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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 사역자였던 위트니스 리의 출애굽기 생명공과 중에서 율법에 관한 부분의 메시지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읽어보시면 좋습니다.
메시지 55 -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그분과 하나 됨 (2)
◈ 성경 : 창세기 1:26, 예레미야 31:3, 32, 2:2, 요한복음 3:29, 마태복음 9:15, 에베소서 5:25-27, 고린도후서 11:2, 계시록 19:7, 요한복음 21:15-17, 고린도후서 5:14-15, 요한복음 14:21, 23, 아가서 1:2-4
이 메시지는 앞의 메시지의 연속이다.
Ⅱ. 사람과 하나님의 로맨스
A. 배필을 얻으실 목적으로 사람을 창조하심
역대로 하나님은 사람과 로맨스를 가지셨다. 하나님은 배필을 얻으실 목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사람을 창조하신 그분의 의도는 주로 종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을 순수하게 색안경을 쓰지 않고 읽는다면,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배필을 얻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전사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이시다. 사랑하는 자이신 그분은 그분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는 그분이 사람을, 그분을 사랑하도록 창조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원 가운데 하나님은 혼자이셨다. 우리는 심지어 그분이 외로우셨다고 말할 수도 있다. 사랑에 대한 그분의 바램은 천사들에 의해서 채워질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분의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분은 사람이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이렇게 해서, 그분의 배필로 창조된 인류와 하나님 사이에 서로 사랑의 관계가 있을 것이다.
B. 이스라엘을 그분의 배우자로 택하심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분의 배우자로 택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예레미야 31장 3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분은 그들과 「데이트」하셨고, 후에는 그들에게 구혼까지 하셨다. 에스겔서 16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보셨을 때 사랑했다. 8절은 이 사랑을 묘사하고 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스러운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우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로 내게 속하게 하였었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하심으로써 약혼하셨다.
예레미야 2장 2절에서도 이 언약을 말씀한다. 이 언약은, 『네 소녀 때의 우의와 네 약혼 때의 사랑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좇았음을 내가 너를 위하여 기억하노라』(원문 참조). 이 구절은 그 언약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데리고 나온 후에 광야에서 행하여졌음을 알려준다. 출애굽기 1장부터 19장까지는 이스라엘의 유년기였다. 주께서는 이스라엘의 유년기의 우의와 약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셨다. 나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실지로 하나님을 사랑했는가 궁금했다. 이 구절에서 주님은 사랑하는 이에게 구혼하는 데 실패했을 때 스스로 용기를 가지기 위해 자신을 격려하는 청년 같았다. 그러한 청년은 사랑하는 이가 단지 그를 쳐다보기만 해도 틀림없이 용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출애굽기의 처음 열 아홉 장의 어디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약혼 때의 사랑을 볼 수 있는가? 어디에서 그와 같은 배우자의 사랑을 볼 수 있는가?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예레미야 2장 2절에서 주님은 이스라엘의 약혼 때의 사랑과 유년기의 우의를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내가 보기에는 이스라엘이 주님께 그렇게 친근하거나 정중하거나 공손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예레미야에서 그분은 이스라엘의 유년 때의 우의를 기억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그 표현들은 예레미야 2장 2절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셨는가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눈이 멀으셨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분은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한 백성, 즉 이스라엘 자손을 그분의 배우자로 택하셨다.
C. 신부를 위한 신랑으로 오심
주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은 신부를 위한 신랑으로 오셨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침례자 요한의 선포를 알고 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그러나 요한이 또한 주 예수를 신랑으로 언급했다는 것은 그렇게 많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요한복음 3장 29절에서 그는,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부활에 관한 장(요 3:3-9)에 포함되어 있다. 부활의 목적은 신랑을 위한 신부를 만들고 예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신부를 취할 자이시니, 그분은 신랑이시라.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셨을 때,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세주와 구원자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랑이 되기 위해 오셨다.
마태복음 9장 15절에서 주 예수님은 그분 자신을 신랑으로 언급하셨다. 금식에 관하여 물었던 눈먼 종교인들에게 주께서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요한의 제자들에 의해 제기된 질문에 관하여 주께서는 그분 자신을 신부를 취하기 위해 오신 신랑으로 나타내셨다. 종교인들의 눈은 그리스도께서 신랑으로 오셨다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우리의 눈이 신랑으로 오신 주를 보기 위해 열려져야 한다.
