
만약 하느님께는 잘못이 없다면 창세기에 잘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가 하느님께서 굽어보시지 않은 이유를, 굽어보시지 않은 것이 편애가 아니라는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은 겁니다.
사실 창세기뿐 아니라 모든 성경이 하느님의 모든 신비를 친절하게 그리고 다 설명하지 않고, 다 설명해준다 해도 인간이 다 알아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고 신비입니다.
그런데 창세기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의 어떤 제물을 하느님께서 맘에 들어 하시느냐 그것을 창세기가 얘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어쨌거나 인간은 죄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고 그래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자유의지를 어떻게 쓰든, 그것도 우리 인간의 자유입니다.
죄를 짓는 데 쓸 수도, 사랑을 하는 데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랑은 할 수 없고 죄만 짓게 만드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억지이고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며 죄의 핑계나 탓을 하느님께 돌리는 미성숙이지요.
성숙하다면 자유의지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고, 성숙하다면 자유의지를 잘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를 다스린다는 것은 자유의지를 다스리는 것이고, 성숙하고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있는 사람은 자유의지를 잘 다스려 자유의지를 죄를 짓는 데 쓰지 않고 사랑하는 데 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를 다스릴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자유의지를 사랑하는 데 힘을 쓰게 할까요?
자유의지를 사랑하는 데 쓰게 하는 것도 사랑이고,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유의지를 사랑을 위해 쓸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할 때입니다.
성당 앞뜰에 성모님 상을 모시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을 안 어떤 분이 “한국 어느 성당에 모셔진 성모님은 성모상에 머리를 갖다 대면 꼭 안수하는 모습인데 기적도 많이 일어난답니다. 그 성모상을 모신 곳이 어딘지 알아보고 그런 성모님을 모셨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행인지, 모시고 있는 성당에서 난색을 표해서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예쁜 성모님을 모시면 더 많은 관심을 지니게 되고 은총도 그만큼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일반 판매용 성모상도 쌍꺼풀하신 분이 인기가 좋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사람들은 신비한 현상에 민감합니다.
어디에 어떤 기적이 있다고 하면 그곳에 쫓아가고 그 혜택을 입고자 애를 씁니다.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 신비한 현상이나 기적을 통하여 드러내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더 많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은총을 주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주어진 은총의 열매에 매달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종교지도자들의 불신은 계속되고, 결국 주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완고한 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자기들의 욕구에 걸맞은 것만을 요구하고, 이미 보여준 표징을 올바르게 보려 하지 않고 또다시 표징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일도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쇼맨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보여주기 위한 기적,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진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기적을 많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기적의 삶을 사는 것이 소중합니다.
기적이 믿음을 가져오기보다 믿음이 기적을 낳습니다.
어떤 성모님 상을 모시든 그 앞에서 그분의 마음으로, 그분의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랑을 베풀고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며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영원한 삶을 살게 해 주어도 그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살아있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기적을 베풀어 준 것은 그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 사건 안에 담긴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현상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기적의 삶을 살지 못한다면 하늘의 기적이 아무리 많이 일어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을 보여 달라고 조르지 말고 여러분이 기적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주님, 표징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눈과 깨닫는 마음을 주십시오.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신분증>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했다는 말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어떤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는 뜻입니다.
‘시험하려고’ 라는 말은 시비를 걸었다는 뜻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표징’이라는 말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어떤 놀라운 기적 같은 일을 뜻합니다.
바리사이들이 표징을 요구한 일은 신원 증명서, 또는 신분증 같은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한 일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요구에 대해서 “무슨 권한으로 그것을 요구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느님이신 분’께 신원을 증명하라고 요구할 권한이 없고, ‘하느님이신 분’이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당신의 신원을 증명해 보일 의무도 없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라는 말씀은 “왜 믿으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 세대’는 특정 세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안 믿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표징을 보여 주기를 단호하게 거절하는 말씀인데,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믿게 만들기 위한 표징을 보여 주지는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미 충분히 표징을 보여 주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무조건 믿으라고 윽박지르는 말씀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0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0,37-38)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예수님의 신원을 증명하는 표징입니다.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 주신 일들, 죽은 사람을 살리신 일들, 마귀를 쫓아내신 일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이 표징이 됩니다.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았지만, 처음부터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 일들을 ‘하느님의 일’로(‘메시아의 일’로) 안 믿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그들이 요구한 대로 어떤 표징을 보여 주셨더라도 그들은 속임수라고 생각하면서 안 믿었을 것입니다.
