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둘 다 3월12일 직무정지 당했다"
광해군과 노무현은 닮은 꼴? 인터넷에 떠도는 '광해군 괴담'
기사전송 기사프린트 지용민(hanfan) 기자
최근 인터넷을 통해 '광해군 괴담'이 떠돌고 있다. '다음 카페'를 비롯해 인터넷 게시판에는 광해군과 노무현 대통령을 비교하는 출처 불명의 글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거대야당에 의해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된 지 일주일째, 조선왕조 비운의 임금이었던 '광해군'과 노무현 대통령과의 유사성을 조목조목 비교해 보는 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집권 과정과 집권 후 모습, 그리고 반대파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난 것까지 노무현 대통령과 조선왕조 비운의 임금 '광해군'과 유사점이 많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네티즌이 상당수다.
'광해군 괴담'을 보는 네티즌의 관심사는 그 결말에 쏠려 있다. 유사점이 많은 노 대통령이 개혁의 군주였다가 신하들에 의해 쫓겨나는 광해군의 전철을 밟을 것인지, 아니면 기적적으로 회생해 성공한 개혁군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을 것인지 탄핵정국의 긴장은 점점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다음은 네티즌들이 비교하고 있는 광해군과 노 대통령의 공통점들을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검증한 것이다.
1. 비주류 출신 : 왕실의 서자 - 상고 출신의 재야 변호사
광해군의 아버지는 '선조'였다. 선조에게는 뿌리깊은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바로 '방계승통(傍系承統)'이 그것이었다.
조선의 임금이란 자리는 '장자' 즉 큰아들의 몫이었다. 성리학이 지배이념으로 확실히 자리잡은 이후에는 '적장자 승계'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으로 인식됐다. 명종은 몸이 약했으며 슬하에 아들을 두지 못했다.
명종이 갑작스레 승하하자 장자도 아니었고, 차자도 아니었고 백번 양보해 '직계'도 아니었던 선조가 '방계'로 보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선조의 정비에게서도 아들이 없었다. 광해군은 후궁의 아들, 그것도 둘째였다.
노무현 대통령의 뿌리깊은 콤플렉스는 '상고 출신'이란 대목이다. 그의 상대였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메인스트림'을 들고 나왔을 정도로 노 대통령은 철저히 비주류였던 것이다.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2001년 2월, 언론사 세무조사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는 노무현 장관을 향해 당시 최병렬 의원이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 평상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진리를 보는 태도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후,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던 최병렬 대표의 주도로 노 대통령은 '직무정지' 당하게 된다.
2. '권좌', 기적적으로 쟁취하다
아마 임진왜란이 없었더라면 광해군은 보위에 오르지 못했을지 모른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당시, 40세를 넘긴 선조는 전쟁이 터지자 부랴부랴 후궁의 아들, 그것도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그리고 피난의 길을 떠난다. 세자로 책봉되기 전에 광해군은 민가에서 생활했다. 그러다 전쟁 중에 왕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서둘러 세자로 책봉된다. 이때 광해군의 나이 18세였다.
왕은 경복궁을 버려둔 채 몇몇 신료들만을 데리고 북으로 도망쳤다. 다급했던 선조는 '분조(分朝)'를 명한 뒤 세자 광해군에게 왜구격퇴의 책무를 맡긴다. 분조란, 조정을 둘로 나눈다는 의미다. 북으로 간 선조 대신 광해군은 의병을 모집해 전쟁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이회창 대세론'을 여론조사 만년 2위였던 이인제로는 꺾을 수 없었다. 민주당은 답답했고, 반이회창 정서가 가득했던 호남민심 또한 답답하기만 했다. 이때, '광주의 기적'으로 '노풍'이 불기 시작했다. '단 한 장의 필승카드' 노무현이 있었다.
노풍은 국민경선 내내 지속됐다. 노 후보의 갑작스런 부상은 기적과도 같았고 그 때문에 이인제 후보측은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만일 이회창이라는 거대한 상대가 없었더라면 노 후보에게 기회가 주어졌을까? 드라마틱한 경선을 통해 후보로 선출된 노무현.
그 뒤 자질론 등에 의해 지지율은 곤두박질치게 되고, 월드컵 붐을 타고 대권에 뛰어든 정몽준으로 인해 동료들로부터 '후보 사퇴' 압력을 받기에 이르렀다.
3. 비주류의 비애 : '세자로 인정 못해' - '후보로 인정 못해'
임진왜란으로 큰 공을 세운 광해군에게 선조는 큰 빚을 졌다. 공식적으로 보위를 이양해줄 절차를 밟게 되는데 명나라에 '세자 옹립'을 고하게 된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를 거부한다. 당시 명나라 역시 후계를 정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선의 세자로 후궁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인정할 수 없었다.
선조는 1592년부터 1604년까지 다섯 차례의 책봉 주청사를 북경에 보냈다. 명은 매번 거부했고 비록 임진왜란의 무공이 뛰어난 광해군이었지만 지위는 흔들리게 된다. 이 무렵, 선조는 새로운 정비를 맞게 되고 영창대군이라는 아들을 얻게 된다. 이때부터, 조정은 영창대군 지지 세력과 광해군 지지 세력 사이의 암투가 시작된다.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들 파문, 이른바 '홍삼파문'이 확대 일로를 걸을 무렵, '단 한 장의 필승카드'로 선택됐던 노무현에 대한 인기는 점차 그 빛이 바래져 갔다. 여론시장을 장악하는 메이저 언론과 척을 진 노무현 후보로서는 노풍을 재점화시키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이때, 민주당 내에서는 당시 인기를 몰아가던 정몽준을 영입해 후보를 바꿔야 한다는 '후단협'이 점차 기세를 잡아가고 있었다. 노무현으로서는 위기에 몰린 셈이었다. 자신들의 후보를 자신들이 인정할 수 없다는 세력에 의해 둘러싸인 노 후보, 그는 위기에 봉착했다.