D. 그분의 신부가 되도록 교회를 거듭나게 하심
주 예수께서는 그분의 신부가 되도록 교회를 거듭나게 하셨다(요 3:3, 5, 29-30). 주님은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을 가지신 신랑이시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신부가 된다면, 우리도 또한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을 가질 것임에 틀림없다. 이를 위해, 거듭남은 필수적이다. 이러한 생명과 본성을 떠나서는 결코 그리스도의 동반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우리는 거듭남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오직 신성한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분의 신성한 본성을 받은 후에라야 죄인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소유하신 그분은 너무도 높고, 우리는 너무도 낮다.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배필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오로지 거듭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거듭남을 통해서 또 다른 생명, 즉 신성한 생명을 받을 수 있다. 이 생명 안에서, 이 생명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배필이 될 수 있고 그분과 짝지어질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다.
E. 그분이 구속하신 자들, 즉 그분의 아내와 결혼하심
이 시대의 마지막에, 그리스도는 그의 구속자들과 결혼하여 그들을 그분의 아내로 취하기 위해 오실 것이다(계 19:7). 현 시대는 「데이트하는」 구혼의 시대, 즉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간의 약혼 시대이다. 이 시대의 마지막날에, 영광스러운 결혼식 날이 올 것이며, 그때에 그리스도는 그분의 구속된 자들과 결혼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받은 자들과의 이러한 결혼에 대한 계시가 성경의 중요 계시이다.
F. 영원토록 결혼 생활을 누리심
성경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영원 속에서 영원히 그분의 백성과 결혼 생활을 누리시리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영원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예루살렘이 어린 양의 아내가 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로맨스의 완성이다.
Ⅲ. 성경 전체가 신성한 로맨스임
성경 전체가 하나의 신성한 로맨스이다. 이것은 성경이 매우 로맨틱한 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특히 아가서에서 그러하다. 어떤 현대주의자들은 아가서가 성경에 포함되어야 하는지를 의심한다. 심지어 몇몇 온당한 그리스도인 교사조차도 이 책에 관해 의심을 가졌었다. 나는 젊었을 때 왜 성경에 한 남녀의 로맨스와 관련된 책이 있는가를 이상하게 여겼었다. 이 책은 우리와 그리스도의 사랑의 관계를 묘사한다.
아가서에 의하면, 주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매우 로맨틱해야 한다. 만일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로맨스가 없다면, 우리는 로맨틱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종교적인 그리스도인들이다. 내가 의미하는 로맨스가 무엇인지를 알기 원한다면, 아가서를 기도로 읽어 보라. 이 책을 기도로 읽을 때, 당신은 주님과 로맨틱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그분에 대한 사랑에 미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신성한 로맨스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더욱더 로맨틱하게 되어야만 한다.
A. 하나님과 사람의 「데이트」로 가득함
신성한 로맨스인 성경은 하나님의 구애와 사람과의 데이트가 가득한 기록이다. 반복해서,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사람에게 나타나신다. 여기에 대한 두 가지 예가 있다. 첫 번째 예는 하나님이 벧엘에서 야곱에게 오신 것(창 28:10-22)이고 두 번째 예는 호렙 산에서 모세에게 하나님이 오신 것이다.
B.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구혼으로 가득함
성경은 또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구혼으로 가득하다. 한 청년이 어느 여자에 대해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는 구혼하게 되고, 그녀를 성가시게 할 지경으로 구혼한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우리 사람에게 구혼하심으로 우리를 괴롭히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그분의 백성에 대한 구혼을 기록한다. 신약에서 우리는 주 예수께서 그분의 제자들을 부를 때 그들에게 구혼하고 계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주 예수님은 반복해서 이러한 구혼의 방식으로 베드로를 괴롭히셨다. 베드로가 주님께 온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주님이 오셨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주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15절). 주님께서는 두 번 더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16, 17절). 베드로에게 이같은 질문을 하심으로 주 예수께서는 그에게 구혼을 하고 계셨다. 그분은 베드로가, 부모님을 존경하는 아이나 다른 친구를 관심하는 친구나 불쌍한 사람을 가엽게 여기는 부자처럼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그분을 감동적인 사랑, 즉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위한 한 젊은 여자의 감동적인 사랑과 같은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셨다.
우리는 요한복음 21장과 3장을 따로 떼어 읽어서는 안 된다. 만일 베드로가 그분을 사랑했다면, 그에게 물으신 그분은 신부를 취하기 위해 오신 바로 그 신랑이셨다. 요한복음 3장에서 신랑으로 오신 주 예수에 대한 계시에 근거할 때, 21장에서 그분의 베드로와의 대화는 구혼의 방식으로 되었음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14장 21절과 23절에서도 주님의 말씀은 동일하다. 21절에서 주님은,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그분이 사랑으로써 신부에게 언급하신 말씀이다. 그것은 약속과 구혼의 말씀이다. 23절에서 주님께서는 계속하여,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와 아들이 주 예수를 사랑하는 자와 함께 거처를 만드는 것은 결혼 생활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언급이다. 주 예수와 거처를 같이하는 것은 그분의 배우자로서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그분의 신부와 함께 친교를 나누는 신랑에 관한 것을 자주 언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말씀의 이러한 측면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인식은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게 해왔다. 그러므로 나는 그분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구혼에 관한 이 말이 우리의 관념을 변화시키기를 원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그분이 우리와 데이트하시고 구혼하신 것이다.