신분증이나 어떤 증명서를 보여 주어도 위조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안 믿으면, 신분증도 증명서도 다 소용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떠나신 것에 대해서 바리사이들 쪽에서는 자기들이 이긴 것으로, 즉 표징을 보여 주지 못해서 예수님이 무기력하게 물러난 일로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그들이 버림받은 일입니다.
믿기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버림받는 쪽을 선택한 일.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을 믿은 일은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됩니다.
그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박해자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하게 의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텐데, 그는 의심하지 않았고, 무슨 표징 같은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곧바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줄 것이다."'
(사도 9,3-6)
이 이야기에 대해서 “초자연적인 현상에 압도당해서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박해자 사울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어떤 환청을 들은 것인지 의심할 수도 있었고, 또 자기가 적대시하고 박해하는 예수님이 정말로 메시아인지부터 확인하고 싶어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서 ‘그냥’ 바로 믿었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믿음이란 그렇게 ‘그냥’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바오로 사도의 회개를 믿은 일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박해자였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도가 되었다는 것을 다른 사도들은 어떻게 믿을 수 있었을까?
'사울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지만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가 제자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르나바는 사울을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데려가서, 어떻게 그가 길에서 주님을 뵙게 되었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는지, 또 어떻게 그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사도 9,26-27)
바르나바의 소개와 보증이 있긴 했지만 사도들이 바오로 사도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했고(사도 9,20), ‘예수님의 이름으로’ 설교했기 때문입니다.
‘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오로’로 변화되었음을 증명하는 증거는 바로 그가 한 ‘일’과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세례 증명서’가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하는 ‘일’과 ‘신앙인다운 삶’입니다.
그 ‘일’과 ‘삶’은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는 ‘나의 신앙’을 증명하고 증언하는 일이 되고, 하느님을 향해서는 ‘신앙생활로써’ 순종하는 일이 됩니다.
반대로, 내가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 나는 아무에게도 나의 신앙과 신앙생활을 입증하지 못하게 되고, 신앙인이라고 말할 자격을 잃게 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주님 안에서 지혜롭고 품위있는 삶 - 초연과 이탈의 훈련>
오늘 말씀 묵상 중 문득 떠오른 한달 전(2023,1.12)의 강론에 그 강론을 받은 형제의 댓글 답신입니다.
다음 같은 일부 제 강론 내용입니다.
“우리가 살아야할 자리는 외딴곳, 안식처는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시는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입니다.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 슬퍼도 슬프지 않은 척, 병이 있어도 건강한 척, 외롭고 쓸쓸해도 즐거운 척, 최소한도의 일상생활만 할 수 있으면 이렇게 사는 것은 위선이 아니라 진정 성숙한 믿음이요 살 줄 아는 삶의 지혜입니다.”
이에 대한 그 형제의 다음 답글에 공감했습니다.
“오랜 시간 척하고 살면서 스스로 위선이라 여겼었는데.... 큰 위안이 되네요.”
‘척하며’ 살아가는 자세는 위선은 커녕 참으로 성숙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거리를 두고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참으로 지혜롭고 품위있는 자세입니다.
이를 위한 초연과 이탈의 훈련이 필수입니다.
예수님처럼 외딴곳을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외딴곳입니다.
얼마전 인용했던 ‘외딴곳’은 제가 요즘 쓴 글중에서 아주 좋아하는 글입니다.
“답은 내 안에 있다
오늘 지금 여기가
내적초월의 자리 외딴곳이다
언제 어디서나
내적깊이와 높이의 본질 추구의
내적초월의 삶을 살자
주님 만나러
외딴곳 찾아 나설 것 없다
언제 어디든
주님과 함께 있으면
초월적 거점의 내적공간이 형성되고
바로 거기가
주님을 만나는 구원의 자리 외딴곳이 된다
참 겸손 은총의 열매다”
바로 이를 위한 묵상기도, 명상기도, 비움기도, 반추기도, 향심기도들입니다.
모두가 다른 기도 명칭이지만 내적 기도 원리나 방법은 똑같습니다.
이런 기도 훈련이 잘 되어 습관화될 때, 초연과 이탈의 삶에 지혜롭고 품위있는 삶입니다.
연중 제6주간 본기도 내용처럼 이런 외딴곳의 훈련이 잘 된 바르고 진실한 사람은 은혜롭게도 주님의 거처가 됩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저는 제1독서 창세기와 복음을 묵상했습니다.
