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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을 아로새겨 눈에 넣는날 그대를 사랑하리다
가질수없는 것을 염원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그날
땅에서도 사랑할수 있는것을 찾을수 있는 그날엔
사랑하고 또 다시 사랑하야 입에 머금으리다 그대
한 입 가득하도록 달콤함이 전신에 불어넣어지면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이처럼 떨리라 감정을
하프의 줄을 모아넣어 타리라 천상을 위한 음악을
눈을 감아 그대를 볼수있는 날에 흘리고도 듣도록
떨어지고 떨어져 검게 변하더라도 사랑하리다 난
금지되었기에 그리고 그려 나 그대 이렇게 그리면
아롱져 얼룩지면 나는 사람들의 바다의 한가운데
서서 느끼리라 사무쳐 나를 녹이는 그 외로움들을
손 하나를 내밀어 점을 찍고 그 곳에서 선을 그려
향하는 오솔길을 굽이치도록 마음에 만들어본다면
나 가리라 드디어 핏빛 노을로 망설임 하나 없이도
흑단같은 머리가 밤에 스며들어 안개로 사라지면
이번엔 내가 모래를 뿌려 달빛에 반짝이게 하리다
단 한번도 느끼지 못한 갖지 못한 기다리는 마음을
외치고 외쳐 닿아 하늘에 나리지 않도록 붙잡으면
예의 그 미소로 햇빛보다 더 따듯하게 안아주도록
나 이번엔 망설임없이 다가가 속삭이리라 사랑을 -
초연과 사초의 이야기
부제:
The Immortals’ Chronicles (불사신들의 연대기)
Volume 1 발췌
…중략…
보았다.
봐버리고 말았다. 눈까지 마주쳐버렸다.
아직도 눈에 선명했다. 조각칼로 동공에 이미지를 새겨넣기라도 한듯 그 끔찍한 모습이 아른거려 도저히 잠들수 없었다. 그는 달
랐다. 너무나 달랐다.
피를 빨던 그 남자. 상황과는 전혀 걸맞지 않게, 내가 살면서 본 생명체 중에 가장 기품있는 자세로 몸을 굽혀, 황홀해하는 표정
의 희생자의 목에 입을 대고 흡혈을 하고 있던 그 남자.
한눈이면 척 알아볼수 있을 정도로 목에서 피를 심하게 뿜고있던 그 희생자는, 남자가 내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자마자 끔찍
한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었더랬지. 마치 마법이 풀려버린것처럼.
발버둥을 치고, 죽어가는 사슴같은 커다란 눈에 핏발이 서는데도 눈치조차 채지 못한듯 피가 뿜어져나오는 목을 부여잡고, 영혼
이 피에 잠겨가는 듯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는데.
피의 분수. 작은 입자들로 분해된 핏방울들이 공기를 갈랐고, 계절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얇은 그의 와이셔츠를 붉게 물들였지
만, 그는 관여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내가 물어왔지.
“누구십니까?”
정중한 말투. 흰자위만 드러내고 돼지 멱따는 소리를 거침없이 내고있는 반시체를 발에 둔 자에게서 나올수 없는 말투.
“저요?”
그리고 내 입에서 나온 바보같은 대답. 비현실적이었다. 너무나도. 원래 하얀 얼굴을 가진 그였겠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밝은 달빛
에 완연히 드러난 그의 얼굴은 정말이지 대리석보다도 더 희었다.
인간에게서 도저히 나올수없는 품위있는 미가 그에게서 풍겨져나왔다. 그 오라에 나는 숨마저 막힐것 같았다. 고작해봐야 20대 초
반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몇천년은 산것처럼 가라앉아있는 눈, 그리고 그 깊이와는 달리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
보고있는 남자. 아니, 흥미롭다는 눈빛이었을까?
“누구십니까?”
“저..저는..사초. 반사초..라고 합니다.”
빨려들어갈수밖에 없다라고 생각될 정도로 깊이를 가늠할수 없던 눈동자가, 순간 장난기를 띠었다. 동시에 남자는 재미있다는듯
이 피식 웃었다.
아, 남자가 원하던 답이 아니었구나.
그의 발치에서 아직도 피를 끝없이 내쏟고있던 희생자가 고통을 뚝뚝 떨구는 애절한 신음소리를 냈다. 목에 있는 구멍을 막고있다
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비정상적이게 큰 소리를 내질러대는 그 사람.
“잠시만 조용히 해주세요.”
남자가 나에게 말할때와는 전혀 다른 오라를 풍기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에 그를 보았던, 흡혈 중과 같은 분위기였다. 백화점 향수
코너보다 짙은 향기처럼, 그의 매혹적인 분위기가 공기를 가득 메워서 숨을 쉴수 없었다.
다시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 희생자는 황홀해하는 눈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히 죽음 직전의 고통을 겪고있을텐데도, 전혀 느
끼지 못하는게 분명했다. 목에서 손은 떼지 않았지만, 이제는 자기가 살기 위해 생존의 본능으로 피가 나오는것을 막는게 아니
라, 자신을 집어삼킬 맹수를 위해 살을 찌우는 초식동물마냥, 그가 다시 자기에게 돌아올때까지 한방울도 흘리지 않으려고 막는듯
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초라. 죽은 풀을 의미하는건가요?”