C. 옛 언약과 새 언약이 다 결혼 언약임
앞의 메시지에서, 우리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이 다 결혼 언약 즉 약혼임을 지적했다.
1. 이렇게 언급된 구약 전체
구약 전체가 약혼의 방식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 이유는 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스겔서, 호세아서 등 모두가 그분의 아내인 그분의 백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의 백성은 그분과 이혼하려고까지 했지만, 주님은 그들을 다시 그분에게로 데려오셨다. 그분은 그들이 다시 그분과 약혼하기를 원하셨다. 호세아 2장 19절-20절에서 약혼에 관한 말이 사용된 것을 살펴보라. 『내가 너에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이 구절들에서 주님께서는 장가든다는 단어를 세 번 사용하셨다. 이 미래 시제는 이것이 그분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두 번째 약혼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혼한 아내가 여기에서 다시 그녀의 남편인 주님께로 돌아온다. 이것은 옛 언약이 배우자를 삼는, 즉 약혼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알려준다.
2. 이런 방식으로 주어진 율법
우리가 지적해 왔듯이, 율법은 약혼증서 즉 약혼계약의 방식으로 주어졌다. 하나님은 산 위에서 그분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그들과 약혼 중이셨다.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그분은 그들을 분발시켜 그분을 사랑하기를 구하고 계셨고 그분 외에는 사랑하는 것이 없기를 구하셨다.
3. 이런 방식으로 쓰여진 신약 전체
신약 전체가 로맨스와 구혼의 방식으로 쓰여졌다. 마태복음에서는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언급한다. 계시록에서는 어린 양의 결혼에 대해 언급하고 어린 양의 아내인 새 예루살렘의 계시로 결론짓는다. 더욱이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해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에게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라고 말함으로 동일한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이 남편인 그리스도에게 교회를 중매하고 있음을 깨달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다음,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엡 5:25) 그들의 아내를 사랑하라고 남편들에게 권하면서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므로, 신약 전체가 로맨스의 분위기로 쓰여졌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구혼하는 자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사랑 즉 그분의 배우자이다. 결국, 신약의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의 결혼이 있다.
4.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구혼하는 말씀임
성경 전체가 그분의 구혼하는 말씀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을 찾고 계신다는 것을 발견한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분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분은 베드로의 애정 넘치는 사랑을 구하면서 그에게 구혼하신 것이다. 전체적으로 성경은 그러한 신성한 구혼의 말씀이다.
5. 하나님의 구혼하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감응하는 애정어린 사랑
하나님의 구혼하시는 말씀을 간직하려면 그분에게 감응하는 애정어린 사랑이 필요하다. 베드로는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도록 요구받았다. 또한 바울도 그러한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도록 강권함을 받았다(고후 5:14-15). 모든 믿는이들이 이렇게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요 14:21, 23).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이렇게 감응하는 애정어린 사랑이 아가서에서 묘사되고 있다. 아가서는 사랑하는 자와 그분의 사랑 사이의 사랑을 묘사하고 있다(아 1:2-4).
Ⅳ. 그분과 하나 됨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
앞의 메시지에서, 우리는 그분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에 관해 지적했다. 더욱이 우리는 그분과 하나 됨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다. 그러한 하나 됨은 율법이 하나의 약혼 증서, 즉 약혼 언약이라는 사실에 연관된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표는 아내가 그녀의 남편과 하나 됨과 같이 그분의 선택한 백성을 그분과 하나로 만드는 것이었다. 율법은 그들 안에 그분의 요소를 넣어주어 그들을 하나님 안으로 인도하여 생명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하나되도록 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의 생명과 본성 안에서의 결합은 창세기 2장 18절-24절에서 아담과 하와의 예표로 묘사된다. 이러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생명과 본성과 표현에서 그분과 하나 된 자들에 의해서만 지켜질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진실로 성경은 구혼의 책이고, 우리의 하나님은 구혼하는 하나님이시다. 어떤 이는 하나님이 구혼하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이 구혼하는 분이심을 나타낸다.