창세기의 카인의 경솔한 처신이 참 안타깝습니다.
이 또한 무지의 결과입니다.
타오르는 질투와 분노로 자기 통제력을 잃은 무지의 사람, 카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다면 무조건 끝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며 자신의 품위를 지키는 것이 진정 지혜로운 자세였던 것입니다.
비록 질투와 분노로 마음은 극도로 혼란스러웠을지라도 최대한 자제력을 발휘하여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평온한 척 했어야 했습니다.
지극한 인내가 태풍을 미풍으로 바꿀수 있으며 경솔한 조건반사적 처신이 유혹에 빠져 미풍을 태풍으로 바꿀수 있습니다.
카인과 아벨 형제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를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 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바야흐로 카인이 질투와 분노의 유혹에 떨어져 아벨을 살인하는 대죄를 짓기 직전입니다.
하느님이 왜 그랬는지 원인을 묻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참으로 카인이 지혜로웠다면 '하느님도 말못할 내적 사정이 있었겠지' 생각하며 하느님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고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자기의 품위를 지켰을 것입니다.
이랬다면 태풍같은 질투의 분노도 미풍으로 변했을 것이며 하느님도 내심 카인이 고마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태는 그 반대로 전개됩니다.
다음 주님의 질책에도 카인은 냉정을 회복해야 했습니다.
카인은 좌우간 화를 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옳아도 화를 내면 무조건 집니다.
화만큼 인간품위를 손상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시의적절한 충고이나 분노로 흥분하여 자제력을 잃은 카인의 귀에 들어올 리 없습니다.
결과 카인은 아벨을 살인했고, 이어 주님의 추궁에 참 뻔뻔하게 대답하니 완전히 자기 품위를 포기한 작태입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대죄를 지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데 이어 카인도 동생 아벨을 죽인 대죄로 삶의 자리에서 쫓겨나 세상을 떠돌며 해매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는 작죄作罪의 카인의 후예들인 사람들입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 작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셨듯이, 이런 카인에게도 생명을 지켜주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졸지에 카인과 아벨, 쌍둥이 아들 형제를 잃은 아담, 하와의 슬픔은 얼마나 컸겠는지요!
참으로 선악과를 따먹은 불순종의 죄의 결과가 얼마나 엄중한지 깨닫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부부에게 자비를 베풀어 “셋”이라는 아들을 주셨고, 다시 심기일전하여 새롭게 삶을 시작한 부부의 용기있는 삶이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카인만 무지한 게 아니라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논쟁하는 바리사이들 역시 무지합니다.
참으로 무지의 악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깨닫습니다.
무지의 질투와 분노로 인생을 망친 카인에 이어 복음의 바리사이들 역시 무지로 인해 예수님을 시험하여 불필요한 논쟁을 불러 일으킵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하늘의 표징들로 가득한 삶인데 새삼 무슨 표징이 필요하겠는지요!
무지에 눈먼 바리사이들의 참 어리석은 소행입니다.
이들이 참으로 지혜롭고 자기 품위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끝까지 인내하며, 열린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삶을 관상했을 것이고, 주님의 은총으로 하늘의 표징들로 가득찬 예수님 삶임을 알아챘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과 지체없이 초연히 이들을 떠나는 예수님의 단호한 분별의 지혜가 참 멋지고 우리에게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카인처럼, 바리사이들 역시 참된 회개가 필요한 이들입니다.
그러나 카인은 물론 이들에게는 회개가 없었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뒤늦게라도 이 말씀을 듣고 회개했어야 하는데 이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지극한 인내와 지혜롭고 품위있는 삶이, 또 외딴곳의 영성훈련이, 초연과 이탈, 회심의 훈련이 우리의 영적 삶에 얼마나 본질적이고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초연과 이탈의 정신으로 지혜롭고 품위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연중 제6주간 본기도가 참 은혜롭습니다.
하느님은 하늘 위에, 또 멀리 밖에 있는 분이 아니라, 바르고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안에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깊이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르 8,12)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마르 8,12) 계속되는 그들의 억지 요구에 예수님은 마음이 지치셨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손가락이 하는 일을 보려 하지 않고 자기들의 논리에 딱 들어맞는 표징만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그들 안에 와 있는데도 형식에 맞는지 규정에 맞는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이미 하느님이며 진리인 분이 세상 우리 가운데 오셔서 구원의 지평이 열리고 있는데, 바리사이들은 줄곧 전달 방식이나 매개체에 불과한 표징만을 보고 싶다고 생떼를 쓰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깊은 탄식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그래서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고 하십니다.