남자가 여전히 정중히 물어왔다.
“아, 네.”
“반사초라..죽은 풀이 아니라는 거군요, 그렇다면.”
질문이 아니었다. 그리고 맞았기에, 나는 가만히 있었다.
“잘 어울리네요. 요새들어 불리는 제 이름은 연이라고 합니다. 초 연. 이렇게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네, 저도..”
“지금 더 대화를 하고싶지만, 불행히도 저는 한달이나 식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가피할것 같네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인 상태에서 꾸벅, 인사를 하더니 자신의 사냥감을 다시 덮쳤다. 빠르다! 어느순간 내 앞에 서
있었는가하면, 다음 초에는 이미 다시 자신의 희생감의 목을 베어물고 있었다. 흡혈을 당하는 그 자는, 기다렸다는듯이 손을 떼
고 그의 이빨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소름이 끼치고도 남을 장면이건만, 이상하게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 모든 것에는 뭔가 숨겨진 미학이 있었다. 죽음이라고 불리기
엔 너무나도 고귀한 면이. 남자가 오른손을 공중에 들었다. 그의 희고 기다란 손가락이 우아하게 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중세시대
의 왕자들이 춤이 끝난 후 했을법한 손짓.
내가 갈 시간인것이다. 나는 조용히 그 곳을 빠져나왔다.
그것이 어젯밤이었다. 오늘 나는 그 초원으로 다시 가기로 결정했다. 그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남자는 두 손을 깍지낀채로 머리 뒤에 두고, 작은 풀들 사이에 누워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어제보다 얼굴에 조금이나마 혈색
이 돌았다. 자신의 피 때문은 아닐게 분명했으나,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사초. 와주셨군요.”
연이 작게 중얼거렸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갈고닦인 흑진주보다도 더 새까맣게 빛났다.
작게 고개를 꾸벅거린채 그의 옆에 주저앉았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미쳤냐고, 피가 빨리고 싶어서 그러냐고 하겠지만, 왠지 그
는 내 허락이 없다면 내 피를 건드리지 않을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흡혈을 할 예정이었다면 그 빠른 속도를 가진 몸으로 충분
히 어젯밤에도 덮칠수 있었으리라.
“어제가 보름달이라, 오늘은 조금 작아진게 보이죠?”
그에게서는 꿀처럼 단내가 나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목소리마저 부드럽게 들렸다. 보통 사람처럼 대화를 하는게 아니라 자장가
를 불러주는것 같았으나,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평안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 동시에, 아드레날린을 분비
시키는 능력도 있는것마냥.
“네, 하지만 전 그믐달이 좋아요.”
“어째서죠? 보통 사람들은 그믐달보다는 초승달을 좋아하는데요.”
남자가 흥미롭다는듯 깍지를 풀고 상체를 일으켜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분명 바람이 불지 않는것 같은데도 그의 머리카락들
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내 눈과 마주치자, 그가 어제처럼 장난스럽게 미소지었다.
“먹잇감을 유혹하는 맹수의 무기죠.”
내 마음을 읽은 듯 대답하는 연. 괜시리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도, 먹잇감인가요?”
아니라는것을 알면서도, 물어보았다.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거죠?”
그가 의외라는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긴 손가락들이 내 머리카락으로 뻗어와 매만졌다. 매끈한 그의 손가락과 매끈
한 내 머리카락이 만나, 소리 하나 없이 그 과정은 이루어졌다.
“저도 피가 있으니까요.”
“피가 있는것이라고 다 흡혈하는 뱀파이어는 아닙니다.”
뱀파이어. 그의 입에서 그 단어가 그렇게 쉽게 떨어질줄은 생각도 못했었는데.
“머리카락 색이 참 특이하네요. 사초는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 존재가 되었군요?”
“아마 맞을거예요.”
“그렇군요.”
우리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의 밤하늘보다 더 짙은 색의 눈이 내 머리카락에서 떠나지 못하는것을 눈치챘으면서도, 나는 아무말
도 하지 않았다. 나도 그에게 취해있었으니까.
“어째서 그믐달을 좋아하죠?”
“초승달은..조금 있으면 완성이 되어버리고, 그렇다면 성취감은 있겠지만, 그 클라이막스가 가고나면 곧 실망해버리니까요. 그믐
달은 여유가 있어보여요.”
“초연..해보인다는 말이군요.”
연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듯 다시 달을 올려다보았다.
“사초, 당신은 왜 나를 증오하지 않죠?”
“제가 왜 연을 증오해야하나요?”
“몇백년전에 사초 부류의 자를 하나 만났죠. 제게 악마라며 저주를 걸다시피 했었는데. 실패할걸 알면서도 저를 죽이려고 했었지
요.”
“우리가..지금 우리의 상태로 태어난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잖아요.”
