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서 어렵다는 소리가 들리지만 그래도 지금은 송구영신(送舊迎新)의 계절이다. <월간중앙>도 2005년 1월호부터 새 옷으로 갈아입었고, ‘전인권이 만난 사람’도 새로 연재한다.
첫번째 탐구 인물은 ‘까치’ 같은 인물을 선정해 보려고 했다. 축구선수 이천수가 적당하겠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때마침 그는 닭띠로 2005년이면 만 24세가 되는 펄떡펄떡 뛰는 젊은이다. 이천수를 통해 새해 새 희망을 이야기해 보자는 것이다. 이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이천수 선수와 그의 형 이천석, 그리고 친구인 프로축구 울산현대팀 성은호 선수를 인터뷰했음을 밝혀둔다. <필자>
이천수는 우리나라에서 축구를 가장 잘하는 선수는 아니지만, 가장 많은 화제를 몰고 다니는 선수다. 그가 얼마나 화제를 몰고 다니는가는 그의 팬 카페(daum.net/ 2000su)에 들어가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팬 카페 회원은 월드컵 열기가 사라진 지금도 4만7,000명에 이른다. 또 <조선일보>도 아닌데, ‘안티 이천수 카페’(daum.net/anti2000su)도 갖고 있다. 그 회원이 무려 1만5,000명이다.
그렇다고 이천수가 자신만의 천부적 매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얼굴과 몸매로 치면 안정환을 따를 선수는 없다. 억센 매력으로 치면 김남일에 못 미친다.
이천수는 173cm의 키에 63kg의 몸매를 갖고 있다. 173cm가 안 되는 세계적 축구스타도 많지만, 이천수처럼 몸이 가늘지는 않다. 날카로운 눈매 때문에 ‘성질이 더러울 것’이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그 외에도 우리는 월드컵 4강에 오르면서 홍명보·황선홍·설기현·이운재 같은 축구영웅들을 갖게 되었다.
全寅權 교수는…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서울대 정치학과에서 ‘박정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지금은 상지대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분야에 당선된 미술평론가이기도 하다.
<편견 없는 김대중 이야기>(1997),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2000), <남자의 탄생>(2003) 등 다양한 분야의 저서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영웅들의 팬 카페는 회원이 5,000명 전후다. 이천수 카페의 10분의 1, 안티 이천수 카페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왜 별로 좋은 조건을 타고나지도 못한 이천수가 그토록 많은 고정 팬을 거느리고 있는 것일까?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단지 축구선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능숙하게 마케팅하는 스타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천수는 당돌한 아이며, 머리가 굉장히 좋은 친구다. 그는 2002년 월드컵 때 대표 선수 중에서 홀로 머리카락에 노란 물을 들이고 그라운드에 나타났었다. 이색적인 모습이었고, 유럽축구를 흉내내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선수가 머리카락에 물을 들인다. 마치 윤복희가 미니 스커트를 유행시킨 것처럼 이천수는 새로운 유행의 선구자였다.
이천수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헤어 스타일을 자꾸 발전시켜 나갔다. 월드컵 후 한·일전 때는 태극기 모양의 헤어 스타일을 선보인 적도 있다. 스페인 리그에 처음 진출할 때는 “빅 스타가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별 모양의 머리를 했고, 스페인 리그에서 함께 뛰는 베컴을 따라잡겠다며 ‘베컴 머리’를 하기도 했다.
이천수(李天秀)
1981년 인천 출생 부평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중퇴 2002년 고려대 축구 선수 2000년 시드니올림픽 국가대표 선수 2002년 프로 축구 울산현대 선수 2002년 한·일월드컵 국가대표 선수 2003년 스페인 레알소시에다드 선수 2004년 스페인 누만시아 선수(現)
지금도 이천수는 서울에 오면 압구정동에 있는 단골 미장원에 들러 머리를 매만진다. 이 미장원은 이제 축구 선수들의 단골 미장원이 되어 있다. 자기가 무슨 패션 모델이라고, 어떤 때는 다섯 시간이나 투자하며 새로운 헤어 스타일을 다듬기도 한다.
거기에다 골을 넣을 때마다 보여주는 ‘속옷 세리머니’는 새로운 화젯거리를 불러일으킨다. 한마디로 이천수는 축구장에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는 그라운드의 창조자다.