많은 복음성가들이 주님의 부름에 관해 이야기하고, 많은 설교자들이 믿는이들을 가리켜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분 자신께로 죄인들을 부르심은 그들에게 구혼하시는 것이다. 그분의 부르심은 그분이 구하는 백성을 구원받게 할 뿐만 아니라 애정어린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신부가 되도록 하는 그분의 구혼이다.
아가서가 성경에 포함된 것은 주님의 주권이다. 소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몇몇 사람들은 아가서를 신성한 책으로 보지 않고 성경에 포함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아가서는 가장 신성한 책이다. 이 책에서 추구하는 자는,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6:3)고 말한다. 만일 우리에게 아가서가 없었다면 주님과 우리의 관계에 관한 그러한 표현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것 그는 나의 것』이라는 후렴이 있는 찬송가가 있다. 이것은 아가서에 대한 말이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분이 주인으로서 우리를 그분의 하인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는 주종 관계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애정 관계이다. 아가서는 지금까지 쓰여진 책 중에서 가장 로맨틱한 책이다. 이 책은 하나님과 그분의 택하신 백성과의 사랑 관계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와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의 결혼 생활에 대한 묘사를 나타낸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 메시지의 주제가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사랑함으로 율법을 지켜 그분과 하나 되는 것임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은 아내가 남편을 사랑함과 같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우리가 반복해서 지적했듯이,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구혼하시는 것이다. 율법은 약혼 계약으로 주어졌으므로 우리는 율법을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하나 되는 것과 분리해서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몇몇 기독교 교사들은 신약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포기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진리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구속과 함께 율법의 내용이 성경 전체의 알맹이로 여겨질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의 율법에 관하여, 신약은 십계명의 내용과 본질적으로 같다. 예를 들어, 성경 전체에서는 우리가 참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신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분 외에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서 하나님의 질투를 언급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 정결한 처녀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유일무이하신 애인이 되셔야 한다. 이것은 십계명뿐 아니라 전 성경을 통해서 가르치시는 것이다.
성경 전체가, 우리가 우상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십계명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성경 전체가 주님의 이름을 합당하게 사용하는 것을 가르치며 망령되이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반복하지만 이 십계명은 율법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원칙적으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관련된 네 번째 계명까지도 율법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신,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이 그분께 속하는 표시로 기념일을 가졌다. 옛 창조에 있어서, 그 날은 안식일, 즉 주(週)의 일곱째 날이었다. 그러나 새 창조에 있어서, 그것은 여덟째 날, 즉 주(週)의 첫째날인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이다.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인 우리의 기념일은 여덟째 날이지 더 이상 일곱째 날이 아니다. 새 창조 안에 있는 우리에게 그 날은 변했지만,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천년왕국 동안 회복된 인류가 계속 일곱째 날을 준수할 것이다(사 66:23).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안식교도들은 믿는이들이 이 시대에도 계속 안식일을 준수해야 한다고 논쟁한다. 그러나 다가오는 천년왕국에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거듭난 백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회복되고 보존된, 아직 거듭나지 못한 인류에 의해 지켜질 것이다. 비록 그들이 창조때의 사람의 상태로 회복되더라도, 그들은 부활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일곱째 날의 백성이 되는 반면에, 우리는 여덟째날의 백성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경우에나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주님께 분별되는 표시로 특별한 날이 있음을 가르친다.
우리는 앞의 네 계명들이 다음 책들에서 계속 지지되어 왔음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나머지 여섯 계명들, 즉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치 말고, 간음치 말며, 도둑질하지 말며, 거짓 증거자가 되지 말며, 남의 것을 탐내지 마는 것 등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우리가 율법을 버린다면 성경 전체를 저버리는 것이다.
율법을 버리지는 않더라도 율법을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않도록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부분적인 율법과 전체로서의 성경이 다 합당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의 접촉 없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율법을 오용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과의 접촉 없이 성경에 접근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오용할 것이다. 유대교도들은 하나님과의 접촉 없이 율법을 이루려는 노력을 함으로써 오류를 범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하나 됨으로써 그분의 율법을 지키는 배필이 되지 못했다. 원칙적으로,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한 실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지만 주님 자신과의 접촉 없이 그렇게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의 지식을 가르칠 때, 그들로 하여금 말씀 가운데서 그분을 접촉하라고 격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남용하고 오용하는 오늘날의 유대교도들이 된다.