“처음엔 정말 많은 고통에 휩싸였었죠. 한 사람을 죽일때마다 한번씩 자살 시도를 했지만, 이 몸은 너무 강했어요. 벼랑에서 떨어
져도, 불에 뛰어들어도, 절대 사라지지 않았었죠. 지금은 그런 시도는 포기했지만, 역시 한번 식사를 끝내고나면 고통스러워요. 몇
백년이 지난 지금에서도..그래서 제 주위 인물들이 초연해지라는 뜻으로 초연이라고 부르게 되었죠. 그래도 다른 뱀파이어들처
럼 일주일에 한번 식사하지는 않아요. 한달에 한번으로 참고 또 참죠. 살인하고 싶지 않은데..”
“이해한다고는 말할수 없어요. 우리들은 그 누구도 해쳐야할 이유도 없으니까요. 하지만..안타깝네요.”
진심이었다. 우리들 같은 자들은 햇빛과 공기, 물 이외에는 그 어느것에도 의존해야할 이유가 없었다. 몇백년의 광합성의 결과물
로 내 머리는 이제 짙은 초록색을 띄고 있었으니.
존재가 존재이니만큼, 대부분 우리들의 부류는 평화를 지지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눈에 띄지않는 공존을 지지했고, 소수
는 적극적인 평화를 지지했다고 하는것이 맞을것이다. 평화에도 적극적인것과 소극적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면 난 아직도 웃겼
다.
연의 눈이 슬퍼보였다. 그는 정말 살인을 증오하는듯했다. 내가 그를 처음 보았을때, 다른 뱀파이어들과는 너무나도 달라보인다
고 느낀것이 역시 맞았다. 일주일에 한번씩 흡혈하는 뱀파이어들은 피가 넘쳐나서,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더라도 보통 사람마냥 혈
색이 돌았고, 대신 눈은 새빨개서 언제나 렌즈를 끼어야만했다.
뱀파이어들이 낮에 나갈수 없다는것은 모두 거짓이다. 다만, 예전엔 렌즈가 없었기 때문에 눈을 감출수 없어 밤에 나갔던것 뿐이
다. 연의 눈은 새까만색이었고, 그의 피부는 첫눈보다도 더 새하얬다. 그가 불필요한 살인을 몇백년동안이나 참아왔는지 보여주
는 증거였다.
뱀파이어들이 피를 빨아야만 힘이 세지는것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반대였다. 그들은 피를 빨지 않을수록 힘이 세
졌다. 배가 고플때 희생자들을 더 세게 잡아야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뱀파이어들은 힘을 사용했기 때문에 다른 무기들이 필요하
지 않았다. 희생자들을 꼬여낼 필요도, 구슬릴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연과는 매우 달랐다. 얼굴이 빼어나지도 않았고, 좋은 향기가 저절로 풍겨나오지도 않았다. 연은 힘을 사용하지 않
는 과정에서 다른, 희생자들을 고통없이 죽일수있는, 나름대로 최선의 자비스러운 방법을 자신도 모르게 습득하게 된 것이었
다. 그는 내가 죽였던 그 어느 뱀파이어들과도 달랐다.
연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사초.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그렇다면 나는 당신의 먹잇감입니까?”
사지가 굳어버렸다. 그는 알고 있었던것이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날 죽이지 않았다. 어째서? 그 속도라면 나를 충분히 죽이고
도 남았을텐데?
우리 부류의 왕족같은 존재인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 종족 중에 가장 강하고 빠른 자들을 골라 뱀파이어 킬러들로 육성했
고, 세계 평화라는 명목 아래에 그들을 무차별하게 살인했다. 몇백년전 유럽의 흑사병으로 인해 급격하게 늘어난 뱀파이어 인구
를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세계에서 뱀파이어를 죽일수 있는건 우리뿐이었고, 현재는 세계에 백명도 되지않는 숫자의 뱀파이어만
이 남아있었다. 물론 우리들의 숫자도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남은 뱀파이어들 중에 가장 센 자들의 하나가 연이었고, 남은 식물인간들 중 가장 센 자들의 하나 역시 나였다. 이번 내 미션의 목
표는 그의 죽음이었다. 설령 그것의 실패가 내 죽음의 연유가 된다하더라도.
“알면서도 왜 날 죽이지 않았죠?”
“사초, 내가 기억나지 않나요?”
문득 어젯밤 그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분명히 “이렇게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라고 했었는데..
뱀파이어들은 인간이었을때의 일을 기억하는 반면, 우리 부류들은 살던 당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말 그대로 우리는 다시 태
어나는것이다. 나 역시 기억이 없었다. 내가 인간이었을당시 연을 알았다는것인가?
“기억나지 않아요..미안해요.”
“그게 더 괜찮을거예요.”
“어째서죠?”
“절 죽이지 않으면 사초는 돌아가서 회복할수 없는 벌을 받겠지요?”
“아..”