2004년 11월17일, 2006년 독일월드컵을 향한 2차 지역 예선 마지막 경기인 몰디브전이 열렸다. 이천수는 경기가 열리기 이틀 전 스페인에서 날아와 인천공항에 내렸다. 이번에는 머리 손질을 전혀 하지 않은 더벅머리였다.
왜 오늘은 머리를 다듬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천수 왈 “스페인 미장원들은 서울 강남보다 형편없더라. 자꾸 우리나라 미장원들이 생각나 못 가겠더라. 그러다 머리가 이렇게 길어졌다”며 한바탕 너스레를 떨었다. 놀라운 말솜씨였다. 강남의 미장원 언니들은 이천수가 얼마나 예뻤을까? 거기에다 별로 대단치도 않은 머리 이야기를 스리슬쩍 애국심에 척 걸쳐 놓았다.
이천수에게 헤어 스타일은 팬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여성 최초로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올브라이트의 브로치 외교를 연상시킬 정도다. 아니, 적어도 이 점에 관한 한 이천수가 한 수 위인 것 같다. 그는 지금까지 10가지 정도의 헤어 스타일을 선보이며, 자신이 임하는 경기의 의미를 새롭게 표현했다.
나이 든 분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놈이 축구 선수야, 패션모델이야? 저래서야 어떻게 공을 차겠어? 축구 생각만 해도 시간이 모자랄 텐데….” 하지만 축구 선수가 헤어 스타일에 신경을 쓰는 것은 머리와 다리뿐만 아니라 온몸과 정신으로 축구를 한다는 증거일 수 있다.
예를 들어, 격렬한 훈련을 끝내고 미장원으로 달려가 머리를 다듬으며 다음 경기에 대한 긴장감을 가다듬을 수 있다. 사우나에 들러 오후에 있을 중요한 계약에 대한 전략을 궁리하는 회사원과 다르지 않다. 다만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축구가 패션을 통해 표현될 수 있다는 감각적 생각, 이런 태도가 오늘날 사회를 움직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기사를 준비하며 여러 자료를 검토해 보았을 때, 흔히 알려진 것처럼 이천수는 ‘타고난 스타’ 또는 ‘게으른 천재’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만들고, 만들어진 이미지를 관리하는 ‘자기관리형 CEO 스타’다. 그래서 그가 더 매력적인 인물로 보였다.
이천수의 말, 그리고 헤어 스타일
그는 가정환경도 좋지 못했다. 집이 처음부터 가난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아버지 이준만(1955년생) 씨는 인천의 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석유풍로와 가스레인지 분야에서 국내 1위를 달리던 ‘후지카’에 취직했다. 의협심이 강하고 리더십이 있어 1,500명의 조합원이 가입한 노동조합의 위원장을 세 번이나 연임했다.
아버지는 후지카에서 어머니 박희야(1957년생) 씨를 만났으며, 어머니는 결혼 후 후지카를 그만두고 보험설계사를 했다. 어머니의 수완도 좋았지만 남편이 노조 위원장이다 보니 보험 계약고가 높았다. 이천수의 가족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었다.
경제적 어려움은 갑자기 찾아왔다. 할머니가 장기간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어머니가 병간호를 위해 보험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런데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국내 1위에 안주하던 후지카가 부도난 것이었다. 아버지마저 실직했다. 이천수가 초등학교 5~6학년 때의 일이다. 이천수는 중학교에 진학한 후 합숙훈련 비용을 제때 내지 못해 고개를 떨궈야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천수는 가난과 신체적 악조건을 ‘깡’으로 버텨온 것 같다. 깡이란 긍정적 의미도 있지만 부정적 의미도 있다. 매번 깡을 부리면 ‘깡패’밖에 더 되겠는가? 그러나 그가 부리는 깡은 좀 달랐다. 이 점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이천수의 ‘깡’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이천수 자신의 말과 친구, 그리고 아버지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그는 한마디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주변의 반응에 강력하면서도 정확하게 반발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그에 관한 자료 중에는 유난히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들을 상대로 경쟁을 벌인 이야기가 많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중·고등학교 축구팀에서는 때로 폭력이 난무했다. 그 폭력은 대개 선배가 후배들에게 단체 기합을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선배들은 종종 “야, 전부 운동장에 집합해”라고 외친다. 그 명령이 도를 넘는 경우가 있다. 그때 이천수는 동료를 향해 “야, 나가지 마! 우리가 잘못한 거 없잖아? 우리가 나가야 할 이유도 없어. 문제가 생기면 내가 다 책임질게! 나가지 마”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고 한다.