4. 두 사람의 지향점 : '개혁 군주' - '개혁 대통령'
갑작스레 선조가 승하하자 세자였던 광해군이 보위를 이었다. 광해군은 왜란 후 피폐해진 조선의 국력과 경제력을 다시 일으키는 등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한 군주였다. 특히 그는 명·청교체기의 상황을 잘 활용하여 국가의 실리를 추구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혁혁한 공과를 세운 북인세력과 손을 잡았다. 왕권 주도로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대동법'을 전격 실시하였고 훼손된 궁궐을 재건하여 왕실의 위엄을 세우려 했다. 역병이 도는 등 질병이 난무하던 때 '동의보감'을 출판시켰다.
광해군은 7년 동안의 전쟁으로 국토가 피폐해진 상태에서, 또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라는 상황에서 국가 재건의 기틀을 잡아 나간 임금이었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들이 자신을 선택한 이유를 '변화와 개혁'으로 인식했다. 개혁을 통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국민들에게 여러 번 약속했다. 그는 대통령이 행사할 수 있는 큰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준다며 '검찰 개혁'을 필두로 국정원 개혁 등에 나섰다. 권력에 로비하는 사람은 공개적으로 '패가망신'하도록 만들겠다고 엄포까지 놨다. 탈권위적인 행보를 의도적으로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최측근 및 친형이 검찰에 구속·조사 받는 처지를 지켜봐야 했지만 '불법정치자금 수사'라는 전대미문의 검찰독립을 이끌어내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중대한 전기 역시 마련했다는 평도 듣고 있다.
5. '인조반정'의 세 가지 명분 - '탄핵'의 세 가지 명분
서인세력이 인조반정을 일으키며 명분으로 내건 사유는 세 가지로 요약됐다. 마찬가지로 거대야당이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하며 내건 사유 역시 세 가지였다. 그런데 역사가와 헌법학자들은 입을 모아 세 가지 사유가 각기 반정·탄핵사유로는 불분명한 것이라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먼저 서인세력이 내건 반정사유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재조지은'을 입은 명나라를 등지고 후금에 호의적이었다.
② '폐모살제 -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위시켰다.
③ 무리한 궁궐 공사로 인해 민생이 피폐해졌다.
조선에게 명나라는 '법'과 같은 존재였다. 국혼, 세자 책봉 등 국가 중대사가 있을 적마다 명에 사신을 보내 알리고 허락을 받았다. 그런 명을 등지고 '중립외교'를 폈다 함은 지금으로 따지면 대통령이 '법'을 위반한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두 번째 사유였던 '폐모살제'는 배 다른 동생이었던 영창대군과 새어머니였던 인목대비를 각각 죽이거나, 폐위시켰던 것인데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것은 왕의 '비리' 사실로 치부되었다.
마지막, 무리한 궁궐 공사 등으로 민생이 피폐해졌다 함은 오늘날로 치면 경제 파탄, 민생 파탄에 해당할 것이다.
한-민 연합으로 지칭되는 거대야당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발의하며 명분으로 내건 사유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①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법을 위반하였다.
② 노 대통령의 측근비리 등이 심했다
③ 노 대통령이 경제를 제대로 이끌지 못해, 민생이 피폐해졌다.
우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탄핵사유가 되지 못한다는 의견이 중론이다. 첫 번째 사유 역시 명백한 위법사유였는지에 대한 선관위의 유권해석이 분명치 않고, 설령 위법을 했어도 탄핵사유까지 되는가는 의견이 엇갈린다. 다수의 헌법학자들은 탄핵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보이고 있다.
6. 1623년 3월 12일 - 2004년 3월 12일
인조반정이 일어난 때는 1623년 3월 12일이었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이 2004년 3월 12일이었다. 두 사람은 연도는 달리 했지만 각기 3월 12일에 직무가 정지됐다. 광해군은 영원히 정지됐고 노 대통령에게는 아직 기회가 남아 있다.
광해군 시대 대북파에 밀려 소외당했던 서인세력들은 1천명의 병력(이중 실제 병사 수는 400명이었으며 나머지는 무장도 제대로 안된 사람들이었다)을 동원해 강제로 왕위를 찬탈했다. 왕을 상대로 한 반정의 규모치고는 적은 수에 해당한다.
같은 선상에서 해석할 수는 없겠지만 수적인 측면만을 놓고 볼 때 대통령을 탄핵시킨 국회의원의 수는 193명이었다. 이 당시 국민 다수가 탄핵에 반대하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적은 수가 국가를 뒤흔든 또 다른 예라 할 수 있다.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난 뒤 강화도 등지를 떠돌다가 제주도에 유배됐다. 그곳에서도 모진 목숨을 19년간이나 더 연명하다 기구한 일생을 마쳤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노무현 대통령의 끝은 아직 '만들어 가는 중'이다. 결말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과연 당대 '비주류'로 시작해서 최고 권좌에 올랐던 두 사람의 결말이 동일할 것인지, 아니면 노 대통령이 현재의 위기에서 기적적으로 회생해 일부 외신에서 예상하듯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될지, 역사는 지금 헌법재판소를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