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5월18일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
San Felice da Cantalice
St. FELIX of Cantalice
Also known as:
Ass of the Capuchins (his own nickname for himself);
Brother Deo Gratias ("Deo Gratias" was his habitual greeting)
Born:18 May 1515 at Cantalice, Abruzzi, Italy
Died:18 May 1587 at Rome of natural causes;
so many came to his funeral that some were injured
in the press to get into the church,
and an extra door had to be knocked through one wall so they could exit;
buried under an altar in the church of the Immaculate Conception in Rome;
miracles reported at his tomb
Beatified:1 October 1625 by Pope Urban VIII
Canonized:22 May 1712 by Pope Clement XI
Felice = contento, dal latino
펠릭스(1513 - 1587)는 이탈리아 칸탈리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비천한 목동으로 생활하였다.
28 세가 되던 해 황소 떼가 도망치는 사건을 겪고 난 후
뜻한 바가 있어서 카푸친회에 평형제로서 입회하였다.
그는 깊은 신앙신과 하느님 뜻에 순명하는 데에 뛰어났다.
그는 가끔 복되신 성모님 품 안에서 어린 구세주를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또한 그의 입술에서는 항상 "하느님께 감사(DEO GRATIAS)!"
라는 말이 떨어질 줄을 모르므로 "데오 그라씨아스 형제" 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42 년 동안 로마에 있는 수도원에서 애긍 생활을 하였다.
그 덕분에 성 필립보 네리와 성 가를로 보로메오와 막역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많은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이 그에게 영적인 문제로 조언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가 하느님을 섬기는 방법은 바로 기쁨으로 가득찬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1587 년 로마에서 선종하였고 1712 년 시성되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성 필립보 네리 사제 축일:5월26일.인창동성당게시판1183번.
*성 가를로 보로메오 주교 축일:11월4일.게시판1454번.
칸탈리체의 성 펠릭스 *황진혁 베르나르디노형제 ofmcap 번역*
펠릭스는 1515년에 이태리의 칸탈리체(Cantalice)에서 태어났다.
어버이인 산티와 산타 포리(Santi, Santa Porri)는
수지를 맞추도록 노력하는 농사꾼 부부였다.
펠릭스는 블라시오와 카롤로라는 형 두 분과 포텐자와
베드로 마리노라는 남동생 두 명이 있었다.
베드로 마리노는 깐탈리체와 리에티(Rieti) 사이의 있었던
하나의 전투 동안에 숨졌다.
펠릭스가 열 살 때쯤 치타두칼레(Cittaducale)에 사는
피키(Picchi)라는 농가에게 일꾼으로 고용되었다.
일꾼들은 원래 야외에서 자라난 거친 시골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일은 힘들었지만 펠릭스는
일을 끝낸 다음 오락으로서 씨름을하곤 하였다.
펠릭스가 어렸을 때에 사촌 한 명이 사막의 고행자들의
전기를 읽어 주곤했는데 그들의 고행들에 대한 묘사는
페릭스를 열중시켜 그들의 엄격성을 본받고 싶어하게 하였다.
펠릭스는 카푸친회에 입회하러 레오네싸(Leonessa)에 가라는 천사를 꿈에 보았다.
그리하여 펠릭스는 꿈을 이루려고 레오네싸에 갔는데
그 곳의 카푸친 수호자는 그분을 관구대리 형제에게 보냈다.
그러나 펠릭스가 그분을 찾을 줄 몰라서 농장에 되돌아갔다.
어쨌든 천사의 신탁을 받는 것에 길들지 않은 펠릭스는
붙잡기가 어려운 것을 구함에 낭비할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천사는 다시 나타나 리에티의 카푸친 형제회에 가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헛된 시도였다. 그럼으로 펠릭스가 농장에 다시 한 번 되돌아갔다.
하루는 아우구스띠노회 수사가 펠릭스에게 그 수도회에 입회하라는 권고를 하였다.
그러나 펠릭스는 "카푸친이 아니면 안 된다" 하고 응답하였다.
이렇게 카푸친회에 입회하려는 소원을 품고 있던
펠릭스는 이번에 치타두칼레에 있는 카푸친 형제회에 가서 자신을 소개하였다.
수호자는 펠릭스를 성당에 이끌어 큰 고상 앞에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얻기 위해 기도하라고 명하였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은 타박상을 입고 피로
물들어 있었으며 모양이 손상된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한 페릭스는 자기에 대한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하였다.
