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흐름 속에서 역사는 진전하는 것이라고 여겼지만 역사는 되돌아가는 듯 세상은 날이 갈수록 더 어지럽다.
“1978년에서 1980년 10월까지 나는 제주도에 있었다. 그때 나라는 어지러웠고, 내가 가끔씩 위안을 얻고자 다녔던 모 교회에서는 제목은 잊었지만,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 라는 노래가 언제나 그치지 않았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오늘의 이 시대도 그때와 비슷하다. 어디에서나 반반으로 나뉘어 적과 동지로 나뉘어져 있고, 내 편이 아니면 모두가 적이다. 그때는 적과 동지가 분명했는데, 지금은 적과 동지가 애매모호하다. 가족들도, 친구들도, 그리고 동료들도 저마다 다른 잣대를 가지고 서로를 의심하고, 미워하고, 그리고 불신한다. 세상은 많이도 변했고, 세월을 흘러갔는데, 왜 그럴까? 셰익스피어는 말했다. “지혜와 선이 악인에게는 나쁘게 보인다.“ 리비우스의 <사서史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악惡은 악惡과 사귀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 세네카의 <루킬리우스에의 서한집>에는 더 절절한 말이 실려 있다. “악惡은 덕德이라는 미명하에 우리들의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어디 그뿐인가? 이디오피아의 격언에는 “악은 바늘처럼 들어와 참나무처럼 퍼진다.”고 실려 있고, 롱펠로우는 <하이페리언>에서 “세상은 사악한 양념을 좋아한다.”고 갈파했다.
세상은 세월 속에서 더 진보해야 하는데, 참된 진보나 참되 보수도 참된 참은 어디에도 없고, 내 것과 내 편만 남아 있으니,
“그가 선한가, 악한가, 하는 것은 내게 문제가 아니다. 그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바보인가 하는 것만이 나의 관심사다. 거룩한 척 하지 말고, 지성을 갖추어라.” 블레이크는 말하고 있는데, 격조 있는 지성은 어딘가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고, 지성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고, 지혜도 아닌, 값싼 향수같이 겉모습만 번쩍거리는 싸구려 지식들과 천박한 욕망들만 세상의 물을 자꾸 흐리고 있으니.
그래도 삶은 계속되고, 그래서 삶은 쓸쓸한 것일까? 이런 저런 일에 휘말리지 않고 사는 것이 참 어렵다.
2019년 7월 17일 제헌절에 쓴 글이 지금의 현실과 같으니, 내일, 내일은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