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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요하강 (8) 1917년 러시아 혁명 발생 무렵의 만주상황
러시아 적백내전 발생 전의 곽송령
곽송령 선생은 광서 9년(1883년) 오늘날의 요령성 심양시 동릉구 심정자진 어초촌에서 태어났으며, 당나라의 유명한 장군인 곽자의의 후손을 자처했다고 합니다.
광서 29년(1903년), 곽송령 동남쪽 장왕촌의 서원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여기서 곽송령은 몇 가지 새로운 지식 분야를 접합니다.
그러나 1904년경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는 학교를 그만둬야만 했습니다.
한숙수, 곽송령
광서 31년(1905년) 가을, 성경장군이었던 조이손이 봉천 대북관에 봉천육군소학당을 설립하였고, 곽송령은 봉천육군소학에 입학하였습니다.
(※청나라 말엽에 무과제도가 폐지되고 각성에 설치되기 시작했던 육군소학은 대개 3년 과정이고, 육군중학은 2년 과정이었으며, 군관학교는 대게 2년 과정이었다. 나중에 육군 소학과 육군중학은 폐지되었고 일반 중학교 졸업생들로부터도 군관학교 입학생을 선발한다. 잦은 전쟁으로 하급 장교와 병사는 항상 부족하였고 군관학교는 단기과정이나 속성과정도 많았다.
청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정식 육군사관학교에 해당되는) 보정육군군관학교도 중화민국 시기 폐교된 후 군벌들에 의해 단기 교육기관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광서 32년(1906년), 곽송령은 봉천육군속성학당에 입학하였습니다.
이곳에서 곽송령은 (중국 혁명단체인)동맹회의 일원인 방성도를 만나고 그에게서 민주혁명적 사상을 접하게 됩니다.
광서 33년(1907년), 곽송령은 봉천육군속성학당을 우등으로 졸업하였습니다.
(※곽송령은 그 무렵 혼란한 만주 사정상 속성으로 군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속성학당의 교육기간은 단기간이었다.)
견습 기간이 끝난 후 그는 성경장군 아문의 위대 초장이 되었다.
곽송령은 군대를 잘 이끌고 부지런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동3성의 육군 통령으로 일하고 있던 주경란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때부터 곽송령과 주경란은 긴밀한 상관-부하 관계를 형성하였고 곽송령은 주경란을 오랫동안 따라 다녔습니다.
선통 원년 (1909년), 곽송령은 주경란을 따라 사천성 성도의 주방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선통 2년(1910년), 곽송령은 방승도와 엽전(1879~1939. 국민혁명군 고위간부 역임) 의 소개로 신군 동맹회에 가입하여 동맹회의 초기 멤버중 한명이 되었습니다.
선통 3년(1911년) 사천성에서 보로운동이 일어나자 사천의 (혁명단체)동맹회는 보로운동 동지들을 이용해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성도를 포위했습니다.
제68표 제2영 영장(대대장)으로 진급했던 곽송령은 성도 북부의 수비를 책임지고 정중하게 군중을 설득하여 유혈충돌 없이 포위를 풀었습니다.
사천성 총독 조이풍(1845~1911)은 비적과 내통하고 협력했다는 혐의로 곽송령을 영장(대대장) 직위에서 해임하였지만, 주경란의 간청에 따라 곽송령은 복직할 수 있었습니다.
무창(武昌)봉기(신해혁명) 이후 청나라는 망하고, 사천성 각지는 차례로 독립을 하였으며, 성도에 대한사천군정부가 수립되고, 주경란이 부도독을 맡았다.
사천성 출신 장군들은 현지 군대를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주경란과 객가 출신 장수들은 사천을 떠나야 했습니다.
주경란(1874~1941. 중국의 정치인, 반일운동가)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곽송령도 발을 붙이지 못하고 사직하여 고향 봉천(오늘날의 심양)으로 돌아 왔습니다.