펠릭스를 잊어버린 수호자가 저녁때에 기도하러
성당으로 돌아와서 아직도 거기에 지원자 펠릭스가 있었다.
그래서 수호자는 "아들아, 뭐 하고 있니?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
너는 착한 사람인데; 우리는 너를 우리 가운데 있게 할거야.
예수께서 이제는 혼자서 고생하실 필요가 없을 거야.
너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도와 드릴 거야"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서 열흘 후에 펠릭스가 입회하였다. 그 때가 1543년의 가을 후반쯤이었다.
만나기가 어려웠던 관구대리에게 소개하려고 로마로 금방 출발하였다.
로마의 카푸친 형제회에서 아스티(Asti)의 베르나르디노 형제,
즉 그곳의 수호자 및 수도회의 총대리인(Procurator Generalis)과 만났는데
그는 펠릭스를 로마관구의 대리였던 볼테라(Volterra}의 라파엘 형제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라파엘 형제는 펠릭스를 정식적으로 입회시켰다.
1544년초 비가 오는 어느 날 아침에 펠릭스는 관구대리가
수련소로 지명한 퓨찌(Fiuggi)의 형제회로 갔다.
그렇게 하여 퓨찌의 보니파시오 형제 밑에서 수련을 받았다.
수련생활의 고됨으로 몸이 약해지게 되었는데 공동체의
형제들이 세속 생활에 돌아가라고 권고할 지경이었다.
결국은 몬테 산 죠반니 캄파노(Monte San Giovanni Campano)에 보내기로 하였다.
마침 거기서 펠릭스는 회복되었고 마스트란또니오(Mastrantonio)의
야고보라는 서기 앞에서 펠릭스는 미래 유산권을 포기하면서
모든 재산을 친형제에게 양도하였다.
다만 그 형제들은 3년 동안 매년마다 곡식 좀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서
페릭스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여 달라고 청해야 하는 조건을 내렸다.
그리고 1545 5월 18일에 서원을 하였다.
시골 출신인 펠릭스는 자연을 사랑해서 격리된
숲 속에 있는 여러 형제회 중에 한 군데에서
남은 생활을 하기를 희망했기 때문에 카푸친이 되었다.
그러나 수도 생활의 첫 몇 년만 퓨찌, 몬테 산 죠반니,
티볼리(Tivoli)와 비테르보 (Viterbo)같은 시골의 지역에 살았다.
1547년에 펠릭스는 로마로 옮겼다.
어렸을 때에 펠릭스는 사막의 고행자들을 모방하여
다시는 빵에 손을 데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이상하게도 로마에서 그의 임무는 빵과 포도주를 동냥하는 일이었다.
펠릭스가 은둔 생활을 하고 싶어함에도 불구하고
이 봉사 때문에 매일매일 군중과 접촉해야만 하였다.
그 때의 카푸친 풍습에 따라 동냥하는 펠릭스 형제는
항상 눈을 내려 깔고 맨발로 돌아다녔다.
각계각층의 은인에게 겸손하며 자신이 있는 목소리로
"하느님께 감사"(Deo gratias)라는 응답을 하곤 하였다.
펠릭스는 그 인사를 자주 반복해서 사람들이
"데오 그라티아스 형제님"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로마의 신학생들도 거리에서 펠릭스 형제를 보았으면
장난으로 "Deo gratias"하고 외치곤 하였는데 펠릭스의 응답은 언제나
"Deo gratias! 내 소년들아, Deo gratias!"라는 인사였다.
<
펠릭스는 형제들의 음식을 마련하면서 굶주리는
사람들에게도 먹을 것을 제공하곤 하였다.
그리고 수도회의 봉사자들에게서 특히 자녀가
많은 과부같은 살림이 어려운 이들을 도와 줄 허락을 받았다.
로마시에서 전염병이 돈적이 있었는데 음식이 형제들에게도
모자랄까 펠릭스에게 다른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도
음식을 동량하도록 허락하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펠릭스 형제는 "형제들아 가난한 이들이
먹을 것을 받으면 형제들은 굶주릴 거라고 생각하니?