“야, 나가지 마! 내가 다 책임질게!” 이 말은 이천수의 사고방식을 설명하는 코드다. 그것은 단순한 의협심의 표현이 아니다. 이천수는 꼭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힘을 합쳐 악조건을 헤쳐 나가자”는 식으로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축구가 야구보다 국민적 사랑을 받는 스포츠다. 그러나 관중 동원 능력은 야구가 한 수 위다. 이에 대해 이천수는 “한국 스포츠신문의 1면을 축구로 도배하겠다”고 말한다. 그가 이런 말을 던지면 ‘프로-이천수’와 ‘안티-이천수’가 말싸움을 벌이게 되지만, 전체적으로는 이천수의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진다.
이런 대목에 이르면 이천수에게서는 모종의 보스 기질이 느껴지며, 그가 그토록 많은 팬을 끌고 다니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러니까 그의 헤어 스타일과 말도 단순히 개인적 취향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그 세대가 갖고 있는 모종의 욕구를 대변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이천수는 그런 트렌드를 읽는 데 탁월한 감각을 갖고 있었다. 물론 이천수의 그런 언행은 자신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결집하는 이유도 된다.
이천수를 직접 인터뷰해 보니 말솜씨가 대단했다. 정치학 교수인 내가 볼 때 그의 말은 도발적이면서도 승부사로서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점은 타이틀 매치가 열리기 전 촌철살인의 혀로 무수한 화제를 뿌렸던 무하마드 알리를 연상시킨다. 그의 입은 ‘월드컵 4강의 영웅’ 히딩크가 언급되는 대목에서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것은 이천수가 언론의 피상적 평가와 관중의 환호에 묻히지 않는 ‘자기만의 생각’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또 이천수는 감이 빨랐다. 예상한 것 이상이었다. 2004년 11월17일 몰디브전이 있기 하루 전날, 경기도 파주에 있는 ‘축구 국가대표 훈련원’에서 2시간 정도 이천수를 인터뷰할 수 있었다. 이천수는 그 전날 오후 입국한 상태였다. 시차적응도 안 된 처지였고, 잠시 후 대표팀 훈련도 예정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인터뷰하기에는 어수선했다. 그런데 “축구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이천수’를 인터뷰하려고 한다”는 나의 의도를 파악하고 나서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지금 계속 외국 감독이 한국 대표팀을 지도하는데, 여기에는 그 나름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한국 선수들은 대개 감독의 말을 잘 듣잖아요? 외국 감독들도 한국 선수들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오기 때문에 처음에는 선수들을 일방적으로 끌고 가려는 경향이 강해요. 그러나 그런 방식이 한국 선수들에게 맞지 않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건 아니다. 왜 감독님은 감독님 나라에서 하던 것과 다르게 행동하느냐’고 지적하고는 했어요. 그렇게 말하고 나니 본프레레 감독님도 달라졌고, 지금은 처음보다 얘기가 잘 통하게 됐어요.”
요컨대, 그는 외국 감독과 한국 선수들이 조건 없이 화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자신이 대표팀 내에서 한국 선수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야, 나가지 마! 내가 다 책임질게”와 같이 반발했던 정신은 외국 감독의 리더십을 날카롭게 꿰뚫어 보고 한국 선수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가를 감독에게 전달할 수 있는 판단력으로 발전해 있었다.
나는 바로 그런 이야기, 축구에 대한 그의 수준 높은 이해력을 듣고 싶었다. 그리고 이천수는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나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와 대화를 하지만, 이천수처럼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하는 친구를 본 적이 별로 없다. 내친김에 나도 핵심으로 들어갔다.
“히딩크는 권력 쥔 잔머리의 도사”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실시된 미국 전지훈련에 참가한 이천수 선수가 히딩크 감독의 작전지시를 듣고 있다.
- 히딩크는 어땠나요?
“히딩크도 그랬지요. 히딩크도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쳤어요. 감독 취임 초기에는 성적이 나빴잖아요? 그게 시행착오를 한 증거지요. 아무리 훌륭한 감독이라도 한국팀을 맡는다면 한꺼번에 다 잘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히딩크는 머리가 좋고 냉철한 분입니다. 그분은 한국에 머무르면서 자기 말이면 다 통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고, 그 의미를 정확히 알았기 때문에 ‘4강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지요. 2002 월드컵이 한국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게임이었습니까? 국민이 축구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협회 임원들도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그 의미를 알았던 것이지요.”