주경란 선생은 누구인가?
(※주경란 : 중국의 군인, 정치가로
1874년 절강성에서 태어났다.
1904년 만주지방의 성경장군(조선시대 명칭은 일명 ‘봉천사또’)이 된 조이손을 따라 동북에 와서 군무를 도왔다.
1906년 동북에서 고위직 장령인 통령이 되어 보병 기병 포병 등 8개 영(대대)를 통솔하고 심양에 주둔하여 (성경)장군부의 친병으로 삼았다.
주경란
1912년 청나라가 망한 후 중국의 실권자가 된 원세개에 의해 임시 총통군사고문에 초빙되었다.
이 무렵 흑룡강성 도독 송소렴이 문인으로 군대에 익숙하지 않자, 북경정부 육군부는 주경란을 흑룡강성 독군서 참모장으로 파견하였다. 송소렴이 사임하고 주경란이 대리도독이 되었다. 1913년 10월 흑룡강성 호군사 겸 민정장(관)이 되었다.
1916년 광동성 성장이 되었다.
1917년 7월경 선통제가 일시 복벽하였다.
1919년경부터~1921년 11월경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 볼셰비키가 러시아 적백내전에서 승기를 잡기 위한 한가지 방법으로, 갑자기 ‘경자 배상금을 포기하고, 만주 동청철도를 중국에 반환하겠다’고 입으로는 선언하자 중국측에서는 이것을 실제로 믿는 사람도 많았다.
1921년 만주의 친일파 장작림은 자칭 ‘동삼성 자치 보안총사령’이 되었고, 러시아 내전과 일제의 만주 동청철도·간도출병·시베리아 침략(일본 역사학계의 용어는 ‘시베리아 출병’ 혹은 ‘간도 토벌’)으로 황폐화되고 있는 만주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보경안민’을 내걸고 인재를 초빙했다.
호로군 총사령에 취임
원세개 사망 후 중국의 실력자중 한명인 손문의 추천으로 장작림은 주경란을 1922년 10월경 만주 동청철도 호로군 총사령에 임명하였고, 4개 여단을 지휘토록 하여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의) 중국령 수분하부터 만주리까지의 철도 연변에 주둔시켰다.
1922년 12월경 만주 동3성 의회연합회는 중동로(동청철도) 연선을 스스로 동3성 특별행정구로 지정하고 특별행정장관이 구내의 군경, 외교, 사법, 재경, 교육 등의 모든 기관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주경란이 특별행정구장관이 되었다.
동청철도(중동로 철도) 위치
주경란은 러시아 내전 백파 러시아군이 중동로 철도를 이용해 볼셰비키와 싸우는 것을 막기 위해 중러 국경에 계엄을 (입으로는) 선포한다.
이 무렵 러시아 적백내전에서 볼셰비키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일제는 재빠르게 볼셰비키와의 교섭에 나서면서 국경지역 조선 독립군 무장해제, 사할린주 할양, 연해주 일대 괴뢰국가 건국 등을 몽상하고, 백파계 러시아인들의 일본 망명에는 매우 인색하였다.
(※물론 일뽕에 환장하는 러시아인들의 일본 망명은 당연히 허용되었다.)
만주로 대거 망명한 백파 러시아인들이 중러 국경에서 분쟁을 일으키자 일부 무장해제를 단행하고,
일부는 혼세마왕 장종창 등의 친일군벌 군대로도 편입되었고, 러시아인들과 백파는 만주에 일시 거주하거나 소련, 호주, 미국, 필리핀, 상해 등지로의 이주를 허용했다.
이후 일제의 굳건한 지원으로 만주의 제왕이 된 장작림은 북경정부(북양정부)의 조곤을 버리고 직접 대표를 볼셰비키에 파견하여 중동로 철도 문제 등을 협상하였다.