내 말을 믿어 봐. 가난한 이들이 먹을 것을 받으면
형제들도 굶줄이지 않을 거야" 하고 반응하자 장상들이 허락을 주어서
그 일 년내내 형제들을 위해서도 충분히 동량하였으며 많은 어려운 시민들도 먹여 주었다.
펠릭스의 동냥 자루는 그 마음처럼 밑바닥이 없는것이었다는 말이 있다.
정말 도와 달라는 요청을 거절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빵, 포도주와 기름을 너그러이 나누어 주곤하였다.
자기 자신이 나누어 보조해 줄 것이 없었을 때에는,
고위 성직자들을 포함하여 부자들에게 부탁하곤 하였다.
펠릭스는 은혜를 베풀든 은혜를 받든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섭리를 믿으며 감사드리라고 권고하곤 하였다.
형제회에나 개인의 집에나, 불치 환자들을 위한 성 야고보의 병원과
성령의 병원과 성 요한 라테라노의 병원에 있는 병자들을 방문하곤 하였다.
간단한 말로써 병자들에게 은총의 기회로써
병을 받아드리며 신뢰를 가지라고 하곤 하였다.
펠릭스가 사람들의 병을 고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는 자주 병자에게 고상으로 축복해서 병이 낫게 되곤 하였다.
또 펠릭스가 동냥한 것들은 받은 이들에게 나중에 치료의 도구가 된 적이 있었다..
하루는 펠릭스가 오르비에토의 주교,
베드로 크레셴지(Crescenzi) 추기경의 어머니인
콘스탄자의 눈을 보시로 받았던 포도주로 씻어서 병을 고쳤다.
이와 같이 또 성 요한의 병원에서 펠릭스가 포도주를 좀 기증한 후에 환자는 나았다.
그리하여 때때로 친구들이 장난으로 펠릭스에게
"펠릭스 형제야, 내가 아프면 나에게 네 포도주 좀 갖다 줘!" 하고 말하곤 하였다.
펠릭스는 모든 사람과 고향인 사빈 지역의 사투리로, 그리고 항상 반말로 말하였다.
그렇지만 보시를 받든 주든 크나큰 존경으로 각자를 대하였다.
은인들이 잘 알았듯이 펠릭스는 거절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무엇을 구하기만 했으면 펠릭스가 할 수 있는 대로 그것을 마련하였다.
자기의 양육 때문에 펠릭스는 잘난 체할 줄 몰랐다.
사람들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그 형제는
회개할 필요가 있는 이들에 허물없이 직접 맞설 수 있었다.
펠릭스의 전기에 있는 이야기들은 ’성 프란치스꼬의 잔 꽃송이’라는
책에서 묘사된 사건들과 비슷하다.
하루는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음식을 동냥하다가
펠릭스는 법학 논문을 읽기에 깊이 빠져든 변호사의 문을 두드리었다.
그런데 간섭에 성난 변호사는 형제가 하는 일보다는
자기의 일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였다.
눈물겨워진 펠릭스는 "하느님의 법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느냐?"하고 물었다.
그 일로 인하여 법계를 그만 둔 변호사는 성직 생활에 헌신하였다.
그리고 펠릭스는 베르나르디노 비샤(Biscia)라는
변호사가 공부하는 법서 위에 고상을 놓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가리키며 "베르나르디노야, 이 봐. 이 모든 책들은
네가 이분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하고 말하였다.
형제회 밖에서 펠릭스는 말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형제회 안에서라도 그 형제의 말은 대부분
좋은 모범을 보여 주라는 몇 마디의 권고였다.
펠릭스는 똑바로 솔직히 말하곤 했는데 어떤 형제에게
"너를 고치고 싶어"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카푸친 설교자들에게는
"이름을 떨치려고 말하지 말고 사람들을 전향시키려고 설교해라"하고 자주 권고하였다.
때때로 에지디오 형제의 명언을 인용하였다 "Bo, bo, bo, assai dico e poco fo!
[뽀, 뽀, 뽀, 아싸이 디코 에 포코 포!]".
그 명언은 ’쯧, 쯧, 쯧, 많이 말하지만 조금만 행해’라는뜻이다.
한 번은 펠릭스가 율리오 안또니오 산토리(Santori),
카푸친회의 보호자 추기경에게 "추기경, 너는 수도회의
장상들에게 속하는 일들에 간섭하도록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도록 임명을 받았소"하고 말한 적 있었다.