- 우리는 월드컵 4강이 학연·지연·혈연을 파괴한 히딩크의 민주적 리더십 덕분이라고 극찬했는데, 다른 측면이 있다는 것인가요?
“민주적이었던 것은 아니지요. 제가 옛날에 히딩크를 ‘여우’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히딩크는 그만큼 한국 선수들을 꿰뚫어 보았어요. 히딩크는 자신의 권한이 크다는 것을 알았고, 그 권한을 최대한 행사했어요. 예를 들면 이런 식이지요. 아무리 실력이 좋고 외국 경험이 많은 선수라도 ‘그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무시하면서 두 경기, 세 경기씩 출전을 안 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해당 선수는 긴장하잖아요? 그런 식으로 감독의 권한을 마음껏 행사한 거죠. 선수들을 경쟁시킨 거예요. 히딩크는 잔머리의 도사예요.”
- 그렇다면 히딩크는 민주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한국 선수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놀았네요.
“그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만, 그게 히딩크의 성공 요인이지요. 내가 스페인에 가서 보니, 유럽에서는 감독이 선수들에게 그렇게 할 수 없어요. 그러면 선수들이 ‘경기에 안 나가겠다’고 버텨요. 그러면 선수가 아니라 감독이 잘려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게 가능했지요.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 시작 직전까지도 ‘최종 멤버는 확정되지 않았다’고 안개를 피웠지만, 나중에 들으니 최종 엔트리는 월드컵이 열리기 훨씬 전에 결정돼 있었대요. 그런데 완전히 엉뚱한 짓을 하는 거예요. 선수를 출전시켰다, 뺐다…. 어떤 때는 후반전에 조금만 내보내고….”
인간의 내면을 읽는 감각 소유자
- 그럼 히딩크는 유럽식 축구를 한국에 접목한 게 아니라, 한국 실정에 맞는 축구를 구사한 거네요?
“그건 아니에요. 그분이 한국 감독님들 하고 다른 것은 아무리 나이 어린 선수라고 해도 말이 되는 얘기를 하면 받아들이고 팀 운영에 적용한다는 거예요. 고집을 피우는 게 아니죠. 그게 그분의 장점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한국 선수들을 다루는 기술을 짧은 기간에 터득한 거죠.”
- 히딩크가 취임 초기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을 때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죠?
“음…. 그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압도적 우월감이라고 할까? 일방적으로 한국 선수들을 지도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한국 선수들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 감독님은 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던 거지요.”
- 그럼 이천수 선수는 히딩크에게 무슨 말을 했나요?
“저는 히딩크 감독님이 저를 가장 좋아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알았어요. 제가 초기에 감독님에게 ‘이건 아니다’라는 말을 많이 했어요. 그래도 그게 옳다 싶으면 다 들어주셨어요. 그래서 감독님은 ‘이천수 저 친구는 할 말은 한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말하자면 저를 경계하기도 하고 조심하셨던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저는 제가 월드컵 팀의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나로서는 놀라운 이야기였다. 히딩크에게 그런 점이 있었다는 것, 히딩크를 그런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이천수의 두뇌 회전, 이천수와 히딩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 이건 이미 축구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상에 선 사나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게임에 관한 것이었다.
히딩크 리더십의 상당부분이 잔머리 싸움이었다는 것도 그렇고,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이천수가 대표팀 내에서 외국 감독과 한국 선수들의 관계가 일방적으로 흐르는 것을 막아내는 방파제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도 흥미로운 것이었다. 실제로 히딩크의 자서전 <마이웨이>(조선일보사 간행, 2002)를 보면 히딩크와 이천수 사이에는 상당한 잔머리 싸움이 오갔음을 알 수 있다. 그 책에서 히딩크는 이천수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이천수는 확실히 튀는 선수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올해(2001년) 초였다. 내가 부임한 직후 우리 선수들이 고려대와 연습경기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 고려대 선수인 이천수가 눈에 띄었다. 발재간이 좋은 선수다. 재목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좀 튄다는 느낌도 받았다. 어린 선수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도 이상했고…. 그래서 나는 그를 무시하기로 했다. 기고만장한 선수는 기를 꺾어놓고 시작해야 한다. 그건 기본이다.
