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 공원은 바다를 끼고 도는 산양일주 도로를 따라 달리다 휴식하기에 좋다.
‘달아’라는 이름은 ‘달구경 하기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공원에서 통영 바다(통영만)를 한가로이 바라보았다.
넓게 펼쳐진 바다와 이름조차 갖지못한 바위섬에서부터 한산섬을 비롯하여
사량도,연화도,비진도,매물도, 추도 등의 섬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섬 이름을 안내하는 대형 지도가 한쪽에 설치돼 있다.
관해정에 앉아 남해 한려수도 최고의 장관이라는 사량도 뒤로 떨어지는 일몰을 보기위해 얼마를 기다렸다.
한없이 중천에 떠있을 것 같던 해가 서서히 수평선으로 내려오면서,
하늘과 바다가 갑자기 주홍빛 물감을 풀어 놓은 듯 무섭게 붉어졌다.
사라져 버린 날들의 모든 신화가 그 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단 한번도 누구에게 들킨 일이 없는 태고의 비밀을 한꺼번에 토해내 듯 해는 장엄한 빛을 발하더니,
서서히 그러다가 갑자기 수평선 너머로 '꼴딱' 넘어갔다.
그 광경을 온 몸으로 받으면서 그 자리에서 꼴딱 죽고 싶었다면 그건 아마 '진실'일 것이다.
삶과 죽음!
그 간극은 과연 얼마만큼의 차이일까 ?
사량도 낙조위로 어둠이 내린다
굴전과 굴밥으로 저녁을 먹고 통영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어디서나 들려오는 남도 여인들의 거센 억양이 서울에서 멀리와 있음을 실감케 했다.
- 박경리(1926 ~2008, 5.5)기념관
산양읍 신전리의 박경리 기념관은 고인의 묘가 있는 신전리 양지농원 내 있다.
전시실에는 고인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 나오는 마을을 복원한 모형과 '토지' 친필원고와 여권, 편지,
생전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영상과, 집필한 책, 작품에 관한 논문 등을 모아 놓은 자료실 등이 있다.
고인이 좋아했던 키 큰 소나무와 채소밭을 가꾼 고인의 취미를 살려 채마밭과 장독대, 물이 흐르는 연못,
호박돌로 포장된 추모의 길, 대나무와 느티나무 숲, 사시사철 피는 꽃을 심은 정원 등이 조성되어 있다.
한국문학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박경리선생을 기리는 기념관
힘들 때, '나는 가족들을 위해 밤새워 쓸 수밖에 없었다'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울었다.
살기가 싫어질 때,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용빈과 '토지'의 서희는 나의 롤 모델이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서희처럼 의지 굳은 여인으로 살리라'
소설속의 서희는 살아있는 나의 우상이자 족쇄였다.
대학 때 구입한 지식산업사의 박경리 전집
갱지라고 하나 누런 종이 위아래 세로줄이 빽빽하다.
토지1.2부와 김약국의 딸들, 단편을 포함 전집 여섯 권인데 몇 번을 읽었을까..
나중엔 읽기가 힘들어 자를 대고 읽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한 번 잡으면 끝까지 보게 만드는 토지의 힘...
90년대 후반 토지 5부를 읽으며 '이제 노회하시는구나, 필력이 많이 떨어지네,
그만 쓰시는 게 전작들을 위해 좋겠다'고 생각했다...감히!!!
우리의 잔혹한 현대사는 한 작가를 키워내기 위해 작가의 가슴에 모진 발자국을 차근차근 새겼다.
그 멍자국 속에서 작가는 소설 '토지'라는 거대한 생명의 나무를 키워냈다.
세상이 선생님에게 잘못을 많이 했지만,
선생님은 그것을 껴안고 삶이 주는 고통이 어떻게 아름다움의 탄생에 관계하는지 몸으로 보여주셨다.
무릇, 내내 우리 가슴 속에서 별이 되는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생이 그러하듯이...
- 또 한 사람 이데올로기의 희생양 음악가 윤이상선생님
현대음악 작곡가로 세계음악사에 우뚝 섰지만 67년 조작된 ‘동백림 사건’으로 친북 좌파가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불운아 윤이상 선생님.
통영국제음악제(윤이상음악제)는 현대 작곡가 윤이상 선생(1917~1995)을 기리기 위해
2002년'서주와 추상' 이라는 주제로 시작됐으며, 올해로 20회를 맞았다.
통영국제음악당(윤이상음악당)
국내 최고의 음악홀 중 하나인 음악당은 유럽에서 녹음하던 국내음악가들
특히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이곳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창 밖 다도해가 3면으로 보이는 음악당 카페에서 낙조를 보며 마시는 커피...
음악당 옆의 스텐포드 호텔과 연결 된 해안산책로를 천천히 걸으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해방 후,
선생은 시인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작곡가 정윤주, 화가 전혁림 등과 민족문화 발전을 위한
통영문화협회를 설립했다.
56년 파리음악원에서 수학했다.
59년 독일에서 열린 다름슈타트음악제 때 쇤베르크의 12음계 기법에 한국의 정악(正樂)을 담은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 유럽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1967년 '동백림공작단'에 연루되어 한 밤중 베를린에서 서울로 강제 소환되었다.
2년간의 옥고 중 세계음악계의 구명으로 풀려났다. - 이 사건으로 독일과는 국교 단절까지 갔다.
71년 독일에 귀화하고 평생 고향땅을 밟지 못했다.
베를린 외곽 반제(Bannsee)호숫가 자택에 한국지도 모형의 연못을 만들고 가지 못하는 고향 통영을
그리워했다.
72년 뮌헨올림픽 개막축하 오페라에서의 ‘심청’을 비롯,
옥중에서 작곡한 ‘나비의 꿈’(68),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광주여 영원하라’(81),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87),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분신한 사람들의 넋을 추모한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94) 등 15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서양현대음악 기법을 통한 동아시아적 이미지의 표현’
또는 ‘한국음악의 연주기법과 서양악기의 결합’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범민족통일음악회’의 산파 역할을 했다.
세계가 선생을 높이 평가했지만,
정작 조국에선 그의 음악조차 자유롭지 않았다.
"나는 하루도 내 조국 내 고향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 민족 성원들 속에 나는 서 있습니다.
짐승도 죽을 때 제 집으로 돌아가는데,
위대한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내 땅에 묻히는 것이 나의 희망입니다.
고향 땅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 나의 간절한 염원입니다."
하지만 선생은 끝내 고향 통영 땅을 밟지 못했다.