미래에 씨스또 5 세가 될 사람에게 "너는 교황이 되면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이익을 위하여 교황이 되어라.
아니면 단순한 형제로서 남는 게 나을 것 같아"하고 말하였다.
같은 사람인 씨스또 5 세는 펠릭스를 때때로 만나서 빵 좀 달라고 하곤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형제가 프란스꼬회 형제였던 그 교황에게 써서 낡은 혹빵을 좀 주면서
"성하, 죄송하지만 너는 아직도 형제이지?"하고 말하였다.
개인 신심과 묵상을 위하여 펠릭스는 기도문과
성서적이나 전례적인 문구를 외우곤 하였다.
문맹이었는데도 그는 마음으로부터 기도하며 정신을 영적인 숙고에 종사시키곤 하였다.
로마의 거리를 걸어다니든 자기의 방이나 형제회의
성당에 있든 펠릭스의 얼은 항상 관상에 빠져 있었다.
영감으로 복음의 말씀을 기억하곤 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잠든 후에 그는 하느님의 섭리에 하루 동안에
만난 사람들을 맡겨 드리면서 수많은 시간을 성체 앞에서 보내곤 하였다.
또한 형식적인 교육으로 알지 못 한 일들에 대한 호기심이 있을 때는
유명한 스페인의 사제인 알퐁소 루포(Lupo)에게서 자주 충고를 구하였다.>
그리고 성 필립보 네리의 친한 친구이며
성 가롤로 보로메오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펠릭스는 진정한 거룩함이 깨닫게 하며 깨닫게 되는 것임을 알았다.
그럼으로 지식이 있는 이들의 충고를 구하므로
"로마 거리들의 이 성인은" 차례로 자기에게서 충고를
구하는 사람들을 그 말로 중고하며 권고할 수 있었다.
펠릭스는 2 세의 로마 청년에게 명물이었다.
젊은이들이 ’아빠’라는 뜻인 "파파(Papa)"라고 불러서
이 카푸친이 받는 존경이 얼마나 큰지 몰랐던 사람들을 놀랬다.
사람들이 그들의 걱정을 펠릭스에게 먼저 직접 알리곤 했는데
의사에게 가기 전에 형제에게 먼저 가서 도움을 청하곤 하였다.
그리고 그는 무릎을 끓고 주의 기도문과 성모송을 바쳐
남아 있는 모든 일을 것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 드리곤 하였다.
그런데 다른 경우에는 펠릭스가 "하늘, 하늘" 또는
"자신으로 하여금 천국으로 가게 해 봐"하고 말하므로
병자들에게 병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하기도 하였다.
어머니들과 아이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항상 어린이들을 주님께 축성하거나 젊은이들에게
"예수, 예수" 또는 "Deo gratias(천주께 감사)"라는
화살 기도를 가르칠 시간을 갖곤 하였다.
펠릭스는 자유롭게 가사를 붙여 성가를 작성해서 부르는 재능이 있었다.
그럼으로 사람들이 자주 노래를 부르라고 부탁하곤 하였다.
동정 마리아에 대한 그분의 신심은 특히 이 가사들과,
또 펠릭스를 잘 알던 알퐁소 루포의 증언으로써 깨달을 수 있다.
그 가사들 중에 하나는 다음과 같다
"오늘 우리 땅에서 작은 장미가 돋아났는데
그 장미는 바로 천주의 모친이신 작은 동정녀 마리아이시다".
그런데 펠릭스는 이 성모님께 대한 신심을 감추었는데 성탄절 가까운 하루 밤에는
알퐁소 루포 신부가 기도하는 펠릭스를 몰래
감시하다가 마리아께서 나타나셨고 형제의 요청에 양보하여
아기 예수를 펠릭스의 손에 넘겨주시는 것을 보았다.
며칠 죽기 전까지 펠릭스는 자기의 봉사를 계속하였다.
산토리 추기경은 펠릭스으로부터 동량의 힘든
임무를 제거하게 하도록 영향을 끼치려고 했는데 펠릭스 형제가 거절하였다.
1587년 4월 30일에 펠릭스는 병에 걸렸는데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았다.
형제들에게 "작은 당나귀가 떨어졌다;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야"하고 말하였다.