표징은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것이지 보여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느님을 조정하려는 나쁜 생각인 거죠.
어쩌면 예수님을 직접 접하고 구원을 체험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고 죄인인 이들은 더 이상 표징을 찾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소위 배웠다는 이들, 한자리 하는 이들, 구원의 열쇠를 쥐고 있는 듯 행세하는 이들, 율법 제도가 합당하다고 인정해 주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구미에 맞는 매개체가 필요한가 봅니다.
제도와 규율의 보호 속에 아직 구원이 절실하지 않을 수도 있고, 자기들이 규정한 잣대를 고수하고 싶을 수도 있겠지요.
예수님께서 급기야 그들을 두고 떠나십니다.
'그들을 버려두신 채 ... 가셨다.' (마르 8,13)
진심은 커녕 말도 통하지 않으니 떠나실 수밖에요.
떠나실 때 예수님 마음이 어떠셨을지 머물러 봅니다.
아마 우리같이 속 좁은 인간이라면 실망이나 무시, 분노, 앙심, 저주를 품을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그들을 구원에서 제외시키지 않기 위해, 그들도 하느님 나라를 위한 새 계약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당신의 완전한 희생제사를 준비하십니다.(마르 8,31 참조)
독서에서는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 그것도 친족 살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슬픈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놀랍게 다가온 사실은, 죄를 범해 하느님에게서 내쳐져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여전히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출산 후 "하느님의 도우심"(창세 4,1)을 칭송하고, 자녀들은 노동의 열매를 주님께 제물로 바칩니다.
에덴에서의 추방이 관계의 단절을 낳지 않고 여전히 주님과 끈끈히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당신이 만드시고 숨을 불어넣어 주신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지고지순한 사랑, 변치 않는 자애를 봅니다.
하느님과 카인과의 대화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마음은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깊은 탄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취조나 추궁, 단죄가 아니라 고통이 배어나는 신음에 가까운 슬픔의 물음이고 안쓰러움 가득한 위로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처럼 아우를 죽인 피로 더럽혀진 땅에서도 쫓겨나야 하는 신세가 되지만, 여전히 가죽옷, 카인의 표, 그리고 셋의 탄생은 아무리 죄인일지라도 연민과 자애로 돌보시는 하느님 사랑의 증거입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완고한 바리사이들을 잠시 내버려두고 떠나실망정, 결코 그들의 구원에서 관심을 거두지 않으실 겁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그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위한 봉헌이 될 것이니까요.
요즈음도 많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신이 어디 있어? 종교는 다 가짜야!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이용해서 신을 팔아먹는 장사꾼에 불과해! 정말 신이 있다면 표징을 보여줘 봐! 그라믄 한번 믿어볼까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이 온통 하느님의 표징들인데... 뭘 보여달라구?"
내가 살아 숨쉬는 것조차 기적이요, 내가 사랑하며 사는 것 자체가 기적이지요.
우리가 이렇게 만나 여기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 아닌가요?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제가 벗들과 이곳에서 만나 같이 살게 될 줄 꿈엔들 알았겠어요?
일상에 깔려있는 이런 수많은 기적들과 표징들을 못 본다면 그 어떤 거창한 표징이 내려도 절대 믿지 못할 테니까 그런 사람은 어떤 표징도 못 보게 될 겁니다.
여러분은 오늘 또 어떤 구원의 표징을 보게 될까요?
또 어떤 하느님의 선물들을 보고 감사드리게 될까요?
오늘 하루를 살면서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의 미소를 만나시길 축원합니다.
과연 기적이란 뭘까요?
기적은 이상한 현상이나 표징이 아니지요.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오는 기인열전 같은 게 아니지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특별하고도 별난 표징(Sign)을 좇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살아 숨쉬고 살아가는 생로병사의 인생 자체가 기적임을 깨달아야만 참신앙에 근접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인생은 기적덩어리입니다.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과 보살핌이 늘 나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아시나요?
그걸 알아야 내 인생이 소중해집니다.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임을, <성령의 궁전>임을 깨닫게 될 테니까요.