“햇빛이 하나 들어오지 않는 방에 사초를 가두어놓고 조금씩 말라죽어가도록 방치할 생각이잖아요, 그들은? 미안해요. 나도 그
땐 뱀파이어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 왕족이 그렇게 변해버릴줄 몰랐으니까..하지만, 뱀파이어로 바꾸면 안된다는것쯤
은 알 정도로 살았었으니까..사초를 그대로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어요.”
“우리는..어떤 관계였나요?”
목소리가 떨려왔다. 내가 다른 식물인간들처럼 특이한 재능이 있는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특히 빠르고 강했던 것은, 나는 다
른 식물인간들과는 달리 인간의 생을 완전히 마치기 전에 식물인간으로 변환되었기 때문이라고 스승님께 들었었다.
식물인간들의 대부분이 평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식물 특유의 습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시체가 된 상태에서 돌연변
이 DNA로 인해 식물인간으로 변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삶과 인사한 사이니, 대부분은 마음의 평화가 보존된 상태로 변환되는것이
었다. 물론, 육식 식물의 DNA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어느날 문가에 죽기 일보직전의 상태로 놓여있었다고 했다. 피에 잔뜩 적셔진채. 지금은 뱀파이어를 죽이는 미션에 나갔다
가 도리어 돌아가신 스승님이, 그때 나를 변환시키도록 약을 주사해주었다고 들었다.
혼자서는 걸어올수 없는 상황, 나를 두고 간 그 누군가가 누굴까 언제나 궁금했었는데..식물인간들은 평화를 추구했지만 자신들
의 비밀이 누설되는것은 용납하지 못했다. 식물인간들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었다면 그런것도 알았을텐데, 그 위험을 무릅쓰면
서 나를 데려다놓은 누군가가 어떤 사람일지 매일 밤 궁금해왔었는데..어젯밤을 제외하고는.
그런데 그게, 연이었다니.
“사랑하는 사이였어요.”
연이 말했다. 그의 태도는 초연한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긴 손가락들이 애꿎은 풀들을 잡아뜯으려했으나, 뱀파이어 특유
의 힘에 의해 인간처럼 쥐어뜯는것은 불가능했기에, 그가 풀을 잡는 순간 풀들은 바스라져 재처럼 땅 위에 힘없이 쌓였다.
“지금은 의학이 발달해서 쉽게 고칠수도 있겠지만, 그땐 그런게 없었어요. 모두들 사초가 죽는다고 말했었죠. 납득할수 없었어
요, 나는. 내가 사초를 물면 사초는 살겠지만, 그게 사는걸까요? 나 그리고, 사초가 살인하면서 나처럼 괴로워하는 모습은 볼수 없
었어요. 그렇다고 죽게 내버려둘수도 없었죠. 내 이기적인 맘도 한몫 했어요. 뱀파이어들은 영생의 존재죠. 하지만 사초는 너무
나 일찍 사라져버릴 거였잖아요. 더군다나 예상보다도 더 일찍..영생하는 존재 중에 살인하지 않아도 되는 이들은 내가 알기로
는 식물인간들밖에 없었어요.”
“나는..살아있을때 어땠어요?”
연이 빙긋 웃었다.
“지금처럼 겁이 없었고, 그믐달을 좋아했고, 그때도 내 얼굴보다는 내 머리카락에 더 관심이 많았죠. 바람이 불고 있지 않은데
도 어떻게 그렇게 움직일수 있냐고.”
그가 내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고, 한숨을 낮게 쉬었다. 그의 향에 온 정신이 마비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를 내려다보니, 그
는 그 비정상적으로 미적인 얼굴을 잔뜩 내 어깨에 비비고 있었다. 왠지 그의 품위있는 멋과는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행동이라, 저
절로 웃음이 나왔다.
“뱀파이어들에겐 어느정도의 예지력이 주어진다는것을 알고있겠지요, 사초?”
연이 나른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는 숨을 쉬지 않아도 됨에도 불구하고, 새근새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넥타이 없는 그의 와이
셔츠 가슴 부분이 그가 숨을 쉴때마다 약간씩 움직였는데, 그럴때마다 소나무인지 라일락인지 알수없는 새로운 향이 내 얼굴
로 훅, 하고 다가왔다.
“알고 있어요.”
“곧 있으면 뱀파이어들과 식물인간들은대대적인 전쟁을 벌일것이고, 그 둘은 생존자 없이 모두 멸망할거예요.”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 영생의 존재들은 유한한 삶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 비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큰데도 불구하고. 유한
한 삶을 가진 이들은 무한을 꿈꾸었지만, 무한을 가진 자들은 무한을 가짐으로 인해 오히려 영혼이라는, 정말 무한한 존재를 포기
한것이 되었을까봐 무한을 두려워했다. 그들에게 있어 무한을 가질수 있는 방법이란 끝까지 그것을 살아내는것 뿐이었다.
연이 말을 이었다. 해도되지 않는 호흡이 괜히 찢어진듯 들려왔으나, 곧 그것은 가라앉았다. 이미 계획한지 오래된 일인듯 했다.