주경란은 장작림 일파와 협조해 만주 중동로 철도 특구내 철도 공동관리권과 산림자원 관리권을 회복하였고 영국과 일본 제국주의자의 간섭을 배격하려 하였다.
동시에 송화강과 아무르강의 항해권 회복에 노력하였다. 또한 주경란은 하르빈의 도시 건설과 민생사업에도 기여하였다.
중국최대의 곡창중 하나인 만주 흑토지대. 압록강 중류의 집안현 환도산성은 흑토지대가 아니다.
1931년 9.18사변 무렵 항일 활동 지원에 나섰고 상해의 19로군도 지원했다. 일설에 의하면 조선인들도 지원하였다.
1941년 서안에서 사망했다.)
곽송령이 봉천으로 돌아온 후 장용(1884~1912. 만주족 출신. 조이손(1844~1927)과 장작림에 의해 암살됨)이 이끄는 연합촉진회에 참여하여 혁명 봉기를 모의했고 청나라 정부에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할 뻔 했으나,
한숙수는 목숨을 걸고 형차를 가로막고 곽송령은 자신의 약혼자이며 봉천으로 돌아와 결혼식을 올리려고 했으며 혁명당에는 참가하지 않았다고 진술해 겨우 풀려났습니다.
그후 곽송령과 한숙수는 부부가 되었다.
1912년 곽송령은 북경장교연구소에 입학했습니다.
1913년 가을, 곽송령은 중국 육군대학에 입학했고, 졸업후 북경강무당에서 교관으로 재직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중국 경공업, 식품산업의 호황
1914년 7월경 제국주의 국가 사이에 패권을 놓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였다.
원세개의 북양정부는 처음에는 중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중국 북양정부는 1917년 8월경 독일에 선전포고한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간의 세계적인 전쟁으로 중국 역시 어부지리를 기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중국으로 수출되는 외국 상품과 자본은 급감하였으며, 전쟁 당사자들은 중국의 인력과 경공업 제품, 생활용품 등을 필요로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비록 1차 세계대전 기간중 중국의 중공업 발전은 더뎠지만, 새로운 공장과 광산이 설립되었으며, 수출이 급증하였고
특히 제사, 제분, 성냥, 제지, 담배, 시멘트, 착유, 설탕정제의 경공업부터 석탄채굴, 철강, 안티몬, 텅스텐 등의 중공업도 1차세계대전 기간에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 되자마자 수입은 급증하고 수출이 급감하였고, 외국의 경제 침략이 지속되자 1922년경부터 중국 경제는 불황에 다시 빠지기 시작한다.
1차 대전 동안, 북양정부는 유럽에 대한 노동자 지원외에도 러시아 적백내전에 소수의 군대를 파견하였고 러시아 볼셰비키에 대한 경제봉쇄 동참, 일본군의 만주 동청철도·시베리아 출병과 점령, 조선인토벌 방관 등 일제와 연합국에 적극 협조하였다.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 목적중 하나인 사할린 섬 일대 자원분포
그러나 (전쟁기간중 경제호황으로 세계1위의 경제대국이 된) 미국의 대통령 윌슨은 14개조의 제안을 하였으나, 결국에는 제국주의 국가의 이권 보장에만 그치게 되었다.
제1차 대전이 종전된 후에도 독일이 점유했던 산동반도의 교주만, 교주철도, 청도, 광물, 해저케이블은 중국에 반환되지 않았고 일본에 넘어갔다.
이것은 결국 중국에 침입한 제국주의자와 친일 매국노에 대항하기 위한 1919년 5.4 운동이 일어나는 한 원인이 된다.)
제정 러시아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1914년 8월경 제정러시아가 독일과의 전쟁에 참전하였다.
제정 러시아의 참전 초기 전국적인 동원령에도 불구하고 전선에 배치되는 군인들에게 줄 소총까지 부족하였고, 시베리아의 소수민족인 고려인까지 동원하였다.