때마침 기자들이 그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나는 ‘그냥 그렇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기술은 있지만 너무 가벼운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이후 코칭 스태프를 통해 그를 관찰하면서 메시지를 보냈다. 대표팀에 들어오고 싶으면 튀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었다. 그 다음 체력보강을 비롯해 몇 가지 사항을 지시했다. 뜻밖에 그는 반응했고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요컨대, 이천수는 처음부터 히딩크 눈에 든 선수였다. 그러나 히딩크는 이천수의 행동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천수는 히딩크와 서로 다른 기질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히딩크는 박지성과 이영표 같은 성실파를 좋아하는 인물인 것 같다(그는 월드컵 후 두 선수를 네덜란드로 데리고 갔다).
그래도 히딩크는 이천수를 의식하며 어깃장을 놓아 보기도 하고, 코칭 스태프를 통해 그를 유혹하는 전략도 구사했다. 이처럼 자신이 정서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선수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 히딩크의 뛰어난 점일 것이다. 이천수 역시 말을 알아듣는 친구였다. 이천수도 히딩크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둘은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나는 이 대목에 이르러 이천수를 축구만 하는 젊은이로 보지 않기로 했다. 그는 감독을 포함해 팀 내의 인간관계를 읽어낼 줄 아는 탁월한 감각의 소유자였다. 그가 쏟아낸 발언들은 평범한 처세술 강의를 뛰어넘는, 사람들이 모여 어떤 일을 만들어 나갈 때 발생하는 문제에 관한 생생하게 살아있는 리더십 강의였다.
또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이천수의 그런 감각과 접근방법이 상당히 뿌리가 깊은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사실은 그의 친구 성은호와 형 이천석을 인터뷰하면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천수의 축구인생은 초등학교 3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네축구에서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은 이천수는 3학년에 진급하자마자 학교 축구부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4학년부터 선수를 뽑았기 때문에 3학년은 자격미달이었다. 이천수는 그날 집으로 돌아와 “3학년은 안 뽑는대! 1년 기다려야 한대”라며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다고 한다. 자신의 실력을 믿고 있던 이천수는 ‘3학년은 안 된다’는 원칙을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천수는 공부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는 아이였다. 반장도 여러 번 했고, 싸움을 잘하면 인기가 높아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미 초등학교 1학년 때 싸움을 잘하기 때문에 여자 아이들이 자기를 좋아한다고 의식했다니, 타고난 승부욕이 있었으며 조숙했던 것 같다. 그 외에도 이천수의 승부욕을 보여주는 사건은 참으로 많다. 한 마디로 자기보다 축구를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날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한다.
모든 것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면서 100% 독약이 된다. 그 독약을 잘못 관리하면 재앙이 된다. 예컨대, 모든 아이들이 싸움 잘하는 아이를 좋아할까? 내 경험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이천수는 짧은 인생 속에 숨가쁘게 달려온 승리의 과정과 경험을 확신하는 듯했다. 그는 인생이 전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승리만이 성공을 쟁취한다는 철학을 일관성 있게 피력했다.
“공부도 다 필요 없어요. 뭐든지 하나만 잘하면 돼요.” 어쩌면 그게 험난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이천수에게 실수가 따른다면, 모든 것을 승패의 관점에서 보는 태도일 것이다.
자질구레한 열등감이 없는 아버지의 성원
이천수 선수의 어머니 박희야 씨와 아버지 이준만씨가 팬들의 격려 메시지가 가득한 아들의 포스터를 살펴보고 있다.
아버지 이준만 씨는 이천수가 공부 쪽으로 나가기를 원했다. 초등학교 내내 이천수의 선수생활을 애써 외면하며 ‘일시적 사건’으로 처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천수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가족 몰래 경기장을 찾아가 아들의 활약을 처음 구경했다. 발군의 실력이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서서히 이천수의 지지자가 되었다. 지지 정도가 아니라 아주 감동적인 지원을 하게 된다.
나는 지난 학기, 학교 강의를 하면서 한 가지 큰 충격을 받았다. 강좌에 들어온 남학생 25명 중 19명이 아버지와 ‘말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13명은 아버지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라고 했으며, 어떤 학생은 “아버지와 단둘이 남으면 너무 썰렁해서 조금이라도 빨리 그 자리를 피하게 된다”고 했다. 나머지 6명은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던 것이 아니라 그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는 경우였다.