기적덩어리인 벗님의 인생을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면서 멀리서 특별한 이적이나 표징을 찾으려 하지 말고, 여러분 가까이에서 이미 그분께서 마련해 두신 그 고귀한 표징들을 찾아 보십시오.
그때 벗님은 하느님이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알게 될 것이고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리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후배 신부님들과 텍사스 끝자락에 있는 ‘엘파소’엘 다녀왔습니다.
뉴욕에서 직접 가는 비행기가 없어서 시카고에서 경유하였습니다.
엘파소에는 제가 30일 피정을 지도했던 신부님이 교포사목으로 왔습니다.
환영과 격려의 차원으로 방문했습니다.
이제 미국에 온지 1달이 조금 넘은 신부님은 멀리서 온 신부님들을 기쁘게 맞이했습니다.
이번 방문에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방을 정하면 제게 제일 좋은 방을 정해 주었습니다.
선배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그렇게 해 주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막 1달이 지났는데 후배 신부님은 마치 미국에서 오래 살았던 것처럼 익숙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모습이 짠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같이 간 신부님들은 모두 덕담을 해 주었습니다.
저는 ‘건강이 최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지내라고 해 주었습니다.
겨울에 온 신부님은 이제 엘파소의 모래폭풍과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온 몸으로 받아낼 것입니다.
따뜻하고 온유한 마음을 지닌 신부님은 하느님의 보살핌으로 건강하고 기쁘게 잘 지낼 수 있으리라 믿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평소에는 일찍 잠자리로 들어가지만 이렇게 후배 신부님들을 만날 때면 좀 더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북미주에서 사목하는 서울대교구 사제들의 모임이 1년에 한 번 있습니다.
그 모임을 주관하는 대표 신부님도 있습니다.
후배 신부님들은 명목상의 대표 신부님도 필요하지만 실질적으로 북미주에서 사목하는 사제들을 도와주는 대표 신부님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막 교포사목으로 미국에 온 신부님을 방문하고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격려해주는 대표가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신부님들이 휴가를 가면 대신 미사를 봉헌해 줄 수 있는 대표가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시골의 작은 도시에 있는 신부님들과 규모가 작은 성당의 신부님들의 고충도 들어주고, 함께 해 주는 대표가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한국에 있는 지구장 제도처럼 북미주에도 지구장 제도가 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신문사에 있기에 어차피 신문홍보를 다니기 때문에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과 열정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사랑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 동생 아담은 어디에 있느냐?”
카인은 하느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인류에게 하느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와 함께 살던 원주민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와 함께 살았던 생명들은 어디에 있느냐?”
카인은 동생을 죽였으면서도 발뺌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적반하장으로 하느님께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어쩌면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많은 생명을 제물로 삼았습니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무고한 원주민들의 삶을 파괴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카인처럼 적반하장으로 대답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그들을 지키고 보호해야 합니까?”
오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 기껏 구해 주었더니 마치 보따리 내 놓으라고 하는 형편입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처럼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이 표징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이 표징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이 표징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표징입니다.
이미 표징은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표징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보여주신 ‘표징’에 감사드리면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18세기 성인인 프랑스 아르스의 비안네 신부님은 매일 성당을 찾아오는 농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농부는 특별한 기도를 하지 않는 것 같은데, 평화로운 모습을 늘 오랫동안 성당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이 농부에게 신부님께서 물었습니다.
“형제님께서는 기도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도대체 성당에 몇 시간씩 앉아서 무엇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분을 보고, 그분은 저를 보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 행복해하지요.”
신부님께서는 이 대답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사실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대화라고 하면서, 늘 일방적이었습니다.
그냥 ‘나’만 말하기 바빴습니다.
심지어 그분을 보지도 않고 말이지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화를 나눈다면 어떨까요?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껴져서 대화를 그만둘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대화를 나눠야만 상대와의 사랑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연애 중인 연인은 하루 종일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같이 있으면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함과 기쁨을 체험합니다.
참 기도는 나의 일방적인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 즉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며 하느님과의 시선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과 사랑의 깊이가 더 생기고 그 안에서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앞선 농부처럼 말입니다.
서로 바라봐야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시는데, 우리는 과연 어디를 보고 있을까요?
혹시 입으로 하느님을 외치면서 다른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과 논쟁을 하면서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마귀를 쫓아내시고, 빵의 기적도 행하시고….
표징의 숫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늘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것만 바라보고 있으니 모든 것이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당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기도를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일방적인 말하기가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그래서 서로 행복한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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