1587년 5월 18일 아침에 침대 옆에 있던 프라토(Prato)의
우르바노 형제는 얼굴이 눈부시게 된 펠릭스가 손을 들고
"오, 오, 오"라는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왠 일 이냐고 질문하자
펠릭스는 "천사들의 무리에 둘러싸인 동정 마리아를 보는데!"하고 대답하였다.
수호자가 여행을 위한 노자 성체를 모시고 왔을 때 펠릭스는
"O sacrum convivium(오 사크룸 콘비비움)"이라는 성체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거기 있는 모두에게 "Deo gratias"라는 응답을 하라고 부탁하였다.
성체를 모신 다음에 사제가 "그리스도인 영혼아, 떠나시오..."라는
임종의 기도를 바치는 중에 끝까지 순종한 펠릭스 형제는 세상을 떠났다.
페릭스의 시신은 로마의 비아 베네토(via Veneto)에 있는
무염시테의 카푸친회 성당에 모셔 묻혔다.
씨스또 5 세 교황님이 금방 펠릭스를 시성하려고 했는데
만일 필요하면 옛날 풍습에 따라 전원 추거로써 하기로 작정했으나
과정을 끝내지 못하고 죽었다. 그 후에 시성 운동의 여세는 떨어졌다.
마침내 1625년 10월 1일에 우르바노 8 세 교황님은 펠릭스 형제를 시복했고
1712년 5월 22일에 글레멘스 11 세 교황님이 시성해 주었다.
깐탈리체의 성 펠릭스는 첫 성인품을 받은 카푸친 회원이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 카페에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인창동성당게시판1403번.
*성프란치스코의 거룩한 상흔 축일:9월17일.게시판1369번.
그는 아뿔리아의 치따 두칼레 교외인 깐딸리체에서 태어났고,
양친은 신심깊은 농부였다.
그는 어릴적부터 소몰이를 하는 등, 농사 일을 거들었으나,
항상 기도하는 열심한 소년이었다.
성장한 뒤에도 펠릭스는 일하면서 기도하는 등,
매우 높은 차원의 관상 기도를 하였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을 하느님과 대화하면서 지낼 정도였다.
그리하여 그는 치따 두칼레의 카프친 수도원으로 들어갔는데,
수련기부터 이미 가난과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는 수련장에게 간청하여 보속과 금욕을 배로 늘렸다.
그리고 동료 수도자들 뿐만 아니라 깐딸리테의 어린이들도
그를 일컬어 "성인"이라고 불렀다.
30세에 성대서원을 발하였고,
4년 후부터 죽을 때까지 로마에 살면서,
음식을 구걸하는 일을 비롯하여 수도원의 허드레 일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성 필립보 네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른 이의
고통을 대속하는" 사람이라며 늘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였다.
펠릭스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천주께 감사"를 연발하고
또 실제로 감사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는 72세의 일기로 운명하였는데, 그날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다고 한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16세기는 모든 사람이 다 아는 대로 루터 등이
소위 종교 개혁의 미명하에 여러 가지의 이단설을 주창하고
유럽의 종교계를 수습하기 어려운 혼돈속으로 빠뜨린 비참한 시대였지만,
그 반면에 신대륙 아메리카에는 전교의 개척이 이루어지고,
또한 동양에도 전교가 활발해지는 한편 수많은
성인이 배출되는 등 좋은 현상도 적지 않았다.
성 펠릭스는 그 시대의 성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515년 이탈리아의 움부리아 주의 칸탈리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불행하게도 가정이 어려웠으므로 통학할 수도 없었고,
소년 시절에는 목동으로서 아버지의 가축을 지키며 지내고,
청년이 되어서는 어느 대 농가의 일꾼으로 살게 되었다.
그러한 관계로 교리같은 것도 별로 연구한 적이 없었으나
신앙심이 유난히 깊었고 아름다운 대자연을 연상하고서는
그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진심으로 숭배 찬미하고,
또한 큰 나무 기둥에 십자가의 모상을 파고 그 앞에서 혹은 묵상하고
혹은 주님의 기도, 성모송, 사도신경 등 외울 수 있는
기도는 모두 바치고 있었으나,
그 중에도 특별히 좋아한 것은 예수 수난에 대한 묵상이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은수자의 전기를 읽고
매우 감동하여 자신도 그들처럼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속세를 떠나 고행을 하려고 생각하고 어느 동료에게 이를 말했다.