그 넓은 농토에도 정치가 엉터리라서 식량부족과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국민생활이 곤궁해졌다.
결국 같은 연합군의 일원이 된 일제로부터 대량의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극동에서 수입하여야만 했고, 중국으로부터도 50만여명의 노동력을 지원받았다.(영국과 프랑스에는 중국인 약 14만여명 이상이 지원되었다. 그중 약 2만여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1917년 2월경 ‘2월 혁명’이 발생하여 로마노프 왕조가 망하고,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그해 10월 공산주의자인 레닌이 주도한 ‘볼셰비키 혁명’이 발생하며, 제1차 대전 연합국에서 이탈한다.
1919년 제1차 대전이 종전된 후 베르사이유 조약에 러시아 볼셰비키 정권은 초청되지 못했으며, 연합국의 볼셰비키 봉쇄와 러시아 적백 내전 간섭은 강화되고 있었다.
1916년 원세개 사망후 만주상황
1917년 손문은 광주 일대에서 군사정부를 세웠고, 곽송령은 손문에게 귀순하여 이후 광동성·감숙성 변방독판참모, 광동성 경위군 영장(대대장)으로 임명됐다. 나중에는 소관 강무당의 교관으로 옮겨졌습니다.
손문이 이끄는 호법운동이 실패하자 곽송령은 광주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으며, 봉천으로 돌아가 동3성 육군강무당에서 전술교관으로 복무했다.
이 무렵 봉천은 군벌이 된 장작림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강무당에서 공부하고 있던 (장작림의 아들인) 장학량을 만난다.
장학량의 추천으로 곽송령은 장작림에 의해 참모장 겸 제2연대장(단장)으로 임명됩니다.
북만주의 대도회 하르빈에 중국군도 일부 입성
1917년 12월경에는 러시아 혁명으로 쫓겨날 위기에 처한 (만주 동청철도의 러시아 백파 장령) 하르바트(Д. Л. Хорват)의 요청으로 장작림 휘하 군벌군이 북만주의 대도회 하르빈에 입성합니다.
(※이 무렵 북만주 최대의 도시가 된 하르빈은 1909년에는 일본의 거물 정치인 이등박문이 사살되기도 한 곳이었다.
중국은 1922년 12월경 중동로(동청철도) 연선을 별도 행정단위인 동3성 특별행정구로 지정한다. 그러나 그후에도 수십년간 동청철도를 둘러싼 분쟁은 계속된다.)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과 일했던 조선인 밀정 '배정자'
일제의 지원을 등에 업은 장작림의 만주 장악
1919년 7월 19일경 관성자사건이 발생하였다. 1919년 8월 5일경 장작림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한 길림성 독군 맹은원(孟恩遠, 1856~1933)이 물러납니다.
이제 만주의 동북3성은 사실상 일본을 등에 업은 장작림이 완전 장악하게 됩니다.
1921년 장작림은 곽송령을 제8여 여장으로 임명하고, 장학량이 이끄는 제3여단과 함께 사령부를 조성했습니다.
참고자료
송한용 저, <중동로 사건>관련 출판물
신불해 저, <최강의 군벌>, <이야기 중국사>
쉬처 저, <만주군벌 장작림>
동아일보, 조선일보 보도내용
만주일대 흑토분포 http://f.china.com.cn/2021-11/11/content_77865934.htm
백도백과 : 곽송령 https://baike.baidu.com/item/%E9%83%AD%E6%9D%BE%E9%BE%84/8450278?fr=ge_ala
주경란 https://baike.baidu.com/item/%E6%9C%B1%E5%BA%86%E6%BE%9C/1810619?fromModule=lemma_inlink
첫댓글 러시아 혁명 발생 무렵의 만주상황이 상당히 복잡했군요 볼셰비키와 장작림, 일제가 각자의 꿍꿍이가 있었군요 결국에는 일제의 지원을 등에 업은 장작림이 만주를 장악했군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