“난 사초를 싸울 자신이 없어요. 그렇다고 다른 식물인간들이 내 몸에 손을 대는 것은 싫어요. 아무리 살인을 싫어한다고해도, 나
에게도 뱀파이어의 본능이 살아있고, 식물인간들에 대한 반사적인 거부감이 있으니까요. 그러니 사초, 당신이 나를 죽여주세요.”
그가 내 어깨에 기대놓았던 자신의 고개를 들어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결연한 의지가 비치는 동시에, 슬픔이 그의 새까만 눈
을 가득 채우고도 넘쳐 흘러내렸다.
“…”
입이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몇백년동안 대가뭄이 있을때 몇번을 제외하고는 겪어보지 못한 느낌이라 당황스러웠다. 입에 습
기가 없을리가 없는데도, 왜 입이 떨어지지 않는것일까.
“그러려고 왔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그래도 입도, 손도, 무엇도 움직이지 못했다. 바보같이. 그가 단호했던 말투를 다시금 느슨하게 풀고, 나른한 말투
로 말을 이었다.
“우리 둘 다 도망치면 좋겠지만, 몇천년이고 개발되온 라이벌 의식이 우리들 몸에선 잠들지 않겠죠.”
아닌게 아니라, 뱀파이어들과 식물인간들은 모든 면에서 타고난 천적들이었다. 보통은 그럴 이유조차 없기 때문에 상관이 없었지
만, 몇시간을 함께 있게 된다면, 뱀파이어들에게서 피어오르는 피의 향은 공기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식물인간들에게는 치명적
인 양으로 스며들어 죽이게 된다. 반대로, 식물인간들의 입에서 호흡할때마다 나오는 독특한 산소 역시, 죽음을 흡입하고 사는 그
들에게는 독이 될수 있는것이다. 약 두시간이 흐르면 양쪽 모두 죽게 되어있었다. 그래서 뱀파이어들과 식물인간들사이엔 대대적
인 전투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연과 도망칠수 없었다. 사랑하는 자라고 해도, 몸은 전혀 상관없이 연을 죽이기 위해 몸부림을 칠테니. 잠들지 않는 본능, 저주받
을 종족갈등. 사랑에 국경이 없다는 말이 인간들 사이에선 유명했으나, 우리에겐 상상일수밖에 없었다.
연을 사랑했던 기억이 없다면, 다시 사랑을 시작할수도 있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아니 뱀파이어는, 종족이 어떻든간
에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도 있는데다 나를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해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랑스러웠다. 사랑할 수 있었다. 아
니, 이미 사랑하는것 같았다. 다시 한번. 그 짧은 시간동안에도.
“죽여주세요, 사초. 난 어떤 식으로든 사초를 해하고 싶지 않아요. 나를 죽인다면 분명히 식물인간 왕가에서는 당신에게 전쟁참
여 면제권을 내려줄거예요. 이렇게 큰 미션을 성공하면 보수를 받는것이 당연한것이잖아요?”
연의 눈이 기묘하게 빛났다. 마치 별빛 안에 숨겨진, 다른 더 밝고 강한 빛이 숨겨져있는것 마냥.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선, 알
수 없는 희망과 슬픔이 적절히 어우러져 물 속에 넣어놓은 수채화같은 느낌을 풍겼다.
순간 고개를 강하게 저어야만 했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지난것이다. 연의 한없는 단내가 어느새 미약하게나마 따갑게 느껴지
기 시작했다. 연 역시 미묘한 차이로, 조금 더 늦게 자신의 눈을 비볐다. 뱀파이어들은 눈을 비비는것 같은 인간적인 행위는 하
지 않는다. 분명 내 숨결 역시 그를 죽이기 시작한것이리라.
“벌써 시작되어버렸네요. 사초, 아프지 않나요?”
그가 중얼거리며 순식간에 초원 저 멀리로 후퇴해버렸다. 초자연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는 우리들이기에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
가 되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떨어지는게 아쉬웠다. 가지말아요, 연.
뱀파이어를 이렇게 믿어도 되는것일까. 그가 지금 말하는 말들이 모두 진실일까. 그의 눈을 보면 이렇게 의심하고 있다는 자체
가 죄처럼 느껴졌지만, 식물인간들의 뱀파이어에 대한 경계심은 죽지않고 내 속에서 끓어올랐다. 아직은 이성이 지배하고 있었지
만, 연의 혈향(血香)이 나를 더욱 마비시킨다면 내 손으로 연을 죽여버릴지도 몰랐다. 내 감정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누군가를 마
주할수 없다는것이 슬펐다. 연은 지금 저만큼 멀리 떨어져있지만, 이렇게 뛰어난 후각으로는 별 소용이 없는것이다. 해봤자 몇분
을 더 늦출수 있을까.
“싫어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튀어나와버렸다. 다급히 손으로 방정맞은 입을 가려보려 애썼지만, 이미 연은 뱀파이어의 청각으로 들어
버린 이후였다. 그는 한걸음씩 더욱 더 후퇴하던 걸음을 바로 경직시키고, 굳어진채 나를 노려보았다.
“왜죠? 왜요 사초? 날 죽이러 왔잖아요? 죽여요.”