그랬더니 그 동료가 말하기를
"아니다. 마음만 있으면 특별히 산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치타 두칼레에 있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시작한
카푸친 수도원에 들어가기만 해도 충분히 네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고 가르쳐 주었으므로 그는 즉시 그 말을 따라
그 수도원을 방문하고 원장에게 받아줄 것을 간청했다.
그래도 원장은 펠릭스에게 과연 하느님의 성소가
있는가 없는 가를 세밀히 관찰하고
나중에 유혈이 낭자한 그리스도 십자가상을 보이면서
"수도자가 되면 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데,
당신에게 그만한 결심이 있습니까?"하고 물어보자,
그는 "제가 고행 이외에 아무것도 원치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잘 아실 것입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때 그의 얼굴에는 극히 열성적인 기색이 보였으므로
원장도 드디어 그를 수련자 중의 하나로 받아 주었다.
펠릭스는 30세로서 수련을 마치고
곧 로마에 파견되어 구걸하러 다니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한 일이었다.
그는 영원한 도시라고 불리는 로마의 네거리나 가로를
매일같이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온정에 호소하면서
수도원의 일용품을 거두고 은인을 위해서는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가 길을 걸을때에는 손에 묵주를 굴리며 눈은 경건하게
밑으로 뜨고 마음은 높이 하늘로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자선의 표시를 받았을 때는 반드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감사의 뜻을 표시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는 은인에 대해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때로는 "게으름뱅이!" 혹은 "거지!"라는 등 저주를 하는
사람이 있을 때도 그는 온순히 "하느님께 감사합니다"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시민들에게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졌다.
아이들은 곧잘 재미로 그의 뒤를 졸졸 따르면서 소리를 맞추어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하고 놀려댔다.
그러나 펠릭스는 조금도 언짢게 생각지 않고 오히려 웃으면서
그들과 하나되어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거듭하곤 했다.
그는 어떤 때에 장상으로부터 자선 받은 것의 일부를
빈민에게 희사해도 좋다는 허가를 들으면,
매일같이 드라스데베르의 빈민굴을 찾아가 금품을 주며
가난한 이를 돕기도 하고, 사랑의 말로써 고민하는 이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 뿐 아니라 틈만 있으면 병자를 방문하여 친절히 간호도 해 주고
때로는 선종의 준비도 시켜주고, 밤에는 종종 수도원의 성당에 가서
감실앞에 무릎꿇고 불쌍한 죄인들을 위해 열심히 주님의 은총과 자비하심을 청했다.
펠릭스의 성덕은 차츰 로마 시민들 사이에 퍼졌고,
그가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게 되었지만
조금도 교만한 기색이 없이 늘 자신을
’카푸친 수도원의 당나귀’라는 천한 말로 불렀다.
그는 세속 학문에 대해서는 그리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써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변호사를 방문하여 그의 호화로운 도서실을
구경하게 된 펠릭스는 "선생은 대단히 많은 책을 가지고 있으나
무엇보다도 십자가라는 책을 읽지 않으면 도리어
영혼에게 해로운 것을 배울 수밖에 없을지도 몰라요"하고
충고하고는 "내가 배운 글자는 붉은 자 다섯 자,
흰 자 하나, 도합 여섯 자밖에 없어요"하고 말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다섯 붉은 자란 것은 주님의 수난의 상징인 오상을 의미하고
하나의 흰자란 것은 순결한 동정 성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성모께 대한 신심은 대단해 그의 임종이 다가왔을 때
성모께서 성사를 안고 마중나오셨다는 전설까지 남아있다.
즉 임종할 시기가 가까워오자 그는 희열에 충만된 얼굴을
벽 쪽으로 향하고 미소를 띄우면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곁의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하고 물어보니까,
그는 "나는 당신들이 아직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있지요"하고
대단히 기뻐하면서 대답한 뒤 곧 고요히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는 1587년 5월 18일, 그의 나이 73세에 이 세상을 떠났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
주여 내 사랑의 사랑 때문에
황송하옵게도 당신이 죽으셨으니,
주여 당신 사랑의 사랑 때문에
당신을 위해 나도 죽을 수 있도록,
꿀과 같은 당신 사랑에 내 마음달게 해 주시고,
불과 같은 당신 사랑에 내 마음 뜨겁게 해주시어,
당신 사랑의 크신 힘으로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에서
나의 마음을 빼내어 차지하소서.
♬노래: 작은꽃 성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