주의 회복 가운데 있는 우리는 기도로 말씀 읽는 것을 귀히 여긴다. 우리는 산 방식으로 그분을 접촉함 없이 성경을 읽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기도나 주님을 접촉하는 것을 떠나 성경을 읽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말씀 가운데서 주님을 접촉한다면, 우리의 체험 가운데서 실지적으로 그분과 하나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의 배필이 될 것이다.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그분과 하나 됨으로, 심지어는 우리가 그분의 사랑이 됨으로, 그분의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 공급이 될 것이다. 율법은 그분의 말씀의 압축이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친근하게 그분을 접촉할 때마다, 우리는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으로 공급된다. 이런 생명으로 우리는 성장하고, 그분의 표현이 되고, 그분의 어떠하심과 일치되는 삶을 산다.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율법과 그분의 말씀과 일치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는 합당한 길이다.
첫댓글 ",,,우리의 기념일은 여덟째 날이지 더 이상 일곱째 날이 아니다. 새 창조 안에 있는 우리에게 그 날은 변했지만,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천년왕국 동안 회복된 인류가 계속 일곱째 날을 준수할 것이다(사 66:23).?/,,,,이것은 인간논리일뿐이지요 성경으로 근거하지못하는 논리이지요.. 그리고 . 앞뒤가 안맞는 논리입니다 . 원칙은 안변한다고하면서 날짜는 변하고? 또 천국에서는 다시 일곱째날을 지킨다고?하니 >////술취한 자의 소리 같이 들립니다
글쎄요, 술취한 자의 소리 같다고 말한다는 것은 술취한 상태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으로 여겨도 되겠지요? 술취한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안다면, 깨어 있는 상태에 대해서도 알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또한 술취한 자가 자신이 술취해서 정신이 없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정신은 멀쩡하다고들 하지요. 그리고, 길이 일어선다고 하고, 자신이 쓰러지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지요. 술취한 자는 자신의 감각이 마비되어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술취한 자는 한가지 말이나 행동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지요. 술취한 자는 두려움이 없는자이기도 합니다. 술취한 자는 자신 이외의 모든 자가 취했다합니다.
아래글도 사단의 소리가 분명합니다 " 다가오는 천년왕국에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거듭난 백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회복되고 보존된, 아직 거듭나지 못한 인류에 의해 지켜질 것이다?/...도대체 말도안되는 소리이지요? 거듭나지 못한자가 어떻게 천국에 갈것이며? 또 하나님의 계명을 어떻게 지킬수 있나요? ,,,이런 엉터리같은 소리는 ,,,머리 털나고 이분에게 처음듣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위트니스 리'답습니다. 아주 훌륭한 글로 포장하여 아주 훌륭하게 사기를 치고 있는 걸 봐서는 말입니다. 거참~ 안식일 예긴 왜 꺼 냈을꼬? ....한 열흘 뒤에 좀 촉촉히 따저 봐야 겠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언급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시는군요. 안식일이 유독 어떤 특별한 무리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가요?
지방교회의 대표 사역자 위트니스리의 오류와 문제점이 잘 나타난 자료라고 봅니다
발췌하여 올린주신 jason님께 감사합니다 이곳에 오시는 사람들에게 교육자료가 될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원, 천만에 말씀을, 읽어보시고 여러 가르침에 대하여 다시 연구를 하십사하는 뜻으로 올렸습니다. 내 생각과 내 관점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며 마치 중세 암흑기의 십자군 전쟁때의 관념과 상황에 흡사한 것입니다. 모두가 열린 마음으로 성경에 대한 여러 각도의 관점을 수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눈이 앞에만 있기에 앞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나와 등을 대고 있는 자가 나의 뒷방향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모든 방향을 동시에 다 보지 못한다는 것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9절-29절: 그러면 율법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율법은 범죄들로 인하여 주께서 더하신 것이요, 천사들을 시켜 한 중재자의 손에서 정하신 것으로 약속을 받은 그 씨가 오실 때까지 있을 것이라. 이제 중재자라 함은 하나만의 중재자가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드를 거스르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이는 만일 주께서 능히 생명을 줄 수 있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진실로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았을 것임이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어 두었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하심이라. 그러나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붙잡혀서 나중에 계시될 믿음이 오기까지 갇혀 있었느니라.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믿음이 온 뒤에는 우리가 더 이상 훈육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음이요,
또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음이라.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으니 이는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씨요, 약속에 따른 상속자니라.
jason님은 이곳에서 안식일방에서 다시 율법과 복음과의 상관관계를 검토하십시오 아직도 초보의 도만 주장하고 고상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어떤 주장이 초보이고 고상한 것인지는 판단하지 않겠지만, 자신의 것만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집하는 것은 그다지 고상해 보이질 않는군요.
그리고 입으로만 율법지키자!라고하는,,, 위트니스리의 교묘한 거짓논리를 듣지 마십시오
입으로만 율법을 지키자라고 하는 건지 아닌지 어찌그리 판단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