한국의 부자 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삭막하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목욕탕에 함께 가거나 놀이동산에 데리고 다니지만, 아들이 사춘기를 지나면 아버지와 정을 나누는 기회는 급격하게 줄어든다. 출세한 아버지는 너무 바빠서 그렇고, 성공적이지 못한 아버지는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못 한다’는 자격지심에 아이들과 멀어진다. 물론 이천수처럼 아이가 특별한 재능을 보인다면 ‘누가 지원을 마다하겠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사정은 그렇게 간단치 않을 것이다.
놀랍게도 아버지 이준만 씨는 6년 동안 아들이 속한 중·고등학교 축구부의 비공식 총무 역할을 자임했다. 무보수로 축구부 버스를 운전했으며 합숙소의 잡무도 도맡아 했다. 시장에 나가 부식거리를 장만하는가 하면 아이들의 빨랫감을 정리하고 합숙소 관리도 했다. 축구부에는 코치가 있고, 선수 어머니 중에서 월급을 받고 밥을 해주는 분이 있었는데, 그 나머지 일은 모두 이준만 씨가 맡았다.
아들과 아버지가 동일한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함께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어린 아들 앞에서 아버지가 허드렛일을 한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힘든 일이다. 학교 당국과 코치는 의사결정을 내리는 사람이고, 무보수 총무는 때로 난처한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아들의 나이가 어릴수록 그 사건의 귀추에 대한 아버지 쪽의 불안감은 커진다. 더구나 대규모 노조의 위원장을 지낸 사람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게 가능한 것은 두 가지 중 하나다.
첫째는 그런 일이 아니면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이 탁 트여 자질구레한 열등감이 없는 경우다. 이준만 씨는 명백하게 후자였다. 그는 지금의 이천수를 연상시킬 정도로 말을 잘하고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6년 동안 아들을 뒷바라지하면서도 회사 임직원들이 받지 못한 임금을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임직원의 임금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다른 직업을 가지려고 하지도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자녀를 기른다는 것이 다 그렇지만, 중·고등학교 축구부도 그렇게 녹록한 곳이 아니다. 대개는 학교의 금전적 지원이 거의 없다. 코치의 월급을 비롯해 일체의 경비를 학부모들이 갹출해 부담해야 한다.
지역이나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낚아채는 명문팀(?)의 경우에는 다른 도시에서 벌어지는 대회의 출전 경비도 만만치 않고, 자신의 아이들에게 은근한 특별대우를 원하는 부모들의 ‘와이로’ 때문에 물이 흐려지기 일쑤다. 이래저래 요즘 기준으로 한 달에 100만 원 정도 들어가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다.
이준만 씨는 그 비용을 제때 충당하지 못했다. 아내 박희야 씨는 백화점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기에 바빴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준만 씨는 축구부 버스를 운전하며 아들 뒷바라지를 계속했다.
이천수가 스페인으로 날아간 지금은 아내와 장모를 그곳에 보내놓고 ‘기러기 아빠’ 신세를 감수하고 있다. 만약 이천수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성공한다면 아버지의 스토리는 틀림없는 텔레비전 휴먼 다큐멘터리감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돈이 많았느냐?”
독일월드컵 2차 예선 몰디브전을 마치고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길의 이천수 선수가 인천공항에서 여성팬이 안고 있는 아기의 등에 사인을 하고 있다.
나는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하는 아버지를 취재하기 위해 인천시 부평구 만수동에 있는 그의 아파트를 급습했다. 그는 여전히 “인터뷰는 안 한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한 가지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때마침 이천수 할아버지의 제삿날이었는데, 이준만 씨는 스스로 시장에 나가 제사에 필요한 음식을 사들이고, 제수씨와 함께 제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하는 태도가 하도 자연스러워 ‘바로 저런 방식으로 아들을 뒷바라지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신기하게 이천수네 3부자(三父子)는 아들과 아버지, 형과 아우라기보다 친구 같은 냄새가 물씬 풍겼다. 아버지를 닮은 탓인지, 형 이천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돈을 벌기 위해 3년 동안 배를 탔다. “꼭 천수를 위해 배를 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달라”고 했지만, 가족에게 돈을 갖다 주기 위해 배를 탄 것은 분명했다. 고등학교 축구부는 중학교 축구부 때보다 훨씬 많은 돈이 필요하기도 했다.
