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시
강지수
터뜨리지 마세요 낮은 조도 아래 구두 굽과 헛기침 실내에 떠도는 먼지로 눈이 시리고 갈 길은 아직 먼 것 같지만 마음껏 흩어지세요 소리 내어 웃으세요 다만 눈으로 보세요 눈으로만 담아요 아주 밝으려면 잠깐은 죽어야 하잖아요 발가벗고 호수에 뛰어드는 아이들 성대한 만찬을 즐기고 있는 가족들 그들 발치에 턱을 대고 누운 개들 졸고 있는 저 시대에는 균열이 없었다지 뉴스도 잠수정도 광케이블도 마음을 전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땐 편지를 찢으면 그만이었고 아득하죠 본 적 없지만 보고 있다는 사실 프레임 속 프레임을 진짜라고 믿는 일 플래시를 터뜨리지 마세요 균열은 미소처럼 보이고 그건 전시의 의도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저건 그냥 검은 덩어리 같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사람 얼굴이네 여기 봐 눈 코 입이 있잖아 꼭 사람 같잖아 사람 맞잖아” 언타이틀드(untitled) 영업 비밀입니다만 제목 없는 작품들은 종종 섞이기도 합니다 엉뚱한 높이 너비 깊이를 달고 너무 빠르거나 늦은 연도 옆에서 심각한 얼굴로 관람객을 속입니다 그건 전시의 의도에 부합하는 걸까요 무제의 테라코타 무제의 오일 페인팅 밀폐된 사각 공간 안에서 일방적 눈맞춤을 감내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죠 유머가 필요할 거예요 오래 보존하고 싶은 마음 허상인 줄 알면서도 버킷리스트를 쓰는 사람처럼 차갑고 신선하게 손짓 한 번으로 꺼내볼 수 있는 건 참 편리하지만 플래시 터뜨리지 마세요 파티는 잠깐이고 스포일러는 영원하잖아요 입꼬리만 올리면 다 미소라고 착각하기 덩어리를 덩어리로 받아들이기 덩어리를 몰래 손으로 만지고 미완의 감촉을 기억하기 마지막 작품을 오래 아주 오래 바라보다가 출구로 나가면서 쏟아지는 빛에 잠깐 말을 잃기 거리에 서서 신선한 공기를 가슴이 부풀도록 들이마신 다음 아 이게 빛 이게 균열 그러니까 그러니까 플래시는 터뜨리지 마세요 —계간 《아토포스》 2024년 여름호 ---------------------- 강지수 / 1994년 서울 출생. 경희대 국제통상·금융투자학과. 출판 편집자. 2024년 〈문화일보〉와 〈메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