그의 돌연 변해버린 태도에 움찔했지만, 나는 기왕 말한거 끝까지 밀고 나가기로 했다.
“연, 당신은 뱀파이어잖아요? 그럼 내가 당신을 죽이러 올것도 알았을텐데, 왜 피하지 않았죠? 죽고 싶어서인가요? 날 사랑했다면
서요. 그럼 우리 어떻게 해서든 같이 있어야 할 방법을 찾아야하는게 아닌가요?”
“없다는걸 알잖아, 사초!”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순간 그가 서 있는 초원 멀리에서, 그의 얼굴가에 무언가가 반짝 빛났다가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여름
의 장마처럼.
“없어. 난 몇백년동안 생각을 해봤지만, 없어. 너도 알잖아? 내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사랑했던 기억도 모두 잊어버리고 살
았을거잖아! 죽음을 빨아야만 사는 더러운 뱀파이어들을 죽이고, 그러면서 힘에 도취해 썩어빠지는 식물인간들 사이에서 살았겠
지?”
“말이 심해요, 연.”
“행복하라고, 그래서 놔줬는데, 그래서였는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변해버렸지? 식물인간들이 요새 어떤지 알아? 왜 요새 뱀파이
어들의 숫자가 예전만큼 빨리 줄어들지 않는지 아냐고!”
그의 정중한 말투는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가 화를 내면 낼수록, 그의 발치에 있는 풀들이 정확한 반경의 원을 그리며 죽어나가
기 시작했다. 알수 없을만치 미세히 흔들리던 그의 머리카락들이 거세게 나부끼고, 그의 눈이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까만 눈만 몇
백년동안 가지고 살아오던 연이기에, 그의 눈은 적응하지 못하고 피눈물을 진주처럼 매달기 시작했다. 어젯밤 섭취한 사람의 피
일 거란 생각에 내 식물인간들의 본능에 의해 조종당하는 부분들이 강렬한 분노로 떨렸다.
“계약을 맺었어. 그 더러운 녀석들이 살인만 하고 사는 뱀파이어들과 계약을 맺었다고. 겉으로는 평화로운 척 하면서, 뒤로는 뱀파
이어들보다 더 많은 숫자의 인간들을 죽여나가고 있어. 왜냐고? 식물 DNA만 가지고는 왕가의 권위를 유지해나갈수 없다는걸 아
니까. 피를 섭취하면 육식식물들처럼 점점 강해지지. 못 느꼈어? 왜 요새 왕족들이 궁전에 사초를 오랫동안 들이지 않는지, 그 피
비린내를 너무 짧은 시간이라 다 느끼지 못했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그가 더욱 더 분에 찬 소리를 내질렀다. 그의 목소리에 깃들어있던 부드러움도, 그 무엇도 사라져버렸
다. 뱀파이어들 특유의 쇳소리가 나기 시작하며, 내 청각을 자극했다. 이성과는 달리 내 눈 역시 초록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이 느껴
졌다.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일초에도 몇백번이나 반복하며, 그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조금만 있으면 앞으로 뛰쳐나갈것만 같았
다.
“곧 식물인간들도 모두 흡혈하게 할 생각이야. 반항하는 자가 있다면 말려죽여버릴 생각이라고. 내가 어떻게 그렇게 사초가 처참
히 죽어가도록 내버려둘수 있어?”
지나친 분노에 의해 그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그의 송곳니가 튀어나오는 순간, 나 역시 이성을 잃었다. 강렬한 태풍에 고목
나무가 쓰러지는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순식간에 초원을 가로질러 그에게로 내리뛰었다.
‘안돼, 안돼!’
속으로 외쳤지만, 이미 내 몸은 내 통제하에 있지 않았다. 연은 충분히 도망칠 시간이 있었음에도, 그 분노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
를 지키고 서서 나를 결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히려 그 미소 속에는 계획된 일의 성공을 지켜보는 자의 승리감과 성취감마저 어
려있었다.
연이 이것을 계획했다! 멈춰줘 제발!
파악.
단단한 나무가 바위에서 몇백년을 머무르다, 드디어 바위를 부순 듯한 소리가 났다. 내 팔..내 팔이 연의 심장을 관통하고, 그
의 등 뒤로까지 빠져나와 있었다. 다른 뱀파이어들을 죽일 때와는 달리 피가 강처럼 흘러나오지 않고, 방울방울 아롱져 내 팔을 타
고 흘러내렸다. 바닥에 고인 웅덩이에는 연의 모습이 반사되지 않아, 내가 허공에 팔을 뻗고있는듯 비춰졌다. 제 할일을 다한 식물
인간의 본능은 언제 그랬냐는듯 제자리로 얄밉게 들어가버렸다.
“사초, 잘했어요.”
그가 칭찬했다. 죽어가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그의 입에서는 단내가 났고, 송곳니는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으며, 눈빛 또한 예의 까
만빛을 띄고 있었다. 그의 분노는 조절된 것이었다. 이것을 오래 계획한 자의 계획된 움직임.