이천수의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사냥법을 가르치는 어미 사자의 역할을 톡톡히 한 것 같다. 동물원에서 자란 사자는 결코 사냥할 줄 모른다. 아무리 사자라도 격렬하게 저항하는 토끼의 숨통을 끊는 방법을 익히는 것은 학습을 요구한다. 가장 좋은 학습 방법은 가까운 곳에서 사냥 시범을 보여주고, 사냥을 직접 해 보도록 하는 것이다. 이천수 부자는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무수한 사냥 시범을 주고받았던 것 같다. 이천수가 그렇게 당당하게 자기표현을 할 수 있는 것도 다 뿌리가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천수와 아버지가 크게 충돌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천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의 일이다. 이미 국가대표급으로 성장한 이천수에게 여러 대학과 프로팀에서 러브콜을 보내왔다. 이때 이천수는 그의 형처럼 가족을 먼저 생각했다. 안양 LG 구단에 거액의 돈을 받고 입단해 가족을 도와야 한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천수를 먼저 생각했다. 아들의 프로행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두 달도 넘는 줄다리기가 계속되었다. 끝내 아버지가 이렇게 화를 냈다.
“우리가 언제부터 돈이 많았느냐? 고려대에 진학하면 합숙소 비용을 안 내니, 우리 살기는 훨씬 나아질 것이다. 지금은 대학에 갈 때다. 만약 프로에 가고 싶거든 받은 돈을 다 싸들고 호적도 파내서 집을 나가라!” 아버지로서는 그런 돈은 쓸 수도 없으며 차라리 부자간에 의를 끊자는 최후통첩이었다. 이천수의 길은 고려대행으로 기우는 것 같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천수와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안양 LG 측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공을 들인 LG의 코치진이 집으로 쳐들어오기도 했다. 약속을 저버려야 했던 고교생 이천수의 마음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두 부자는 기나긴 과정을 거쳐 고려대행을 결정지었다. 중요한 것은 이기심이 아니라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갈등이 시작되었으며, 그 갈등을 부자가 함께 나누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프로 스포츠는 단순한 즐거움을 제공하는 여가가 아니라, 새로운 정신을 요구하는 산업으로 발전했다. 현실의 직업세계가 돈의 힘과 폭력이 난무하는 ‘더티 게임’을 하는 곳이라면, 프로 스포츠는 ‘깨끗한 산업’이라는 꿈을 판다. 자본주의의 부속물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열렬한 선전부대가 되었다. 스포츠 스타들은 10대 후반부터 성공의 길에 들어서서 20대 중·후반기에 절정기를 맞이한다. 다른 어떤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젊은 나이에 성공을 구가한다는 매력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헤쳐나가야 하는 어려움도 많다. 대체로 운동선수들은 어린 시절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성공=재능’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성공=재능+알파(α)’로 구성된다. 그 알파의 양상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점점 더 시대의 정신에 부합해야 한다.
육체와 정신의 균형, 젊음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열정을 한 곳에만 쏟아부어야 하는 집중력, 갑자기 찾아온 성공을 잘 관리하는 평정심, 이런저런 부상의 극복 등 사실 프로 선수들이 부닥쳐야 하는 어려움은 다른 어떤 직업의 종사자들보다 크다.
프로 선수들은 관중의 환호에 휩싸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선수를 둘러싼 직접적 세계는 그들을 상품으로 대접한다. 다시 말해, 프로 선수들은 그들의 상품성을 사고 팔려는 수많은 상인들 가운데서 살아간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시장의 점검을 받고 검토의 대상이 된다. 계속 기량이 좋아지고 성적이 올라가면 상인들은 웃음을 짓지만, 어디 인간의 몸을 타고난 사람이 매번 그럴 수 있겠는가?
‘깨끗한 산업’의 꿈을 파는 프로 스포츠
하지만 관중의 환호보다 소수 상인들이 선수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더구나 선수들은 아직 인생 경험이 적은 젊은이들이고, 상인들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능구렁이들이다. 선수들은 바로 그 능구렁이들의 농간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한다.
거칠게 말해서 프로 선수들은 몸을 팔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몸의 상태가 나빠지면 그 순간 끝장이다. 한때 굉장한 ?력??보였다가도 제대로 몸을 관리하지 않아 스타의 대열에서 탈락한 선수는 부지기수다.
그런데 몸을 판다는 그 사실이야말로 지구화시대의 삶을 가장 정확하게 반영하는 일이다. 한국의 프로 스포츠는 아직 인간적인 데가 많지만, 이미 그 길로 들어섰다. 돈을 긍정하면서도 돈에 연연해 하지 않는 스타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정신, 새로운 생각을 요구한다.
