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구정승골에서 정승 정창손과 이준경, 이덕형을 만나다]
ㅡ역사 인물ㅡ
절기는 가을에 접어들었어도 하늘이 푸르고 나뭇잎도 여전히 파란색이다. 양평은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여서 교통이 좋아 자주 다니는 편이다. 양평 목왕리 계곡에 가면 조선시대 정승을 지낸 선비들을 만나게 된다. 구정승골은 아홉 선비가 묻힌 골을 의미한다. 우선 세 정승의 묘역을 탐방하기로 한다. 먼저 동산東山 정창손(1402~1487)의 묘역으로 향한다. 도로에 인접해있어 접근성이 좋은 편이다.
본관은 동래정씨 충정공파이다. 사당과 묘역이 인접해있어 접근성과 산세가 좋다. 묘역의 위치는 양서면 부용리 산37ㅡ1번지이다. 시호는 충정忠貞公이다. 본래 광주 (방이동)에 묻혔는데 도시개발로 인해 1970년 양평 하개산荷開山으로 이장했다.
폐비윤씨 사건에 연루되어 부관참시 당해 안타까움이 더한 인물이다.
언어 학자와 유학자이며 훈민정음 창제 때 반대한 집현전 학사 중 한 사람이다. 뱃짱이 있는 선비로서 할말은 서슴치 않는다. 공자 맹자 때부터 내려온 유학과 성리학을 부정해서 파직 당하기도 했다가 복직한다. 세종이 승하한 후에도 문종 때 병조판서와 단종때에 이조판서를 역임할만큼 신임이 두텁다.
1453년 계유정란 때 수양대군을 도운 인물로 세간에 눈총을 받은 인물이다. 단종 복위를 고변한 김질의 장인이며 1457년에 좌의정까지 오른다. 이후 예종과 성종대에도 승승장구하며 관직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1485년 85세의 나이로 사직하며 정계에서 물러난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정승이다.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 선생은 동래정씨로는 처음 정승에 오른 인물이다.
사후 22년만에 기묘명현에 오른 염간공 정충량(1480~1523) 선생이 후손인데 광주시 장지동 영모재에 묻혀있다.
산 모퉁이를 돌면서 안내판을 만난다.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1499~1572) 선생의 묘역이다. 본관은 광주廣州 이씨 동고파이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소나무가 울창한 평지에 묻혔다. 묘역이 깔끔히 단장되어 있다. 충남 보령 출신으로 영의정을 지냈다. 선조를 왕위에 올린 공신으로 선조 묘정에 배향된다. 충청도 구계서원龜溪書院에도 배향되었다. 조선시대 서예에 능한 학자이며 이연경과 조광조의 문인이다.
사림파의 개혁에 반대했고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질 때 신진사림(동인)의 정적으로 지목된다.이준경이 6세 때 갑자사화(연산군 10년)로 조부祖父인 이세좌와 부친 이수정이 사사된다. 16세 때부터 이연경과 조광조로부터 성리학을 익히게 된다. 1550년 영의정 이기의 모함으로 유배되기도 한다.
기묘사화로 피화避禍된 조광조를 풀어 주고 을사사화 피화인들을 신원하였다. 유배지에 있던 노수신 유희춘을 석방해 과감히 등용하게 된다. 역학에도 밝아서 왜란이 일어날것을 에측한 예언가이기도 하다. 이준경의 제안으로 지금의 북쪽 자하문쪽으로 비상문을 만들었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이 문으로 나섰다. 피난 비상구로 요긴하게 썼다고 한다.
명종이 위독하자 이준경이 침전밖에서 후계자를 묻는다. 인순왕후가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 보위를 이으라고 전교를 내린다. "소신은 귀가 어둡습니다. 다시 하교해 주소서." 윤탁연에게 전교를 받아 적게 했다. 혹시 있을지 모를 오해의 여지를 해소하기 위함이다. 매사에 철저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다. 위급한 임금이 실수할까 염려해서 되물은 것이다.
동절기 저녁 노을은 순간이다. 해가 지기 전에 지척인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1561~1613) 선생의 묘역으로 향한다. 한음 선생의 사당이 눈에 들어온다. 홍살문을 지나 한원문漢原門을 들어서면 영정각 쌍송재雙松齋가 보인다. 후손이 옆 건물에서 찻집을 운영하며 관리하고 있어 사당 주위가 깨끗하다. 영정각은 광주 이씨 문중에서 건립했다.
본관은 광주 둔촌 집集의 8대손이다.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한다. 이조판서 직에서 백성을 구제할 시무8조를 지어 올린 기록이 있다. 공직을 두루 거친 명재상이다. 영조는 불천지위不遷之位를 내려 제사를 모시게 했다. 1603년 김포의 모친 묘와 안협의 부인 한산 이씨의 묘를 한음의 묘소에 이장하게 된다.
묘역은 사당 뒤편 300m 지점 능선에 위치해 있다. 부인 한산 이씨와 함께 합장묘이다. 묘역의 석물이 역사를 대변한다. 묘역 관리가 잘 되어있다. 멧돼지와 고라니 등이 야간에 내려와 훼손이 심하다고 한다.
조선 중기 문신인 한음은 포천군 자작리 외가에서 자랐으며 양사언梁士彦 문하에서 수업한 인물이다.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사위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에는 이항복과 막역한 사이이다. 이덕형은 광해군 즉위 때 공로가 큰 남인 소속의 인물이다. 37세에 정승의 반열에 오르고 4년 후 영의정을 지냈다.
1613년(광해군5년) 인목대비를 폐출 시도가 일어나자 반대하다 탄핵을 받아 삭직削職된다. 이후 양평으로 낙향해 그릇됨을 상소하며 세월을 보내다 53세에 생을 접는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한음이 직접 심은 은행나무가 역사의 흔적을 보여준다.
한음은 사직서에 이런 글을 남긴다. "성현께서 남긴 책을 살펴, 몸을 검속하고 마음을 살피는 일에 조금이나마 근본이 선 후에 임금을 섬긴다면, 어리석음에 이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겸손한 자세로 평생을 살아온 선비 정신에 존경심이 더한다.
아홉 정승이 묻힌 양평 지역은 서울과 근거리에 있어 후대들이 많이 찾는 지역이다. 삼정승에 대한 의미를 새삼 새겨보기 위해 양평을 찾아 역사의 현장을 살피고 돌아선다.
2024.10.16
첫댓글 정승 정창손과 이준경, 이덕형을 만나고 오셨네요.
글과 사진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와 자세한 설명과 멋진 사진으로 저도 다녀온 듯한 느낌입니다~
좋은 글과 사진 감사합니다~ ^^
정병경 작가님
이닥형 한음 의 발자취를 이리 세세하게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저희 시댁 광주 이씨 문중 으로 매년. 행사에
저두 2번 찾았던 곳 입니다
덕분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