뱀파이어에게는 독이 될 식물인간의 체향이 그의 심장으로 바로 관통해버렸다. 그는 잠시 꿰뚫려진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다
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미소짓는 그의 모습을, 나는 불사신들의 특유의, 영원히 잊지 못하는 기억의 한켠에 아로새겼
다.
죽어가는 그의 눈에 얼핏 희망이 스쳐지나갔다. 그가 할수있는한 최대로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사초, 곧 우리는..”
스르륵.
그러나 채 말도 끝내지 못한채 그는 축 늘어져버렸다. 초연. 그가 죽었다. 내가 살았을때도, 죽었을때도 사랑할수밖에 없었던 그
가 나로 인해 죽어버렸다.
“연? 장난치지 말고, 어서 일어나요.”
그의 심장에서 다시 팔을 뽑으면 그가 아파할까봐 빼지도 못하고, 그를 어색한 각도로 지탱한채 살며시 흔들었지만, 그는 일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벌써 조금씩 새파래지기 시작한 눈꺼풀 아래로 울지도 못하고 있는 나 대신, 아까 채 떨어지지 못했
던 피눈물 한방울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그것은 그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내 팔에 당연스럽다는듯이 자리를 잡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흡수되지 않은채 방울진채로 내 팔
에 올려져있었다.
“왜요, 왜 먼저 가요, 누군 혼자서 계속 살고 싶은줄 알아요? 일어나요. 일어나요, 빨리!”
응답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를 아직도 기묘한 각도로 안은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팔을 빨리 빼야한다는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는다면 나 역시 곧 죽어버릴테니까. 그러나 식물인간의 본능이 차고 들어오지 않
았고, 그러길 원하지도 않았다. 왜일까,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억지로 날 이끌었던 본능이 지금은 이렇게 잠잠한 이유가..?
팔에 올려져있던 연의 눈물방울. 여태 한번도 일어나본 적없는 일. 뱀파이어가 자신의 천적을 위해 흘린 눈물방울. 그것때문임
이 분명하리라..
곧 일어날 식물인간들과 뱀파이어 사이의 세력싸움. 피를 섭취하기 시작한 식물인간들로 인해 인간들에게 들키지 않고 죽일수 있
는 양이 모잘라지기 때문일 것이다.
살인을 싫어하던 이상한 뱀파이어, 초연. 나를 죽이기보다는 스스로 죽기를 결정한 뱀파이어. 내가 인간일때도 목숨을 걸고 사랑
했고, 인간으로서의 생을 마친 후에도 결국엔 다시 빠져버린 뱀파이어.
내가, 혼자서 다시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그의 혈향은 내 팔을 타고 스며들었다. 물 대신 피를 흡수하는 식물처럼, 숙인 내 어깨를 뒤에서부
터 감싸 흘러내리는 긴 생머리가 붉게 물들어가는것이 보였다.
죽어가고 있구나. 점점 나른해져왔다.
죽기 싫다면 지금 멈추어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딱히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이미 죽어있는 몸이기에 피가 흘러나
가버린 연의 몸은 벌써부터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져있었다.
재미있지, 연?
우린 죽어가는 순간에서야 함께 할수 있으니 말이야. 서로 닮아가고 있어. 생전엔 그러지 못했던것처럼. 우리의 처음 만남부터.
연의 혈향이 머리카락을 타고, 두피를 통해 내 몸으로 깊숙히 침투했다. 몇백년동안 물에만 익숙해진 혈관 속에서 끈적거리고 농
축된 뱀파이어의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피가, 내 피가 시작되는 정점, 심장에 도달한 순간, 나 역시 연의 몸 위로 낙화처럼 무너져내렸다.
연의 핏방울 속에 섞인 기억들이 내 머리를 잠식해가는것이 아프도록 감미로웠다. 연의 향처럼, 연의 눈빛처럼.
우리들의 죽음처럼.
- 몇백년전
“그런게 어딨어! 치사해!”
사초는 볼을 잔뜩 부풀린채 초인적인 속도로 자신의 주변을 뛰어다니고 있는 연을 뾰로통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팔짱을 끼
고 고개를 치켜드는것이 모든걸 해결해주기라도 할것처럼 퉁명스럽게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에 연이 웃었다.
“아아 왜!”
“나도 그렇게 빨리 달려보고 싶단 말이야. 불공평해!”
“얼른 나으면 되잖아.”
“힘든거 알잖아.”
사초는 분위기가 어두워지지 않도록 억지로 울음을 몸 속으로 다시 구겨넣었다. 연이 자신을 즐겁게 해주려고 춤추듯, 몸에 벌써
부터 배인 고풍스런 움직임으로 달리고 있다는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동시에, 의사가 더 이상 자신이 할수 있는 일
은 없다고 지난 밤에 말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연이 자신의 옆에 있을때는 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재능, 즉 인간이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해주는 재주를 썼기 때문
에 아픈 티를 내지 않고 웃을수 있었지만, 그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다시 눈도 뜨지 못할 정도로 죽어가는 몸으로 돌변해버렸
다. 그를 처음 만났을때와는 너무나 달라진 자신의 몸이 원망스러워 하늘에 항의라도 해보고싶었으나, 달라질 것이 없다는걸 알았
다.