새해 들어 처음 만나본 탐구인물 이천수는 프로 선수로서, 상품으로서 자신의 몸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플레이, 골 세리머니, 헤어 스타일 등 3박자를 갖춘 선수”가 되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다. 그는 스페인 프로 리그가 자신을 영입할 때 자신을 통해 한국시장을 공략하겠다는 계산을 한다는 것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추파춥스(Chupa Chups)’라는 스페인 굴지의 사탕회사가 ‘이천수표’ 추파춥스 사탕을 만들자고 제안했을 때 “내가 스페인에 오게 된 또 다른 의미를 온몸으로 느꼈노라”고 말했다.이쯤 되면 한국 선수들이 외국으로 진출하는 것이 그 나라 돈을 벌어오는 것인지, 외국에서 한국시장을 점령하기 위한 미끼가 되는 것인지 구분이 잘 안 된다. 박세리처럼 대성을 거둔 경우에도 그 계산은 복잡하다.
한국 소비자들은 텔레비전 시청료를 내야 하며, 그들이 사용하는 골프용품을 구매하고, 무의식중에 미국시장의 우월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왜 타이거 우즈가 제주도까지 날아왔겠는가? 한 마디로 국제적 프로 스포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냉혹하며, 돈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다.
이천수는 그 돈의 의미를 하나하나 깨달아가고 있었다. 이천수는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진출에 큰 기여를 했고, 2003년 스페인 리그(프리메라리가)에 이적료 42억 원과 연봉 6억 원 등 총 46억 원의 몸값을 받고 진출해 현재는 누만시아에서 뛰고 있다. 지금도 진행중인 ‘2004~2005년 시즌’에 성적이 그렇게 좋지 못하다.
급한 나머지 희망을 저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천수 선수가 2004년 3월 아테네올림픽 아시아 예선 전 이란과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은 뒤 '대한민국이여, 일어나라'라고 쓴 속옷을 드러내 보이는 골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사진:중앙포토>
물론 이천수는 여전히 “팀 기여도가 높다”는 평을 듣고 있으며, 스페인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하지만 처음의 기세는 한풀 꺾였다. 이천수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해외에 진출한 우리의 월드컵 스타들이 기대만큼 큰 성적을 내지 못했으며, 최근 들어 한국축구도 아슬아슬한 징후를 보이고 있다.
2004년 11월17일 나는 이천수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 몰디브전을 관전하러 상암경기장을 찾았다. 마치 고등학생팀과 대학생팀 간의 경기를 보는 것 같았는데, 우리 선수들은 이상하게 서두르고 있었다. 전·후반 모두 30개 정도의 슈팅을 퍼부었는데, 골은 2개밖에 나지 않았다.
나의 시선은 이천수의 플레이에 초점을 맞출 때가 많았다. 이천수 역시 서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미드필드 외곽에서 공을 잡으면, 공을 몰아 빠르게 안쪽으로 파고드는 플레이를 여러 번 했다. 무언가 빠르다는 것, 놀라운 발재간은 돋보이지만 운동장의 반만 사용하면서 수비에 열중하는 몰디브를 침몰시키지는 못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몰디브처럼 약체를 상대하고 있는데 마음만 급해 쓸데없는 슈팅만 날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2005년에는 독일월드컵을 향한 최종 예선 리그가 남아 있다. 지금 한국 대표팀은 매출액이 떨어진 기업의 회의실처럼 무언가 어수선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허정무 코치가 “나의 역할은 끝난 것 같다”며 사의를 표명했고, 본프레레 감독은 대표팀을 둘러싼 어수선함을 수습하려는 듯 친정체제를 선언했다. 유가 급등이나 환율 하락과 같은 외생변수에 휘청거리는 한국경제를 닮았다.
결국 원리는 비슷한 것 같다. 급하다고 슈팅만 때리면 상대는 약체라도 더욱 신이 나서 명수비를 연출한다. 오히려 한 호흡 가다듬고 상대의 예상을 거슬러 인내하며 한 박자 쉬어갈 때 찬스는 생기는 것 아닐까? 때로 백 패스가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2005년 한국의 독일월드컵 진출이 확정되고, 스페인 리그에서 대활약을 펼친 다음 연말쯤 ‘축구 영웅’이 되어 귀국한 이천수를 초대해 그동안의 변화를 들어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첫댓글 어익후 길다 -0-
옛날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