“나도 뱀파이어였으면 좋겠어. 그럼 너처럼 건강하게 움직일수 있을텐데.”
연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으나, 나이에 걸맞지 않게 채 젖살마저 다 빠지지 않은 사초의 얼굴을 보더니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
다. 아직 신출인 그는 모르고 있었다. 사초가 아파 보이지 않는것이 순전히 자신의 일시적인 영향 때문이라는것을. 연은 금방 사초
가 나을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니가 뱀파이어가 되면, 아마 세상에 있는 다른 뱀파이어들이 다 웃을거야.”
“왜!”
“넌 아마 피가 징그럽다고 손가락으로 사람들을 툭툭 건들여보고는 인상만 찌푸릴테니까!”
“그게 뭐가 잘못됐어! 피는 싫은걸 어떡해. 넌 그걸 어떻게 마시는지 모르겠어.”
“걱정마.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렇게 살지 않도록 해줄테니까.”
“하지만..”
사초의 표정에 잔뜩 여름날의 어두운 그림자처럼 그늘이 졌다.
“뱀파이어들은 평생 살수 있고, 인간들은 아닌걸..”
연이 달리는 것을 멈추고 사초의 옆에 앉았다. 아직 피를 마시는것을 완벽히 조절할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조심스
레 거리를 조절했다.
“걱정마. 우린 영원히 사랑할수 있을테니까.”
아직 몇십년 먹지 않은 신출내기 뱀파이어 연의 머리에, 아직 다 자리잡지 않은 미래의 영상이 흐릿하게 지나갔다. 그는 왠지 자신
과 사초가 손잡고 걷고 있는 곳 위가 구름이라고 생각했지만, 말도 안된다고 치부해버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이지?”
“그럼.”
아직은 어떻게 그렇게 할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라는 말을 목으로 가시 삼키듯 아프게 넘기며 연은 사초를 바라보았다.
“키스해줘.”
사초가 연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연은 몰랐으나, 사초는 자신의 몸 속에서 끓어오르는 죽음의 기를 벌써 느끼고 있었다.
“안되는거 알잖아. 나 그러다 못 참아서 물어버리면 어떡하려고 해.”
“그래도 해줘. 마지막 부탁이야.”
평소와는 다른 사초의 표정에 연은 자신도 모르게 사초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사초에게서 나는 인간의 피 냄새 때문에 그는 사초
의 침대틀을 거세게 잡았다. 그의 입술이 사초의 입술에 닿는 순간 압력에 이기지 못하고 나무가 부서지면서 미세한 가루가 되
어, 폭죽처럼 그들의 머리위에서 공기의 움직임과 함께 춤을 추었다.
그들의 첫키스이자 첫 접촉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연은 자신의 입 속으로 직접적으로 전해져오는 그녀의 숨결에서 죽음을 느꼈다. 죽음에 가까워있는 자신의 희생
자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저절로 생긴 그의 재능이 사초에게도 자동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그제서야 그는 알았다.
차가운 뱀파이어의 입술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은 사초는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 서서히 어두워져오는 햇빛이 들어오
는 창문을 등지고, 연은 자신의 재능 때문에 아픔에 몸부림치지 않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사초를 내려다보았다.
주먹을 세게 쥐고, 뱀파이어라는 이유 때문에 나오지 못하는 눈물 대신에 핏방울을 흘리며 연은 몇시간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했
다. 사초의 죽음은 연에서 비롯된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연의 재능에도 한계가 있었다.
밤이 다가오면서 사초는 점점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고, 연과 함께 이 세상에 남기 위해 밀려오는 죽음의 파도에서 빠져나오기 위
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연은 그의 눈에서 쏟아져내리는 핏방울들로 그녀의 옷을 적시며 정신없이 그
녀를 안아들고 어디론가 빠르게 향하기 시작했다.
그 날, 사초는 건강해졌으나, 연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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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백년 후, 햇빛이 가득한 사초의 방에서 이루어졌던 연의 예지이자 약속은 진실이 되어 둘을 찾아왔다.
첫댓글 오! 대단히 감동적인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슬프다 잘 읽었어요.
그래도 해피엔딩이니까요 !
해피엔딩..이라...... 너무 슬픈데요.. ㅠㅠ
Deathrasher님 오랜만에 뵙네요 . 반갑습니다 .
잘 읽었습니다. 온새미로님 단편은 슬플 때가 많아요. 그건 그렇고, '반사초'라 죽은 풀은 아니라는 내용을 보고, '헛, 안 죽는 풀이라 이름이 '불사초'였으면 엄청 깼겠는데?'하고 혼자 웃는 수퍼였습니다. ㅋㅋ
앗 . . . 곽문규와 같은 이치였나요 ? ㅋㅋ
아하하, 고영락도 비슷한 이치라는 걸 살짜기 귀띰해 드리죠. ㅋㅋ
기대기대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